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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빼앗으려는 병업 고비 중에서도 신체를 포기하지 말라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적지 않은 수련생들, 특히 나이 든 대법제자들이 수련의 길을 끝까지 걷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 원인에는 구세력의 배치와 박해가 있고, 세상을 떠난 수련생 본인의 원인도 있습니다. 제가 본 것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지만 목숨을 빼앗으려는 병업 고비 중에서 정념으로 관을 돌파하지 못하고 신체를 포기한 것이 그 원인 중 하나일 수 있습니다.

병업 중에서 어떤 수련생은 고통을 견디지 못해 어쩔 수 없이 포기했고, 어떤 수련생은 나이가 많으니 죽으면 죽는 거라고 생각했으며, 어떤 수련생은 “사부님께서 구해주시지 않았다면 이미 제 뼈마저도 썩어 없어졌을 텐데”라며 만족해하며 떠났고, 어떤 수련생은 사람의 몸이 죽어도 원신(元神)은 죽지 않음을 알고 태연히 떠났으며, 어떤 수련생은 박해로 죽은 이들도 원만한다는 것을 알고 층차에 연연하지 않으며 구원만 되면 된다며 평온히 눈을 감았고, 어떤 수련생은 일부 고비를 잘 넘기지 못하자 자포자기하여 비통한 심정으로 떠났으며, 어떤 수련생은 가족에게 묘지와 수의를 사게 하고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경우는 적어도 이 문제에 있어서는 자신을 수련인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의 사명을 잊은 것으로, 그 교훈이 매우 뼈아픕니다. 특히 병업 고비에 직면한 수련생들은 이를 거울삼아 경계해야 하므로 이에 대한 저의 몇 가지 생각을 수련생들과 교류하고자 합니다.

1. 제가 법에서 이해한 바로는, 신체의 죽음을 올바르게 대해야 합니다. “살아 바라는 것 없고 죽어 애석할 것 없네”(홍음-무존)는 사부님께서 수련인에게 요구하시는 것이자, 수련인이 생사를 초연히 대하는 태도입니다. 대법제자들은 대법을 수호하고 사부님의 중생 제도를 돕기 위해 생사를 담담히 보지만, 생사를 담담히 본다고 해서 생명을 가볍게 보거나 구세력이 목숨을 빼앗고 박해하도록 방임하는 것은 아닙니다.

2. 제가 법에서 이해한 바로는, 파룬따파(法輪大法) 이 법문에서 인체는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찬 악취 나는 몸뚱이가 아니라 신의 걸작이며, 최후에 사람(신)을 구하는 데 쓰입니다. 신체가 없으면 법을 얻어 수련할 수 없습니다. 윤회 중에 천 년에 한 번 얻기 어려운 사람의 몸을 우리는 얻었고, 억만년에 한 번 만나기 어려운 정법을 우리는 만났습니다. 어찌 신체를 지키며 잘 수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3. 제가 법에서 이해한 바로는, 대법제자는 구세력의 배치와 박해를 결코 인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구세력은 미혹을 깨뜨리지 않는다는 구실로 대법제자를 평범한 사람처럼 늙고 병들어 죽게 하고, 심지어 감히 사부님의 표면을 향해 손을 대기까지 했습니다. 사부님과 대법제자는 박해를 반대하며, 우리는 오직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길만 걸어갑니다. 병업 고비 중에서 목숨을 걸고 정념으로 관을 돌파하지 않고 신체를 포기한다면, 그것은 구세력을 인정하고 협조하는 것이 아닙니까? 구세력이 육신을 빼앗는 것과 수련자가 스스로 육신을 포기하는 것은 별개의 일입니다. 우리가 사부님께 서약한 그 순간부터 우리의 생명은 더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대법에 속하게 됐습니다. 우리에게는 생명을 포기할 권리가 없습니다. 생명을 포기하는 것은 서약을 파기하고 사명을 저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생을 구하고 소멸시키는 정사(正邪) 간의 대전에서 우리가 당장은 많은 일을 하지 못할지라도, 우리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광명이요, 아름다움이요, 자비요, 순정한 정에너지로서 사람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4. 제가 법에서 이해한 바로는, 신체를 지킴으로써 대법을 실증할 수 있습니다. 파룬따파는 성명쌍수(性命雙修)이므로, 많은 사람의 육신이 죽는다는 것은 대법을 실증하는 데 불리하지만, 수련자가 표면상 모두 무병무사하거나 불로불사한다면 그것은 미혹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구세력이 대법제자의 신체를 빼앗는 것은 그것들이 대법을 파괴하고 대법제자를 박해하는 악이기 때문입니다. 수련생이 정념으로 고비를 돌파하지 못해 있어서는 안 될 신체의 사망을 초래한다면 그것은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미혹 속에서 수련하는 우리는 생명으로만 갚을 수 있는, 풀 수 없는 사망의 매듭이 있는지 알 수 없으므로 자신을 사부님께 맡기고 절대로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부님의 안배가 우리의 수련 제고에 가장 좋은 것임을 믿습니다.

5. 제가 법에서 이해한 바로는 수련자는 굳센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대법은 끝없는바(大法無邊), 당신의 그 마음에 의거해 수련해야 하며, 당신이 얼마나 높이 수련할 수 있는가는 완전히 당신의 인내력과 고생을 견뎌내는 능력에 달렸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질병과 고통을 포함해 남들이 견디지 못하는 것을 견뎌내야 합니다. 삶이 죽음보다 못한 지경에 이르기 전에 누가 쉽사리 생명을 포기하겠습니까? 삶이 죽음보다 못하다는 것은 고통과 절망 속에 있는 속인의 느낌과 관념입니다. 수련자의 생명이 사부님, 대법과 함께하고 사람을 구하고 구원받으며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숨이 붙어있고 주의식(主意識)이 깨어있는 한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6. 제가 법에서 이해한 바로는, 감당한 만큼 얻게 됩니다. 고통은 곧 업력을 없애고 덕을 쌓으며 공이 자라나게 하는 좋은 일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대근기인(大根基人)이어서 사부님께서 난도를 높이신 것일 수도 있고, 우리 배후의 생명을 위해 감당하고 있을 수도 있으며, 우리가 보호하고 구해야 할 이들이 너무 많아서일 수도 있고, 우리가 구한 이들이 가져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든 고통의 순간, 인내의 순간은 박해에 맞서고 중생을 성취시키며 위덕을 수확하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7. 제가 법에서 이해한 바로는, “좋고 나쁨은 사람의 일념(一念)에서 나오며”(전법륜), 우리가 병이라 여기지 않으면 병이 아니고, 할 수 있다고 여기면 할 수 있습니다. 그 난관도 우리가 생각하기에 달렸으며, 진정한 대법 수련자에게는 병이 없습니다. 하물며 우리에게는 사부님도 계시고 법도 있으며 다년간의 수련 기초도 있습니다. ‘우리는 원래 신이었다’에서 송광명은 생체 장기적출 수술칼 아래서 ‘나는 죽을 수 없다, 아직 할 일이 많다’는 일념(一念)으로 생사가 역전되어 장기 수혜자는 죽었지만 그는 살아났습니다. 이를 단순한 이야기로만 보지 마십시오. 대법제자의 정념이 나와 상황이 반전된 일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8. 제가 법에서 이해한 바로는, 자신이 추구하는 것은 누구도 관여하지 않습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이 우주 중에는 이런 이치가 있다. ‘당신 자신이 구하는 것은 누구도 상관하지 않으며, 당신 자신이 가지려 하면 누구도 상관하지 않는다.’ 나의 법신이 당신을 저지할 것이고, 당신을 점화(點化)해 줄 것이지만, 당신이 늘 이런 것을 보고는 당신을 더는 상관하지 않는다.”(전법륜) 수련생이 병업 고비 중에서 일단 넘기기를 포기하고 죽으려 한다면, 사부님께서 관여하실 수 없고 관여하실 수도 없어서 구세력이 틈을 탈 기회가 생깁니다. 일단 그들 손에 들어가면 우리가 어찌 사부님의 고도(苦度)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겠습니까? 우리의 억만년 기다림에 어떻게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구원을 기다리는 중생들에게 어떻게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9. 제가 법에서 이해한 바로는 안으로 찾아야 합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악이 어떻게 미쳐 날뛰든지, 당신이 만약 결함이 없으면 그것은 감히 당신을 건드리지 못한다.”(각지 설법14-대법홍전 25주년 뉴욕법회 설법) 결함이란 사람마음, 집착 아니겠습니까? 꼭 무슨 큰 문제가 아니라도 아주 작은 일이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고 대법제자의 상태에 부합하지 않아도 안 됩니다. 작은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진지하게 수련하지 않으면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작은 문제와 큰 문제를 가늠하는 기준은 사람의 마음이나 생각이나 정이 아닌 대법입니다. 예컨대 나태함, 속인 일 중시, 게으름, 식탐, 게임에 집착, 자손에 대한 집착 등은 속인 중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수련 중에서는 문제가 됩니다. 특히 경사경법(敬師敬法)에서는 조금의 소홀함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최후 시기의 중국인들은, 대법제자를 포함해 존비(尊卑)를 구분하는 마음과 경외심이 부족합니다. 경사경법은 단순히 공양하고 절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대법서적이나 사부님 사진을 더럽고 난잡한 곳에 아무렇게나 두거나 숨기고, 법공부하기 전에 손도 씻지 않고, 법공부할 때 옷차림이 단정치 않고, 다리를 꼬고, 가려워서 긁적이며, 대법 책을 향해 기침하고 재채기하면서 입과 코를 가리지 않고, 병업으로 힘들어하며 책을 보면서 일그러진 표정을 짓는 등… 대법책의 매 글자는 모두 사부님의 법신(法身)이고 사부님의 법신은 곧 사부님이신데, 사부님 면전에서 감히 이렇게 무례하고 방자해서야 되겠습니까?

10. 제가 법에서 이해한 바로는, 법을 많이 배우고 잘 배워야 합니다. 성심을 다해 추구함이 없어야 합니다. 법 학습이 따라가면 심성도 제고되고 신체 표면의 변화도 따라올 것입니다. 최근 2년간 저는 우리 지역의 연로한 수련생들 중 일부가 법공부를 적게 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전법륜’ 외의 대법서적은 보지 않거나 거의 보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전법륜’만 보고, 어떤 이들은 ‘전법륜’조차 거의 보지 않습니다. 법을 배울 때 문장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어떤 단락은 표면적 의미조차 이해하지 못합니다. 지식 수준이 낮은 문제도 있어서 더욱 법공부를 적게 합니다. 단체로 법을 배울 수 있다면 이런 문제들은 많이 줄어들 것입니다.

11. 제가 법에서 이해한 바로는, 연공을 강화해야 합니다. 파룬따파는 성명쌍수(性命雙修)이므로, 수련도 해야 하고 연공도 해야 합니다. 연공은 공능을 가지(加持)하고, 본체(本體)를 개변하며, 각종 생명체와 술류의 것을 연화(演化)할 수 있습니다. 원만할 때는 육신의 변화도 따라가야 합니다. 어떤 노년 수련생들은 연공을 게을리하여 새벽 연공을 견지하지 못하고, 시간이 있어도 보충하지 않거나 완전히 보충하지 않습니다(저도 그랬는데 지금 바로잡고 있습니다). 동작이 심하게 변형된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병업으로 세상을 떠난 한 노년 수련생은 포륜(抱輪)을 해도 파룬궁수련생인지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여건이 되는 분들은 수련생들과 함께 사부님의 공법 교육 비디오를 보면 좋겠습니다. 동작이 비교적 정확한 분들이 수고스럽더라도 도와서 바로잡아주시는 것도 좋습니다.

12. 제가 법에서 이해한 바로는, 발정념을 중시하고 구세력이 우리의 신체에 가하는 모든 박해를 단호히 부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세력이 이용하는 벌레 등 미세한 것들, 먼지처럼 우리의 몸과 사상을 덮고 있는 잡다하고 반드시 도태될 썩은 것들을 깨끗이 청리(淸理)하지 않으면 우리의 수련은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심각한 병업은 세 가지 일을 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뺏깁니다. 이것들은 매우 사악하지만 또한 매우 나약하여, 우리가 정념이 충족하고 엄숙하게 대하면 일념으로도 제거할 수 있습니다.

13. 제가 법에서 이해한 바로는, “해내어야 수련”[홍음-착실한 수련(實修)]입니다. 저는 지금은 세상을 떠난 두 노년 수련생이 고비 중에 한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누구나 고비를 겪지 않습니까? 겪는 사람과 겪지 않는 사람의 느낌은 다르지만, 법리는 같으며 깨달을 수 있는 데까지 해내면 됩니다.”

저는 70대인데, 1996년 법을 얻은 후 2019년까지 병 없이 온몸이 가벼웠으며, 체력과 활력이 18~20세 때보다도 더 좋았습니다. 2020년 가을 이후 사부님의 보호 아래 세 차례나 목숨을 위협하는 병업의 큰 고비를 정념으로 돌파했습니다. 2022년 5월 이후 시력이 갑자기 0.01로 떨어져 한 자(30cm) 밖의 사람은 자녀와 손주, 자매들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됐습니다. 그러나 다른 책은 볼 수 없지만 법은 배울 수 있었습니다. 사부님의 자비로우신 보살핌 덕분에 법을 배울 때는 대법의 매 글자가 1cm 크기로 확대되어 보입니다. ‘전법륜’이 16절판만큼 크게 보입니다. 저는 지금 즐겁게 관을 돌파하고 있습니다. 제 피부는 눈처럼 하얗고 안색은 분홍빛이며 진주 같은 광택이 나고 주름이 없으며 목주름도 없습니다. 체형도 비만이 사라지고 균형 잡혔습니다. 이는 대법의 기적입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마(魔)가 대법제자를 괴롭힐 수 있는 것은 당신이 보지 못하고 당신 자신이 방법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인데, 그것은 이 빈틈을 파고든다.”(각지 설법15-2018년 워싱턴DC법회 설법)

작년에 이 법을 배우면서 저는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사부님, 정말 그렇습니다.’ 올해 다시 이 법을 배우면서 크게 깨달았습니다. ‘마(魔)야, 내가 너를 볼 수 없어도 사부님께서 내게 알려주셨다. 나에게는 사부님도 계시고 법도 있는데 내가 널 두려워하겠느냐?! 능력이 있다면 나와서 내게 보여라, 내가 너를 멸하리라!’ 순간 전신의 털이 곤두섰지만 마음은 반석과 같았습니다. 정법 구결을 외우자 온몸이 가벼워지고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어찌할 수 없음이 마가 저를 어찌할 수 없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정념이 충만하자 마는 정말로 놀라 달아났습니다.

이상은 현 단계에서의 약간의 깨달음이니, 법에 부합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바로잡아주시기 바랍니다.

 

원문발표: 2024년 11월 1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4/11/14/48499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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