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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 정법위의 하늘에 사무치는 죄악 (3)

글/ 순스샌, 오우양퍼이, 린잔츤

[밍후이왕] (전편에 이어)

3. 중공은 정법위를 통하여 전체 중국인을 박해하다

정법위(정법위원회)는 중국 공산당이 기른 흉악하고 잔인한 한 마리 괴수다. 다년간 공산당은 그것으로 하여금 집을 지키게 하고 이 괴수를 방임하여 사람을 물게 하고 심지어는 사람을 잡아먹어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또 이 흉악하고 잔인한 괴수는 너무나 많은 선량하고 무고한 중국인들을 상해하고 병탄하였다. 실은 공산당이 국민들의 피와 살로 정법위라는 이 한 마리 괴수를 먹여 키운 것이다.

군벌 혼전시기에 ‘대포가 한번 울리면 황금 만 냥’이라는 한 마디 유행어가 있었는데 싸움이 일어나면 남이 위급한 때를 틈타서 한몫 보아 큰 횡재를 얻는다는 말이다. 정법위는 중국인들을 박해하는 와중에서 중국 사람들의 노동 소득 중에서 대량의 경비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불법적으로 중국인을 박해하는 과정 중 정법위 계통의 구성원들의 도덕이 급속하게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 정법위로 하여금 쾌속으로 암흑가로 변화하게 하였다. ‘과거에는 토비가 심산에 있었지만 지금은 토비가 공안(경찰)에 있다.’는 이 말이 곧 이 상황의 절실한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경찰과 국민의 대립정서를 선동하여, 민간 반항 기세가 점점 치열해지자 정법위는 기회를 타서 돈과 권력을 요구했으며 유온(維穩)의 기치를 높이 들고 마음대로 증원하고 군대를 이동하였다. 폭력으로 국민을 잔인하게 압제할수록 국세가 더욱 혼란해졌고, 저우융캉은 갈수록 ‘강산을 수비’하는 중신(重臣)으로 되었다. 정법위 체제는 중국의 가장 큰 암흑가이며 저우융캉은 가장 큰 암흑의 우두머리다.

이 몇 년 간 가장 심하게 세력을 확장한 정법위는 방대한 세력을 구비하였을 뿐만 아니라 방대한 이익도 구비하였기에 필연적으로 그 자신의 독특한 의지가 있었다. 그러나 정법위의 이익과 의지는 도리어 중공의 그 어떤 지도층의 이익과 의지와 같은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미 중국 사회가 안정하지 못할수록 그들은 요풍득풍(要風得風), 요우득우(要雨得雨)하게 되며 그들 손의 권리가 더욱 크고 이득도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법위의 근본 이익과 의지는 사회 안정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사회 불안정에 있다.

정법위는 국민의 피와 땀으로 모은 재물을 남용하여 ‘최고가의 안정유지(天價維穩)’를 하다

두 눈이 실명된 중국 변호사 인권운동 인사인 산둥 린이인 천광청 변호사는 법률 지식을 자습하면서 많은 촌민, 장애인들의 권리와 이익을 수호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천광청은 약세 단체의 인권수호를 도왔다는 이유로 4년 3개월간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이는 억울한 안건으로 인정받았다. 일 년 전에 천광천은 형기가 만료되어 석방되었다. 하지만 인신 자유가 없었는데 부인 왠우이징과 딸 천커스, 80의 고령인 어머니를 포함하여 모두 집에 연금되어 있었고 통신신호도 단절당했다. 그가 받은 박해는 직접 저우융캉이 통제하는 정법위로부터 온 것이다.

동사고촌의 천 변호사 집을 감시하는 인원은 적게는 7, 80명 가장 많을 때는 몇백 명에 달했는데 겹겹의 간수가 7, 8겹이나 되었다. 현지 정부는 향에서 감시하는 사람을 고용하여 그를 감시케 했는데 하루에 100위안을 받으면 팀장이 10위안을 제하고 고용된 감시자는 하루에 90위안을 받았다. 천광청은 현지에서 하루 노동수입이 5, 60위안인데 이 일은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되니 사람들이 이 일을 모두 하려 한다고 말하였다.

현지 정부 관리가 천광청에게 알려준데 의하면 그로 인해 쓴 안정유지비가 2008년 3,000만 위안이었고 2011년에는 6000만 위안을 초과하였는데 여기에는 상급과 북경에 가서 관리에게 준 재물은 포함하지 않았다고 한다. 안정유지비는 현에서 일차적으로 직접 향에 몇 백만 위안을 주고, 대부분 돈은 모두 상부에서 가져가고 아래 사람들은 작은 돈을 가질 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현지 정부가 ‘맹인’ 한 사람 때문에 국민의 피땀을 얼마나 낭비하였는지는 외부 사람들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천문학적 숫자이다,

맹인 한 사람을 박해하기 위해 6,000만 위안을 사용할 수 있는데 정법위가 통제하는 중국 사회는 얼마나 많은 돈을 쓰겠는가?

중국 정부가 금년에 대폭적으로 상급 부문에 국내 경찰, 무장 경찰을 전근시키면서 수요 되는 안전 예산 지출은 7,017억 위안이다. 평론은 안정유지용 지출이 연속 수년간 국방 예산을 초과하였는데 이는 분명하게 현재 중국 사회모순과 동요하는 형세가 극심해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안정유지 비용’이라고 속칭하는 국가 안전 예산을 근일 중국의 재정부가 공포하였다. 2012년 중국이 사용한 국방 지출 6조 7,000억 위안과 비교하면 경찰, 국가안전부, 무장경찰, 법원, 감옥 등 공안 안전 기구의 비용은 7,017억 위안 증가될 것으로 증가폭도 작년 6,293억 위안의 11.5%이다.

비록 중공은 수년래 줄곧 ‘안정이 일체를 압도한다.’고 외쳤지만 중공이 제멋대로 나쁜 짓을 하는 것은 도리어 사회를 갈수록 불안정하게 하였다. 관리들의 부패가 가중됨에 따라 사회의 빈부차가 갈수록 확대되며, 국민의 기본 권리가 보호를 받지 못하는 등의 원인과 동시에 대중이 서신과 방문을 통하여 유관 부문에 의견을 제시하고 해결을 요구하는 것 등 법률이 규정한 상고 경로작용이 미소하므로 저층 국민들이 부득불 빈번하게 법규정을 초월하는 반항을 하게 되었다. 일부 지방 정부에서는 ‘사회 안정을 수호’하기 위해 이런 행동을 지지하지 않고 심지어는 강경한 태도로 ‘안정유지’를 한다.

안정유지는 중국 대륙 간부 정적의 중요한 고찰 지표로서 그 지도적 원칙은 ‘안정이 일체를 압도한다.’이기에 관리들은 안정유지를 위해 거의 그 어떤 수단을 쓰든지 묵인 받을 수 있는데 중화인민공화국 법률을 위반하는 불법적 수단까지 포함한다.

근 몇 년래 대륙의 집단적 봉기 사건을 포함한 사회 모순은 갈수록 더욱 돌출하다. 그리하여 고압 통치를 수호하기 위하여 중공 중앙으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기층 향진 가도에 이르기까지 모두 ‘종치 사무실’ ‘안정유지 사무실’ 등 기구가 나타나서 항상 ‘610사무실’, ‘방범사무실’ 등과 함께 사무를 본다. 예를 들면, 일부 기층 문건 중에서 “안정유지 사무실(방범 사무실)‘, ’안정유지 사무실(‘610 사무실’)이라는 논조가 있어 어떤 사람들은 ‘610사무실’이 ‘안정유지 사무실’로 이름을 고치지 않았는지를 생각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상세하게 이 몇 개 사무실의 관계를 설명해 보자.

중공악당의 이른바 ‘중앙 사회치안 종합 치리 위원회(약칭 ’중앙 종치위‘)’는 1991년 조직되었는데 중공 중앙의 이른바 ‘직속 공무 부문’(기타 직속 공무 부문에는 정법위, 중앙조직부, 선전부 등을 포함)으로서 아래에 ‘중앙 사회치안 종합 치리 위원회 사무실’[약칭 ‘중앙 종합판(中央綜治辦)]을 설치하였는데 그것은 ‘중앙 종치위’의 일처리 기구로서 ‘중앙 정법위’기관과 합쳐서 근무를 했다. ‘중앙 종치위’의 주임은 일반적으로 모두 중앙 정법위 서기이다.

‘중앙 안정유지 업무 지도 소조’는 중공 악당 중앙의 ‘의사 협조 기구’이며 90년대에 정식 설립되었다. 하지만 그 하부에 조직한 사무실 ‘안정유지 사무실’이 각지에 건립된 것은 근 몇 년간의 일이다. ‘안정유지 지도 소조’에 속한 회사에는 ‘중앙 정법위원회 중앙 종합치리위원회’, 중앙선전부, 공안부, 국가 영화 텔레비전 방송 총국이 포함된다. 그의 상설 판사 기구는 ‘중앙 안정유지 업무사무실’[약칭 ‘중앙 안정유지판(維穩辦)’] ‘중앙 종치판’과 마찬가지로서 ‘중앙 안정유지판’ 역시 중앙 정법위 기관이 합쳐 사무를 본다. ‘중공 중앙 안정유지 지도 소조’의 조장은 일반적으로 중앙 정법위 서기이다. ‘안정유지 사무실’ 주임은 통상적으로 정법위 부서기가 겸임한다. “안정유지사무실‘은 사회 각 방면과 관련되며 다만 정법 방면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에 속한 회사는 중앙 정법위보다 광범위한데 공안, 검찰, 법원계통 및 국가 안전 부문 외에 또 선전 부문도 받아 넣었다. 중공악당은 중앙, 각 성과 시, 현과 향 가도에 일급, 심지어는 중요한 사업, 기업 회사에 까지도 모두 ’안정유지 사무실‘을 설치하였다.

전직 기구는 사람이 사람을 감시할 수 없기에 금전으로 사회를 동원하는 것이 중공의 사악한 전통적 수법이다. ‘남방 주보(南方周末)’는 일찍이 기사 하나를 보도한 적이 있는데 ‘임시공’이 중국의 안정유지 계통의 받침목이라고 했다. 즉 ‘군중을 선동하여 전쟁에 참여하게 했다.’이다. 이러한 이른바 ‘임시공’이 중앙이 발동한 군중에 속하는 것이다. 이 문장은 ‘우유 배달공, 가스 배달공, 청결 공, 물업관리공…… 이런 임시공들은 천가 만호에 모두 없어서는 안 될 사람들로서 공안 기관이 뻗어 나갈 수 있는 촉각들이라고 지적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특유한 관찰력으로 수시로 구석구석의 치안 소식을 수집한다.’ 일부 중요한 부분에는 이런 감시자의 분업이 매우 세밀하다. 예를 들면 경찰에 의해 안정과 관계되는 인원으로 나누어 편입된 중점인원, 이른바 ‘위험인물’ 주변에는 모두 밀정 두 사람을 안배하여 감시하게 하였다. 이 문장 중에는 쟝슈성 수챈시(江苏省 宿迁市)를 예로 들었는데 일 년도 안 되는 사이에 이 시에 3만8천 명의 치안 지원자가 있게 되었는데 142명 중 한 명 꼴이 된 것으로, 한 장의 엄밀한 ‘방공 회로망’이 형성되었다. 공안 기구는 심사 장려 하는 세칙(細則)을 통하여 지원자들에 대해 누적 관리하며 일 분에 100위안(약 1만8천 원)으로 환산하는 재정을 현금교환장려 전문항목으로 건립한다. 지원자는 최저 0.01점, 최고는 100점으로 누적하는데 일정한 점수에까지 누적한 후 장려금으로 현금 환산한다. 이로부터 볼 수 있는바 중공 악당은 사람들이 납세한 돈으로 특무 통치를 진행하며 자신들의 독재 정권을 유지하는 것이다.

광명일보(光明日报)에 일찍이 ‘최고가 안정유지’란 문장에서 밑바닥이 없는 굴이 도대체 얼마나 많은지를 제기했다. 말의 뜻은 근 몇 년래 각지에서 분분히 ‘안정유지 사무실’, ‘종합 치리 사무실, 응급 사무실’ 등 기구를 설립하고 지방의 주요 관리가 친히 책임지고 있다. 170만 인구의 산시 타이왠시(山西 太原市)에 인민조해위원회가 2,622개, 조해인원 18,442명이고, 광시 꾸이강(廣西 貴港)의 현 향 두 개 급 안정유지 업무 상태에서 안정유지 일에 전문적으로 종사하는 인원이 600명이며 촌급 안정유지 정보인원이 3,500명이 된다. 광둥 광저우(廣東 廣州)시 재정 보고에서 발표하기를 본 시 2007년 안정유지비가 44억 위안인데 당해 사회보장 취업자금 35억 위안보다 많으며 이 숫자는 일부 인대 대표의 반대의견을 끌어내었다. 뿐만 아니라 충칭(重慶)시는 2009년 안정유지 예산이 52.7억 위안이며, 2008년 지방 재정 중 무장 경찰 경비 총 지출액이 52.7억 위안이라고 했다. 각지의 안정유지 압력이 거대하기에 지출도 급격하게 증가하였으며, 일부 지방에서는 안정유지 경비지출을 보장하기 위해 기타 재정 지출을 삭감하도록 압박하였다. 예를 들면 후난(湖南)성 쥔(津)시는 이로 하여 모든 행정 사업 회사가 지출을 20%압축하였으며, 심지어 통일적으로 월급을 받는 인원들의 월급에서 돈을 떼 냈다.

‘심천 현지 사회관찰 연구소’의 소장은 중국 학술계와 민간이 ‘안정유지비’가 연속 몇 년간 국방 예산보다 높은 현상에 대하여 모두 적지 않은 비평을 제기하였다고 했다. 그 주요 원인은 각급 정부가 ‘안정 유지’를 민생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위치에 놓았기 때문이다.

“안정유지비용 중의 공안 안전은 이미 국방 경비를 초과한다. 이것은 우리 이 사회가 매우 안정하지 못하여 대량의 비용을 안정유지에 사용해야 함이 요구된다. 실제로 우리는 민생에 대한 지출은 사보, 의료, 교육 이런 것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다. 만약 안정유지비를 민생에 지출한다면 그렇게 높은 안정유지비용을 사용하지 않아도 될 수 있다. 안정유지비용이 이 몇 년간 매우 빨리 증가했다. 실제 주요 원인은 우리의 경제 발전이 갈수록 시장화 하지만 우리 전반 사회가 정치개혁을 통제함이 매우 완만하기 때문이다. 정치 개혁과 대중 이익의 소구(訴求)가 매우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 중국의 가장 중요한 현실 문제는 정치 체제가 경제 발전의 속도와 규모에 적응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더욱 직접적으로 사회 모순을 격화시키는데 이로 인하여 사회는 일종 ‘안정하려 할수록 안정하지 못하다’의 지경에 빠지게 된다고 했다.

방대한 안정유지 지출이 사회보험, 의료 등 본래 대량으로 지출해야 할 민생 비용을 점용해 버렸는데 장기적으로 보면 사회 진보에 불리하고 최종적으로는 중공 정권의 안정유지를 동요하게 한다. 이로 인하여 중공 자신의 대변자인 인민망(人民網)도 부득불 감탄해마지 않았는데, ‘고비용 안정유지’는 장구지계(長久之計)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법위는 어떻게 ‘안정유지’ 하였는가?

산둥(山東) 린이(臨沂)는 6,000만 위안을 천광청 한 사람을 박해하는데 사용하여 기록을 창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근 몇 년 간 또 하나의 기네스 세계기록을 돌파하였다. 즉 ‘세계에서 유일한 8성급 집무 빌딩’이 기네스를 통해 인정되었다. 그 집무 빌딩은 모두 382억 위안을 투자하였는데 평방미터당 건축비용이 32만 위안으로, 세계 건축 역사상의 신기원을 열었다.

린이는 3개 구와 9개 현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 중 이난 현, 이수이 현, 멍인 현, 핑이 현, 퍼이 현이 국가급 빈곤 현으로서 이멍산 구에 속한다. 이 몇 년 간 시위 정부의 관리 하에 세계 초일류 계획 설계에 따라 행정사무실 구역을 새롭게 건립하였다. 새로 건립한 시 정부 빌딩은 새로운 구의 정 중앙에 자리 잡았는데 빌딩 건축 면적이 12만 평방미터이고 23층 (지하 2층 포함) 엘리베이터가 18개 설치되었다. 이 공정은 또 10대 조립 건축이 있는데 예를 들면 화샤 24교, 맨해튼 광장, 베니스 수상 캐슬, 에펠탑, 피라미드, 천리 고비 사막과 국제 유람선 클럽 등등이다! 빌딩 구석구석마다 호화로움과 눈부심을 체현하였는데 일체 내부 장식은 모두 유럽의 최고 명품 브랜드로, 모든 내빈들의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했다.

산둥 린이의 왕린팡이라고 부르는 여고생이 린이 시 ‘8성급 집무 빌딩’의 어두운 내막 즉 ‘린이 8성급 집무 빌딩 배후에 싸여진 백골’이라는 쪽지를 전한 것으로 인하여 경찰에 의해 뢰쫭 공안 분국 심사실에 붙잡혀 가서 비인간적인 시달림을 당했다. 경찰은 이 17세 밖에 안 된 미모의 소녀를 발가벗겨 심사실에 매달아 놓고 때려 온몸이 성한 데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몸에는 담뱃불로 3, 40곳이나 지져 놓았고, 두 유두는 타서 눌려 붙었고 신체 음부도 담배꽁초에 의해 참혹한 화상을 입었다. 뒤이어 린이 시 공안기관은 왕린팡이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고 하면서 몰래 급급히 시체를 화장해 버렸다. 17세 미모의 여고생 왕린팡은 이런 태평성세 중에서 참혹하게 생명을 빼앗겼다.

‘린이 8성급 집무 빌딩 배후에 싸여진 백골’을 쓴 장잰궈(张建国)도 죽었는데 죽은 원인 역시 자살이다. 한 첩자의 말에 의하면 “린이에서 이주와 고발로 현지 경찰 측에 의해 맞아 죽은 사람이 몇십 명에 달한다.”였고 그의 가족들도 모두 정신병원에 보내졌다.”는 것이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깜작 놀라게 하는 이 일련의 참혹한 일로 인하여 관련 매체가 린이 시 정법위 서기 리훙하이를 인터뷰하였다. 기자가 왕린팡이 왜 붙잡혔고, 고문으로 비참하게 죽게 되었는지 물었을 때 리훙하이는 크게 웃으면서 말하였다. “왕린팡의 부모는 모두 전문적인 민원인 가구로서 이주 문제로 여러 번 불법적으로 성(省)과 북경에 민원을 제기하다가 잡혀 돌아왔는데 전형적인 미치광이다! 왕린팡이 예쁘게 생긴 것만 보지 말라. 사실 그녀의 부모로부터의 유전과 그녀의 부모가 여러 차례 민원을 한 것에서 영향을 받아 일찍이 정신이 비정상이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몇몇 학생과 한 패가 되어 첩자를 보내면서 악독하게 시위와 정법위를 공격하였다. 이러한 미치광이를 붙잡지 않고 누구를 붙잡겠는가?”

기자가 다시 왕린팡과 장잰궈의 죽음을 물었을 때, 리훙하이는 다시 크게 웃으면서 “기껏해야 두 미치광이지 않는가? 많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왕린팡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물으니 리훙하이는 마음속의 쾌감을 금치 못하면서 “그 애는 우리 경찰들의 담배를 훔쳐 피운 후 담배꽁초로 자신을 지졌다. 이 방면에서 우리 경찰들은 확실히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데 그 미치광이가 담배를 훔치지 못하게 해야 했다. 지금 그 애는 이미 죽었는데 자신이 목을 매어 자살했다.”고 했다. 기자가 시체는 법의관의 검시를 거쳤지를 물으니 이 서기는 “미치광이가 목을 매어 자살하였는데 검시는 무슨 검시란 말인가?”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경찰(공안), 검찰, 법원 이 세 기관은 본래 각급 위원회의 지휘를 받고 정법위가 조정한다. 정법위 서기가 공안국장을 겸임한 후 ‘피 감독자가 감독자의 지휘를 받는다.’ 법원, 검찰은 공안국에 대해 감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정법위 서기가 자신들의 상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법위 서기와 공안이 법을 왜곡하여 부패 남용하는 일이 갈수록 증가되지만 법원과 검찰은 관계하기가 매우 어려우며 입안은 말할 여지도 없다. 원래 당이 사법을 관리하여 권력이 법보다 큰 체제를 인기하였기에 설상가상로 된 셈이다. 공안이 정부 관원들의 개인 정원을 지키는 보위원으로 되고 법원과 검찰은 다만 따라서 검게 될 뿐이었다. 그러므로 국민 및 변호사들은 보편적으로 법률이 괴사되었고 유권이 어려운데다가 난을 더 가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의 상상으로는 정법 일을 주관하는 ‘정법위 서기’는 가장 법을 아는 사람이다. 하지만 진실한 상황은 완전히 상반된다. 정법위 서기가 한 지방의 정법 일을 주관하는데 어떤 지방의 정법위 서기는 현지 정법 업무의 최종 결정권을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는 그들의 일언은 중천금과도 같다. 그리하여 어떤 정법위 서기는 직권의 편리를 이용하여 사법 기관에 압력을 가하거나 직접 관여하며, 사법기관의 사건 처리를 관여하면서 헌법이 부여한 사법 기관의 독립적 사건 처리권을 침범하였다. 1998년, 선양시민 순강은 홍구 소팡스 촌지부서기가 법과 기율을 위반하는 문제를 고발한 것으로 인하여 2년 도형을 받게 되었다. 이 억울한 안건 중 착오적인 판결은 뜻밖에도 법정을 열어 심리하기 전 이미 홍구의 ‘3장회’(법원장, 검찰원장, 공안국장)가 결정하였으며, 이 위법적인 결정은 곧 본 구의 정법위의 한 지휘자가 ‘주관’ 하에 만들어 낸 것이었다.(1월24일 ‘중국 청년보(中国青年报)’에 근거하다.)

정법위 서기 리창허는 뤼징이를 타격 보복하기 위해 또 사법기관에 압력을 가했고, 사법 기관을 조종하여 뤼징이를 일 년형에 언도하였다고 한다. 바로 이처럼 마음대로 사법 부분을 조종하는 권리를 갖고 있기에 품성이 좋지 않으면서도 정법위 서기 직위에 있는 자들이 사법 영역에서 자신들이 해내지 못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사 고용하여 사람을 죽이더라도 제약을 받지 않고 권력에 의하여 안건을 잘 처리할 수 있고 직접 살인자와 자신으로 하여금 결국 법률의 제재를 피할 수 있게 한다.

정법위 서기가 담대하게 사람을 고용하여 살인하는 것은, 어느 정도에서 그들의 직무를 이용하여 형사사건 해결을 교란함이, 편리한 것과 관계가 있다. 예를 들면 안후이(安徽)성 우후스(芜湖) 시 당위, 정법위 서기 저우치뚱이 사람을 고용하여 애인을 살해한 후 곧 형사사건 업무 지도자의 직무 편리를 이용하여 애써 사건처리 인원의 시선을 사건 해결 방향에서 이탈하게끔 하였다. 하지만 주요하게는 거의 제약을 받지 않는 권력이 그들로 하여금 감히 위험해도 온 힘을 다 발휘하고, 또 몸을 던져 가면서 모험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짱한원(張漢文, 男)는 깐수청(甘肃成)현의 정법위 부서기인데 2011년 10월 29일, 침대 밑에 숨어 있는 12살 여자아이가 발견되어 10월 30일, 여자아이 가족이 경찰에 신고하여 외설스러운 행위가 드러났고, 11월 1일, 짱한원은 이미 현 위에서 정직 처분을 받았으며 경찰 역시 법에 의해 그를 구류시켰다고 한다.

2011년 10월 7일, 융징(永靖)현 인민검찰원은 쿵더훙(孔得紅), 마궈칭(馬國慶)에 대해 공소를 제기하였는데, 쿵더훙은 고의 상해죄, 트집을 잡아서 싸움을 걸면서 소란을 피운 죄, 강간, 불법 총기소지 죄 등등으로 고발하고 마궈칭은 불법 총기소지 죄로 고발하였다. 안건을 처리하는 경찰이 누설한데 의하면 단지 공안기관이 조사한 것만으로도 쿵더훙이 강간한 여자는 10여 명이 된다고 했는데 그중 다수는 여자 재학생들이었고 박해를 당할 때 대다수가 18세 미만이었다고 한다.(중국청년보 11월 9일자)

‘쿵더훙이 강간한 여학생이 무려 10여 명에 달하는데 그중 다수가 재학 중인 여학생으로서 박해 당시 18세가 채 안 되었다.‘ 다만 이 점만으로도 이 안건은 세인들을 놀라게 함이 충분하다. 하지만 더욱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중공 융찡현 상무위원이고 정법위 서기 겸 공안 국장인 청쌍린(曾祥林)이 기자들에게 한 한마디 말이다. “나는 정말 이런 청소년들의 시비 관념과 준법 관념이 왜 이렇게 깊지 못한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

청쌍린은 청소년들의 시비 관념, 준법 관념이 천박한 것이 납득되지 않는다고 했지만 허다한 군중들은 아마 성인으로서, 연장자인 청쌍린은 추호의 동정심도 없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그런 나이 어린 피해자들을 책망하는 것이 더욱 납득되지 않아 할 것이다. 현지 정법위 서기 겸 공안국장으로서 자신이 관할하는 지역에서 그처럼 악렬하며, 크고 중대한 안건이 발생한 것으로 인하여 수치를 느끼는 대신 책임을 ‘이런 청소년의 시비 관념과 준법 관념이 이처럼 천박하다’는 데로 돌리니 이것이야 말로 얼마나 가소롭고 황당한 일인가?

정법위 서기들의 도덕과 준법 관념이 이처럼 극히 천박하지만 중공의 도구와 졸개로 됨에는 오히려 독특한 민감성이 있다. 전문적으로 파룬궁을 진압하기 위해 장쩌민은 잇따라 ‘610사무실’과 안정유지 사무실을 모두 정법위에 소속시켰다. ‘610사무실’은 명의상에서는 정법위에 속하지만 그것은 또한 독립적인 체계로서 권력은 마치 중앙 문화혁명 조직과 같고, 610은 정법위를 통하여 중국의 공안, 법원, 검찰, 무장 경찰 체계를 통제하며, 수시로 중국 외교 내정 각 부문의 일체 자원을 동원할 수 있었다. 정법위는 그 권력이 급히 확장되었기에 전국 각급 각 부문을 건드릴 수 있었고, ‘610’과 안정유지 두 사무실의 집무 직능이 스스로 더해져 정법위 서기의 직권은 전례 없이 확대되었다.

뤄간(罗干)이 정치국에 진입한 후 장쩌민은 그를 ‘정법위 서기’로 임명하고 무장 경찰을 동원할 수 있는 권력을 주었다. 무장 경찰은 주로 대내적으로 안정유지 진압에 사용하는 것으로 만약 무장 경찰을 움직이는데 매우 높은 고급관리가 와서 승인한다면 늦을 수 있기에 각 지역 ‘안정유지’의 요구를 완성하려면 중앙은 반드시 무장 경찰을 동원하는 권리를 지방에 주어 작은 소란이 연변하여 신속히 지역적, 심지어 전국적인 소란으로 확산되는 것을 피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렇게 되자, 실제적으로는 중국의 지방 무장 역량으로 변해 버렸다. 또 특수경찰의 설립 역시 중공 지방 당국들로 하여금 수시로 정예 부대를 움직여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왜냐하면 중공은 2005년, 36개 중점 도시에 모두 특수 경찰을 창설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특수 경찰은 실제상 공무원 편제다. 하지만 그것의 실제 훈련과 무장은 모두 군대에 속한다. 아울러 군대 내의 비교적 정예부대에 속하는데 여기에는 무장 경찰 특수 경찰이 속하지 않는다. 중국 특수 경찰은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공안 특수 경찰, 다른 하나는 무장 경찰 특수 경찰이다.

각급 공안 기관 국장, 청장, 부장이 무장 경찰 부대 각급 제1 정위를 겸한다. 마치 현재 공안부장 멍잰주(孟建柱)가 무장 부대 제일 정위, 충칭스 공안 국장 겸 무장 경찰 지대 제1 정위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왕리쥔이 타흑(조직 폭력 등 검은 세력을 타도한다는 의미) 중 빈번하게 무장 부대를 출동시키고, 각지에서 법을 집행함에 무장 경찰과 공안을 사용한 외에 대량으로 무장 경찰을 사용하여 군중을 진압할 수 있은 것도 바로 이런 체제가 편리를 도모하여 주었던 것이다.

최근 몇 년래 중국에서는 폭력에 맞서 싸우는 대규모 집단 반항 사건이 갈수록 격렬해지고 있으며, 일반적인 항의 사건은 더욱 많아 헤아릴 수도 없다. 관방 통계에 의하면 전력을 다하여 올림픽을 보호하던 2008년 한 해에만 군중 반항 사건(중공은 소란이라 칭한다.)이 12만 건에 달했다고 한다. 10년래 안정유지를 할수록 더욱 혼란해져 공안, 사법부 전부가 관비(官匪)들의 보호세력으로 전락 되었으며, 특수 경찰 무장 경찰, 무기, 장갑차 등을 모두 동원하여 원망으로 항의하는 일반 국민과 대치하였다. 이것이 바로 정법위가 진탕 먹으면서 안정 유지하여 결과적으로는 자신이 ‘혼란’한 정세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저우융캉이 상무위원에 들어온 후 권력은 더욱 커졌고 국세는 더욱 ‘혼란’해졌다.

하나의 간단한 형사 사건도 경찰이 법을 어기고 정부가 경찰을 동원하여 민중을 진압하며 진실한 소식을 봉쇄하는 것으로 인해 결국에는 경찰과 민중의 충돌을 일으켜 수천수만의 군중들이 모여 분노해 경찰차를 불 지르고 부셔 버리는 등 동란이 일어난다. 이러한 사건은 꾸이저우 웡안(貴州甕安), 후베이 스서우(湖北石首), 융촨(永州), 산시푸구(陝西府穀), 저어쟝(浙江), 광둥(廣東) 등 전국 각지에서 연이어 발생하였다. 모두 경찰이 불공평하게 법을 집행하였는데 경찰을 동원하여 군중을 진압하였고 심지어는 시체를 빼앗고, 증인을 봉살(封殺)하여 대규모 민중 반항을 일으켰던 것이다. 정부 측은 문제의 본질을 규정할 때 일률로 ‘진상을 잘 모르는 군중이 흑악 세력(혹은 불법 세력)의 선동에 이용당했다.’고 한다. 그런 후 이른바 앞장서서 반항을 조성한 몇 사람을 붙잡아 판결한다.

이제까지의 오랜 기간 동안 ‘무장 경찰이 시체를 빼앗다’는 이미 중국 사회의 가장 기괴한 현상으로 되었다. 후베이성 스서우 시에서 6월 19일에 엄중한 민중 항의사건이 발생하였다. 발생한 원인은 무장 경찰 부대가 사망 원인이 불명한 시체를 빼앗아, 사망자 가족이 민간 법의관을 청하여 관련되는 부검을 진행해서 타살 증거를 얻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사망자는 요리사였는데 주점 위에서 떨어져 숨졌기에 가족은 정부 측에서 자살로 결론짓는데 많은 의문이 남게 되었다. 그리하여 비공식적으로 조사하게 되었다. 하지만 현지 정부 측에서는 이 소식을 알고 경찰을 파견하여 시체를 빼앗으려 했다. 이 일은 스서우의 만여 명에 달하는 민중 항의를 일으켰던 것이다. 중공은 약 3만에 달하는 무장 경찰을 동원하여 민중들을 해산시키고 강제로 시체를 빼앗아 갔던 것이다.

유사한 집단 반항사건이 소수민족 지역에서 발생하여 민족 간 충돌로 전의되면 정부 측은 해외 테러집단이 한 일로 문제의 성질을 규정한다. 가장 전형적인 사건은 2009년 신장 7.5일 사건이다. 내막을 아는 사람의 공표에 의하면 저우융캉이 고의적으로 작은 일을 크게 만들어 배후에서 후진타오에게 칼부림을 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18대 권력 투쟁과 관련된 것이다.

신장 사건은 원래 광둥 쇼관에서 발생한 일이다. 한인들이 한족 여자아이가 신장 사람에게 강간당했다는 말을 듣고 위구르 족을 구타하였는데 두 사람이 죽고 많은 사람들이 다치게 되었다. 현지 정부는 의식적으로 종족 사이에 서로 구타하는 것을 방임하면서 관계하지 않았다. 위구르 족 군중은 우루무치에 있는 시 정부에 가서 평화로운 시위를 했으나 정부 측은 내버려 두고 상관하지 않았다. 불만에 찬 정서는 격화되어 불태우고 때려 부수어 버리는 동란 행위로 되어 한족과 위구르 족 사이에 상호 참살하는 상황으로 되었다. 저우융캉은 이미 일찍이 위구르족 사람들이 집회하여 시위한다는 소식을 알았으나 후진타오에게는 설명하지도 않았고, 사전에 민심을 위로하여 불만을 완화시키지도 않고 먼저 무장 경찰을 배치하였다가 사태가 사망 사고가 나면서 엄중한 소란으로 발전하자 무장 경찰을 출동하여 ‘안정유지’를 하였는데 하루 사이에 140명이 사망되었고 800명이 부상당하게 되었던 것 이다.

이전의 이른바 티베트 판란은 신장 사건과 성질이 같은 것으로 모두 생존권 관련 안건이 정치 사건으로 상승한 것이다. 목격자의 말에 의하면 그날 무장 경찰이 티베트 사람으로 가장하고 때리고 불을 질러 진압 구실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진상은 지금에 와서 까지도 깊은 미혹 속에 빠져 있다. 라싸로부터 우루무치에 이르기까지 ‘평란(平乱)’의 수법은 판에 박은 듯이 꼭 같다. 하나는 덮어 감추면서 소식을 봉쇄하고 기자들을 쫒아낸다. 두 번째는 진압하는데 충돌 상황을 승급한 후 강력하게 진압한다. 세 번째는 모자를 씌우고, 소란을 해외 세력의 선동, 지휘라고 귀결시킨다. 그리고는 비디오를 돌려 당국에서 진압에 유리한 구실로 될 수 있는 장면을 촬영한다. 한족과 장족, 한족과 위구르 족 간의 원한과 증오는 렌즈 앞에서 촉진시키는 것 이다.

정법위는 흉기가 정의로운 사람들의 손에 장악되었을 때에는 중국 인민에 대한 박해를 감소시킬 수 있었으나 박해하지 못하게 할 방법이 없고, 흉기가 악인의 손에 장악되어 있을 때는 정법위가 무법천지로 중국인을 박해함을 조성하게 된다.

쵸스(乔石)는 15년간 정법위 서기로 있으면서 무장 경찰을 동원하여 진압한 일은 한 차례뿐이지만 저우융캉은 일 년에 15차례 무장 경찰을 동원하여 인민을 진압하였다. 지방 정부는 이주와 국영 기업 개혁 중 불만이 있는 군중을 대치할 때는 늘 정법 계통, 공안 무장경찰과 법원을 동원한다. 쵸스는 이에 대해 매우 큰 불만이 있었다. 그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퇴보의 길을 걷는 것이며 떵소핑이 제창한 개혁의 주요 정신은 당정을 분리하는 것인데 지금은 당정이 분리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당이 정을 대신하고 심지어는 당이 법을 대신 하기에, 공안, 검찰과 법원은 지방 관리들이 집을 보고 정원을 지키는 격으로 되었다고 말했다. 쵸스는 “떵소핑의 권위는 대단히 컸다. 하지만 당시 형사 범법죄를 엄하게 타격하려고 하던 것도 펑전(彭真)의 제지를 당했는데 지금은 감히 원칙을 견지하는 사람마저 없다.”라고 말하였다.

쵸스는 은퇴 10년 후 금년 초에 왕리쥔 및 저우융캉의 통치 하의 정법위를 엄중하게 비평하였다. 그는 저우융캉이 정법위 서기를 담당한 5년 간 중국의 법제는 후퇴했다고 했다. 쵸스는 베이징에서 법원을 정법위 관할에서 빼내어 ‘당이 법을 대체한다.’의 추세를 제지할 것을 건의하였다.

(계속)

문장발표: 2012년 5월 12 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5/12/25727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