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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 정부의 범죄 – 청원에 대한 폭력적 차단과 악의적 답방(상)

[밍후이왕] (밍후이 통신원 대륙 종합보도) 정상적인 사회에서는 청원 상소 제도가 국민이 법에 따라 청원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권익을 보장하는데 편리하도록 하는 것인데, 만약 폭력으로 차단하거나 악의로 답방한다면 많은 사람은 틀림없이 이해하지 못하고 놀라워할 것이다. 이게 어찌 가능한가? 기왕 정부에서 청원상소 제도를 제정한 이상, 법률이 또 국민에게 청원자유를 준 이상, 아무리 정부에서 폭력으로 청원을 차단하고 답방하는 행위가 나타났다면 이건 분명 법률 용어상의 모순 문제인 것이 아니라 위법 행위임을,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렇다. 이런 폭력적인 행위는 대륙 사람들에 대해 말한다면 무슨 희귀한 일이 아니다. 청원상소 제도를 제정해 놓고 사회계약으로서 불문율의 제도로 되었는데도 오히려 그 실질적인 것은 중공 정부의 범죄로 되었다.

청원에 대한 폭력적 차단과 답방은 중공 특색의 통치 모델

청원상소는 본래 정상 사회에서 국민의 한 가지 기본 인권 자유이고, 관민이 상호 대화하는 통로이자 한 정부의 집정 능력과 국가의 법제 문명 정도를 검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독재 폭정을 즐기는 사악한 중국공산당(이하 중공)은 도리어 이 인권을 진정으로 국민에게 돌려준 적이 지금껏 없었다. 중공은 정권을 탈취하여 정부를 건립한 후 전국적으로 대(大)사면을 실시하고, 복구 건설하면서 사회를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연속으로 정치운동을 발동하여 사회 각 계층의 국민을 박해하고 위협하며 노예화하였다. 그때 겁에 질린 군중은 중공의 고무 격려로 줄곧 계급의 적을 고발했지만, 청원상소로 자기 권리를 수호할 줄은 도리어 모르고 있었다. 제도가 있다 해도 그것은 국민에게 마땅히 있어야 하는 기본 권리임을 모르고 있었다. 중공은 8천만 국민을 시달리게 하여 죽이거나 굶겨 죽인 후에도 여전히 요행으로 살아남은 군중을 강박하여 계속해서 ‘사회주의 노선’을 걷게 하면서 국민에게 반성하게 하고 당국의 책임을 물을 기회마저도 주지 않았다. 중공에서 ‘검은 5부류’로 확정된 타격 대상의 일반 군중은 진작부터 청원하여 말할 권리를 박탈당했는데, 다만 ‘무산계급 전정’을 당할 몫만 있었다. 당시 전반 국가는 중공에 유린당해 경제가 붕괴하고 문화가 퇴폐되었으며 전통이 매몰되고 백성은 두려워했다.

붕괴의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중공은 부득불 ‘개혁개방’을 해야 했다. 대외로는 세계를 기만하면서 국제사회와 방향을 같이하기 위해서라고 하고, 대내적으로는 국민을 우롱하면서 ‘법으로 나라를 다스린다’고 허세를 부리며 황당하게 일련의 법률을 제정한 동시에 각급 정부에 무슨 ‘내신내방 사무실’을 설립하고는 극소수의 청원인에게만 약간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을 뿐인데, 이는 외부에 중공이 개방으로 간다는 가상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89년 대학생이 정부에 탐오 및 부패를 숙청하라고 요구했을 때, 중공 권력 집단은 안 된다며 탱크 부대를 동원하여 맨주먹인 학생들을 발포하고 깔아 죽여 세계를 경악게 한 유혈 사건을 만들어 냈다. 망나니 장쩌민은 애국 학생들의 선혈을 밟고 정권을 잡은 후, 첫 번째로 한 일이 전국적 범위에서 6.4 청원 학생을 청산하면서 ‘일체 불안정한 요소는 맹아에서부터 소멸해야 한다.’고 외쳤으며, 또 수많은 인사가 연루되게 하였다. 잇따라 이 불학 무식한 망나니는 어디서 굴러 온 것인지도 모를 무슨 ‘3강’이란 것을 만들어내어 전당 전군 전민을 강박하여 ‘정치를 말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관민이 대화할 여지는 또다시 거의 다 차단되어 버렸다.

6.4 후, 관민이 대화할 통로는 중공에 의해 완전히 소멸하지는 않았지만, 많은 부가 조건이 중공에 의해 첨가되었고 갈수록 많고 무거워졌다. 중앙은 각 성시 관원이 ‘자기 집 문을 잘 지키고 자기 사람을 잘 관리’하도록 책임지고, 종합 관리와 정적을 한데 연결하며, 각급 성시는 지방 관리에게 ‘각자 문 앞의 눈을 쓸고 누가 일이 생기면 바로 누가 책임지며’, 그렇지 않으면 해임되고 쫓겨난다. 지방 관리는 관직을 잃지 않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청원상소 제도를 수개하면서 무슨 ‘단계를 건너뛰어 상소하지 못하며’, ‘집단 상소를 하지 못하며’, ‘당원 간부는 선두 상소하지 못하며’, ‘중복으로 상소하지 못하며’ ‘상소(上訪-상방)를 하방(下訪)으로 변화시킨다.’ 등등이다. 후에 중공 관리의 탐오 부패로 집단 상소 사건이 갈수록 많아지자 대응에 지친 각급 망나니 정부는 아예 폭력으로 창원을 차단하고 악의적인 답방을 감행하면서 상소 당사자를 위협하여 매수하거나 때리고 부수고 빼앗았고, 그렇지 않으면 함부로 죄를 씌워 노동 교양 판결을 내렸으며, 억울한 사건, 억울한 재판을 빚어낼지라도 관원이 승진하고 부자가 되는데 영향이 없었다. 오래 진행되는 와중에 폭력적으로 상소를 차단하고 악의로 답방하는 것이 점차 중공이 안정을 유지하는 모델로 됐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대륙에서 흔히 이런 하나의 특색적인 ‘광경’을 볼 수 있다. 중공의 중요회의, ‘(정치적으로) 민감한 날’, 명절기간, 혹은 민원인의 청원이 최고조인 시기에 중공 각급 정부는 무장경찰, 특수경찰, 순경, 교통경찰, 사복경찰, 심지어 암흑가 폭력조직, 본바닥의 불량배를 끌어다 보안 요원을 시키는데 각자의 지반에서 진지를 확고히 정비하고 적을 기다리듯 상소를 차단하고 안정 유지를 했다. 이러한 때, 이것이 중공 당국이 조직한 정부 범죄임을 아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천고의 억울함은 청원을 폭력적으로 차단하는 데에서 시작

중공은 청원을 폭력으로 차단하는 중에 많고 많은 억울한 사건을 만들어 냈다. 90년대 말, 파룬궁 수련생의 청원에 대하여 중공이 폭력으로 청원을 차단한 것은 천고의 억울함이라고 할만하다. 그때 중공 두목 장쩌민은 파룬궁을 박해하기 위해 정법위 두목 뤄간과 서로 결탁하여 끊임없이 유언비어를 날조하고 말썽을 일으켰기 때문에 파룬궁 수련생의 ‘4.2’ 대(大) 청원이 일어났다. 일이 발생한 당일, 당시 총리는 개방적으로 이 일을 처리하여 해외 매스컴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일이 발생한 후 장쩌민은 당시 총리의 결정을 부정하였다.

하찮은 소인배인 집정자 장쩌민은 중공 전 우두머리 마오쩌둥이 발동한 문화 대혁명의 정치 수단을 모방하여 굳이 파룬궁을 박해하였다. 그리하여 또다시 전국 파룬궁 수련생의 대 청원을 유발하였다. 역사는 중공에 민의를 알게 하여 민심을 얻을 절호의 기회를 한 차례 주었지만, 중공은 정반대의 방법을 썼다. 대응한 것은 청원에 대한 폭력적 대 차단으로서 중공의 청원사무실, 각지 베이징 주재 사무실은 청원차단 사무실로 변했고, 천안문 광장은 청원차단 광장으로 변했다. 중공의 각지 관원, 무장경찰, 사복 특무, 공검법(공안, 검찰, 법원)은 교통 주요 도로를 가로막고 파룬궁 수련생을 강제 체포하여 인명부를 만들어 각지의 악독한 검은 감옥에 집어넣고 폭력적 세뇌를 하고 재물을 사취하였으며, ‘전향’되지 않는 자에 한해서는 직접 노동 교양 판결을 내렸다.

청원에 대한 폭력적 대차단 후 중공은 점점 더 격상하여 청원 차단을 전국에 파급된 정치 대박해로 변하게 하였는바, 매체가 거들어 파룬궁을 악독하게 모함했고, 관리와 국민이 저마다 태도 표시를 하도록 강요했으며, 중공은 민의를 강간하였다. 장 씨 깡패 집단은 전국의 모든 폭력 기구와 사회자원을 조종하여 박해를 강화하였다. 장쩌민은 직접 전국 관리, 사악한 경찰에게 밀령을 내려 파룬궁 수련생에 대해 ‘명예를 실추시키고 경제를 파탄시키며, 육체를 소멸하라, 맞아 죽으면 자살한 것으로 간주하라’, ‘신원조사를 하지 말고 직접 화장하라’는 등의 소멸 정책을 행하게 했다. 신주 대지의 천고의 억울한 사건은 바로 이렇게 발생했다. 억울한 사건은 발생한 지 이미 14년이 되었고 억울한 사건은 전국에 널리 퍼졌으며, 아직도 대륙 각지에서 여전히 발생하고 있다.

궁수화(公淑華)는 1978년에 출생한 예쁜 소녀다. 산둥(山東) 성 멍인(蒙陰) 현 탄부(坦埠) 진 진첸관좡(金錢官莊) 촌민이고 중등 전문학교를 졸업했으며 미혼이다. 파룬따파(法輪大法)가 화를 당하고 있을 때, 모친, 남동생, 여동생과 함께 일가족 네 식구는 베이징에 가서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멍인 현 탄부 진 정부 폭도의 청원 차단과 잔혹한 박해를 당했다. 모친 후이청화, 남동생 궁피빈은 파룬궁 수련을 확고히 했기에 불법 노동 교양을 당했고, 여동생 궁수친은 고등학교 시험을 치른 후 대학에 다닐 자격을 취소당했고 후에는 행방불명되었다. 궁수화는 2001년 설이 지난 후 핍박으로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2002년 9월 20일경에 멍인 현 다이구 진에서 수련생 장더쩐, 텅더룽, 궁마오하이와 함께 멍인 현 ‘610’(전문 파룬궁을 박해하는 불법조직)과 형사경찰 대대에 불법 체포되어 사악한 경찰의 고문 자백, 구타 시달림, 야만적 음식물 주입을 당했다. 궁수화는 컴퓨터 비밀번호를 알려 주지 않았기에 사악한 경찰의 가중되는 박해를 받았고 03년에는 13년 불법 판결을 받고 산둥 여자 감옥에 들어가 오늘까지 박해받고 있으며, 궁수화 미혼부는 10여 년이나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궁수화의 부친은 장기간 국외에서 장사하고 있으므로 가정을 돌볼 수 없다. 궁수화 및 모친, 남동생이 불법 감금되어 있어도 관심을 두는 사람이 없고 집의 재산도 모조리 약탈당했다. 2001년 설 기간에도 그녀 집은 현금 1만여 위안(약180만 원)을 강탈당했다.

허베이 스자좡의 타오훙성은 원래 허베이 성 안전청 4처에서 출입국 비자 사업을 하던 경관으로서 정과급 간부이다. 1999년 12월 25일 타오훙성은 천안문에 가서 파룬따파 현수막을 펼쳐 직장과 당적을 제명당했고, 노동교양 3년(시지오파출소에서 노교소에 보냄)을 당했으며, 스자좡 시 노교소 2대대 201중대에 감금되었다. 외부에서는 타오훙성이 노교소에서 어떠한 강제 세뇌 및 심신을 괴롭히는 이중 박해를 받았는지 알 수 없다. 수련 후 줄곧 건강했던 그는 신체 건강이 급격히 악화하여 몇 달 사이에 거의 죽게 되었다. 병이 위급할 때 노교소는 당황하여 그를 가족에게 밀어 보냈는데 집에 돌아온 지 며칠 사이에 타오훙성은 억울하게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내 위펑친은 “그는 국가를 사랑했고 결코 정부를 반대하지 않았어요. 그는 그저 지도자에게 파룬궁이 좋다고 알리려 했을 뿐이에요.” 하고 말했다.

탄광후이는 당시 40여 세였고 헤이룽장 빈 현 숭장 진 파룬궁 수련생이다. 2000년 6월 상경하여 청원하였기에 완자 노교소에 붙잡혀 들어가 불법 노동교양 1년을 당했다. 2001년 6, 7월 사이에 사악한 경찰 몇이 그녀를 들어다 남자 노동교양대대에 넣었다. 들리는 말에 따르면 남자 셋이 그녀를 윤간했다고 한다. 탄광후이는 그들에게 알려 주었다. 당신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범죄이고 응보를 받을 것이다. 폭도들은 두렵지 않다고 했다. 거의 동시에 그녀는 교도관에게 정신병으로 모함당해 완자 병원에 보내져 날마다 주사를 맞았다. 7월 중순, 완자 노교소에서 15명의 파룬궁 수련생을 박해한 참극이 폭로된 후, 노교소에서는 갑자기 탄광후이를 집으로 데려가게 하였다. 그녀는 이미 박해로 정신이상에 걸려 집에 간 후 미쳐서 곳곳으로 뛰어다녔다. 스스로 생활할 수 없어 가족은 수차례 그녀를 정신 병원에 보내 치료받게 했다.

내몽고 퉁료 시의 류슈룽 여사는 63세인 퇴직 직원이다. 원래 그녀는 각종 질병이 몸에 있었는데 연공한 후 각종 병이 종적 없이 사라졌다. 온 가족 6명이 모두 파룬궁 수련자인데 대법이 모함받자 파룬궁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하러 온 가족이 함께 베이징에 청원을 갔다. 베이징에 이르러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류슈룽은 둘째 딸 텐신과 함께 있었다. 모녀 두 사람은 청원사무실을 찾지 못하자 직접 공안부에 갔다가 국보 대대의 사악한 경찰 사오쥔, 왕버에게 잡혀 현지 감옥으로 납치돼 갔다. 그때부터 그들 일가는 사당의 광적인 박해를 당했다. 그중 류슈룽의 남편 텐푸진은 박해로 치사하고, 큰딸 텐팡은 두 차례의 불법 판결로 총 9년, 둘째 딸 텐신은 불법 노교 2번, 셋째 달 텐미오는 불법 판결 6년, 아들 텐쐉장은 불법 판결 3년을 당했다. 류슈룽 본인은 불법 노교 2년, 불법 판결 4년을 당했다. 수년 동안 그녀 일가는 여태껏 함께 모인 적이 없다. 그가 잡혀가지 않으면 누가 또 갇히고 하였는데 류슈룽과 딸은 놀랍게도 5차례나 같은 노교소 한 감방에서 박해당했다. 류슈룽과 남편 텐푸진은 퉁료에서 일찍이 성공한 장사꾼이다. 그러나 중공 악당에 박해당해 가산은 탕진되어 생계마저 어려웠다.

자이렌성은 하북 성 한탄 시 청안 현 노인 파룬궁 수련생으로서 후하고 어진 사람이다. 2000년 10월 그는 개인 안위도 돌보지 않고 베이징 청원을 떠났다. 그를 체포하려는 경찰을 마주하고 노인은 태연하게 말했다. “나는 연공인이요, 나는 도리를 말하러 왔소.” 베이징 경찰은 그의 얼굴을 사납게 타격하며 말했다. “누가 너더러 도리를 말하라 했는가!” 후에 청안 현에 압송돼 가서 구치소에 7달 갇혀 있었다. 악도들은 갖은 방법을 다해 자이렌성이 파룬궁 수련을 포기하도록 핍박했지만, 노인은 자신의 신앙에 확고하여 사악한 경찰 리즈더, 양스화, 텐꾸이성, 취전핑, 형사 경찰과 무장 경찰 수십 명의 박해를 받았다. 라이터로 팔꿈치를 태우고, 방풍을 시키지 않으며, 사지를 묶어 달아매고, 죄수 공판 대회를 열고, 조리돌림을 당하며, 불법 노동교양(노교소에서 받지 않으니 구치소에 감금했다.)을 하고, 재물을 사취하면서 목숨이 경각에 이르러서야 집에 돌려보냈다. 그는 구치소에서 나온 후 몸은 형편없이 허약하여 두 사람이 부축해야 걸을 수 있었다. 집에 돌아온 후 5분에 한 번씩 화장실에 가서 설사했고 식사하지 못했으며 누워서 말할 힘도 없었다. 약 반 달 후인 2001년 5월 원한을 품고 세상을 떴는데 그때 69세였다. 그의 사망은 아내, 자식 및 친우들에게 무한한 애모와 미봉할 수 없는 슬픔을 가져다주었다.

뤼전(한족, 1976년 7월 25일생)은 산둥 멍인 현 멍인 진 시루라이 촌 사람이며, 충칭대학 국제 금융학과 학생으로서 품행과 학문이 모두 출중했다. 1999년 중공이 대법을 박해한 후 뤼전과 충칭대학의 수련생들은 결연히 여러 번 베이징에 청원을 가서 대법을 수호하였다. 잇따라 충칭대학 및 현지 경찰의 박해를 당해 세뇌반에 갇히고 학교에서 제명당했으며, 후에는 충칭 시산핑 노교소에서 일 년간 불법 노교 당하면서 고문 박해받았다. 또 충칭대학 불법인원은 그의 학사학위 발급을 중지하였다. 출옥 후, 뤼전은 학교에 의해 멍인으로 송환됐지만 멍인의 불법인원은 접수를 거절하여 이때부터 뤼전은 호구를 붙이지 못했다. 현지 ‘610’ 악도는 마을에 지시를 내려 방송 스피커로 날마다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마을 사람들이 그와 접촉하지 못하게 했고 그의 가족은 이 때문에 거대한 압력을 받았으므로 뤼전은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2004년 3월, 뤼전은 멍인 현 멍인 진에서 자오구, 피위쥔 부부와 함께 납치당해 연이어 멍인 구치소, 린이 시 세뇌반에서 박해당했고 후에는 또 멍인 현 구치소로 이전돼 수개월 괴롭힘을 당했다. 2004년 12월 멍인 현 ‘610’은 멍인 현 법원을 조종해 그에게 11년이란 오판을 내렸다. 09년 6월 21일, 뤼전은 산둥 감옥에서 악도들의 고문 박해로 사망했는데 그 해 33살이었다.

양얜하이(62세)는 충칭사회사업 직업학교 부교수이다. 1997년 7월 그는 아내 장루위안(충칭사회사업 직업 학교 부교수)과 함께 파룬따파 수련으로 들어섰다. 이때부터 이들 고급 지식인 부부는 신체가 건강하고 명리를 담담히 보며, 선량하고도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그들이 교육계에 몸담은 전공학과 대학에서 공부하는 수많은 학생에게 더욱 마음을 쏟았고 더욱 훌륭히 사회에 보답하였다. 박해가 발생한 후, 중공은 도처에서 요언을 날조하고 폭력이 그치지 않았다. 정황을 아는 국민으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의무를 이행하고, 국가, 정부에 대해 책임지는 태도로 2000년 겨울 방학에 양얜하이는 법에 따라 베이징 청원을 가서 파룬궁 진상을 설명했는데 뜻밖에도 중공 악당이 그에게 준 대답은 여러 차례의 가택수색, 세뇌, 위협이었다. 그의 아내 장루위안도 여러 번 불법 감금당해 이른바 ‘학습반’에서 강제 세뇌당했고 또 충칭 마오자산 여자 노교소에서 잔혹한 박해를 당했다. 부부는 불법 인원들에게 장기간 박해당하여 안정할 수 없었고 정신적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타격을 받았다. 2004년 1월 4일 양얜하이는 박해로 사망하였다.

(계속)

문장발표: 2013년 5월 26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3/5/26/27450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