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럽 청년 대법제자
[명혜망] 저는 2020년에 법을 얻은 청년 대법제자로, 현재 벽화 복원 전공 2학년 학생입니다. 예술 전공 분야에서의 수련 체득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학교 선생님을 통해 깨달음을 얻다
학교에서 수업을 들을 때, 가끔 선생님의 말씀이 큰 깨우침을 준다고 느낍니다. 비록 학문적인 내용을 설명하시지만, 그 안에는 더 깊은 차원의 수련 문제를 짚어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사부님께서 그들의 입을 빌려 저를 일깨워주시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어느 날, 정물화를 그릴 때 그림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선생님은 출발점이 잘못되었다며 제가 수평선을 너무 낮게 설정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자신을 너무 낮게 두고 바라보았으며, 더 높은 시각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저는 수련을 떠올렸습니다. 새로운 항목을 시작할지 말지 망설이고 있었는데, 그것은 제가 스스로를 충분히 좋지 않다고 여기거나, 수련에서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는 제가 스스로를 너무 낮게 위치시켰기 때문입니다. 저는 더 높은 시각에서 바라봐야 하며, 대법제자가 가져야 할 정념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극복하지 못할 것은 없으며, 우리는 존엄하게 중생을 구할 수 있습니다.
저는 스스로를 올바른 위치에 놓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대법의 한 입자로서,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실 스스로를 과소평가하는 것도, 자아를 부풀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두 ‘자아’를 중심으로 한 집착입니다.
저는 겸손해야 하지만, 동시에 용감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만약 제가 스스로를 믿지 않고, 법을 믿지 않는다면 정념을 가질 수 없으며, 그렇게 되면 일을 잘할 수도 없고, 중생을 구하는 힘도 약해질 것입니다.
저 자신만을 생각하며, 제가 해낼 수 있을지 걱정했지만, 사실 중생을 구하는 일은 제 개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마땅히 먼저 타인을 고려하고 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또한 사부님께서는 저를 믿고 계시는데, 제가 스스로를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사부님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이것은 믿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또 한 번은 인물 크로키를 할 때, 선생님께서 제 해부학적 표현이 정확하다고 하셨지만, 제가 그린 인물은 제대로 서 있지 않으며, 지면에 단단히 연결되지 않아 마치 아래로 떨어지는 듯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 역시 위치를 잘못 설정한 문제였습니다.
수련과 연결해서 생각해 보니, 반드시 법에 굳건히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겉으로 아무리 좋아 보일지라도, 근본이 반드시 단단해야 합니다. 만약 일을 하는 출발점이 바르지 않다면 결국 올바르게 나아갈 수 없습니다.
때때로 저의 수련은 겉모습에만 그칠 때가 있습니다. 다섯 세트의 공법을 연마하고, 법공부와 발정념을 하며, 진상을 알리는 활동에도 참여하지만, 정말 잘하고 있는 것일까요?
법을 ‘학습’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단순히 ‘읽고’ 있는 것일까요?
가부좌 자세로 앉아있지만 마음은 흐트러진 채 형식적으로 손을 들고 발정념 자세만 취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진정으로 시방(十方) 세계를 진동할 만큼 강력한 정념을 내보내고 있는 것일까요?
저는 겉으로만 수련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진정으로 수련하며 자신의 모든 부분을 법에 동화시키고, 동시에 중생을 구하려는 진실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그 답은 ‘제가 항상 그렇게 잘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온 마음을 다해 세 가지 일을 정진하며 수련해야 하며, 점차 피상적인 수련 단계를 벗어나야 합니다.
이는 마치 벽화를 그리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벽이 단단하게 세워지지 않고 흔들린다면, 아무리 아름다운 벽화를 그린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때때로 겉으로는 매우 ‘정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인물 드로잉 수업에서는 보통 실물 크기의 인물을 장시간 동안 그립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선생님께서 과제를 바꾸어 여러 개의 작은 크로키를 그리도록 하셨습니다. 저는 이를 매우 서툴게 해냈습니다.
저는 자신이 실제 크기의 인물화를 더 잘 그릴 수 있었던 이유가, 이미 많은 연습을 통해 신체 각 부분의 크기를 익혔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형식이 바뀌자 저는 더 이상 정확한 비율을 잡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수련에서 집착을 제거하는 과정도 이와 같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같은 상황에서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후천적으로 익힌 것이며, 다른 상황에서는 종종 자신의 집착을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저는 이해를 더욱 깊게 해야 합니다. 단순히 이러한 상황을 기억하고, 그때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외부환경이 어떻게 변하든지 간에 진지하게 착실한 수련을 해야 합니다. 수련은 내면의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질투심
가끔 저는 질투심을 느낄 때가 있는데, 주로 수련생들을 향한 것입니다. 다행히도 수련생끼리는 솔직하게 소통할 수 있으며, 질투심을 수련인들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질투심을 발견하면, 서로 도와주고 격려하며 이러한 나쁜 생각을 제거하려 노력합니다. 수련생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동급생들은 저에게 질투심이 하나의 방해 요소이며 제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제 전공은 벽화 복원으로 이는 협력이 필수적인 공동 작업입니다. 학교의 회화 준비 수업에서 선생님들은 우리의 작품을 비교하며 서로 배울 수 있도록 유도하십니다. 제 성적이 다른 동급생들보다 조금 더 좋을 때, 그들이 저를 질투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비계 위에서 함께 작업할 때, 한 사람만으로는 결코 작업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협력해야 하며, 우리는 하나의 팀으로서 자신보다 훨씬 크고(물리적인 의미에서도) 중요한 목표를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경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아직 학생이기에, 누가 조금 더 잘하든 간에 우리가 도달해야 할 기준에는 아직 멀었으며 배워야 할 것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졸업 후에는 아마 다시는 서로 만날 기회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수련에서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인간 세상에 있으며, 아직 표준에 도달하지 못했고, 수련해야 할 것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성장해야 합니다.
서로에게서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각 수련생의 장점을 살려 더욱 효과적으로 중생을 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분야에서 더 잘하고, 어떤 사람은 저 분야에서 더 잘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함께 협력하여 일을 잘 해낼 수 있으며,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공동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짊어진 사명은 우리 자신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숭고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련을 원만하게 마친 후에는, 우리는 각자의 세계를 주관하게 되어 다시는 서로를 만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저는 질투심이 저와 수련생들 사이를 가로막도록 두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마치 학교에서 함께 공부하는 동급생과 같기 때문입니다.
화학및 기술 수업에서의 수확
수련 후, 저는 한동안 세속적인 지식을 배우는 것에 흥미를 잃었습니다.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기는 했지만, 그것은 단지 대법의 이미지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좋은 학생’처럼 보이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단순히 겉으로만 좋은 학생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좋은 학생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오히려 제가 ‘어쩔 수 없이’ 외계인의 지식 같은 것들을 배워야 한다며 불만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최근 저는 어떤 일이든 심성을 제고할 기회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게다가 사부님께서도 법을 설명하실 때 현대 과학을 활용하셨습니다. 저는 이러한 지식을 통해 더 높은 법리를 이해하고, 나아가 대법을 실증할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물질적 환경을 소중히 여기는 것도 신에 대한 존중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환경은 신께서 우리가 수련하고 대법을 실증할 수 있도록 마련해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저는 화학과 기술 과목을 공부하면서 얻은 두 가지 깨달음을 공유하려 합니다.
학교 선생님께서는 현대 미술 작품은 아무리 복원하려 해도 거의 불가능하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반 고흐의 작품은 몇십 년 만에 손상되었지만,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은 수 세기 동안 보존되었으며, 설령 손상되더라도 비교적 쉽게 복원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들이 전통적인 공예 기법을 따르고, 전통적인 재료를 사용하여 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작품을 창작하는 데는 일반적으로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단순히 한 폭 그림의 바탕을 준비하는 데만 몇 개월이 걸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술가들은 종종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으며, 생전에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고, 명예나 금전을 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술을 창작하는 이유가 신을 찬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재료의 물리적 화학적 특성을 존중하며, 작업 과정에서 엄격한 규칙을 따랐습니다.
이에 반해, 현대 미술은 구성이나 재료 사용에 있어 무지하고 진지하지 않으며, 규칙을 따르지도 않습니다. 현대 예술가들은 의도적으로 전통을 거스르며 그림을 그려내는데, 그 결과물은 혼란스럽고 조화롭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공산주의의 사악한 악령과 같아서, 모든 면에서 신성한 것과 대립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질적인 측면에서도 현대 미술은 화학적으로 서로 충돌하는 물질들을 함께 사용하여 캔버스, 석고, 페인트층을 손상시킵니다. 이러한 이유로 미술 작품들은 복원이 불가능한데, 이는 작품 자체가 자멸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수련인으로서 저는 여기서 한가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사악한 것들은 겉으로도 매우 추악해 보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매우 단명하고 연약한 존재입니다. 이것은 ‘악은 결코 정의를 이길 수 없다’는 진리의 한 가지 구체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 제5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무슨 도(道)가 한 자(尺)면 마(魔)는 한 장(丈)이라고 한다. 그것은 속인 중의 삿된 설(邪說)로서, 그 마(魔)는 영원히 도(道)보다 높을 수 없다.”
우리는 또한 전통적인 유화 기법인 레이어링 기법(글레이징 기법)과, 보다 현대적인 일회성(바로 칠하는) 기법(알라 프리마)에 대해서도 배웠습니다.
레이어링 기법은 여러 겹의 투명한 레이어로 구성되었으며, 이를 통해 더욱 깊은 인상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빛이 그림의 표면에 도달하면 (투명하기 때문에) 이 레이어를 투과하여 원래의 지지체(예: 표면 처리된 캔버스 및 나무 패널 등)에 도달한 후 다시 반사됩니다.
이 과정에서, 빛은 여러 층을 투과하면서, 많은 안료 입자들과 부딪치게 되고, 그로 인해 상당한 양의 빛이 흡수됩니다.
이 때문에 같은 안료를 사용하더라도, 레이어링 기법을 적용한 그림이 더 어두워보이는 이유입니다.
또한, 색상은 일반적으로 팔레트에서 직접 섞지 않으며, 대신 여러 겹의 투명한 층을 추가하면서 소량의 희석된 안료를 덧칠하여 점진적으로 보정하면서 최종적인 색을 만들어냅니다. 이 과정 덕분에 초기 밑그림은 수많은 투명 레이어를 통해 반짝이며 살아나는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반면 일회용 기법(알라 프리마)는 여러 겹의 층을 쌓는 방식이 아니라, 단 한층의 두꺼운 물감으로 원하는 색을 즉석에서 혼합하여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이러한 기법으로 그려진 그림에 빛이 도달하면, 빛은 깊숙이 투과하지 못하고 거의 즉시 반사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레이어드 기법과 비교했을 때 알라 프리마 기법으로 그린 그림은 색감이 더 밝고 얕아 보입니다.
또한 두꺼운 물감이 가장 아래층을 완전히 덮어버리기 때문에 빛이 캔버스나 지지체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저에게 이것은 더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수련을 하면서 저는 때때로 ‘알라 프리마’ 방식으로 무언가를 하거나, 제 인생 동안 쌓아온 모든 ‘쓰레기’를 한꺼번에 버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매우 피상적인 방식일 뿐이며, 단지 한 가지 집착을 다른 집착으로 대체하여 다른 무언가가 되는 것일 뿐, ‘진정한 자아’만큼 순수해질 수 없습니다. 깊이 파고들지 못하고, 단지 표면을 두껍게 덮어버릴 뿐입니다.
또한 제가 인내심을 잃을 때, 그것이 곧 ‘인(忍)’의 기준에 따라 자신을 요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깨달음도 얻게 되었습니다.
파룬따파의 수련이 강대한 위력을 지니는 이유는, 단순히 표면적인 변화가 아니라, 대법이 우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반본귀진(返本歸眞, 진정한 자신의 본원으로 돌아감) 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부님께서는 ‘창춘 보도원법회 설법’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는데, 나는 당신들이 수련을 정말 아주 잘했음을 보았다. 특히 노수련생들, 당신들을 보면 정말로 기쁘다. 그러나 당신들도 마찬가지 문제가 있을 것인즉, 때때로 사상 속에는 아직 좋지 못한 것이 반응(反應)해 나올 수 있고 심지어 상당히 좋지 못한 것이 반응해 나올 수도 있으며, 그리고 반응해 나온 그런 좋지 못한 것이 갈수록 나쁠 것이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 이치를 알려주겠다. 우리는 수련할 때, 여러분이 알다시피, 미시적인 것에서부터, 당신 생명의 구성에서부터 당신을 개변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개변된 당신의 그 부분은 바로 표준에 도달했으므로, 그 부분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당신의 사람 이 부분이 무엇을 하려고 할 때, 그 부분은 따라서 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신이 나쁜 일을 하는 것과 같게 되고, 그러면 떨어져 내려온 것과 같게 되므로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당신들이 끊임없이 수련하면, 끊임없이 법의 그 한 부분에 부합되는바, 그를 격리한다. 마치 나무의 나이테와 같이 수련 중에는 한 바퀴, 한 바퀴씩 밖으로 확산하고 있는데, 나무껍질은 당신의 표면이다. 그렇다면 그는 수련이 잘 된 그 부분에서, 안에서부터 밖으로 수련하는데, 최후에는 표면까지 수련한다. 당신의 수련 잘된 그 부분은 신이고, 수련 안 된 그 부분은 사람이다.”
제가 정직하고 인내심을 갖고 집착을 한 층 한 층 깊이 들여다볼 때, 저는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입니다.
때때로 저는 더욱 깊숙이 숨겨진 집착을 발견하게 되며, 그것들이 매우 더럽고 추악하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마치 빛이 레이어링 기법의 층층이 쌓인 안료 입자들을 투과할 때 알리 프리마 기법보다 훨씬 더 많은 안료 입자를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법으로부터 더 많은 빛을 흡수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저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가장 원초적이고 참된 나 자신을 찾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정념이 오랜 시간 동안 쌓인 수많은 오염된 층을 뚫고 빛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자비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룻밤 사이에 부처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마치 한 번에 원하는 색을 얻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며 서서히 대법에 동화될 것입니다.
저는 신이 인간에게 남겨준 서양 전통 유화가 이렇게 정묘하다는 사실에 깊이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주의 진선인(真·善·忍) 특성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실증하는 것에서 법을 실증하는 것으로
과거에 저는 자신을 실증하려는 집착이 매우 강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제가 가졌던 생각들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어느 정도 지금도 여전히 그런 면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그것을 분별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미 제2의 본성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부님께서는 제가 이 마음을 버릴 수 있도록 아주 소중한 기회를 주셨습니다.
여름방학 동안 우리는 한 달간의 복원 실습 과정을 가졌습니다. 1년간의 이론과 그림 수업을 마친 후, 이번이 처음으로 실제 복원 작업을 접하는 경험이었습니다.
학기 초반에는 극심한 피로를 느꼈지만, 점차 빡빡한 일정과, 신체적, 정신적으로 높은 집중력을 요구하는 긴 수업에 익숙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일주일간 이어진 회화 시험 동안, 우리는 심지어 그곳에서 밤을 새우기도 했습니다. 저는 자신은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스스로 얼마나 득의양양하고 자랑스러웠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작업 시간이 길지 않더라도, 비계 위에서 외벽을 복원하는 일은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저는 또다시 완전히 지쳐버렸습니다. 마치 매번 기준이 높아질 때마다 그러했던 것처럼요.
그러나 제 심성은 전혀 제고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스스로 더욱 몰아붙이고, 점점 더 거만해졌으며, 성취감만을 쫓게 되었습니다.
수련이 아닌 단순한 신체 훈련과 다름없었습니다. 속인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압박감에 익숙해진 것일 뿐 심성은 전혀 제고되지 않았습니다.
처음으로 비계를 오르기 전, 동급생들은 모두 높은 곳을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수련을 하기 전에 자주 암벽 등반을 했었고, 높은 곳에 익숙했기 때문에 저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비계 플랫폼은 일반적인 신장에 맞춰 설계되어 있었고, 저는 키가 작은 편이라 더 높은 부분에 닿기 위해서는 자주 나무판자를 밟고 올라서야 했습니다.
또한 우리가 복원하던 건물 외벽에는 커다란 창문이 하나 있었는데, 비계는 벽과 가깝게 설치되었지만, 창문이 있는 부분에서는 벽과 비계 사이에 틈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창문 위의 처마 부분을 복원할 때, 저는 판자를 사용해야 했으며, 자칫 잘못하면 그 틈 사이로 떨어질 위험도 있었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저는 수련인으로서 언제나 겸손을 유지해야 하며, 결코 쉽게 ‘나는 이미 이 어려움을 극복했다’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잘못 다루면 위험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들을 많이 사용하기에, 이를 올바르게 다루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두려워하지도, 자만하지도 말고, 언제나 신중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잘못된 보수 작업을 제거하기 위해 수술용 칼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자꾸 잊어버려서, 실수로 손을 베이곤 했습니다.
첫 주 동안 매일 다칠 정도였지만, 사부님의 보호 덕분에 상처는 하룻밤 만에 사라졌습니다.
또한 물로 씻을 수 없는 외벽의 숨겨진 부분은 증기로 세척합니다. 처음으로 증기 세척기를 켰을 때, 강한 증기압에 깜짝 놀라 순간적으로 손을 놓쳤고, 그 순간 손이 뜨거운 증기에 닿아 화상을 입었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저는 깨달았습니다. 수련인이 진상을 알릴 때, 우리 손에는 사람들의 내면 깊숙이 숨겨진 가장 오염된 부분을 정화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증기 세척기를 단단히 쥐어야 하듯, 이 도구를 확고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두려워해서도 안 되지만, 동시에 부주의해서도 안 됩니다. 만약 우리가 신중하지 않다면, 오히려 일을 망치거나, 자신과 타인을 다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중생들에게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사부님의 보호 아래, 저는 뜨거운 증기에 손이 직접 닿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습니다.
실습 기간 일이 아무리 복잡하고, 한여름의 무더위 속에서 아무리 힘들게 일하더라도, 우리는 부당한 대우를 받았고 업무를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복원하던 성의 다른 구역은 개방되어 있었기 때문에, 관광객들과 자주 마주쳤습니다. 어떤 부모들은 우리에게 들리도록 큰 소리로 아이들에게 말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나중에 저 사람들처럼 방학 동안 힘든 노동을 해야 한단다!”
또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처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우리 나라에서는 젊은 사람들이 벌금을 내야 하는 범죄를 저지를 경우, 벌금 대신 공공노동을 하도록 배정됩니다. 왜냐하면 벌금은 본인이 아니라 부모가 대신 내기 때문입니다.)
오후에 우리는 비계에서 내려와 잠시 커피를 마셨습니다. 그런데 성의 청소부가 우리를 보고 일도 안 하고 논다며 꾸짖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루 종일 일하고 있었고, 그것도 학교 교육 과정의 일부라서 급여 없이 작업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상황이 저에게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문화유산을 복원하고 있었지만, 감사는커녕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거나, 마치 벌을 받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이 오히려 좋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명예와 인정받고 싶은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 쓰지 않게 되니, 저는 더 겸손해지고, 더욱 선량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들과 선배들은 모두 매우 친절하고 겸손하며, 설령 남들이 그들에게 좋지 않게 대하더라도 상대방을 존중했습니다.
저는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습니다. 오직 1학년 학생들만이 일이 힘들다거나, 휴일이 없다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태도에 불평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청소부가 저희 선생님을 심하게 꾸짖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작업복을 입고 있었고, 석고 가루로 온몸이 더러워진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는 아주 교육 수준이 높은 학자로, 학문적으로도 명성이 높은 분이셨습니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겸손하게 청소부의 지적에 감사를 전하며, 자신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직접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저는 깊은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수련하지 않는 속인조차 저보다 더 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실습이 계속되면서, 저는 제 생각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그릇되었는지 점점 더 깨닫게 되었습니다.
매번 제가 실수로 선배들에게 폐를 끼치고 사과할 때면, 그들은 따뜻하게 웃으며 위로하며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마, 우리도 모두 한때는 1학년이었어.” 그 말을 들으며 저는 그들이 분명 크게 변화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속인들도 자신을 수련하고 제고하고 있었고, 저는 이 환경을 더욱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저는 선배들에게 물었습니다.
“이제는 이런 일들로 더 이상 힘들지 않나요?” 그들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런 이기심과 자기중심적인 마음을 없애버려, 네가 더 이타적이고 배려심이 깊어지지 않는다면, 결국 이 일을 계속할 수 없을 거야.” 그 말을 듣고 저는 깊이 놀랐습니다.
사부님께서 저를 위해 이 모든 것을 배치해 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학교 선생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원 작업을 할 때 반드시 예술을 존중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작품들은 인류가 과거에 가졌던 전통과 가치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작품의 원작자를 존중해야 하며, 절대 우리 개인적인 것을 개입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과거의 복원가들에 대해서도 관용을 가져야 합니다. 그들이 때때로 작품을 망쳐놓기도 했지만, 그들이 고의로 그런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회주의 복원가들로부터 르네상스 작품을 ‘구해냈다’고 해서 스스로를 영웅처럼 여기며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그분들은 사실 복원가가 아니라 예술가입니다.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본래 배운 전문 분야에서 일할 수 없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처럼 이탈리아에서 복원 재료를 공수할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차고에서 임시로 재료를 섞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들이 작품을 망쳐놓은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그들이 처한 시대적 환경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선생님은 이렇게 강조하셨습니다. “우리는 미래의 복원가들을 위해, 그들에게 불필요한 어려움을 남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과거 복원가들의 실수를 반면교사 삼아, 우리가 ‘가장 뛰어난 복원가’라고 착각해서, 되돌릴 수 없는 일을 저지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저는 이 말씀에 깊이 감동받았습니다.
또한 어느 날, 저는 동급생과 함께 한 연로한 복원가를 도와 오래된 나무 고해성사 벤치를 보존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우리는 조각된 나무 표면 위의 다층 색채(폴리크롬) 회복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벤치의 상태가 너무 나빠 이동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동급생은 나무판 위에서 윗부분을 복원했고, 저는 바닥에 누운 채로 아랫부분을 복원해야 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 벤치를 구하는 데 필요하다면, 그것이 바로 내 역할이다.’
저는 이 벤치를 제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 벤치를 위해서 생각해야만, 진정으로 그것을 구할 수 있습니다.
수련인으로서 저는 중생을 구하는 과정도 이와 같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중생을 먼저 고려해야 하며,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진상을 전해야지, 우리 자신의 생각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누군가를 도울 때도, 먼저 상대방을 배려해야 합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저는 최근 한 수련생을 대했던 제 태도를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를 돕고 싶었지만, 충분히 배려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에게 너무 엄격하게 대했습니다. 그의 부족한 점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대학교 첫해가 지나고 나서야, 저는 제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오만하며 자만심이 강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정기적으로 1학년 학생들과 만나 그들을 돕습니다. 이 과정은 마치 거울을 보는 것과 같았습니다.
1년 전의 내 모습을 되돌아보고, 현재의 나는 어디까지 성장했는지 점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우수한 고등학교를 나왔고, 모두가 성적이 뛰어나고, 항상 최고의 성과를 내기 위해 노력하는 학생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동급생들보다 못하면 낙담했고, 능가하면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그때 저는 강한 경쟁심을 갖고 있었고, 이 때문에 오히려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실수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자아를 내려놓고, 자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실수를 걱정하지 않으니, 배우는 과정이 훨씬 더 수월해졌습니다.
저는 여전히 많은 부족점이 있지만, 지금 그것들이 드러남으로써 앞으로 더 잘 인식하고 개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종종 저에게 조언을 주십니다. 예를 들면 “연필 대신 잉크로 그림을 그려라.” 그 이유는 연필을 사용하면 실수를 쉽게 지울 수 있지만, 잉크를 쓰면 실수를 숨길 수 없기에, 더 명확히 인식하고 개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해가 지난 후, 저는 의학을 공부하는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습니다. 그녀가 제 공부에 대해 묻자, 저는 재미있는 일화를 들려주었습니다.
“내가 문화유산을 복원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웃었어.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것이 상처가 되지 않아. 오히려 그런 경험이 내 수련에 도움이 됐지.”
이제 제 생각은 바뀌었습니다. 수련인으로서 저는 자신을 실증하는 방식을 통해 대법을 실증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또 저에게 “대법제자들은 모두 예술가인가요?”라고 물었을 때, 더 이상은 억울하게 느끼지 않았습니다.
대신 차분히 대답합니다. “많은 대법제자들은 저명한 과학 분야에서 학습하거나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의사, 변호사, 과학자 등 다양한 빛나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각자의 분야에서 훌륭한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대답이 친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만약 제가 스스로를 변호하며 설명하려 했다면, 그러한 반응은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내려놓고 담담히 받아들이자, 제 친구는 감탄하며 말했습니다. “와, 나는 대법제자들이 이렇게 훌륭한 사람들이라는 걸 몰랐어!”
이상은 현재 저의 층차에서 이해한 제한적인 깨달음입니다. 만약 법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부디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수련생 여러분 감사합니다!
원문발표: 2025년 2월 1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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