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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원수로 갚는 중공의 반미·반(反)파룬궁 행태(상)

—중국과 미국의 이야기를 올바르게 말하다

​글/ 하의(何義)

[명혜망] 중공(중국공산당)이 최근 미국 션윈(神韻)예술단과 파룬궁을 대상으로 집중 공격을 가하면서 국제사회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중공이 이번에 파룬궁을 공격하는 이유는 1999년 장쩌민(江澤民) 때와는 다르다. 장쩌민은 순전히 개인적인 질투에서 비롯됐지만, 중공의 이번 목표는 미국을 무너뜨리고 미국을 대신해 세계 제1강국이 되는 것이며, 이 기회를 틈타 파룬궁 박해의 역사적 죄책을 미국에 뒤집어씌우려는 것이다. 즉 중공의 궁극적인 반미 전략의 일환이다.

1. 중공의 두 얼굴의 반미 행태

중공의 반미·증오 정책은 오래전부터 이어져왔다고 할 수 있다. 중공은 미국의 강대함과 민주제도의 우월성을 질투하며, 뼛속 깊이 히스테리적인 증오심을 품고 있다. 전면적인 반미·증오 정책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중공은 오랫동안 중국 민중 속에서 반미 감정을 조장하고 미국을 폄하해왔다. 일부 반미 투사들은 자국민을 상대로 여론전을 벌이면서까지 미국과 미국 국민을 폄하하고 비방하는 데 힘을 쏟았다.

예를 들어 “미국 중산층의 삶은 중국의 농민공보다도 못하다”, “중국의 2천 위안이 미국의 3천 달러보다 낫다”, “미국은 완전히 망했다”, “미국 같은 엉망진창인 곳에 누가 가겠는가” 등 사실을 완전히 왜곡하고 진상을 은폐하는 논조와 기사들이 중국의 여론장에서는 언제나 우세였고 관영 매체의 각광을 받았다.

동시에 중공은 반미 사상을 애국주의로 포장하고 “중미 전쟁은 불가피하다”는 공격적인 논조를 선전했다. 장기간의 세뇌와 주입으로 중국인들은 흑백과 시비를 구분하지 못하게 됐고, 속아 넘어간 ‘샤오펀훙’(小粉紅, 맹목적인 애국주의로 공산당을 추종하는 중국 젊은이들)들은 미국이 ‘중국만 보면 반대한다’거나 ‘미제의 중국 멸망 음모는 끝나지 않았다’고 잘못 인식하게 됐다. 거짓말로 선동된 증오는 폭력으로 이어져 민간에서 ‘의화단’ 사건(1900년 무렵 중국에서 일어난 반외세 운동)이 빚어졌다. 2024년 단오절 당일, 미국 코넬대학교 교수 4명이 지린시 베이산 공원에서 중국인 남성의 흉기에 찔렸다. 이 사건은 국제사회의 강력한 규탄을 불러일으켰지만, 중공 당국은 ‘우발적 사건’이라는 말로 얼버무렸다.

그러나 중공의 반미·증오 정책에는 두 얼굴이 있다. 뼛속 깊은 증오 외에도 다른 속셈이 있는 ‘사랑’도 있다.

트럼프가 제47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중공은 갑자기 대대적으로 미국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미국 동물원이 판다를 학대했다는 거짓말을 퍼뜨린 12명의 샤오펀훙을 체포해 형을 선고했을 뿐 아니라, 주중 미국대사관 웨이보에 있는 반미·증오 댓글을 제거했고, 당 매체는 거창하게 ‘미중 우호 이야기를 잘 전하자’는 공모전까지 벌였다.

이는 중공의 상투적인 속임수로, 이른바 ‘혁명의 양손’ 전술이다. 즉 한 손은 강경하고 한 손은 온건한데, 겉과 속이 다르다. 투쟁철학을 앞세우는 데 있어 공산당이 선구자다. 당내 숙청도 그렇고, 군중운동도 그렇고, 국제무대에서의 외교활동도 그렇다. 지금은 전랑(戰狼, 전투적) 외교가 트럼프라는 철판에 막혀 꼬리를 내리고 우방 행세를 하며 전략적 기만을 시작한 것이다.

‘미중 우호관계’를 말하자면, 역사적으로 미국이 중국을 사심 없이 도운 일화는 많지만, 중공이 미국에 우호적이었던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의 도움과 선의에 대해 중공은 감사는커녕 보답할 줄도 모르고, 오히려 배은망덕하고 은혜를 원수로 갚으며 미국과의 투쟁을 획책했다.

역사를 이해하고 현실을 올바르게 판단하기 위해, 우선 미국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중국을 도왔고 중공에 선의를 베풀었는지 간단히 돌아보자.

2. 미국의 대(對)중국 지원 역사

중공의 거짓된 교과서에서 근대사는 제국주의의 중국 침략사로, 그중에서도 미국이 가장 악랄한 것으로 그려진다. 실제로는 열강의 중국 침략 과정에서 미국이 중국에 가장 적은 피해를 주었고, 오히려 중국이 미국과의 관계에서 얻은 이득이 적지 않았다.

1) 청나라(건륭제) 시기 제2위 무역국: 1784년, 미국의 첫 대중국 무역선 ‘차이나 엠프리스’호가 중국에 도착했다. 이를 계기로 미중 무역의 문이 열렸고 쌍방이 평등하게 이익을 얻었다. 미국인들은 다른 나라보다 중국의 법규를 더 잘 지켰고, 미국은 곧 영국에 이어 중국의 제2위 무역국이 됐다. 중국인들은 이를 통해 많은 금과 은을 얻었다.

2. 청나라(동치제)와의 평등조약: 1868년, 미중은 ‘버링게임 조약’을 체결했다. 앤슨 버링게임(Anson Burlingame)은 당시 미국 링컨 대통령이 중국에 파견한 공사(公使)로, 쾌활하고 중국에 우호적이었다. 당시 많은 중국인이 미국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미국이 중국에 주미 영사를 파견할 것을 요청하자 청나라는 아예 버링게임을 흠차대신으로 임명해 중국을 대표해 각국을 방문하게 했다. 버링게임의 첫 방문국이 바로 미국이었다. 그는 미국에서 연설을 통해 중국 문화를 선양하고 중국의 평화 애호를 칭찬했으며, 중국 정부를 대표해 미국과 협상하여 중국의 이익을 지키면서 ‘버링게임 조약’을 체결했다. 이는 아편전쟁 이후 중국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평등조약이었다.

3. 신축년의 문호개방 원칙: 1901년, 미국은 중국(청나라 광서제)을 대상으로 문호개방 원칙을 제시했다. 당시 러시아, 프랑스, 영국 등 열강이 중국에서 세력범위를 갖고 있었는데, 미국의 문호개방 원칙은 중국의 주권 완전성을 보호했고, 특히 객관적으로 러시아의 중국 동북 지역 침탈을 저지하고 열강의 중국 영토 분할을 억제했다.

4. 배상금을 통한 교육 지원: ‘신축조약’의 배상금 규정에 따라 미국은 7.32%인 약 3천여 만 냥의 은자(원금과 이자 포함)를 받았다. 미국은 이 중 1천여 만 냥을 반환해 교육 사업에 사용하도록 했다. 여기에는 중국 유학생의 미국 유학 파견과 칭화학당 건립이 포함됐다. 1924년(중화민국, 총통은 차오쿤, 황푸, 단치루이), 미국은 2차로 신축 배상금 1천2백여만 달러를 반환했고, 중국은 이를 칭화대학 설립과 당시 극동 최고 수준의 도서관인 ‘국립베이핑도서신관(國立北平圖書新館)’[현 중국국가도서관 고적분관(古籍分館)의 전신] 개설에 사용했다. 1929년, 중국은 배상금으로 47명의 유학생을 미국에 파견했는데, 이들이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후 중공의 ‘양탄(兩彈)’(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에 기여한 전문가들이 많았다. 이 외에도 옌징대학과 베이징협화병원의 설립에도 신축 배상금이 사용됐다.

5. 비호대와 험프 루트: 1941년 7월, 미국의 셰너트 장군은 퇴역군인들을 모아 ‘비호대’를 조직해 중국의 항일전쟁을 지원했다. 당시 중화민국 총통은 장제스(蔣介石)였다. 일본의 중국 전략물자 봉쇄를 뚫기 위해 미국 육군항공대 공수총대(Air Transport Command, ATC)와 중국항공공사(CNAC)는 히말라야산맥을 넘는 험프 루트(Hump Route, 駝峰航線)를 개척했다. 비행 난도가 매우 높아 ‘죽음의 항로’라고도 불렸다. 전후 미국 공식 통계에 따르면, 미국 공군은 험프 루트에서 총 468대의 항공기를 잃었고, 1,579명의 조종사와 승무원이 희생되거나 실종됐다. 비호대와 험프 루트는 중국 항전 승리에 큰 공헌을 했다.

6. 불평등조약 폐지: 1943년, 미국은 중국의 항일전쟁을 격려하기 위해 아편전쟁 이후 중국과 체결한 모든 불평등조약을 솔선해서 폐지했다. 미국의 주도로 영국, 독일, 이탈리아, 일본도 불평등조약을 폐지했다. 이로써 외국 조계지와 영사재판권이 중국에서 사라졌고, 중국(중화민국)은 국제사회의 평등한 일원이 됐다.

7. 마셜의 조정과 트루먼 독트린: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미국은 공산주의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로 인해 중화민국의 주권이 손상됐으며, 소련 공산당이 동북지역에서 많은 우선권을 얻어 중공의 반란에 화근을 남겼다. 1945년 말부터 1946년까지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마셜 장군을 파견해 국공내전을 조정했다. 미국은 국민당군에 대한 군수품 공급을 끊으면서까지 장제스에게 중공과 민주연합정부 구성을 강요했다. 중공은 표면적으로는 화해를 가장했지만, 배후에서는 계속해서 교통을 파괴하고 국민당군을 공격하며 협상을 지연시켰다. 마셜의 조정은 결국 실패했지만, 이로 인해 국민당군은 무장 토벌의 유리한 조건과 시기를 놓쳤고, 동시에 중화민국 경제가 무너지면서 중공이 살아남게 됐다. 1947년, 미국은 전 세계 공산화를 저지하기 위한 트루먼 독트린을 제정했지만, 이 전략은 오히려 의도적으로 중공을 살려뒀다. 태평양전쟁 이래로 스틸웰, 데이비스, 마셜, 트루먼 등 미국 정부 내 친공 인사들은 중공에 대해 환상을 품고 있었고, 중화민국을 견제하고 중공을 편드는 일련의 정책을 추진하여 중공이 중화민국 정권을 탈취하는 것을 방조했다.

8. 유엔 상임이사국: 1945년(중화민국 시기), 미국의 노력과 고집으로 샌프란시스코 유엔 창립대회에서 중공의 대표 둥비우(董必武)가 중국 대표단에 참가해 다른 대표들과 함께 ‘유엔헌장’에 서명했다. 중국(중화민국)이 유엔 창립국이자 5개 상임이사국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공이 컸다.

1971년 7월 9일부터 11일까지(중공 시기), 미국 대통령 국가안전보좌관 키신저가 비밀리에 중국을 방문해 중공국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와 회담했다. 이후 미국은 중화인민공화국(즉 중공국)이 유엔 대표권을 획득하는 것을 수용했다. 같은 해 10월 25일, 유엔은 2758호 결의안을 통과시켜 중공 정부의 대표가 중국의 유엔 유일의 합법적인 대표임을 인정했고, 중화인민공화국은 안전보장이사회 5개 상임이사국 중 하나가 됐다.

9. 닉슨의 방중과 마오·저우 면담, 카터의 중공과의 수교: 1972년 2월 21일부터 28일까지 미국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해 중난하이에서 마오쩌둥(毛澤東)을 만났고, 저우언라이 등과 회담했다. 이 방문은 ‘세계를 바꾼 한 주’로 불리며, 미국 역사상 두 번째 대(對)공산 유화정책의 문을 열었다. 방문이 끝나기 전, 양국은 상하이 공보를 체결했고, 이후 미국은 점차 대만에서 철군하기 시작했다. 1977년, 카터가 백악관에 입성했고, 1981년 퇴임하기 전인 1979년 1월 1일, 미국은 중화민국과 단교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전면적으로 수교했다. 이때는 키신저의 비밀 방중 이후 약 7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미중 수교 이후 양국 관계는 밀월기에 접어들었다. 일본, 호주, 서독 등 미국의 주요 동맹국들도 잇따라 대만과 공식 관계를 단절하고 중공과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이로써 중공국이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고 중화민국이 국제사회에서 배제되는 세계 구도가 형성됐다.

10. 부시 대통령의 대중공 유화 정책: 1989년 중공의 톈안먼 대학살 이후, 미국 부시 정부는 여러 차례 중공을 위해 뒷문을 열어줬다. 예를 들어 특별 면제령을 승인해 보잉사가 중국에 상용기 4대를 판매하도록 허가했고, 군사 제재를 완화했으며, 중국 관리들의 미국 복귀를 허용했고, 중국 전투기의 현대화 계획인 ‘피스 펄(Peace Pearl)’ 계획을 지속했다. 6개월 내에 두 차례나 덩샤오핑에게 서신을 보내고 특사를 베이징에 파견해 미국이 중공과 함께 난관을 극복하길 원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미국은 확실히 중공이 난관을 극복하도록 도왔다.

11. 클린턴의 중공 WTO 가입 지원: 1999년 7월, 중공의 장쩌민이 1억 파룬궁수련자들에 대한 정치적 박해를 시작했고, 각지에서 청원할 곳을 찾지 못한 수련자들은 혼자서 또는 둘씩 짝을 지어 베이징으로 달려가 파룬궁을 위해 공정한 말 몇 마디를 하려 했다. 그러나 오히려 많은 청원 수련자들이 체포·구금됐고, 중공은 10월에 원래 베이징 파룬궁연구회 회원 몇 명을 기소하려 했다. 같은 해 10월, 클린턴은 두 차례나 장쩌민에게 전화를 걸어 중공의 WTO 가입 협의 타결을 희망했다.

2000년 3월, 클린턴은 연설에서 무역과 인권을 분리하고, 중국의 WTO 가입이 경제적 자유를 가져올 것이며 국민들이 더 큰 발언권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클린턴은 백악관에 ‘차이나홀’을 설치해 의회 내 반중 의원들을 설득했고, 5월에는 전직 대통령 카터, 포드와 수십 명의 전직 정치인들을 백악관에 초청해 의회가 중공에 영구적 무역 특권을 부여하도록 승인할 것을 촉구하며 중공의 WTO 가입을 위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미국의 추진으로 2001년 12월 11일, 중공은 공식적으로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했고, 공산주의의 마지막 큰 본거지가 자유 세계 무역 공동체의 정식 회원이 됐으며, 이는 중공의 세계 지배 야망에 매우 중요한 경제 도약의 조건을 제공했다.

(계속)

 

​원문발표: 2025년 1월 14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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