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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이 ‘무신론’을 이용하여 신앙자유를 박해하고 있음에 대하여(1)

글 / 명혜평론원 어우양페이

【명혜망 2005년 3월 29일】

(사진)’천사의 심판’, 작가:왕웨이싱

머릿말

1,’무신론’은 과학적으로 실증 된 것인가?

2,’과학’과 ‘유신론’의 상호보완성

3,’무신론’이 ‘유신론’을 부정할 수 있는가?
(1), 중공의 특색 ‘과학보급(科普)’이 타도하는 것은 무엇인가?
(2), 우주의 끝은 있는가?
(3), 사람의 사상으로 신의 일을 상상할 수 있는가?
(4), 인간세상의 이치에 부합되면 신의 의지가 없어도 되는가?
(5), ‘존재를 증명할 수 없음’이 바로’존재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인가?

4,’무신론’은 ‘유신론’ 중에서 변경(邊界)된 한가지 특별한 예

5, 중공은 ‘무신론’ 을 정치공구로 변화시켰다
(1), ‘무신론’은 원래 학문의 한 과목이다
(2), 중공은 왜 ‘무신론’을 해야 하는가?
(3), 중공은 어떻게 ‘무신론’을 펼치는가?

6, ‘무신론’이 중국인민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었는가?
(1), 중국에 과학기술이 진보를 가져다 주었는가?
(2), 중국에 도덕의 승화를 가져다 주었는가?
(3), 국민 생활의 평안(安康)을 가져다 주었는가?

맺는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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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말

몇 해 전 러시아의 한 무신론 학자가 어느 날 큰 회의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연설을 하고 있었다. 청중들도 그의 말에 공감하고 있을 때 그는 큰소리로 하나님에게 도전하였다. “하나님, 만약 당신께서 정말로 영험하시다면 지금 내려와 이 많은 군중들 앞에서 저를 죽여주세요. 그러면 우리는 당신의 존재를 믿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해 놓고는 일부러 몇 분간을 기다렸다. 물론 하나님은 그를 죽이려 내려오지 않았다. 그는 좌우를 훑어보며 청중들에게 “당신들은 모두 보셨죠!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머리에 수건을 두른 한 시골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선생님, 당신의 이론은 아주 고명합니다. 당신은 지식인이고 저는 시골 아녀자 인지라 당신에게 반론을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오직 제 마음속에 있는 한 가지 문제에 대해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여러 해 동안 예수를 믿어 왔기 때문에 제 마음은 주에 대한 은혜로 가득차 있어 아주 즐겁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애독하고 있는데 읽을수록 재미가 있습니다. 제 마음은 예수님께서 제게 베푸신 위안으로 가득하며, 예수를 믿음으로써 제 인생 최고의 즐거움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가지 여쭙겠는 바, 만약 제가 죽었을 때 하나님은 근본 존재하지 않고 예수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님을 발견한다면, 성경을 전부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한 평생 예수를 신봉했다고 하여 어떤 손해를 보게 되나요?”

시골 여인의 갑작스런 질문에 무신론 학자는 한참 동안 생각했으며 회의장은 아무 소리없이 조용했다. 청중들도 시골여인의 추리에 공감했으며 학자마저도 아주 단순한 여인의 논리에 감탄했다. 학자는 낮은 소리로 “여사님, 제 생각에 당신은 아무런 손해도 보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여인은 또 학자에게 물었다. “학자님께서 이렇듯 좋은 대답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 질문이 하나 더 있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죽었을 때 정말로 하나님이 계시고 성경이 아주 정확한 사실이며 또 천당과 지옥의 존재를 발견했을 때, 또 예수님이 정말로 신의 아들임을 당신이 알게 된다면 당신은 어떤 손해를 보게 될까요?” 학자는 오랫동안 생각하였으나 여인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못했다.

천 백년간 이 러시아 학자와 노부인의 이야기처럼 ‘유신’과 ‘무신’의 쟁론은 인류 역사상 지금까지 반복되고 있다.

정상적인 사회에서 신을 믿고 신을 믿지 않음은 완전히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고, 그에 대한 쟁론 역시 세계관의 다름에 불과하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에서 펼쳐지고 있는’무신론’은 아주 불행하게도 중공의 독재정권에 이용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무신론’은 실제로 세계관의 다름에 의해 생길 수 있는 분쟁에 속하는 것인데, 중공에 의해서는 잔인무도하게 신앙을 말살하는 핑계거리로 변화되었다. 중공은 ‘과학’이라는 명목하에 나라의 힘을 빌어 신을 믿는 자를 박해하고 있는 바, 그 상황이 아주 처참하여 그것으로 인한 재난도 아주 혹독한데 이는 역사상 전대미문의 일이다.

‘무신론’은 정말로 ‘유신론’ 보다 더 과학적인가?

본문에서 더 넓은 시야로 이번 논쟁을 심찰할 것이며, 중공의 절대화한 ‘무신론’ 교육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가져다 준 사상적 사고를 타파하고, 중공과 장쩌민집단이 ‘무신론’을 이용하여 파룬궁에 대해 오랜 시간 동안 하늘과 땅을 뒤엎는 비방을 하며 추악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을 반성하게 할 것이다. 또한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넓은 흉금으로, 여러 사람들의 진정한 신앙의 자유를 수호하도록 할 것이다.

1.’무신론’을 과학적으로 실증 하였는가?

‘과학이 한 발자국씩 진보할 때마다 하나님은 한 발자국씩 후퇴한다’는 말은 무신론에서 주장하는 첫 서두이다. 그러나 과학의 발전 역시 인류에게 더욱 큰 미지의 공간을 열어주었다. 그 결과 인류는 갈수록 자신들이 아주 보잘 것 없는 존재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1928년 물리학자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 막스-보른은 강체개념(狄拉克)에 기초하여 전자를 제약하는 방정식을 발견하고는 자신의 믿음을 설파했다. “우리가 알기로는 물리학은 6개월 내에 끝난다.” 그러나 중자의 발견은 물리학에 새로운 대문을 열어주었으며, 6개월이 지났지만 물리학은 끝나지 않았고 오늘날 60년이 지났지만 물리학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사실상, 과학의 발전은 ‘유신론’과 반대로 달리는 것이 아니다

동한(東漢)의 저명한 ‘무신론’자 왕충은 ‘천인감응(天人感應)’을 믿지 않았다. 사람은 땅에 살고 신은 하늘에 있어서 멀리 떨어져 있는데 사람의 말을 신이 어떻게 알아 들을 수 있는가 하여 ‘천인감응’을 부정하였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조그마한 무선 발사장치 하나만 있어도 하늘의 위성과 통신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동차의 전 지구 위성 정위계통 GPS가 바로 이런 원리에 의해 나온 것이 아닌가? 사람은 무선장치 보다 더 복잡하고 선진적인 ‘의기’인데, GPS마저 위성과 교류할 수 있는데, 사람이란 이 ‘기계’는 하늘의 신과 교류할 수 없단 말인가?

만약 왕충이 오늘까지 살았다면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그를 도와 ‘무신론관’을 성립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도리어 반대되는 이론을 펼쳤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유신론’을 과학이 발전하지 못하여 낙후된 상태와 무지에서 기원되었다고 하는데 ‘무신론’ 역시 그렇지 않은가?

사실 인류는 줄곧 과학적인 방법으로 외계 생명체를 탐구하고 있으며, 아주 많은 사람들도 신비한 비행접시 현상에 대해 흥미진진하게 거론한다. 천문학과 우주학이 관측한 최신 데이타에 의하면 우주 중에 입자가 물리 표준모형으로 묘사된 보통 물질이 4%만 점하고 96%는 미지의 암물질과 암에너지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그럼 그 암물질 중에 생명체가 있을 것인가 아니면 없을 것인가? 과학자들이 탐구하는 자체가 사람보다 더 고급적인 생명을 찾을 수 있음을 배제하지 않는다. 만약 사람을 창조할 정도로 고급적인 생명을 찾을 수 있다면 신을 찾은 것이 아닌가?

때문에, ‘과학’은 ‘무신론’의 특허가 아니다. 절대 과학적인 질서에 따라 일을 해 본 적이 없는 중공은 ‘과학’이란 말을 애용하는데, 사실 그것은 ‘과학’을 남용하는 것이며 사람을 때리는 몽둥이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중공과 장쩌민집단은 파룬궁을 박해할 때 ‘과학 숭상’을 함부로 떠들며, ‘무신론’을 ‘과학적인 무신론’인양 말하는데, 마치 ‘무신론’이 ‘과학’에 의해 증명된 객관 법칙인 듯 여기고 있는 것이다.

사실 진정한 과학은 ‘과학’이란 두 글자를 더하여 대담해지게 할 필요가 없는 즉, 사람들은 ‘과학물리’, ‘과학화학’이란 말을 들어보았는가? 없다. 이것은 공산당이 과학적이지 않은 것들을 ‘과학’을 도용하여 자신을 미화하기 좋아하며 이로써 백성들을 현혹시킨 것이다. 예를 들어 무슨 ‘과학 사회주의’ ‘과학 공산주의’인데 누가 또 공산주의를 믿는단 말인가?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자본주의마저 자신들을 ‘과학 자본주의’라고 말하지 않는다.

만약 ‘유신론’을 일종 세계관의 가설이라고 말한다면 ‘무신론’ 역시 다른 일종의 ‘가설’일 따름일 뿐 무슨 과학의 정론이 아니다. ‘무신론’ 자의 경전으로 떠받들어지고 있는 ‘진화론’ 역시 다윈이 그 당시 관찰하여 제기한 일종 가설이었던 것이다. 현재 ‘진화론’은 일종 ‘신화’로 보급되었을 뿐 엄밀한 논증은 아직까지 없다. 현대 진화론을 추종하는 자들에게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한 번 물어보라. 그들은 아직도 진화의 증거를 고달프게 찾고 있지만 수없이 많이 찾아낸 진화론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예들을 힘들게 해석하려 하고 있다.

2. ‘과학’과 ‘유신론’의 상호보완성

한 과학자의 성과와 신을 믿고 신을 믿지 않는가 하는 것과는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 이름난 수많은 대과학자들, 케플러(Kepler), 보일(Boyle), 뉴톤(Newton), 페러데이(Faraday), 몰스(Morse), 줄(Joule), 맥스웰(Maxwell), 멘델(Mendel), 플레밍(Fleming)등등은 모두 신앙을 가진 ‘유신론’자 들이다. (반대로 공적이 있는 과학자들 중에 신을 믿지 않는 이들은 이들에 비하면 모두 그렇다.)

사실상 서방의 과학은 이미 사람의 생활방식을 철저히 변화시켰으며 생활 곳곳에 깊숙히 침투되어 있다. 과학에 대한 의지로 많은 사람들은 과학을 숭배하지 신을 숭배하지 않는 바 이 한 점은 모두다 아는 사항이다.

재미있는 소식 하나가 있는데 미국의 대과학자들을 상대로 신앙하고 있는지 조사하였다고 한다. 20세기부터 20세기 말까지 과학자들이 신을 믿는 비율은 갈수록 적어져 ‘무신론’자들은 이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다. 이에 대해 한 사람이 풍자적으로 표현해 놓았는데, 비록 과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지만 (심지어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은 더욱) 인류 과학의 완전 돌파는 오히려 갈수록 느려지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갈수록 희망을 볼 수 없다. 때문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물리학자들도 너도나도 업종을 바꾸어 컴퓨터 프로그램 혹은 금융투자로 갔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사람들이 갈수록 신을 믿지 않음으로써 과학 발전이 갈수록 느려진다가 아니다. 오늘의 과학자들은 확실히 큰 돌파가 필요한 시기인지라 과학자들은 과거에 감히 발을 들여놓지 못했던 영역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최근 몇 해 사이에 서방의 일부 과학자들과 신학자 사이에 합작을 시작하고 있는 즉, 그들은 종교단체의 신선한 경험을 근거로 또 현대 과학의 발전을 진지하게 모색하고 있다.

이에 대해 과학자들이 대답해야 할 문제는 ‘어떻게?’ 이다. 즉 세포가 신체 속에서 어떻게 일하는가? 초음속 비행기는 어떻게 설계되었는가? 인 반면, 종교가 대답해야 할 문제는 ‘왜?’이다. 사람은 왜 창조되었는가? 나는 왜 반드시 진실한 말을 해야 하는가? 왜 하나의 우주가 존재할까? 왜 그것은 현재의 이런 질서를 지니고 있을까?

과학은 사물, 사람, 동물의 행위가 어떻다고 분석할 뿐, 이 행위의 좋고 나쁨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그러나 종교는 오히려 이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과학은 오로지 ‘무엇인가’란 이 문제를 연구할 뿐. 종교만이 비로소 ‘왜’란 문제를 연구한다고 말한다.

과학자는 비록 일정한 정도에서 ‘왜’를 해석할 수 있지만, 만약 ‘왜’를 뿌리까지 캐물어보면 과학은 첫 번째의 ‘왜’는 해석하지 못하는데 바로 사람들이 항상 말하는 ‘첫 번째 원인'(First Cause)이다.

‘무신론’자는 인류의 기원을 해석할 때 ‘진화론’으로 사람이 원숭이로 진화하였다고 주장하지만 원숭이가 사람으로 진화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우리는 원숭이는 애초에 무슨 생명으로부터 진화되었는지 알아냈는가? 그 생명은 또 무엇으로 진화되었는가? 이렇게 끝까지 캐물어 나가게 되면 무신론자들은 완벽하게 말할 수 있을까?

지금 일부 자연과학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둔 동시에, 또 종교적인 배경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한 가지 공통된 소원이 있는데, 이는 과학과 신학 사이에서 공통점을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어떠한 관건적인 문제에서 과학이 얻지 못한 결론을 신학으로 해석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들은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즉, 사물은 모두 저급에서 고급으로 진화한다. 그럼 이 방향은 어디에서 왔는가? 이는 진화론 자신조차 해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물이 진화되기 이전에 확정된 것이 있어 그것으로 진화되기 시작한 것이라면, 그럼 하나님에 의해 사물이 진화될 방향이 결정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중공은 ‘사람의 의지로 바꿀 수 없는 객관규률’이란 말을 한다. 사실 ‘사람의 의지’가 아니면 누구의 의지인가? ‘대자연’이라는 세 글자로 대충 넘어갈 수 있는가?

종교 자체는 ‘과학’이 발전되도록 도와줄 의무가 없으며 객관적으로 과학을 위해 사고방식을 열수 있는가 없는가는 과학자 개인의 연구행위이다. 그러나 만약 ‘무신론’ 자 이지만 더욱 ‘과학’적인 흉금으로 ‘신의 의지’가 존재한다는 가능성을 한 번 열어놓고 , 다른 사람을 존중하여 신앙의 자유를 선택할 수 있다면 아마 이 사회는 더욱 조화롭게 아름다워질 것이다.
(계속)

문장완성:2005년 03월 25일
문장발표:2005년 03월 29일
문장갱신:2005년 03월 29일 02:56:07
문장분류:【시사평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5/3/29/98144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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