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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베이성 화이라이현 류위수 가족이 당한 박해, 부부 억울하게 사망

[명혜망](허베이성 통신원) 1999년 7월 중국공산당(중공) 장쩌민 집단이 광적으로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 박해를 시작한 이후, 허베이성 화이라이(懷來)현 투무(土木)진의 파룬궁수련자 류위수(劉玉書)의 가족은 더 이상 평안한 생활을 할 수 없게 됐다. 가족들은 반복적으로 납치되고 불법 감금되고 노동수용소에 보내지고 징역형을 받았으며, 두 딸의 행복한 가정도 박해로 파괴됐다. 2023년 11월 중순, 투무 파출소 경찰이 류위수와 니원슈(倪文秀) 부부 등 파룬궁수련자들을 괴롭혔고 며칠 후 니원슈가 불행하게 세상을 떠났다. 2024년 5월 25일, 류위수는 80세의 나이로 억울하게 사망했다.

류위수는 여러 차례 현지 공안국 파출소에 의해 납치되어 현지 구치소에 불법 감금됐다. 2003년에는 불법 노동수용소 수감 판결을 받았으나 고혈압으로 인해 박해 시도가 실패로 끝났다. 2004년 3월에는 현지 공안국에 의해 불법 감금되어 장자커우(張家口)시 세뇌반에서 5년이나 감금됐다가 2009년 3월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 그의 몸은 부어 있었고 기억력이 저하됐으며 집에 가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건강이 점차 악화됐다. 소식통에 따르면 세뇌반에서 박해를 받는 동안 세뇌반 직원이 비밀리에 미상의 약물을 그의 음식에 넣었다고 한다.

류위수는 1944년 11월 12일에 태어나 1996년부터 파룬궁 수련을 시작했으며, 아내 니원슈와 장녀 류차오샤(劉朝霞), 차녀 류차오훙(劉朝紅), 차남 류차오후이(劉朝輝) 모두 파룬궁을 수련했고 온 가족이 심신으로 많은 혜택을 받았다. 1999년 7월 20일 파룬궁 박해가 시작된 후 류위수의 가족은 더 이상 평안한 생활을 할 수 없게 됐고, 그 지역에서 가장 심한 박해를 받은 가정 중 하나가 됐다. 2015년 6월 5일, 류위수 부부는 파룬궁 박해의 주범인 장쩌민을 상대로 법에 따라 형사 책임과 기타 관련 책임을 추궁하기 위해 최고법원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다음은 류위수가 고소장에서 진술한 가족이 당한 박해의 일부 사실이다.

대학생이자 화학 공장 엔지니어인 장녀 류차오샤는 여러 차례 납치되고 감금됐으며, 2년간 불법 노동수용소에 수감됐다. 베이징 구치소에 불법 감금됐을 때는 불법 감금과 박해에 항의하며 단식했다. 그녀가 사경을 헤맬 때 야외에 버려졌다가 행인에게 구조돼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집에 도착했을 때는 얼굴이 완전히 달라져 가족들도 알아보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대법 수련을 하면서 회복됐다. 직장에서는 해고됐고 군 장교였던 남편과는 강요에 못 이겨 이혼했으며, 이렇게 가정이 파괴됐다.

차녀 류차오훙은 박해로 인해 유랑생활을 하며 집에 돌아갈 수도 없게 됐는데, 그후 장자커우에서 납치돼 5년이라는 부당한 형을 선고받았다. 감옥에서 온갖 고문을 당했고 남편과 이혼을 강요당했으며, 언니와 마찬가지로 가정이 파괴됐다.

2000년 10월, 나와 아내, 큰딸 및 다른 수련자들이 현 소재지에서 연공을 하다가 나와 아내 등 4명이 구치소에 불법 감금됐다. 또 한 번은 한 수련자가 현수막을 걸고 진상자료를 배포했다는 이유로 그의 집이 공안에 포위되어 납치됐다. 내가 10여 명과 함께 진상을 알리러 갔다가 경찰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했고 우리는 모두 잡혀갔다. 먼저 구치소로 보내졌다가 향 정부로 이송됐다. 여성 파룬궁수련자들은 한 방에 갇혀 협박을 당했고, 남성 파룬궁수련자 3명은 함께 갇혔는데 악인들이 마음대로 구타하고 고문하고 수동식 전화기로 전기 고문을 가했다. 우리가 비명을 지르자 양말로 입을 막았다.

2001년 양회 기간에 나는 세뇌반으로 끌려가 박해를 받았는데 구타와 욕설이 끊이지 않았고 육체적, 정신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했다. 8개월이 넘어서야 마음에도 없는 ‘3서(三書, 3가지 수련 포기 각서)’를 쓰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2004년 3월, 나는 다시 장자커우 세뇌반(불법 감옥)으로 보내졌는데, 이게 무려 5년이나 계속되어 2009년 3월에야 풀려났다. 5년간의 불법 감금 기간 동안 당한 육체적, 정신적 고문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당시 치아가 대부분 빠졌고 혈압이 200이 넘었기에 세뇌반 측은 책임지기를 두려워해 화이라이현에 데려가라고 통보했지만 몇 달 동안 아무도 오지 않았다. 세뇌반에서조차 화이라이현 610(파룬궁 탄압 전담 기구)은 인간성이 없다고 욕했다.

나의 아내 니원슈는 구치소에 네 번이나 불법 감금되어 총 80여 일을 보냈고, 세뇌반(불법 감옥)에서도 30여 일간 감금되어 육체적, 정신적으로 비인간적인 박해를 당했다.

둘째 아들 류차오후이, 불법적으로 7년 형 선고받아

의사인 둘째 아들 류차오후이도 잔혹한 박해를 당했다. 그는 2000년 10월 1일 천안문 광장에서 대법을 위해 억울함을 호소했다. 11월 어느 날 밤 7시, 화이라이현 투무향에서 7~8명이 와서 가택수색을 했고 그와 부모는 향정부로 납치됐다. 악인들은 수동식 전화기로 류차오후이를 한 시간 넘게 감전시키고 구타했다.

2001년 5월, 화이라이현 투무진 파출소는 근무 중이던 류차오후이를 납치해 파출소에서 심문한 후 어떠한 절차도 없이 현 구치소에 일주일간 불법 감금했다가 석방했다. 2001년 6월, 현 610 사무실은 류차오후이의 직장을 찾아가 현 위생국과 직장 지도부를 협박하여 그의 직무를 정지시키고 생활비로 150위안만 지급하게 했다. 10월이 되어서야 정상 근무가 가능했다. 2001년 12월, 류차오후이는 핍박을 피해 유랑생활을 하다가 ‘무단결근’이라는 이유로 현 위생국에서 해고됐다. 이 기간에 투무진 파출소는 집이 비어 있을 때 침입해 불법 수색을 했고, 나중에 보니 금 장신구와 경태람(景泰藍) 공예품 일부가 도난당했으며 집안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2002년 5월 9일, 류차오후이는 거주지에서 장자커우시 차오둥(橋東) 공안분국 형사경찰 제3중대에 납치되어 구타를 당하며 자백을 강요당했고, 소지품이던 현금 2천여 위안과 안경, 서적, 의류 등을 강탈당했으나 등록이나 반환은 없었다. 2002년 8월 초에는 장자커우시 세뇌반에 납치되어 불법 감금됐고, 2002년 11월 초에는 화이라이현 구치소로 이송됐다.

2003년 8월 25일, 류차오후이는 7년형을 불법 선고받았다. 2004년 1월 초, 탕산시 지둥(冀東) 감옥 제1지대 1중대로 이송됐다. 수감 기간에는 항상 두 명이 감시했고 더욱 심한 신체 구속을 가해 고혈압, 안저 출혈, 오른쪽 무릎 반월판 파열 등이 생겼다. 게다가 2008년 올림픽 전후로는 불법적으로 통신과 면회 권리마저 정지당했으며, 10월에야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원문발표: 2025년 1월 4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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