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우리 지역의 수련생 갑(甲)이 오랫동안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됐고, 이로 인해 많은 수련생이 박해당하게 됐습니다. 저 역시 경찰에 납치돼 30여 일간 구치소에 갇혀 있다가 풀려났습니다.
구치소에 처음 들어갔을 때, 제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생각이 혼란스러웠고, 발정념(發正念)을 해도 무력함을 느꼈으며, 법을 외우려 해도 법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밤에는 구치소 규정상 교대로 불침번을 서야 했으므로 그 시간에 ‘전법륜(轉法輪)’을 외울 수 있었습니다.
당시 전법륜을 절반가량 외울 수 있었기에 6강을 외웠습니다. 법을 외우고 나자 머리가 맑아지면서 점차 정념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꾸준히 법을 외우고 발정념을 하면서 박해를 당하게 된 문제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부님께서 깨우쳐 주시고, 보호해주시고 계심을 뚜렷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음은 제가 구치소에서 겪은 일과 반성, 그리고 깨달음을 서술해 수련생 여러분과 교류하려 합니다.
1. 안으로 찾아 얻은 반성과 교훈
수련은 용감하게 자신을 마주해야 하며,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된다
구치소 첫날 밤, 법을 외운 후 저는 제 부족함을 세심히 찾아보았습니다. 우선 최근 자꾸 떠오르는 색욕을 엄격히 제거하지 못했음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세력의 안배를 확고히 부정하지 못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편식하고 늦잠을 자며 연공을 게을리했습니다. 직업상 어쩔 수 없이 위챗(WeChat)을 사용해야 했지만, 그 과정에서 다른 계정들을 자주 살펴보고 영화 감상도 즐겼습니다. 그 결과 수련이 느슨해져 늘 피로했고, 기술 포럼에서 공부하다 지루해지면 NTD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정상 사회의 사람들이 이런 문제를 어떻게 보는지 알아야 당(黨) 문화에 미혹되지 않는다’며 스스로를 합리화했습니다. 간단히 말해 수련이 너무 느슨해졌던 것입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수련자로서 나태함으로 생긴 업력(業力), 특히 색욕은 마땅히 스스로 감당해야 하지 않을까? 사부님께서 대신 감당해주시길 바랄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하자, 일반인에게는 고통스러웠을 구치소 생활이 전혀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감당해야 할 것은 기꺼이 감당하고, 감당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정념(正念)으로 부정했습니다.
더 깊이 생각해보니, 사실 평소에도 어떤 문제들이 잘못됐다고 알면서도 계속 그냥 넘어갔습니다. 솔직히 말해, 그 문제들을 직면하기 싫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천지행(天地行)’ 포럼에서 기술을 배울 때 지루하고 집중이 안 되면, 안으로 찾아보지 않고 대신 동영상 시청으로 지루함과 불안감을 달래려 했습니다. 이는 문제를 회피한 것입니다.
또 다른 문제는 수련생들의 기술적 문제를 도와줄 때였습니다. 그들에게 문제 해결을 도와주면 그들이 소책자를 제작해 사람들을 구하게 되고, 그렇게 구원받은 사람들 중에는 제 몫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깊이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이런 생각이 남에게 의존하는 마음 같아 좋지 않은 생각이라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돌이켜보니 참으로 어리석었습니다. 결국 자신을 속인 결과였습니다. 사부님을 속일 수 없고, 신(神)을 속일 수 없는데, 제가 왜 자신을 속여야 했을까요? 우리는 사람의 마음을 용감하게 직면해야 합니다. 오직 ‘진선인(眞·善·忍)’만이 표준이며, 어떤 이유나 변명도 통하지 않습니다. 이 표준에 맞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바로 이 표준으로 판단해야 하는데, 저는 자신을 속인으로 여기며 회피했던 것입니다.
무엇이 사악의 박해를 부정하는 것인가?
첫 번째 사례: 앞서 말했듯이, 박해가 발생하기 전 자꾸 떠오르는 색욕을 엄격히 제거하지 않은 결과는 참으로 심각했습니다. 경찰이 문을 부수고 들이닥쳤을 때, ‘이것은 내 집착으로 불러온 마귀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내 잘못이다. 내 잘못으로 사악한 구세력에게 박해의 구실을 주었으니, 빨리 이것을 제거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당하게 사악의 박해를 부정하지 못했습니다. 박해를 돌파할 정념(正念)이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계속 ‘사부님께서 결정하신다’는 생각만 반복했습니다. 사실 ‘사부님께서 결정하신다’는 생각은 제가 방법이 없고 능력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사부님, 알아서 해주세요’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서야 깨달았습니다. ‘대법(大法) 수련생이 사람의 마음 때문에 감옥에 갇히는 것은 누구의 안배인가?’ 사부님께서는 “그것은 구세력의 안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우리에게 사람의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옥에 갇혀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수련을 통해 제고될 수 없습니다. 절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수련인의 모든 제고는 법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단순히 고통을 겪는 것으로 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소도(小道)를 수련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부님께서는 결코 경찰의 박해를 통해 우리가 수련에서 제고하도록 안배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구세력의 짓입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길을 걷도록 하셨습니다.
사악이 대법 수련생을 감옥에 보내 박해하는 것은 공안, 검찰, 법원 등 사법기관 관계자들이 범죄를 저지르게 만드는 것으로, ‘대법을 수련하면 박해받는다’는 공포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이는 대법 수련생의 가족은 물론 주변 친구들까지 대법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게 하여, 결국 중생을 구하는 데 심각한 방해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구세력의 생각입니다. 그들은 개인 수련만 중요시하고, 사부님의 정법(正法)과 중생 제도를 중시하지 않습니다. 저 역시 이 점에서 그들을 완전히 부정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저는 사부님께 간절히 요청하는 데만 급급했습니다. 반드시 박해를 돌파해야 하고, 절대 박해받아서는 안 되며, 집에 돌아가 법을 잘 배우고 안으로 찾아 법 속에서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날 경찰은 저를 납치해 구치소에 감금할 생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 상황이 겹쳐 결국 제가 스스로 구치소에 갇히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이는 제가 사악의 배치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저는 ‘사악이 저를 박해하는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없었습니다. 마치 사악이 구타할 때 “엄마! 엄마!”라고 외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 경우 사부님께서 도우려 해도 도우실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사례: 구치소에 감금되었을 때 어느 날, 같은 감방의 한 사람이 보석금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보석금은 나중에 아무도 감히 반환을 요구하지 않아요. 만약 요구하면 경찰이 이유를 만들어 다시 잡아넣을 겁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에게 진상을 알려주었습니다. 중공(中共)의 법률은 종이 한 장에 불과하다고 설명하면서 진상을 전했는데, 옆에 있던 수련생 병(丙)이 말했습니다. “그 보석 보증금은 정말 반환을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명혜망에서도 보도됐어요. 전에 한 수련생이 보증금 반환을 요구하자 돌려주겠다고 파출소로 부른 뒤, 도착하자마자 붙잡아 감금했습니다.” 제가 그렇다면 그것을 묵인하는 것은 사악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자, 병 수련생은 “박해를 피하려면 그 돈은 포기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우리가 구치소에 들어올 때 받은 신체검사와 핵산 검사 비용도 각자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병 수련생의 말에 “경찰이 그 비용은 자기들이 부담한다고 했어요”라고 반박했습니다. 병이 “당신은 그 말을 믿나요?”라고 묻자, 저는 “왜 안 믿겠어요? 그들이 우리를 박해했는데, 우리가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인데, 오히려 우리보고 돈을 내라고요? 저는 한 푼도 낼 생각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병 수련생은 제 말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 상황에서 더 깊은 대화를 나누기 어려웠습니다.
문득 한 수련생 을(乙)이 생각났습니다. 그는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이유로 연금 지급 중단을 당했지만, 연금 지급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것은 덕(德)으로 보상받을 것이고, 내 생활은 어떻게든 사부님께서 우리를 굶게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을과 병의 행동은 모두 사악을 인정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이유나 두려움 때문에 돈 반환을 요구하지 않고, 반환을 요구하러 갔다가 다시 박해받을까 봐 미리 피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길을 후세에 남겨둘 수 있겠습니까?
만약 어떤 세인이 우리의 돈을 가로챘다면, 그것은 대법제자를 박해한 것이며 큰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중생 제도의 관점에서 봐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돈을 돌려주든 말든 그것은 상대방의 문제입니다. 물론 우리가 돈을 요구한다고 해서 반드시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생각조차 이것을 인정하고 묵인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바른길을 걷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변질된 관념을 바로잡지 못한다면,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는 대법제자로서의 올바른 태도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비롭고 평온한 상태 유지하기
저는 오랫동안 대법제자를 박해하는 경찰들을 생각할 때마다 그들이 참으로 불쌍하다고 느꼈습니다. 결국 사람의 직업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들도 구원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실제로 경찰과 마주했을 때, 제 마음은 전혀 그런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에 대한 반감이 생겼고, 그 반감은 거의 본능적이었습니다.
당시 처음으로 직접 경찰과 대면하는 상황이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단지 명혜망에서 본 다른 수련생들의 경험을 떠올리며, 경찰에게 협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공지 게시판의 한 글에서 “경찰의 생각대로 말하지 말라”는 내용을 기억했습니다. 그래서 경찰이 질문할 때마다 저는 “이건 사건과 무관합니다”라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결국 저는 수련자로서의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지 못했고, 행동도 다른 수련생들의 방식을 단순히 모방하는 수준에 그쳤습니다. 즉, 진정으로 마음속에서 수련자로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하고 깨달아 행동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제 말은 사악한 요소를 억제하거나 경찰의 선한 본성을 일깨우는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고, 오히려 경찰을 화나게 만들어 상황을 더 악화시켰습니다. 사실 그날 저녁 저는 풀려날 수도 있었지만 스스로 기회를 놓쳤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근본적으로 구세력의 박해를 부정하지 못했고, 제 마음 상태도 전혀 수련인다운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30여 일 동안 저는 경찰과의 관계를 바로잡지 못했습니다. 법리상 경찰을 대립적 존재로 여겨서는 안 되며, 그들도 구원해야 할 대상임이 분명했습니다. 설령 그들이 구원되지 못한다 해도 그것은 그들의 선택일 뿐, 누구도 대법과 대립되는 위치에 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저는 경찰을 마주할 때마다 그들에 대한 반감과 감정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이후에 문득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제가 다른 곳에서 일을 본다면, 예를 들어 은행에 가서 상담원을 만난다면 어떻게 할까요? 먼저 미소 지으며 가벼운 인사를 나눌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대법제자로서 선량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경찰을 대할 때는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요? 심지어 한 번도 그들을 “경찰관님”이나 “소장님”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면 마치 사악을 인정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慈悲(츠뻬이)한 마음과 상화(祥和)한 심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만약 제가 그 가르침을 따랐다면, 그렇게 일을 그르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경찰이 대법제자를 박해하는 것이 잘못된 일임을 알고 있습니다. 경찰 입장에서는 단지 ‘업무’를 수행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들이 맡은 ‘사건’을 이렇게 처리해서는 안 되며, 최소한 그들은 총구를 1cm 위로 들어 양심적으로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경찰에 대한 존중과 그들의 업무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사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그들이 진상을 들을 때 잘 받아들일 수 있을지를 고려했어야 합니다. 그들을 미워하며 대립하는 상황에서 진상을 알린다면 그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중생이 진실을 수용하고 효과를 최대화할 수 있을지를 먼저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2. 기타 깨달음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정념으로 대해야
구금 37일째가 다가올 무렵, 감방 내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며 끝내 이곳을 나가지 못하면 어떻게 할지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감방 책임자는 37일이 지나도 풀려나지 못하면 각자 다른 방으로 배정될 것이며, 그러면 환경이 더욱 열악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최소 반년은 기다려야 법원 판결을 받고 이곳을 떠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저도 쉽게 나갈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걱정과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이성적으로는 감정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감정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었습니다. 구치소에 감금된 이후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는데, 자꾸 눈물이 나와 점심 시간에는 힘겹게 참아야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습니다. ‘왜 이렇게 우울할까?’ 결국 고생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혹시라도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오랫동안 지내야 할까 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고생을 두려워하는 것 역시 사람의 마음입니다. 마땅히 무위(無爲)여야 하고 마음이 움직이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제가 사악의 박해를 부정하는 것과 전혀 충돌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대법제자로서 사부님을 도와 정법을 실천하는 사명이 있기에 사악한 박해와 그 배치를 부정하는 것이지, 단순히 체포되지 않거나 고생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더구나 저는 사부님의 안배를 따르는 것이고, 모든 것은 사부님께서 결정하시는 것이지 제가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면, 그것이 사부님의 안배를 방해하게 됩니다. 마치 구세력들이 자기 생각으로 사부님의 일을 방해하여 이렇게 큰 난(難)을 초래하고, 수많은 중생을 멸망시키는 데 일조한 것과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을 깨닫고 나니 더 이상 두렵지 않았고, 차분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공능이 소실되어 사용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정념으로 사악을 제거할 수 있다
전에 ‘봉신연의(封神演義)’에 나오는 많은 신들이 토둔(土遁)과 수둔(水遁)(땅이나 물 속으로 숨는 것)을 할 수 있었고, 진정하게 수련한 할머니가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만 해도 자물쇠가 열리는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그렇다면 왜 수련생들이 박해받을 때 신통을 사용해 탈출할 수 없을까?’ 어느 날 법(法)을 외우다가 그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속인사회의 상태를 파괴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생각도 들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진상을 알리는 과정에서 나쁜 사람에게 잡히면, 그 순간 공능을 사용해 상대를 고정시키고 탈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은 영향을 미치는 범위가 작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감시 카메라 앞에서 갑자기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아무도 감히 대법제자를 박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인간 세상의 미혹(迷)을 깨뜨리게 되어 사람들이 대법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고,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쉽게 접근할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신통을 그런 방식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대신 다른 공간에서 사람을 조종하는 사악한 생명체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사람은 사악에게 조종당해서는 안 되며, 오직 사부님의 안배에 따라야 합니다.
사람의 사유에 빠져서는 안되고, 불도신(佛道神)의 표준에 따라야 한다
중학교 시절(1999년 박해 전), 한 가지 일이 생각납니다. 어느 날 제 눈두덩이 며칠 동안 심하게 부어올랐습니다. 친구가 “내가 너라면 그냥 병가를 내고 학교에 안 갈 거야”라고 말했지만, 저는 오히려 무척 기뻤습니다. ‘이건 사부님께서 내 업력을 소멸시켜 주시는 거야! 이렇게 큰 좋은 일이 어디 있어!’ 저는 전혀 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아직 어렸고 형성된 관념이 없었기에, 사부님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제가 인식한 것은, 우리가 미혹된 세상에 살고 있으므로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허상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불도신(佛道神)의 기준에 따라야 합니다. 비록 인간 세상에서 수련하고 있어 사람의 마음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불도신의 기준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요구해야 합니다. 당시 제가 정말 불도신이었다면, ‘과연 내가 이 구치소에서 나갈 수 있을까? 도대체 언제 나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저는 계속 이런 생각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할까요? 결국, 진정한 ‘자아’가 아니라 후천적으로 형성된 ‘속인의 관점’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저의 진정한 본성은 사부님을 도와 정법을 실천하는 것이며, 사악한 박해를 마주했을 때 그것을 제거하고 부정하는 것입니다.
최근 들어 어떤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과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 생각 자체를 부정했습니다. ‘모든 것은 사부님께서 결정하시는 것이다’라고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부정이 수동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즉 이런 생각이 반복해서 떠오르는데, 그것을 근본적으로 제거할 수 없고, 단지 부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야 왜 저는 이 걱정을 완전히 내려놓을 수 없는지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내가 그런 생각을 한다’가 아니라, 그 생각 자체가 처음부터 저의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후천적으로 형성된 것이며, 심지어 구세력들이 강제로 주입한 것입니다.
모든 걸 깨닫자 제 마음은 신성하고 장엄한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리고 하루 이틀 후에 구치소에서 나가게 될 것이라는 강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정말로 3일 후 저는 구치소를 떠났습니다.
새벽에 꿈을 꾸었습니다. 한 교실에 많은 학생이 있었고, 저도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는데, 저는 문득 깨달음을 얻고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아, 알고 보니 나만이 사부님을 따라 내려온 것이었구나! 내 이름은 ○○이고, ○○년 ○○월에 태어났어.” 그리고 나서 곧 꿈에서 깼습니다. 꿈속에서 말했던 이름과 생일은 실제로 저의 이름과 생일이었습니다. 저는 사부님께서 일깨워주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난밤 제가 바르게 깨달았으며, 오직 저만이 사부님을 따라 내려온 존재였고, 그 외의 모든 다른 생각은 진정한 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맺음말
우리에게 사람의 마음이 있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자신의 사람 마음을 용감하게 마주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비록 한 번에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더라도, 일을 한 번에 잘 해내지 못하더라도 계속해서 노력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수련인의 상태입니다. 사람의 집착을 제거하는 데 중점을 두고, 청정한 마음으로 신성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본질은 수련의 문제입니다. 만약 우리가 진정으로 수련에 집중하고 형식에 치우치지 않는다면, 정말로 많은 박해를 줄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원문발표: 2025년 3월 2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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