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캐나다 대법제자
[명혜망] 저는 90년대생 제자입니다. 어릴 때부터 인연이 있어 대법을 접했고 사부님께서는 제 마음속에 대법 수련의 씨앗을 심어주셨습니다.
학교 다닐 때 저는 법공부를 하다 말다 했습니다. 그때 저는 수련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습니다. 비록 법리로 자신을 어느 정도 단속했지만 사람의 층차에서 벗어나 제고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개념이 없었습니다. 정에 깊이 빠져 학창시절에는 조기 연애까지 했으며, 마음이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몹시 의식했기에 늘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어 했고, 성적과 장래를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대학 다닐 때 저는 정에 깊이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수련을 포기했습니다. 그때 저는 온몸이 아프고 경직되어 괴로웠으며, 공부만 하려고 하면 큰 압박감에 무너질 것 같았고 앞날에 대한 집착으로 극도로 고통스럽고 답답했습니다. 몇 년 동안 저는 거의 도피하듯 지냈고, 늘 휴대폰만 보면서 밤을 새웠습니다. 마치 정신적 마약을 복용하듯 일시적인 ‘위안’을 얻었지만, 그럴수록 마음은 더욱 초조해졌고, 초조할수록 더욱 도피하고 싶어졌습니다… 악순환이었습니다.
매번 극도의 절망 상태에 이를 때마다 대법이 저를 구해주었습니다. 기억 속의 법리와 약간의 정념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이를 악물고 쇠뿔 끝을 파는 것을 멈추고 더 이상 대립하지 않으며 집착을 내려놓으려 했습니다. 저는 발견했습니다. 몇 년간 내려놓지 못하고 풀지 못했던 집착도, 제가 정말로 그 마음을 버리기로 결심했을 때는 고작 며칠이나 몇 시간 정도만 괴로웠을 뿐이었습니다. 괴로움 속에서 이를 악물고 참으면서 그것을 배척하니, 많은 것을 내려놓을 수 있었고 그로부터 해탈된 것 같았습니다.
작년에 저는 ‘밀레르빠 수련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밀레르빠 존자가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고 일체를 내려놓고서라도 수련 성취하려는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아 진정으로 수련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물질들이 여전히 저를 가로막고 있었고, 저는 늘 법정인간(法正人間) 시기 이후에 다시 수련하겠다고 생각하며 ‘전법륜(轉法輪)’조차 펼쳐보지 못하고 ‘왜 인류가 존재하게 되었는가’와 ‘왜 중생을 구도하려 하는가’ 만을 겨우 읽었습니다. 이 두 편의 직설적이고 전면적인 경문은 저에게 매우 큰 충격과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8월 중순, 제 머릿속에 갑자기 서약을 실천해야 한다는 문제가 떠올랐고 매우 불안했습니다. 이런 집착을 가진 채로 일부 경문을 보았는데, 저는 다시 한번 사부님의 홍대한 자비와 중생들이 절박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에 깊이 감동했습니다. 저는 사부님을 도와 이 중생들을 구하고 싶었습니다.
약 열흘 후, 한 수련생이 우리에게 새로운 경문 ‘대법수련은 엄숙한 것이다’와 ‘험악(險惡)을 멀리하라’를 보내주었는데, 그 안에서 명확하게 서약의 문제를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전 제자로서 자신의 서약을 실천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만약 잘하지 못한다면 제가 대표하는 수많은 중생이 생명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제 관념이 이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진정으로 수련에서 승화하여 사부님의 정법을 돕고 중생을 구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관념의 전환과 수련을 결심하는 것 사이에는 마치 거대한 협곡이 가로놓인 것 같았고, 저는 그 장벽을 도저히 뚫을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어느 날 밤, 저는 인터넷상의 한 낯선 수련생에게 제 혼란과 고통을 털어놓았습니다. 그 수련생은 선의로 사부님께 가지(加持)를 간청하고 저에게 용기와 지혜를 주셔서 난관을 돌파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저는 사부님께서 이런 때 가지를 청하라고 일깨워주시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제자가 어찌 자신을 그러한 교란에 맡길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자신을 사부님께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와 몇 마디 나눈 후, 저는 마음속의 그 큰 돌덩이가 기적처럼 사라진 것을 느꼈고, 그 힘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돌파하기 어려웠던 느낌도 사라졌습니다. 사부님께서 저를 도와 그러한 교란의 물질을 제거해주셨고, 저는 다시 법공부를 할 용기가 생겼습니다!
그리하여 다음날, 저는 오랫동안 방치했던 ‘전법륜’을 꺼내 법공부를 시작하면서 수련으로 돌아왔습니다. 사부님께 대한 저의 감격과 감사한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며칠 후, 저의 배우자도 수련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시 대법으로 돌아온 후, 저는 아직도 사람마음 속에서 머뭇거리는 수련생들과 제 이해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수련생들이 걱정을 내려놓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1. 타인의 견해를 신경 쓰고 정에 집착하다
이전에 저는 사람의 정을 극도로 중요시하고 동경했으며, 그것이 매우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집착심이 충격을 받은 몇몇 순간에, 저는 사람의 정 속에 있는 이기적이고 더러운 면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정은 자신의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제가 정으로 다른 사람에게 잘 대할 때, 겉보기에는 좋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큰 정도로 어떤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도 저에게 잘해주기를, 최소한 저의 좋은 점을 알아주고 이해해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정 속에서는 또한 질투심, 과시심, 통제욕 등 각종 집착이 생깁니다.
저는 또한 깨달았습니다. 사람은 노력하고 추구한다고 해서 뜻대로 완벽한 감정과 생활을 얻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신이 아니라 업력으로 가득하고 이기적인 존재인데, 어떻게 집착으로 추구해서 행복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오직 명리정(名利情-명예, 이익, 정)을 담담히 보고 사심(私心)을 내려놓아야만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비록 여러 해 전에 저도 이러한 법리를 이해했지만, 그때는 내심으로 진정 깨닫지 못했고, 실제 생활 속에서 여러 번의 시련을 겪고 나서야 속인의 추구가 얼마나 허망한 생각이며 얼마나 의미 없는 것인지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이 이치를 깨달았을 때, 저는 충격이 너무 커서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인생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져 다시 우울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제가 정말로 그런 허망한 집착을 버리고 ‘나는 수행하러 왔지 즐기러 온 것이 아니다’라는 현실을 받아들였을 때, 사부님께서는 저의 ‘무엇이든 다 추구하려는 젊은이의 집착심’을 많이 제거해 주셨고, 저는 더 이상 생명을 포기하려 하지 않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을 배웠으며, 점차 진정으로 고층차로 수련하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많은 경우 사람이 신경 쓰는 것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그 마음의 응어리 때문이며, 그것 때문에 승복하지 못하고 쇠뿔 끝을 파고드는 것입니다… 본래는 그것이 없어서는 안 될 만큼 중요한 것이 아니었는데, 오히려 후천적으로 형성된 집착에 이끌려 잠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집착심과 집념은 각종 감정과 생각을 만들어내어 사람을 미혹시키고,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놓지 못하게 만듭니다. 사실 그것들은 모두 가짜일 뿐입니다. 그것들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 아무리 진짜처럼 연기해도 그것들에게 속아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집착을 버리는 것은 실제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금연 문제와 같습니다. 비록 오랜 습관과 집착일지라도, 정말로 내려놓으려 하고, 내려놓을 용기가 있고, 아까워하지 않고 내려놓는다면, 사부님께서는 통쾌하게 제자를 도와 이 물질을 제거해 주실 수 있습니다. 관건은 제자가 마음을 굳게 먹고 그 더러운 것을 도려낼 결심이 있는지를 봅니다.
동시에 저는 또한 계속해서 ‘속인들이 대법제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무례하다’는 생각을 배척해 왔습니다. 이것은 구세력이 중생구도를 교란하기 위해 만들어낸 가상이며, 사부님께서 인정하시지 않는 것이고 진실도 아닙니다. 제자는 ‘세인들이 대법을 오해한다’는 가상에 속아 세인들에 대해 바르지 못한 관념과 편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때로 저는 법공부 중에 ‘진상을 모르는 사람들이 어떤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까’하는 생각이 들거나, 사부님과 대법에 대해 불경스러운 생각이 들면 단호히 그것을 배척했습니다. 저는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사부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면 그대로 듣고 믿을 것이며,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겠다, 사람마음의 망념이 주는 교란을 부정하겠다.” 점차 법공부 할 때 마음이 많이 평온해졌습니다. 그런 생각 아래서, 제가 걱정한 것은 실제로는 다른 사람들이 저를 이해하지 못할까봐, 제가 어떻게 설명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전히 그 사심이었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머릿속에 사람의 생각도 없고 집착도 없이 오직 법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법공부를 열심히 해 자신을 더욱 깨끗하게 만들고 싶다.’
수련으로 돌아온 후, 저는 위챗을 삭제하려고 했습니다. 제가 수련 결심을 내리기 힘들었던 것도 이것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젊은이들은 거의 모두가 위챗을 사용하는데, 저는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까봐 실천하기 어려웠고, 또 해내지 못하면 구세력에게 교란당할까 봐 걱정했습니다(이 생각을 부정해야 합니다). 최근에 저는 생각했습니다. ‘내가 하는 것은 사부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어야 하고, 나는 신께서 만족하시는 방식대로 살아야지, 특히 세상의 기풍이 날로 떨어지는 현대사회에서 속인 대중이 인정하는 방식이나 사회의 조류를 따라가서는 안 된다.’ 사실 일부 속인들도 위챗을 사용하지 않을 수 있고, 일부 속인들도 반공(反共) 때문에 태연하게 위챗 친구들에게 차단당하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정을 내려놓습니다.
제가 그 끈적끈적한 정의 폐물을 버리고 배척하려고 할 때, 마음이 한결 가벼워짐을 느꼈고, 곧바로 위챗을 삭제했습니다. 삭제하기 전에, 저는 일부 친구들에게 더 이상 위챗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말했는데, 그들도 그렇게 불가사의하게 여기지 않았고 일부에게만 몇 마디 설명이 필요했을 뿐이었습니다. 어떤 이는 도청 방지와 휴대폰 사용 줄이기라는 생각에 동의를 표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의존심, 집단에 순응하려는 마음, 정에 대한 집착이 무슨 일을 하든 마치 늘 타인의 인정과 이해가 필요한 것처럼 만들고, 대세를 따르게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하고 결단을 내리기 어려웠습니다. 속인은 고독을 두려워하지만 수련인은 이러한 마음들을 버려야 하며, 맹목적으로 조류를 따르지 말고, 역류를 거슬러 올라갈 때도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맹정진해야 합니다!
타인을 대할 때, 수련인은 정을 출발점으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상대방이 자신을 인정하고 자신에게 좋은 태도를 보이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위해 생각하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중생을 대해야 합니다.
2. 구세력의 교란, 병업 가상에 대한 두려워하는 마음, 추구하는 마음
이전에 저는 추구하는 마음이 매우 강했습니다. 마치 집착심을 버리는 것이 시험과 어려움을 피하고 속인 중의 편안함과 행복을 얻기 위한 것 같았습니다. 두려운 마음도 자주 저를 교란했습니다. 머릿속에서 ‘불길하거나’ 무서운 생각들이 떠올라 당황스럽고 불안했으며, 심지어 때로는 법 속에서 사부님께서 구세력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일깨워주시는 것을 보면서도 두려워서 자신과 가족을 걱정했습니다(이것도 정에 대한 집착입니다). 저는 그러한 생각들을 배척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추구하는 마음을 갖고 행동했고, 때로는 매 분 매 초 사상 속에서 그것들과 겨루느라 강박증처럼 멈출 수 없어서 매우 긴장했습니다. 이 두려운 마음도 제가 이전에 수련으로 돌아오기 어려웠던 한 가지 이유였습니다. 사실 대법제자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걱정할 필요가 없는 생명입니다.
인생관이 바뀐 후, 저는 제가 수련하는 것은 인간 세상이라는 쓰레기 더미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며, 사부님을 도와 중생을 구하기 위한 것이지, 이 쓰레기 더미 속에서 온갖 방법으로 고통을 피하고 좋은 날을 보내려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제자가 어떻게 하든 구세력은 어떠한 권한도 없으며, 그들의 생각과 존재는 사부님께서 모두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는 자신이 파룬따파를 수련하고 있으며 사부님의 관리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부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고 정법을 교란하는 세력들을, 저는 제자로서 절대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단 한 알의 먼지까지도 그들이 관리할 수 없으며, 오직 사부님의 안배만을 따르는 것입니다! 사부님의 평어 문장 ‘사부님과 대법을 찬송하다’를 읽은 후, 저의 이해도 더욱 이성적이 되었습니다.
이제 사부님의 일깨움과 경고를 보면 그러한 교란의 생각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되었고, 제 생각은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사부님께 제자가 바르게 행할 수 있도록 가지해주시기를 청하며,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문제는 제자가 반드시 잘 해내야 합니다.’ 저는 ‘정정당당함’을 체험했습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잡념에 대해서도 더 이상 교란을 두려워하며 그렇게 긴장하지 않게 되었고, 많이 태연해졌으며 정념도 많이 충실해졌습니다.
병업관에 대해서는, 이전의 고난 속에서 저는 점차 그러한 느낌들과 겨루지 않고 순리에 따르게 되었습니다. 마음을 내려놓고 법공부를 시작하자 그것도 많이 약해졌습니다. 고난에도 인연이 있지 않습니까? 인터넷에서 많은 수련생들이 전생의 원한으로 인해 수련 중에 고통과 어려움을 겪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읽고 나면 고통을 감내할 때 그 원망하는 마음을 더 쉽게 내려놓을 수 있게 되고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여기서 한 청년 수련생의 심득 문장 ‘청년 대법제자: 잘 수련하여 진상을 알리고 사람을 구하자’를 나누고 싶습니다. 여시에서 그녀는 매일 눈물로 얼굴을 씻을 정도로 우울한 가상 속에서도 법을 외우는 것을 견지하여 교란을 제거하고 큰 제고를 얻었다고 합니다. 저는 그녀의 끈기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난관에 직면했을 때 법을 외우고 법공부하는 가운데 끊임없이 대법에 동화되고 확고히 사부님과 법을 믿는다면, 제자는 큰 제고가 있을 것이며 비할 데 없는 정념이 생길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에 직면하여 안으로 찾고 자신을 바로잡는 것은 구세력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며, 또한 속인 중의 이익을 추구하거나 고통을 피하기 위해, 혹은 추구하는 마음을 갖고 형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자신을 잘 수련하고 대법에 동화하여 사부님의 정법이 필요로 하는 것을 원융하기 위한 것입니다.
3. 고생을 두려워하고 번거로움을 두려워하는 사심
고생을 두려워하는 배후에는 구세력에 대한 부정이 철저하지 못한 것 외에도, 사실 고통을 두려워하고 번거로움을 두려워하는… 병업관으로 몸이 괴로울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깊이 파고들면,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인간 세상의 명리정에서 손실을 보는 것이며, 이는 각자의 근본적인 집착과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내려와 천신만고 끝에 대법이 전해지기를 기다렸는데, 이때 고생이 두려워 속인 중의 향락을 추구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만약 향락을 바란다면 애초에 어찌 이 고해인 인간 세상에 오려 했겠습니까. 많은 큰 부자들은 모든 이익을 다 얻었지만, 생명의 의미를 찾지 못해 괴로워하며, 적지 않은 이들이 티베트, 네팔 등지를 찾아다니며 구하고 있습니다… 법을 얻은 사람이라면 명리정의 덧없음과 인생이 잠시 머무는 여관과 같다는 이치를 더욱 잘 알 것입니다. 우리가 연극에 너무 깊이 빠지지 않는다면, 득실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깨달았습니다. 제 생명은 대법을 위해 온 것이며, 인간 세상의 행복이나 명리정에 대한 그 어떤 집착과 미련도 모두 ‘가짜 나’의 관념이 아닙니까!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석가모니의 제자들이 동냥 그릇에 대해서도 집착과 비교하는 마음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는 지금의 ‘밥그릇’도 사람의 직업, 수입원을 가리키며, 사람들이 명리와 체면 있는 생활에 집착하는 것이 높은 곳에서 보면 아마도 승려들이 몇 개의 동냥 그릇을 집착하는 것처럼 우스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몇 개의 예쁜 동냥 그릇 때문에 만고의 기연을 놓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게다가 대법을 수련하면 마땅히 얻어야 할 물질적 이익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때로는 고생 자체가 그렇게 감당하기 힘든 것이 아닌데, 단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걱정되고, 사람의 후천적 관념이 고생하는 것, 이익을 잃는 것, 남들이 자신을 좋지 않게 대하는 것 등을 모두 나쁜 일로 여기기 때문에, 사람들은 고생을 두려워하고 온갖 방법으로 고생을 피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진념이 아니며, 고층의 이치에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관념을 바꾸어 정말로 고생하고 관을 넘는 것을 좋은 일로 여긴다면, 느낌이 완전히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사실 우리가 몸과 마음이 불편함을 느끼는 매 초가 모두 제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을 할 때 항상 단숨에 성공하려 하고, 모든 것이 자신의 생각대로 진행되기를 바라며, 무언가 미해결된 일이 있으면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해집니다.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다려야 하거나 아직 명확히 생각하지 못한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고, 심지어 강박증처럼 계속 대립하고 이리저리 반복해서 생각하며 마음을 편히 두지 못합니다… 이는 아마도 통제욕이 너무 강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저는 이 때문에 매우 피곤함을 느꼈고, 연공할 때도 늘 입정하기 어려웠으며, 머릿속에는 이런저런 일들이 계속 떠올랐습니다. 저는 일의 진행 과정과 결과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도록 노력해야 하며, 사부님께서 최선의 안배를 하실 것을 믿고, 자연스럽게 따르며, 하되 구하지 않고, 일이 순조롭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결국 그러한 번거로움은 저의 제고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저의 안일한 마음도 매우 심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조차 어려웠고, 이불 속을 좋아했으며, 늘 직면해야 할 압박감을 피하려고 했습니다. 한번은 제가 먼저 이불을 확 걷어내자 쉽게 일어날 수 있었는데, 그 순간 저는 ‘와신상담’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구천은 본래 부귀한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그는 나라를 되찾겠다는 뜻을 잊지 않고 안일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아예 이불도 버렸습니다… 속인들도 건강을 위해, 자격증을 따기 위해, 성과를 이루기 위해, 몇 푼을 더 벌기 위해 이를 악물고 고생을 감내합니다. 많은 중국인들은 심지어 생존을 위해 강인하게 견디며 큰 고생을 합니다. 속인도 고생 없이는 진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제력이 있어야 하고 안일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는데, 제자가 제고하려 하면서 무슨 고생을 두려워하겠습니까. 게다가 수련인이 고생을 통해 얻는 것, 이루는 일은 속인이 속인이 몸매나 가꾸고 명리를 얻는 것보다 훨씬 더 소중합니다. 그것은 미래의 진정한 행복과 위덕입니다.
번거로움을 두려워하는 마음 뒤에도 사심이 있습니다. 자신을 보호하고 이익을 지키며 편안함과 안일을 추구하려는 마음입니다. 사부님께서는 약간의 불성(佛性)이라도 남아 있는 생명을 구하기 위해 억만 년의 시간을 들여 준비하셨고, 제자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시면서 크고 작은 모든 일을 안배하시고 각종 원한을 선해(善解)하셨습니다.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만약 신이 번거로움을 두려워한다면, 삼계 내의 이 모든 복잡한 구조를 만들고, 또 이 우주의 쓰레기 더미에서 직접 사람을 제도하며, 희망이 있는 모든 생명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까?
저는 매우 부끄럽습니다. 사람이라면 최소한 약속을 지켜야 하지 않습니까, 최소한 은혜를 알고 보답해야 하지 않습니까? 저는 사부님을 실망시키고 슬프게 해드리고 싶지 않으며, 사부님께서 더 많은 것을 감당하시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게다가 저도 저의 중생들을 구하고 싶습니다. 그들도 저에게 희망을 걸고 있으며, 그들도 그토록 초조해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세웠던 서약이야말로 제자의 진심이자 진정한 소망입니다. 번거로움을 두려워하는 것은 결코 제자의 진심이 아니라 가짜 나의 생각입니다. 때로는 마음이 괴로워서 정법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집착이 생기지만, 매일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삼퇴(중국공산당의 3가지 조직 탈퇴)하는 것을 보면서, 매 몇 초마다 누군가가 그들이 대표하는 무수한 중생들과 함께 구원받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의 고통도 견딜 만하다고 느껴집니다.
저는 이해했습니다: 중생을 더 잘 구하고, 서약을 실천하며, 사부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원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층차로 수련하도록 노력하고 책임을 져야 하며, 이것이 바로 제가 이 세상에 온 진정한 소망입니다. 사람들도 평소 시험에서도 합격할 수 있다고 해서 복습을 멈추지 않고 점수를 조금 적게 받아도 속상해하며, 돈을 조금 적게 벌어도 신경 씁니다. 수련은 생명의 본질적인 일이며 우리가 진정으로 중시해야 할 것인데, 어찌 도리어 건성으로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노력하고 정진해야 할 일입니다!
4. 제시간에 맞출 수 있을지, 잘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
저는 생각합니다. 처음에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법을 얻을 기회를 주셨고, 지금까지도 옛 제자들이 돌아와 서약을 실천하라고 부르고 계시니, 이는 우리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시간이 너무 짧지 않을까 걱정하거나 여러 가지를 추측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부님께는 가장 좋은 안배가 있으십니다. 만약 정법 이후에 원만에 이른다 해도, 지금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고 서약을 실천하는 데는 영향이 없습니다. 사부님과 법을 믿으면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사부님께서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 기회를 주고 계신데, 우리가 또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 오직 진정으로 자신을 제자로 여긴다면, 사부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제도하실 것입니다!
이전에 저는 제가 어릴 때부터 심리적으로 약했고, 의존심이 강했으며, 마음속으로 늘 불안과 초조함을 느꼈고, 사회 공포증이 있었으며, 심지어 초등학교 때부터 알 수 없는 이유로 생명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제 세계 중생의 대표이고, 사부님께서 저를 법을 얻게 하시고 이 사명을 주시며 이 서약을 세우게 하셨다는 것은, 제가 내심이 나약하고 이기적인 생명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오히려 매우 강대하고 다른 이들을 보호할 수 있으며 책임을 질 수 있는 생명이며, 비록 제가 이전에는 매우 약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어떤 세계의 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관념의 전환으로 저는 ’가짜 나‘를 구분하고 가상을 부정하는 데 더 많은 체득이 있었습니다.
저는 또 생각했습니다. 만약 사부님께서 어떤 생명을 구하고자 하신다면, 제자가 그것을 하러 갈 때 당연히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사부님께서 차근차근 제게 신심을 강화시켜 주고 계심을 느낍니다.
우리가 정말로 사부님과 법을 믿고 사부님의 안배를 완전히 받아들이며, 쇠뿔 끝을 파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표면 상태나 과거의 잘못과 유감에 대해 대립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최후의 시간에 잘할 수 있을지, 수련 성취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5. 사부님께 영원히 감사드려야 합니다
이전에 어떤 관과 난을 만났든, 우리는 모두 사존께 충만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사부님께서 제자에게 하신 안배는 최선의 안배이며, 우리는 진정으로 ‘최선’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절대로 ‘흥정’하려고 해서는 안 되며, ‘신이 왜 내 생각대로 하지 않지’ 또는 ‘신의 생각을 내가 왜 이해하지 못하지’ 등의 생각을 가져선 안 됩니다. 사람이 어찌 자신의 그 극히 낮은 지혜의 이해로 신께 일하시기를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사부님께서는 이미 제자와 중생을 위해 엄청난 난을 제거해 주셨습니다. 수련생이 쓴 ‘사존께서 중생을 위해 감당하신다―발정념으로 다른 공간을 본 것’과 ‘수련자가 절대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 등의 문장에서 묘사된 광경은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받지 않을 수 없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사부님께서는 또한 무한한 지혜로 제자를 성취하시고 위덕을 모두 제자에게 주시며, 잘하지 못한 제자에게도 거듭 기회를 주십니다… 사부님께서는 정말 제자 자신보다도 제자를 더 소중히 여기십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부는 대법제자의 이름을 삼계에서・인간세상에서・저승(陰間)에서, 지옥을 포함해 전부 제명했다. 그 이후 대법제자의 생명은 오직 대법의 관할에만 속하고, 더는 윤회에 들어가지 않으며, 죄가 있어도 지옥의 관할에 속하지 않는다.”(대법수련은 엄숙한 것이다)
한 사람이 대법 수련을 시작할 때부터, 사부님께서는 제자를 지옥에서 제명하시고 제자를 위해 온 마음과 힘을 다하시는데, 제자는 반대로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열심히 실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원신(元神), 모든 세포, 인신(人身), 수련한 공(功), 세상에서의 모든 능력과 성취, 얻은 일체… 우리의 홍미지극(洪微至極)한 모든 것은 다 사부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제자가 세상에서의 능력과 성취가 남보다 뛰어나다고 해서 무엇이 자랑스러우며, 어찌 이로 인해 우월감과 교만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마땅히 겸손하고 감사한 마음을 유지해야 합니다. 사부님의 법신께서 제자 곁에서 직접 모든 것을 안배하시고 밤낮으로 보살펴주시는데, 이런 보호는 다른 생명들이 감히 조금이라도 바랄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어찌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영원히 사부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수련으로 돌아온 후 저는 대법에 대해 이전에 없었던 소중함을 느꼈습니다. 한 사람이 일단 수련을 시작하면 사부님의 법신이 일대일 또는 다대일로 직접 제자를 보살펴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갑자기 불가사의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자가 무슨 덕이 있고 무슨 능력이 있다고… 때로는 발정념할 때 게으름을 피우려 할 때면, 저는 자신에게 일깨웁니다. ‘이것은 임무나 부담이 아니라, 매번의 발정념 기회는 모두 사부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이다.’
맺음말
평범한 사람은 부호와 귀족을 부러워하고, 귀족은 하늘의 신선을 부러워하지만, 사부님께서는 신들도 모두 대법제자를 부러워한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기회를 잡아 수련하는 것은 실제로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일이니, 망설일 필요가 없습니다.
아직도 실망에 빠져 있는 수련생들이 사람의 마음을 내려놓고 돌아오기를 희망합니다. 관을 넘을 때는 사부님께 가지해주시기를 청하고, 자신을 교란과 ‘가짜 나’가 아닌 사부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게으름 피우고, 도피하고, 포기하려는 어떤 생각에 대해서도 그것이 가짜라는 것을 인식해야 하며, 그것은 폐물이 죽기 살기로 발버둥 치면서 제자를 기만하려 시도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상업(思想業)을 대하듯이 즉시 그것과 자신을 구분하고 배척해야 하며, 그것에게 속아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우리는 책임감 있고, 용감하며, 자비로운 생명입니다. 단지 마음을 굳게 먹고 수련을 견지하며 용맹정진할 수 있는지만 보는 것입니다.
적절하지 못한 곳이 있다면 수련생 여러분께서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원문발표: 2024년 12월 1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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