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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념을 말해보자

글 / 대륙대법제자

[명혜망 2005년 8월 28일] 사부님께서는 설법하실 때, 정념에 대해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여러 동수들도 평상시, 교류하거나 문장을 쓸 때 늘 정념에 대해 제기하는 바, 대법제자로 놓고 말하면 정념은 관건적이고도 중요 합니다.

1. 무엇을 정념이라 하는가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대법제자의 지혜는 정념에서 나온다. 신념(神念)”> 사부님께서는 또 말씀하셨습니다.“곳곳에서 사사건건, 심지어 매 일념마저 모두 법의 요구와 일치 한다면, 그것은 곧 원만 후의 생명이다.” 원만 후의 생명은 당연히 신의 상태입니다. 완전히 하나의 신의 상태입니다. 또 신의 “매 일념이 모두 법의 요구와 일치 할 수 있기에” “법의 요구와 일치 할 수 있다.”는 의념이 즉 신념(神念)—정념입니다. 이것은 곧 우리들의 생각, 의념이 정념인가 아닌가, 법의 표준으로 가늠하는가 하지 않는가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법의 요구와 일치하는 것이 곧 정념이며, 그렇지 않으면 곧 정념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의념이 정념이라 느껴졌다 하여, 그것이 곧 정념인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어떤 동수들은 생각합니다.“반드시 걸어 나오지 못한 사람들로 하여금 걸어 나오게 해야 한다. 반면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반드시 법으로 돌아오게 해야 한다. 오직 우리들이 정념만 충족하다면 꼭 할 수 있다.” 이 말은 듣기에는 매우 힘이 있고, 정념이 매우 충족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가장 관건적인 것을 소홀히 한 것으로, 곧 바로 사부님께서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억지로 해서 될 일은 아니다. 그가 수련하고 수련 안 하고는 모두 자신에게 달렸다. 우리는 단지 잘하도록 권할 뿐이다. 또한 단지 되도록 그들을 일깨워 주고, 그들에게 알려주며, 도리를 명백하게 알려 줄 뿐이다. 강제적으로 해선 안 된다.” > 이로부터 보면, 우리가 반드시 어떠어떠해야 한다는 생각과, 사부님의 설법과는 그리 일치하지 않음을 명확히 보아낼 수 있습니다.

2. 부동한 층차에는 부동한 정념이 있다

“부동한 층차에는 부동한 법이 있다.” 『전법륜』 > 왜냐하면 정념이 법의 요구와 일치한 의념을 확보하기 때문에, 부동한 층차의 법의 요구와 의념이 일치될 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곧 부동한 층차의 정념입니다.

예를 들면, 처음 진상을 알리고 법을 실증할 때, 우리 모두가 가능하게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법을 실증하라고 하셨다.” 이러한 생각은 의심할 바 없는 정념입니다. 우리는 사부님의 제자이기에 당연히 사부님의 말씀에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법공부가 부단히 깊어짐에 따라, 우리의 인식은 한층 더 제고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대법제자로서 대법 중의 하나의 입자이다. 우리는 반드시 법을 실증해야 한다. 이는 우리의 직책이다!” “사부님께서 우리들에게 법을 실증하라고 하셨기에, 나는 곧 법을 실증한다.”로부터 “내가 법을 실증하겠다.”, “나는 반드시 법을 실증하겠다.”에 이르렀는데, 기실 정념의 층차가 제고된 것입니다. 나는 법을 실증하는 구체적인 문제에서, 역시 유사한 정황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3. 정념과 정행

정념과 정행의 관계에 대하여, 사부님께서는 매우 똑똑히 말씀하셨습니다.“당신이 누가 정행하지 못함을 보았을 때, 사실 바로 그는 정념이 부족한 것이다. 사상이 사람의 행동을 지배하기 때문에, 당신의 정념이 충족할 때 당신의 행위는 긍정하고 단정한 것이며, 정념이 부족할 때의 행위는 단정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정념, 정행은 일성으로서 분리될 수 없다고 인정합니다.

비록 사부님께서 이미 매우 명확히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늘 이러한 말들을 듣게 됩니다. “모모는 7.20 이후, 집에서 법공부를 했고 연공도 했으며 발정념을 했다. 때로는 동수들과 교류도 하여 정념 역시 매우 충족한데, 다만 걸어 나와 법을 실증하지 못한다.”

법을 실증하러 걸어 나오지 못함은, 긍정적으로 정념이 충족하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정념이 충족하다면, 꼭 걸어 나와 법을 실증할 것입니다. 사부님의 요구대로 걸어 나와서 법을 실증하지 못하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좋은 사람이라고 조차 할 수 없는 바, 당연히 대법제자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부님께서는 자비로 줄곧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며, 줄곧 기회를 주고, 기회를 주고, 또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정말 응당 진귀함을 알아야 하며, 시간이 긴박함을 깨닫고, 빨리 걸어 나와 법을 실증해야 합니다. 당신은 어쨌든 자신의 생명의 영원을 위해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법리상에서 얼마나 높이 인식했다면, 당신들은 곧 어떤 정도로 할 수 있다.”> 걸어 나오지 못한 수련생에 대하여 이러하며, 이미 걸어 나온 수련생에 대해서도 역시 이러합니다.

예를 들면, 진상자료를 배포할 때, 일부 동수들은 끊임없이 법공부를 하며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진상 과정 중에 일을 잘 하면서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워 하는 마음을 버리면서도 경솔하지 않아야 하고, 현시심도 버려야 합니다. 질과 양에 주의 하면서도, 수량을 보증해야 합니다. 자료를 배포하는 과정에서 세인을 구도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울러 형식과 내용을 결부함에 유의 해야 합니다. 붉은색 종이로 자료를 싸거나, 유지봉투에 넣어 매 집 문 앞의 적절한 위치에 놓거나, 기타 합당한 위치에 놓아야 합니다. (큰길 옆 혹은 인도에 던지지 말아야 함) 이리하여 사람들이 문만 열면 자료를 줍게 되는 데, 선물(?)을 받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되어, 자료를 보는 확률이 높아 질 수 있습니다. 만약 다른 동수들이 이미 그 자료를 배포하였다면, 중복하여 배포하지 않음으로써 낭비와 헛된 힘을 쓰지 말게끔 해야 합니다. 시간안배 역시 유의해야 합니다. 즉 너무 자주 자료를 배포하지 말아야 합니다. 너무 자주 배포하면 반감을 불러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혹은 자료를 너무 쉽게 얻을 수 있다고 느껴져서 소중히 여기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또 시간 간극이 너무 길지도 말아야 합니다. 너무 길면 시기 적절하게 진상을 요해 하지 못하여 구도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또 부동한 군중을 구별해야 하는 바, 이에 따라 배포하는 자료의 종류도 좀 부동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비교적 부유한 사람은 집에 거의 VCD가 있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진상 CD를 배포하면 효과가 비교적 좋습니다. 그러나 농촌에는 VCD가 있는 집이 극히 적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CD를 배포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고, 다른 자료를 중점적으로 배포해야 합니다. 만약 누구의 집에 VCD가 있는지 없는지를 모르는 상황에서는 전단지를 배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전단지는 누구나 다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또 자료의 수량, 자료의 내용, 종류가 어떠한가 등의 정황 등을, 자료를 만드는 동수들과 교류하고 협조하여 실제 상황을 근거로 필요한 조정을 하여, 법을 실증하는 일을 더욱 잘 해야 합니다.

총괄적으로 말하면 박해가 시작된지 5년 남짓한데, 긴긴 시간을 돌이켜보면 얼마 멀지 않구나. 배포한 자료 적지 않고(상대적으로 말함) 질과 양 역시 괜찮았네. 심성은 각기 부동했으나, 문제에 부딪히면 법으로 비교했네. 사사(事事)중에서 법이 먼저였거늘, 마음이 명백하니 정념이 일도다.

이것은 우리 일부 동수들의 조그마한 체험이다.

4. “제자들 정념이 족하거니, 사부는 회천력(回天力)이 있노라” >

무엇을 “제자들 정념이 족하거니”라 하는가? 나는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상, 의념, 인식이 능히 법의 요구와 일치할 수 있다면 곧 정념이 충족한 것입니다. 일치 할수록 정념은 더욱 충족합니다.

어떻게 정념을 충족하게 할 것인가? “내가 생각하건데 오직 법공부를 많이 해야만 정념이 강해질 수 있다.” 『2003년 정월 대보름날 설법』

우리의 머리 속에 담겨있는 법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들의 사상도 더욱 더 법의 요구와 일치될 수 있으며, 마지막에 가서 머리 속에 담은 것이 모두 법이면, 그것은 곧 완전한 일치로서, 그러하다면 곧 원만일 수 있다.

몇 년간, 나는 끊임없이 법공부를 계속하여 정념 역시 갈수록 충족해졌고, 사부님의 보호로 매우 많은 손실을 피면함으로써 법을 실증하는 일을 더욱 더 잘했고, 점차 원만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나는 이것은 “제자들 정념이 족하거니, 사부는 회천력(回天力)이 있노라”[弟子正念足 師有回天力]의 일종 체현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을 모두 바르게 하였다면 곧 어떠한 교란도 없는 것인가? 단지 매우 많은 손실을 감소 시킬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여러분 자신에게도 아직 확실히 의식하지 못하는 요소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비로소 빈틈을 타게 되는 것이며, 낡은 세력은 곧 그것들이 하고자 하는 것을 억지로 강요 할 것이다. 동시에 일부분 수련생, 특히 제 3부분의 수련생에게는 아직도 일정한 업력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이러한 것들을 이용하여 빈틈을 탄다.”『2003년 정월 대보름날 설법』

우리가 말하건대, 만약 우리의 정념이 충족하지 못하면 곧 낡은 세력의 틈을 타게 되며, 정념이 부족할수록 박해를 받음이 더욱 심합니다. 이런 현상은 이미 존재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릇 박해를 받았거나 혹은 엄중한 박해를 받은 동수들이, 곧 바로 정념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확실히 의식하지 못한 인소가 존재”하거나, 혹은 업력이 비교적 커서 낡은 세력에게 틈탈 기회를 주어 박해를 당했거나, 엄중한 박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어떤 원인으로 낡은 세력이 틈을 탔거나 박해를 받았거나를 막론하고, 우리는 모두 그것을 승인하지 않고 모두 그것을 전부 부정해야 합니다. 아울러 법공부를 잘하여 부단히 정념을 가강해야 하는 이는 긍정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박해를 당한 동수, 특히 엄중하게 박해를 받은 동수에 대하여 반드시 정확한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동정심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속인들이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자비를 말하고 관용을 말하는 바,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관용하며 자신에 대해서는 엄해야 합니다. 오직 우리들이 사부님을 믿기만 하고 법을 믿기만 하면, 사상 행위가 기본상에서 법의 요구와 일치할 수 있는 바, 이는 긍정적입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법중에서 하나의 이치를 알았는바, 이 우주 중에서 어떠한 생명이라도, 그가 받은 고통은 모두 헛되이 받은 것이 아니다. 특히 대법을 수련하는 한 사람으로서 뿐만 아니라 정법시기의 대법제자로서, 오직 최후에 여전히 법중에 있다면 어떠한 결과이든 기다리고 있는 것은 모두 원만이다. >

나는 이렇게 이해합니다. “오직 최후에 여전히 법 중에 있다면” 이 역시 “제자들 정념이족하거니”, “어떠한 결과이든 기다리고 있는 것은 모두 원만이다.”(이는 이미 허다한 사례가 증실했다.) 이 역시 “사부는 회천력이 있노라.” 입니다. “오직 최후에 여전히 법중에 있다면 어떠한 결과이든 기다리고 있는 것은 모두 원만이다.” 이는 “제자들 정념이 족하거니, 사부는 회천력(回天力)이 있노라”[弟子正念足 師有回天力]의 또 하나의 체현입니다.

그러나 “법에서 수련하지 않고 박해를 감당하는 자체로는 더욱 높게 수련하는 방법이 없으며 대법제자의 표준엔 더욱 도달하지 못한다.” > 그것은 또 별도로 논의해야 합니다.

“사부는 회천력이 있노라.”의 더욱 큰 내포는 대법제자들이 한 것이 어떠하던지를 막론하고, 세인들이 정법 이 단계를 걸어지나 갈 수 있던지 없던지를 막론하고, 또 우주의 중생들이 어떠하게 표현하던지를 막론하고, 대궁 우주 중의 정법은 반드시 성공한다는데서 체현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는 별도로 되는 문제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문장완성: 2005년 8월 27일
문장발표: 2005년 8월 28일
문장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5/8/28/109302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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