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혜망](랴오닝성 통신원) 랴오닝성 푸순(撫順)시 파룬궁수련자 왕훙빙(王紅兵·여)는 2009년 4월 18일 중공 경찰에 납치돼 7년 반 동안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다. 출소 당시 그녀의 건강 상태는 극도로 나빠져 의식이 혼미했고, 다리를 절며 걸었으며, 뇌졸중을 앓고 있었다. 2년 후, 그녀는 뇌출혈로 식물인간 상태가 됐고, 70세에 가까운 나이에 연금마저 박탈당했다. 병상에서 1년을 보낸 후 2020년 초, 73세의 나이로 억울함을 안고 세상을 떠났다.
왕훙빙의 여동생 왕훙샤(王紅霞)는 2024년 6월 13일 다시 납치됐고, 푸순시 둥저우(東洲)구 법원에서 비밀리에 불법적으로 4년형을 선고받았다. 2025년 2월 19일부터는 랴오닝 여자 감옥으로 끌려가 박해받고 있다.
왕훙빙은 1947년생으로, 1997년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 수련을 시작해 신체적, 정신적으로 많은 이로움을 얻었다.
2009년 4월 18일 밤, 푸순시 국보(국내안전보위대: 파룬궁 탄압 담당 공안기구) 대장 펑웨(彭越)와 웨이전싱(魏振興)이 신푸 파출소와 푸민 파출소 경찰들을 이끌고 일제히 행동에 나서 왕훙빙, 왕훙샤, 한루이신(韓瑞欣), 왕샤오리(王曉麗), 왕슈궈(王秀國) 등 파룬궁수련자 10여 명을 납치했다. 왕훙빙은 푸순시 신푸구 다오제(道街)에서 경찰에 납치됐고, 불법 가택수색을 당했다. 경찰은 CD, 기계 설비, 주간지와 서적 등 개인 물품을 강탈해 경찰차로 실어갔다. 당시 왕훙샤는 심한 구타를 당해 걷지도 못했다.
이들은 푸순시 신푸구 법원에서 3년에서 7년 반까지 불법 판결을 받았다. 왕훙빙은 7년 6개월, 왕훙샤는 7년, 왕슈궈는 7년 6개월의 불법 형을 선고받았다. 덩중샤오(鄧中孝)와 32중학교의 한 교사도 각각 7년형을 받았고, 한루이신은 3년형, 장샹롄(張香蓮)은 강제노동 3년, 왕샤오리는 강제노동 1년 6개월을 받았다. 성이 가오(高)인 한 남성 파룬궁수련자도 불법 강제노동 처분을 받았다.
왕훙빙은 2009년 11월 28일 감옥에 끌려갔다. 첫날부터 감옥 책임자는 두 명의 죄수를 시켜 왕훙빙을 감시하게 하며 ‘전향 작업’을 진행했다. 그들은 “전향하지 않으면 밥도 물도 주지 않겠다”며 특히 머리를 집중적으로 때렸고, 아침부터 한밤중까지 서 있도록 강요했다.
당시는 12월로 방안이 매우 추웠지만, 감옥경찰들은 그녀에게 두꺼운 옷을 입지 못하게 했고, 런닝셔츠와 팬티만 입은 채로 추위에 떨게 했다. 폭행을 할 때는 경찰을 쳐다보지 못하게 한 후 “누가 당신을 때리는 것을 봤느냐?”라고 말했다. 왕훙빙과 다른 파룬궁수련자들이 폭력배들의 교활한 변명을 듣고 “당신들은 너무 사악하다”고 말하자, 그들은 왕훙빙과 다른 파룬궁수련자들을 더욱 가혹하게 때렸다. 왕훙빙이 구타로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었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서 있기를 강요했다. 폭행을 가한 죄수들은 인간성이 없고 매우 교활했다. 감형을 위해서라면 “파룬궁을 박해하지 말라”는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왕훙빙은 이렇게 6일 동안 학대를 당한 후, 전향서를 쓰라는 강요를 받았다. 그녀가 전향서 작성을 거부하자 죄수들이 대신 써서 강제로 지장을 찍게 했고, 이것으로 폭행자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완수했다고 여겼다. 그들은 이 전향서를 감옥 교정과에 제출해 공을 세웠다. 죄수들은 다른 파룬궁수련자들에게도 압력을 가하며 “너희가 전향하지 않아 우리의 감형이 지연되면 절대 안 된다”고 협박했다.
감옥 교정과는 파룬궁수련자 박해 계획을 완수하기 위해 이른바 ‘전향’을 강요했다. 전향하지 않으면 감옥경찰은 죄수들에게 매일 밤 2시간씩 교대로 당번을 서게 했고, 이런 방식으로 죄수들이 파룬궁수련자들을 증오하게 만들어 각종 압박을 가하도록 했다. 죄수들은 수련자들이 잠을 자지 못하게 하면서 “너희가 전향하지 않으면 우리가 당번을 서야 하는데, 감옥 노동 강도가 너무 세고 일도 몹시 힘들다”며 파룬궁수련자들을 원망했다. 전향하지 않으면 식사와 물마저 주지 않았고, 특히 머리를 집중적으로 때리며 아침부터 밤까지 서 있게 했다. 왕훙빙은 죄수들의 구타로 정신이 혼미해져 매일 어지러움에 시달렸다.
여동생 왕훙샤는 2016년 4월에 출소했고, 왕훙빙은 2016년 10월에 만기 출소했다. 출소 후 왕훙빙은 생계수단이 없었고 퇴직금이 중단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다. 심신이 어느 정도 회복된 후 푸순 사회보장국에 여러 차례 찾아가 퇴직금 복원을 요청했지만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했다.
왕훙빙의 건강 상태는 극도로 나빠져 절뚝거리며 걸었고 정신도 혼미했다. 이때 그녀는 이미 70세에 가까웠다. 여동생은 언니가 너무 안쓰러워 눈물을 흘렸다. 집으로 돌아온 왕훙빙의 상태를 보며 왕훙샤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생계수단도 없었고, 왕훙빙은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이혼 수속을 밟았다. 전남편은 상황을 염려하면서도 지역사회와 파출소의 괴롭힘을 두려워했다. 왕훙샤는 집을 임대해 직접 언니를 돌보며 언니의 건강이 빨리 회복되기를 바랐다. 당시 두 자매 모두 퇴직금이 중단된 상태였고, 생활비를 마련할 방법이 없었다. 동생 왕훙샤는 밖에서 일을 하며 돈을 벌면서 언니를 돌봤다. 왕훙빙은 종종 멍하니 앉아 있곤 했는데, 감옥에서 받은 박해가 너무나 깊이 각인돼 있었다.
왕훙빙은 2018년 가을 심각한 뇌출혈을 일으켜 식물인간 상태로 병상에 누워있다가 2020년 초에 억울함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났다.
원문발표: 2025년 3월 7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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