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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왜 인간세상에 고난이 존재하도록 허락하였는가?

글 / 용천묵객(龙泉墨客)

【명혜망 2004년 8월28일】유신(有神)과 무신(无神)은 역사적으로 이미 몇 천년의 논쟁이 있었다. 무신론자가 “신이 존재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직접 증명하려고 하는 것은 거의 헛수고일 뿐이었다.. 왜냐하면 이 우주의 드넓음과 천체의 궁대함, 그리고 미시적 세계의 복잡함과 미묘함은 사람의 인지범위를 훨씬 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가 인식하지 못하고 탐지하지 못한 시공과 척도 범위 내에 인류를 초월하는 고급생명이 존재하지 않음을 그 누구도 보증할 수는 없었다. 그런 이유로 하여 물러서서 유신을 구하게 되면 곧바로 논리상의 반문인 즉, 만약 정말로 자비하고 인애(仁愛)하며 못할 것이 없는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왜 이 세상의 고난에 대하여 보고도 못 본 척 한단 말인가? 왜 또 인류에겐 전쟁, 전염병, 기아, 빈곤과 각종 불공평이 있단 말인가? 이것이 바로 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물음에 부딪혔다.

분명, 그런 식으로 사람의 “이성, 논리”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하는 “신”은 확실히 존재하지 않는다. 일부 일은 우리 현실의 표면에서 보게 되는 것과 같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한 가지 이야기가 있다. 여행 중이던 두 천사가 한 부유한 가정집에 가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이 가족은 그들에 대하여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는데, 그들을 편안한 손님 침실에서 하룻밤 쉴 수 있게 해주지 않고, 추운 지하실의 구석진 곳을 내어 주었다. 그들이 그 곳에서 잠자리를 만들고 있을 때 비교적 나이든 천사는 벽에 구멍 한 개가 있는 것을 보고 단번에 그것을 수리해 주었다. 젊은 천사가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노천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일부 일들은 보이는 것과 같이 그러하지 않다.”

이튿날 밤, 두 명은 또 아주 빈곤한 농부집에 가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주인 부부는 그들에 대하여 아주 친절하였고 겨우 남아있던 아주 적은 음식물을 꺼내어 손님에게 대접하였다. 그 다음 또 자신의 침대를 양보하여 두 천사에게 주었다. 이튿날 이른 아침 두 명의 천사는 농부와 그의 아내가 흐느껴 우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그들의 유일한 수입원인 젖소 한 마리가 죽어버린 것이었다. 젊은 천사는 아주 화가 나서 노천사에서 왜 이러한 일이 생기는 것인가 질문하기를, 첫 번째 가정은 모든 것이 있었지만 노천사는 또 그들을 도와 구멍을 막아주었고, 두 번째 가정은 그처럼 빈곤하면서도 손님을 성심껏 맞이해 주었는데, 노천사는 오히려 젖소의 죽음을 왜 저지하지 않았는지 물었다.

“일부 일들은 보이는 것과 같이 그러하지 않다.” 노천사는 또 말하기를, “우리가 지하실에서 하룻밤을 묵을 때 나는 구멍으로 벽 안에 금전이 잔뜩 쌓여있는 것을 보았다. 주인이 탐욕으로 미혹되어 그의 재부를 나누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구멍으로 막아버렸다. 어제 저녁에 죽음의 신이 농부의 아내를 불렀기에 나는 젖소가 그녀를 대신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일부 일들은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과 같이 그러하지 않다. ”

속인은 고인(高人)이 행하는 일은 예상 밖이라고 늘 말한다.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고인이 높이 서서 멀리 보기 때문이다.그는 당신이 보지 못하는 규율과 어떠한 요소를 통찰할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지혜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하는 일 역시 일반인은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드넓은 우주 중에는 또 인류가 아직 접촉하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한 수많은 규율이 있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만약 신이 존재하는 세계에 (혹은 공간에) 마침 인류가 접촉하지 못했기에 인식하지 못한 규율이 존재한다면, 그렇다면 인류가 경험한 범위에서의 논리는 그에게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한 가지 일을 이렇게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고 생각하지만 그는 오히려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 장자(庄子)의 이야기”塞翁失马,焉知非福 (새옹실마 언지비복) ” (편집자 주 : 인생 기우화복(机遇 祸 福)의 변화는 헤아리기 어렵다는 내용) 가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이 도리인데 그 새옹은 사실 대지혜의 사람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사유는 일반 사람과 달랐다.

사람들은 항상 자신이 불행한 일에 부딪히면 하늘이 불공평하다고 원망한다. 마치 이 세상에 고난이 없고 불공평이 없어야 비로소 조물주의 자비와 사랑이 실현되는 듯이 여긴다. 예를 들어 매 사람마다 어릴 때 모두 자기가 바라는 것에 대하여 부모가 다 들어주고 무슨 곤란이든지 모두 와서 도와주어 해결해야만 비로소 좋고 이것이 바로 자신을 “사랑”한다고 여기는 것과 같다. 그러나 성장한 후 자신도 부모가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아이가 희망하는 그러한 “사랑”은 꼭 진정한 “사랑”이 아님을 체험하게 된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희망하는 신의 “자비, 인애”는 신의 눈에서의 진정한 “자비, 인애”일까?

일부 사람들이 보기엔, 이 세상은 좋은 사람은 오래 못 살고 나쁜 사람은 늘 죽지 않는 것으로써, 선악에는 보응이 있다는 말은 헛소리이며, 신불(信佛)의 존재가 있다는 것도 허망한 것이라고 한다. 사실 만약 진정으로 신이 존재한다면, 그럼 한 사람의 생명의 진정한 과정은 아마도 우리가 이 세상에서 머무르는 짧디 짧은 몇 십년이 아닐 것이다. 죽음 또한 생명의 진정한 종결이 아닐 것이며, 죽음이 한 생명에 대한 가장 고통스러운 징벌은 아닐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컴퓨터의 플로피 디스켓에서 한 개 문서를 하드디스크에 옮겼는데, 플로피 디스켓을 놓고 말할 때 이 문서는 소실된 것이나(죽음) 하드디스크를 놓고 말할 때 그 문서는 여전히 존재한다(살아있음). 현대 양자역학의 이론에 따르면 우리 이 우주에는 수많은 평행공간(다른 공간)이 존재하고 있는 바,우리가 느낄 수 있는 시공은 단지 그 중의 한 개일 뿐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때 ‘삶과 죽음’에서, 죽음은 단지 생명이 한 개의 평행세계에서 다른 한 개의 평행세계로 옮겨지는 것에 불과한 바, 이를 듣기엔 마치도 폭스(福克斯)의 “성계미항(스타트렉 Star Trek )”과 같은 예를 든 것이라 할 수 있다.
(편집자 주 : 스타트렉- 미국 TV SF 시리즈. 23세기를 배경으로, 미지의 별들과 생명체를 찾아서 모험을 거듭하는 우주선 ‘엔터프라이즈(Enterprise)’호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

인간 세상의 고난에 대하여 일반적인 속인들이 또 모두 부동한 인식이 있을 수 있다. 중국에는 “큰 재난을 당해 죽지 않으면 반드시 훗날에 복을 받는다” 란 속담이 있다. 만약 시각을 좀 더 멀리 한다면, 만약 생명이 우리가 볼 수 있는 이 몇 십 년에 제한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사람이 세상에서 감당한 고난은 모두 나쁜 일이 아닐 것이다. 사람이 세상에서 멋스럽게 행복을 누리는 것 역시 모두 좋은 일만은 아닐 것이다. 물론 이는 더욱 높은 지혜의 기점에 서서 예를 든 것이다. 우리 이 세계에서 생활하는 속인들이 타인의 고통을 보고도 동정하지 않고 도리어 잘됐다고 말하면 그것은 바로 병적 상태이다.

사실 고난과 불행을 마주했을 때, 더구나 타인의 고통을 마주했을 때, 한 사람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이것이야말로 한 생명의 길고 긴 인생과정에서 중대(重大)한 일이며,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자비, 인애의 신이 주목하는 것일 수 있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럼 신을 신앙하는 바른 믿음에서 볼 때, 한 생명이 형성될 시기에 그의 가장 본원적인 특성은 이미 그 속에 존재한 것이다. 이 특성의 인간세상에서 표현으로 불가(佛家)는 “”불성(佛性)”이라고 하고, 유가는 “인(仁)”이라고 부르며, 서방은”신성(神性)”이라 하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늘 “양지(良知)”라고 말한다. 또 생명 본원 특성에서 온 표현으로 사실 나의 이해에 따라 귀결한다면 인간 본원의 특성은 바로 “眞善忍(진 선 인)” 이 세 글자이다. 이 특성에 근거하여 사람은 비로소 망망한 속세에서 진리를 찾을 수 있는데 “도를 깨닫고” “법을 얻거나”혹은 “신을 믿는다”.

“眞善忍(진 선 인)” 의 특성으로 말하자면, 한 사람이 인간세상에서 갖은 악을 저지르며 그의 생명의 본원 특성을 거슬러 행한다면, 그것은 바로 생명의 영원한 자아 훼멸로 나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신이 지나치게 잘못하고 있는 그에게 죄를 가해 줄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생명 근본 특성에 순응하여 행하는 좋은 사람을 우리 동방문화 속에서는 바로 반본귀진(返本归真), 득도(得道), 성성(成圣), 원만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고, 서방에서는 바로 영생(永生), 구원을 얻는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각종 신앙의 차이는 단지 수련 방법이 다를 뿐이다. 어떤 것은 무위(無爲)를 말하고 망념을 제거함을 말하며 어떤 것은 계율에 의거하고 어떤 것은 자성(自省)과 몸을 닦음에 의거하고 어떤 것은 숭배와 참회를 말한다. 목적은 모두 탐욕과 질투, 광망(狂妄) 등등의, 생명 본원 특성인 “진, 선, 인”에서 이탈된 망념을 제거하는 것이다.

인간세상 속의 고통과 불공평을 마주하고, 신을 믿는 올바른 신자(正信者)를 놓고 말할 때 신앙이 그에게 준 것은 바로 선량과 공의(公義)에 대한 절대적인 신심인 바, 현실이 어떠한 역경 속에 처해 있든지를 막론하고 선(善)을 행함에는 조건이 없고 한도도 없다. 그는 절대로 하늘과 사람을 원망하지 않으며, 천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비탄하지 않는다. 이것 역시 일체 올바른 믿음(正信)을 사회 속에서 행해가는 적극적인 일면이다.

여기까지 말하면, 일부 사회 개량가들은 올바른 믿음에 대한 신앙을 질책하지만, 법률과 제도적 측면으로는 고난과 불공평의 근원을 근절하지 못한다. 확실히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아마 그는 과도하게 이 한 점을 주목하지 않을 것인 즉, 그가 주목하는 것은 가능하게 매 사람마다의 전반 생명의 여정일 것이다. 아울러 인생에서의 일세(一世)는 아마도 그 속에서는 하나의 작은 여인숙에 불과할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그 어떤 법률과 제도가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사랑하게 할 것이며, 사람이 지닌 질투, 탐욕 및 서로 간의 원한, 전쟁을 제거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후자가 바로 인류 일체 고난의 근원이 아니겠는가?

세상에는 무수한 고난과 비극이 매일같이 발생하고 있다. 우리가 하늘의 불공평을 원망할 때 아마도 그는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을 바라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양심을 돌아보라. 가능하게 그것이 바로 그가 우리 생명의 깊은 곳에 심어놓은 씨앗일 것이다. 이 씨앗으로 하여금 성장하게 하면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고난과 불행에서 철저히 멀어질 수 있는 “도(道)”일 것이다.

역경에 대면하여 나는 늘 아래의 이 한 단락 말로 자신을 일깨워주는데, 여기서 이를 독자들에게도 드리고 싶다.

“악한 자(惡者)는 질투심 탓으로 사(邪)적인 것을 위하고, 화풀이를 위하여 스스로 공정치 않다고 하노라. 착한 자(善者)는 늘 자비심이 있거니 원망도 없고 증오도 없이 고생을 낙으로 삼노라. 개달은 자(悟者)는 집착심이 없으며 세인들이 환각에 미혹됨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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