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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후이성 벙부시 여성 엔지니어 량화이위안, 박해 끝에 세상 떠나

[명혜망](안후이성 통신원) 안후이성 벙부시의 79세 파룬궁수련자이자 고급 엔지니어인 량화이위안(梁懷遠)은 2016년 2월 납치돼 무고한 죄명으로 기소되어 불법 판결을 받고 안후이성 여자감옥에 감금됐다. 그녀는 혼자서는 일상생활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박해를 받았고, 가족들이 병보석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에 변호사가 직접 감옥에 가서야 말도 못하고 일어날 수도 없는 상태가 된 량화이위안을 만날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녀를 집으로 데려왔으나 건강이 회복되지 못한 채 2024년 11월 25일 원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중국공산당(중공)이 파룬궁에 대해 20년간 지속해온 박해 속에서 량화이위안은 수차례 불법 가택수색과 구금, 강제노동 등의 박해를 당했고, 심지어 정체불명의 독극물 주사를 맞아 혼절하기도 했으며, 40여 일간 전신이 마비됐다. 당시 성 감옥병원의 천(鎭) 원장은 “량화이위안에게 무산계급(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시하라!”고 고함쳤다. 량화이위안이 2015년 최고검찰원에 장쩌민을 고소하자 벙부시 경찰은 곳곳을 수색하며 그녀를 납치하려 했다. 2016년 2월, 량화이위안은 안후이성 딩위안현에서 파룬궁 진상을 알리다가 납치됐고, 5월에 불법 재판을 받고 형을 선고받았다.

1996년 3월, 량화이위안의 78세 어머니는 여러 가지 질병이 재발해 병원에서도 치료할 방법이 없어 집에서 죽음을 기다리다가 파룬궁을 수련한 후 건강을 되찾았다. 량화이위안은 《파룬궁(法輪功)》을 연속으로 3번 읽고서 오랫동안 이해할 수 없었던 인생의 문제들을 단번에 깨달았다. 빌릴 수 있는 파룬궁 서적을 모두 읽고는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 수련의 길에 들어섰다. 진선인(眞·善·忍)의 요구대로 자신을 단속하여 승부욕과 이기심이 강하던 사람에서 점차 관용과 인내심이 있는 사람이 됐고, 일이 생기면 남을 생각하고 도움 주기를 즐기는 사람이 됐다. 여러 가지 질병도 어느새 모두 나았다.

1999년 7월 20일 중공 악당 장쩌민 일당이 미친 듯이 파룬궁을 박해한 이후, 량화이위안은 중공 당국의 불법 가택수색과 납치, 정체불명의 독극물 주사를 맞고 실신, 불법 강제노동 등의 박해를 수차례 당했고, 현지 파출소와 주민위원회 등의 괴롭힘을 자주 받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으며, 여러 차례 유랑 생활을 강요받아 집이 있어도 돌아갈 수 없었다.

성 감옥병원의 ‘무산계급 독재’ 독 주사

2003년 7월 20일 저녁, 벙부시 ‘610사무실'(장쩌민이 불법적으로 설립한 파룬궁 박해기구)이 각 구 610과 파출소의 협조를 받아 당일 밤 시 전체의 20여 명의 파룬궁수련자 집을 수색하고 납치했다. 량화이위안은 집에서 벙부시 벙산구 610의 장페이제(張培杰) 등 여러 명의 경찰에게 불법 가택수색과 납치를 당해 구치소로 끌려갔다. 혈압이 너무 높아(240/140) 수감이 거부됐으나 경찰 장페이제가 구치소에 억지로 하룻밤 구금하게 한 뒤, 다음날 량화이위안을 성 감옥병원의 천 원장(부원장, 파룬궁 박해 전담)에게 보냈다. 그들은 량화이위안에게 강제로 혈압약을 먹이고, 문과 창문을 모두 철판으로 못 박고 선풍기도 틀지 않은 작은 방에 가둬 놓았다. 한여름 기온이 섭씨 40도였다.

酷刑演示:打毒针(注射不明药物)
고문 재연: 독 주사(정체불명 약물 주사)

7월 30일 오후, 천 씨라는 소위 원장은 여러 경찰과 죄수들 앞에서 량화이위안을 향해 소리쳤다. “시 610에서 사람이 왔다!” 그러고는 구호를 외쳤다. “량화이위안에게 무산계급 독재를 실시하라!” 곧이어 5, 6명의 죄수들이 시멘트 바닥에 누워있던 량화이위안의 팔과 다리를 잡아 철제 침대에 내팽개치고, 그녀의 양손을 각각 침대 선반 모서리에 수갑으로 채우고 두 발을 침대 틀에 묶어 대자 모양으로 만든 뒤, 정체불명의 독약을 그녀의 몸에 주입했다.

몇 분 후 량화이위안의 음부에서 많은 피가 흘렀고 그녀는 혼절했다. 한밤중에 그녀의 혈압이 이완기 0에 수축기는 30mmHg도 안 됐고 심장 박동이 점차 멈췄다. 아마도 직업윤리와 양심의 발현 때문인지 주치의 마오 주임이 자비로 300위안을 내어 벙부의과대학에서 전문의를 긴급히 불러와 구급했다. 수 시간의 구급 끝에 량화이위안은 마침내 죽음의 문턱에서 구해졌다. 하지만 량화이위안의 몸은 완전히 파괴됐다. 2주가 넘도록 눈을 뜨지 못했고 말할 기력도 없었으며, 한 달이 지나서야 겨우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었지만 국수처럼 곧바로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오장육부가 아프고 출혈이 멈추지 않았으며 피가 섞인 소변이 계속됐다. 사지가 마치 찐빵처럼 부어오르고 검게 변했으며 계속 떨렸고, 발바닥에서는 피가 나고 고름이 흘렀다.

상상하기 힘든 것은 이런 상태에서도 두 손은 여전히 장기간 철제 침대 틀에 대자 모양으로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는 점이다. 48일 후 감옥병원에서 나올 때 중공 악당들은 가족들에게 5천 위안의 의료비까지 강제로 내게 했다. 퇴원할 때 량화이위안은 여전히 허약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강제노동과 끊임없는 협박

량화이위안이 감옥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온 후 구(區) 610의 장페이제가 계속 경찰을 데리고 와서 협박하고 괴롭혔다. 주민위원회도 끊임없이 전화로 가족을 협박했다. 파출소 경찰도 상황보고서를 쓰라고 했다. 반년 후 량화이위안의 몸이 아직 회복되지도 않았는데 시 610은 그녀에게 3년의 강제노동을 불법 선고했다.

량화이위안의 어머니는 장기간 끊임없는 가택수색과 친인척의 납치, 투옥, 시 610과 구 610, 주민위원회, 파출소의 지속적인 협박과 괴롭힘의 환경 속에서 살았다. 가족 중 두 사람이 불법 강제노동을 당했고, 결국 장기간의 공포로 인한 심장 확장과 심부전으로 2006년 3월 불행히도 세상을 떠났다.

2006년 5월 12일,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2개월도 채 되지 않았을 때 시 610 경찰 리바이정(李百正)이 신청 공안분국의 경찰 몇 명을 데리고 량화이위안의 집을 수색했다. 아무것도 찾지 못하자 오후 2시에 신청 공안분국에 출두하라고 통보했다. 또다시 박해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경찰이 떠나자마자 량화이위안은 집을 떠나 3개월여간 유랑했다.

2008년 3월 5일 11시, 벙부시의 20여 명의 파룬궁수련자가 동시에 중공 경찰에게 불법 수색과 강탈을 당했다. 주민위원회 주임 진신(金鑫)의 인솔 하에 신청 공안분국 국장 가오펑(高峰)을 필두로 시 610과 구 610, 형사대대의 스융(史勇) 등 10여 명의 경찰이 전용 공구로 쇠문 빗장을 잘라 량화이위안의 집에 들이닥쳐 집 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갓 산 MP4를 빼앗아갔고, 또 그녀의 아들이 공부용으로 가지고 있던 영어 원어판 외국 영화 이야기 비디오테이프 30여 개(아들이 TV 제작 전공)와 재생기도 모두 빼앗아갔다.

당시 63세였던 량화이위안은 납치돼 시 구치소로 끌려갔으나 고혈압으로 331부대 병원 외래로 보내졌다. 두개내압 상승으로 인한 실신과 빈맥 진단을 받았고 위독 통지서가 발부됐다. 구치소에서 수감을 거부해 가족들이 데려왔다. 보름이 지나자 신청구 610의 양 과장과 파출소의 친 경찰이 그녀의 집에 와서 시 610과 정법위원회의 지시라며 강제로 허페이로 보내 1년 반의 강제노동을 시키겠다고 했다. 하지만 허페이 여자 강제노동소에서 신체검사에 불합격해 수용이 거부됐고, 다시 105부대 병원으로 데려가 컬러사진을 촬영한 결과 고혈압과 두개내압 상승, 빈맥 등이 확인돼 결국 한밤중에 벙부로 데려와 집으로 보냈다.

610은 세뇌반을 열겠다고 협박했다. 량화이위안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집을 떠나 유랑 생활을 했다. 2010년 시 610은 사악한 지시를 내려 그녀의 1년치 퇴직금도 지급 중단했다.

불법 판결과 자기관리도 못 할 정도의 박해

량화이위안이 2015년 최고검찰원에 장쩌민을 고소하고 진상을 알리자 벙부시 경찰은 줄곧 곳곳을 수색하며 그녀를 납치하려 했다. 2016년 2월, 량화이위안이 안후이성 딩위안현에서 진상을 알리다가 납치됐고, 5월에 재판을 받아 5~6년형을 선고받았다.

량화이위안은 안후이성 여자감옥의 노약자 감방에 불법 감금됐다. 혈압이 높아 병원에서 관찰하는 동안 그녀는 병실의 다른 수감자에게 말했다. 구치소에서 연공한다는 이유로 의자에 묶인 채 옷이 벗겨져 속옷만 입은 상태에서 양손이 들려진 채 남자 경찰들이 둘러싸고 보며 웃었다고 했다. 그녀는 당한 모욕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고 수치심으로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감옥은 줄곧 불법적으로 가족의 면회 권리를 박탈했다. 량화이위안의 딸은 여러 차례 감옥에 면회를 요구했으나 감옥은 거절했다. 감옥은 사람이 감옥에 없으니 감옥병원에 가서 만나보라고 했고, 감옥병원은 감옥의 동의가 있어야 만날 수 있다고 했다. 감옥과 감옥병원이 서로 책임을 미루는 바람에 타지에서 온 량화이위안의 딸은 1년이 넘도록 여러 번 갔지만 만날 수 없었다. 어머니의 신체와 정신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고 심지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2019년 7월이 돼서야 가족이 선임한 변호사가 다시 감옥에 가서 합법적인 면회를 요구해 몇 차례 교섭 끝에 마침내 감옥병원에서 수년간 만나지 못했던 어머니를 만났다. 딸은 눈물이 쏟아졌다.

량화이위안은 감옥병원에서 몇 명의 수감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침대에 누워 전신을 움직일 수 없었고 언어 기능도 상실해 겨우 눈을 깜빡거려 딸에게 인사할 수 있었다. 딸이 우는 것을 보고 량화이위안은 손으로 딸을 쓰다듬어주고 싶어 말을 듣지 않는 팔을 힘껏 들어올리려 했지만 결국 딸에게 닿지 못했다.

량화이위안은 코에 관이 삽입돼 경관 영양을 공급받고 있었고 연하 기능이 상실돼 도뇨관을 삽입했으며, 눈만 움직일 수 있고 사고는 있었지만 다른 신체 부위는 자율적으로 움직일 수 없고 마비돼 있거나 기능이 상실됐다. 이런 증상은 이전에 독약을 주사했을 때의 상태와 매우 비슷했다. 감옥에서 주사를 맞았는지는 감옥만이 알 수 있다.

이런 상태인데도 감옥병원은 어떤 치료도 하지 않고 단지 경관 영양으로 목숨만 유지하게 했고, 수감자들을 시켜 대소변을 받게 하고 보살피게 했다. 감옥도 합리적이고 합법적인 설명을 하지 않았다. 변호사가 다시 서면으로 병보석 신청서를 제출하자 감옥 경찰은 절차대로 진행하고 감옥 지도부에 신청하겠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량화이위안은 마침내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녀의 건강은 끝내 회복되지 못한 채 2024년 11월 25일 원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량화이위안이 당한 박해에 관해서는 명혜망 기사 ‘안후이성 벙부시 여성 엔지니어가 중공의 잔혹한 박해를 당한 경험’, ‘안후이성 벙부시 고급 엔지니어 량화이위안이 장쩌민 고소’, ‘안후이성 여성 엔지니어, 불법 판결 받고 아버지 원한 품고 세상 떠나’ 등을 참조하기 바란다.

 

원문발표: 2024년 12월 15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4/12/15/48612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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