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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정사에 기록된 불법(佛法) 파괴의 응보

글/ 지청(智淸)

[명혜망] 부처님은 정말 존재할까? 선악의 응보는 정말 있을까? 많은 사람이 의문을 품고 있다. 역사적 기록을 한번 살펴보자. 역사상 ‘법난(法難)’은 주로 네 차례 있었는데, ‘삼무일종의 재앙(三武一宗之厄)’이라 불렸으며 정사인 《이십사사(二十四史: 사기·한서 등, 24가지 중국의 정통 역사서)》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 제1차 법난은 북위 태무제 탁발도(拓跋燾) 시기에 일어났으며, 《위서(魏書)》에 그 전말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북위 태무제 탁발도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모두 불법(佛法)을 매우 경건하게 믿었고, 그런 환경의 영향으로 탁발도 역시 불교에 대해 늘 호감을 가졌다. 하지만 탁발도가 즉위한 후 점차 변화가 생겼다. 사도(司徒)였던 최호(崔浩)는 총명하고 유능했으며, 조정을 보좌해 태무제의 신임을 얻었다. 최호는 천문과 음양 학문에 정통했으나 늘 불법을 차별했으며, 많은 사람이 출가해 승려가 되고 불상을 주조하며 사찰을 짓는 것이 국가 자원의 낭비라고 여겼다.

한번은 장안에서 반란이 일어나 탁발도가 친정(親征)에 나섰는데, 어떤 이가 한 사찰에서 칼과 창 등 무기를 발견했다. 탁발도는 사찰이 반군과 결탁했다고 여겼고, 이때 최호가 “이곳에 재앙이 잠복해 있으니 뿌리를 뽑으셔야 합니다”라고 진언했다. 서기 446년, 탁발도는 사찰과 불상을 파괴하고 승려들을 생매장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최호를 설득하려는 사람들이 나섰다. 그의 의견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관겸지(冠謙之)라는 도가 수련인이 있었는데, 최호는 그를 스승으로 모셨고 이후에 관겸지는 태무제 탁발도의 존경도 받았다. 관겸지는 이후 최호를 찾아간 이야기를 전했다. “간절히 최호와 논쟁했으나 최호는 듣지 않았소. 난 최호에게 말했소. ‘그대는 곧 목숨을 잃고 멸문지화를 당할 것이오.’”

최호의 아내 곽 씨는 불경을 공경하여 늘 독경했다. 최호는 화가 나서 불경을 꺼내 불태우고 재를 화장실에 버렸지만 곽 씨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최호의 일족인 기주자사 최색(崔賾)과 형양태수 최모(崔模)는 불법을 깊이 신봉하여 늘 절을 올렸는데, 최호는 “야만인의 신에게 머리를 숙이고 절을 하는구나”라며 비웃었다. 최색과 최모가 불법의 오묘함을 설명했지만 최호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최호는 우쭐대며 거만했다. 태원(太原)의 관리 몇이 최호에게 아첨하며 그의 비석을 세워주겠다고 했고 최호는 동의했다. 결국 최호의 공적을 담은 《국서(國書)》를 지어 비석에 새겼고, 비석이 세워지자 의론이 분분했으며 소문이 경성에 퍼졌다. 하지만 기록된 내용이 황제의 불만을 샀고 조사를 명하자 최호의 부패 사실이 드러났다. 서기 450년, 탁발도는 최호 일족을 모두 처형하라고 명했다. 오직 최호가 비하하고 조롱했던 최색과 최모 두 집안만이 사형을 면했다. 관겸지의 ‘멸문’ 예언이 과연 실현된 것이다.

최호는 죄수 수레에 실려 대로를 끌려 다녔다. 호송병 10여 명이 그의 머리에 소변을 보았고 길가의 백성들은 수군거렸다. 《위서》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재상급 관리가 처형당한 것 중 최호와 같은 경우는 없었으니, 세상 사람들은 모두 응보의 증거라고 여겼다.” 그는 불경을 태워 재로 만들어 화장실에 버렸는데, 이제 이런 모욕을 당하니 세상 사람들은 모두 불법을 모욕한 데 대한 응보라고 여겼다.

불교에 대한 박해는 6~7년간 지속됐다. 한번은 탁발도가 머물던 궁실이 벼락을 맞아 병풍이 쓰러졌고 탁발도는 거의 깔려 죽을 뻔했다. 이처럼 명백한 하늘의 경고는 하늘이 거듭 그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고 단지 우연한 일로만 여겼다. 서기 452년 봄, 탁발도는 궁중에서 갑자기 죽었는데 겨우 45세였다. 그해 겨울, 새로 즉위한 위고종은 곧바로 불교를 전면 회복시켰다.

역사상 ‘삼무일종’의 북위 태무제 탁발도, 북주 무제 우문옹(宇文邕), 당 무종 이염(李炎), 후주 세종 시영(柴榮)은 불법을 비방하고 파괴해 모두 응보를 받았다. 북주 무제 우문옹은 불법을 폐지하고 이듬해 죽었는데 겨우 36세였으며, 아들은 단명했고 나라는 멸망했다. 당 무종은 불교를 없애고 역시 이듬해 죽었는데, 겨우 33세였으며 자손을 남기지 못했다. 후주 세종 시영은 망치로 불상을 부수고 39세 나이로 병사했다.

사실 네 차례의 법난에서 매번 서로 다른 계층과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이치로 깨우치고 정으로 움직이며[曉之以理,動之以情] 권고했지만, 사람들은 미혹 속에서 자만하여 강권을 가졌다고 제멋대로 할 수 있다고 여기며 불법을 박해했고, 결국 인과응보를 피하지 못했다. 지혜로운 자는 깨어 있고 어리석은 자는 미혹되니, 앞 수레가 넘어진 교훈[前車之鑑]을 살피지 않을 수 없다.

20세기 말, 중화대지에서 또다시 불법에 대한 잔혹한 박해가 벌어졌다. 1999년부터 장쩌민과 중국공산당(중공)은 파룬궁에 대한 잔혹한 탄압을 시작했고, 수백만 파룬궁수련자가 불법 강제노동과 감금, 세뇌, 거주지 감시 등의 박해를 당했으며, 심지어 생체 장기적출까지 당했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선악상보(善惡相報)의 인과율은 변하지 않았다.

사실 박해를 주도하고 추진하고 능동적, 수동적으로 참여한 자들은 지난 십여 년간 일찍이 ‘현세의 응보’로 징벌을 받았다. 명혜망이 2019년 발표한 ‘파룬궁 박해, 19년간 2만여 명이 업보를 당하다’는 통계에 따르면, 1999년부터 2019년 사이에 20,784명이 업보를 당했으며, 여기에는 연루된 친구와 친척 등 4,149명이 포함된다고 지적했다. 겉으로 보면 어떤 이는 반부패에 연루돼 실각했고, 어떤 이는 중병으로 죽었으며, 어떤 이는 교통사고를 당했고, 또 지옥의 온갖 징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가 파룬따파 수련자를 어떻게 대했는지에 따라 그가 받는 응보도 같은 형태일 것이며, 더욱 참혹할 것이다. 불법은 자비롭지만 동시에 위엄도 있는 것이다.

파룬궁수련자들은 간곡히 진상을 알리며 세인들에게 박해에 참여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파룬따파 명혜망 보도에 따르면, 상당수의 판사와 경찰이 총구를 한 치 위로 들어(역주: 상부의 총살 명령에도 일부러 빗맞힌다는 뜻) 자신을 위한 퇴로를 남기고 있다.

하지만 최근 이미 궁지에 몰린 중공과 그 당 수괴가 의지하는 천이신(陳一新) 등이 해외에 ‘파룬궁 타격 업무처’를 설립해 미국의 파룬궁수련자들을 더욱 박해하고 있다. 중공은 파룬궁을 이기고 미국을 이기며 세계를 제패하기 위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고 자만하며 아무도 자신을 관리할 수 없다고 여긴다. 알지 못하는 것은, 역사와 현실의 교훈이 확실히 존재하며, 신께서는 영원히 인간보다 높으시다는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오만하고 거만해도 마찬가지다.

이른바 당사자는 미혹되지만 방관자는 명확히 보이는 법이다. 시인 괴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른 사람의 착오를 인식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자신의 착오를 인식하는 것은 어려운데, 이는 매우 큰 신지(神智)의 깨어남이 필요하다.” 북위의 최호는 죄수 수레에 실려 ‘소리 높여 울부짖었지만’ 세상에는 ‘후회약’(후회를 없앨 수 있는 약)이 없다. 사람은 무엇을 하든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모든 이의 길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원문발표: 2024년 12월 24일
문장분류: 천인(天人)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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