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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인의 ‘믿음’이란 무엇인가

글/ 쓰촨성 대법제자

[명혜망] 믿음은 수련인으로서 수련할 수 있는 기초입니다. 기본적인 믿음이 없다면 이 법문에 들어설 수도 없을 뿐더러, 수련 중에 난(難)을 만났을 때 정념으로 고비를 돌파하는 것은 더욱 말할 것도 없습니다. 최근 제 머릿속에 갑자기 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는데, 저는 제가 이전에 속인 중의 믿음과 수련인의 믿음이 무엇인지 전혀 구분하지 못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먼저, 속인의 믿음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속인이 어떤 일을 믿으려면 반드시 먼저 보고 듣고 사고한 후에 결론을 내리는데, 이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논리입니다.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보는 것이 진실이라는 것은 속인 사회 이 층차에서는 틀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수련인은 모두 알고 있듯이, 속인의 후천적으로 형성된 관념이 이미 사람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어서 사람의 사유 판단이 최종적으로 어디에서 나오는지, 사실 본인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제가 관찰한 바로는 절대다수의 판단은 후천적 관념이 통제하거나 그것에 영향받아 나온 것입니다.

수련인이 때때로 법으로 자신을 대조하지 않는다면 속인과 아무런 차이가 없어서 극히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신구의(身·口·意)를 알고 있는데, 사상 속에 바로 이런 습관적 관념이 있다면, 어떤 일을 할 때 이 습관적 관념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1. 제가 이해하는 수련인의 ‘믿음’

아마도 많은 수련생과 다를 수 있는데, 저는 수련을 시작한 이래로 몸의 ‘증상’이 단지 법공부와 연공에만 의지하자 별로 큰 개선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효과가 좋지 않네?’ 자연스럽게 법에 대해 의심이 생기고, ‘믿음’이 일단 느슨해지면 오래되면 속인과 같아지고 심지어 속인보다도 못하게 됩니다.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 같습니다. ‘내가 이렇게 오래 연공했는데도 병이 낫지 않았는데 내가 왜 믿어야 하지?’

제가 기억하기로는 교류문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20여 년을 수련하고 모두들 비교적 정진했다고 생각하며, 많은 박해도 겪었던 한 오랜 수련생이 ‘병’이 위중하여 죽음에 이르렀을 때, 오히려 그를 방문한 수련생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수련하는 이 법이 도대체 진짜인가?!” ‘병업’의 표현은 다른 난과 다르며, 그것은 사람의 믿음과 불신의 근본을 직접적으로 이끌어냅니다. 다른 난, 예를 들어 사악의 박해를 받거나 생활이 곤란하거나, 혹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찰 등은 모두 쉽게 의식 속에서 소업(消業)이나 시험으로 귀결될 수 있어서 주변의 가족에게 말해주면 그들도 아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장기간의 ‘병업’은 자신의 신념을 갉아먹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필연적으로 가족과 주변인들의 신념도 갉아먹어서, 그들은 심지어 대법을 지지하다가 불신이나 증오로 바뀔 수 있습니다.

수련인이 이런 마장(魔障)에서 벗어나려면 제 생각에는 오직 속인의 믿음을 초월해 인식해야 합니다. 수련인의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반드시 자아를 초월하여 완전히 ‘나’를 참고하지 않고, 오늘 ‘내’ 신체에 어떤 문제가 생기더라도 모두 법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고, 근본적으로 그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좋지 않은 신체반응이 일단 나타나도 마음속에 전혀 파문이 일지 않고, 자연스럽게 사부님이 계시고 법이 있으니 두려움도 놀람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나’, 즉 신체에 대한 집착을 초월할 수 있습니까? 수련인은 마땅히 보아야 하는데, 대법이 널리 전해진 32년 동안 주변의 수많은 수련생이 질병에 시달리다가 병 없이 몸이 가벼워진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신체가 어떠하다고 해서 전부를 부정해서는 안 되며, 사부님께서는 시종일관 우리에게 안으로 찾으라고 하셨고, 이것이 분명 자신의 문제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하며, 사부님께서는 매 제자를 모두 평등하게 대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공이 있던 영은사(靈隱寺)에서는 당시 아마도 제공이라는 이런 한 고인(高人)만 나왔을 것이고 다른 스님들은 모두 수련 성취하지 못했는데, 그렇다고 석가모니 부처님이 전하신 법이 거짓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단 한 사람이 수련 성취하고 다른 만 명이 모두 수련 성취하지 못했다 해도 그것은 진실한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각종 원인으로 인해 중의학이 이름만 남고 실체는 없어져서 절대다수의 중의사가 병을 치료하지 못하는데, 그렇다고 중의학이 거짓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저는 일찍이 직접 몇몇 중의학의 절기(絶技)를 목격했는데, 정말로 죽었다 살아나고 약을 써서 병이 나았습니다!

2. 생생세세 쌓인 업과 구세력 배치

동시에 사부님께서도 우리에게 알려주셨는데, 생생세세의 채권자 중에는 선해(善解)하려 하지 않는 이도 있어서, 그래서 일부 대법제자들이 장기간 ‘병업’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으며, 이런 인연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직 주의식(主意識)이 강하고, 이리저리 생각하지 않으며, 심지어 사부님을 의심하거나 대법을 의심하지 않고, 시종일관 사부님께서 어떤 제자도 포기하지 않으실 것이며,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것이 반드시 가장 좋은 것이라고 굳게 믿어야 합니다. 오직 법의 요구대로 하고 무슨 결과를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생각해서 될 일이 아니며, 우리가 생각하면 그것은 단지 집착일 뿐이어서 조금도 좋은 점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병업’ 고비 초기에는 이 한 층의 법에 대한 이해가 그리 깊지 않아서 마음속으로 늘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아, 나는 오늘 법을 얼마나 배웠는가, 나는 또 자신의 집착을 얼마나 찾았는가, 나는 오늘 갈등을 어떻게 대했는가, 나는 계속 잘 수련하고 있는데 내 신체는 왜 회복의 기미가 없지?’ 오래되면 올라오지 못하면 또 위험으로 나아가서 또 대법과 사부님을 의심하기 시작하는데, 이렇게 하면 이 난관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평소에 늘 다른 사람들에게 선(善)을 권하지 않습니까? 선악은 보응이 있다고 알려주는데, 보응이 없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나쁜 일을 하면서 말합니다. “왜 나는 벌을 받지 않지? 보응이 없는 거 아니야?” 우리가 생각해보면, 만약 우리가 무엇을 좀 하고는 무슨 보답(예를 들어 몸이 좋아지는 것)을 바란다면, 그 심성이 속인 층차로 떨어진 것이 아닙니까? 저는 일찍이 단장취의(斷章取義)하여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당신의 心性(씬씽)이 제고되어 올라오면 당신의 신체에 곧 큰 변화가 일어날 것”(전법륜)이라는 말씀에 집착했었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좀 하기만 하면 심성이 제고됐다고 여겼는데, 지금 보니 모두 추구하는 마음이고 모두 자아에 대한 집착이었습니다.

맺음말

진정한 수련인의 ‘믿음’으로 자아를 내려놓는 것은 말하기는 쉽지만, 수련인이 진정 관을 넘을 때는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 신체가 견디기 힘들 정도의 격렬한 반응, 심지어 정상적으로 법공부하고 연공할 수 없고 심각할 때는 정상적인 생활조차 할 수 없으며, 거기에다 가족의 이해하지 못함까지 더해져서 육체와 정신의 이중 고통이 따릅니다. 이럴 때는 사실 오직 수련인의 ‘믿음’으로만 걸어올 수 있습니다.

단지 제 자신의 경험과 견해로써 이런 유의 난을 아직 겪지 않은 수련생에게 참고와 경계가 되기를 바랍니다.

개인의 층차가 한정되어 있으니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롭게 지적해주시길 바랍니다.

 

원문발표: 2024년 12월 1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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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4/12/10/48594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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