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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도 자아를 내려놓는 과정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지금도 수련생들 중에서 명백한 안전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내 생각을 조금 말하고자 한다. 부적절한 부분이 있다면 수련생 여러분께서 지적해주시기 바란다.

10여 년 전, 나는 전화 도청에 대해 그런 일이 있다는 정도만 알았고 유선전화는 전화선을 뽑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휴대폰 도청에 대해서는 전원만 꺼두면 도청이 안 된다고 잘못 알고 있었다.

한번은 긴급 상황이 생겨 몇 년간 연락하지 않았던 수련생을 찾아가야만 했다. 만나서 수련생이 휴대폰을 가지고 왔는지 물었고, 나는 일찍 전원을 껐다고 했더니 수련생이 배터리를 빼라고 했다. 속으로 조금 꺼림칙했지만 바로 그대로 했다. 그 후 안전 문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접촉했던 경찰이 감시가 얼마나 쉬운지 알려준 데다가, 직접 휴대폰이 사악한 세력에 의해 원격 조종된 경험도 있어서 안전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게 됐다. 사부님께서 휴대폰 안전에 관해 설법하신 것을 공부한 후에는 더욱 이성적이고 엄숙하게 안전 문제를 대하게 됐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더 잘 알게 됐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휴대폰을 들고 수련생을 찾아간 것은 명백한 안전 문제였다. 그 이유는 내가 이것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알게 된 후 주의해야 할 때도 마음속으로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그 ‘꺼림칙함’을 자세히 보니 휴대폰 배터리를 빼는 것이 너무 귀찮아서 하기 싫었던 것과, ‘전원만 꺼두면 된다’는 잘못된 관념 때문에 이것이 쓸데없는 짓이고 전혀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반감과 저항감이 생겼던 것이었다. 그 이면에는 사실 ‘내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면 안전하고, 내가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만 안전하지 않다’는 것, 즉 자신의 인식을 고집하는 것이 있었다.

그때 주변 수련생들이 안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때의 표현을 보면, 어떤 수련생은 처음에는 휴대폰 도청을 중시하지 않다가 박해를 당한 후에는 휴대폰로 도청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매우 경계했는데, 환경이 느슨해지자 다시 휴대폰 안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휴대폰 곁에서 민감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주의하지 않게 됐다. 또 어떤 수련생은 전화로 민감한 내용을 말하면서도 사악이 다른 뜻으로 이해할 것이라고 고집했다. 또는 밖에서 진상을 알리는 일을 할 때의 어떤 행동이나 표현이, 박해에 참여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인이 봐도 행동이 이상해서 의심을 불러일으킬 텐데도 수련생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다.

이런 것들의 이면에도 ‘내 생각이 맞다고 고집하면서 내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만 하고, 필요 없다고 여기는 것은 하지 않는다’는 마음이 있었다. 법으로 대조해보니, 명백한 안전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이면에는 두 가지 주요한 원인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는 ‘정(情)’ 때문이다. 일을 할 때 사람의 정에서 출발하여 이것을 하고 싶고 저것은 하기 싫고, 이렇게 하고 싶고 저렇게는 하기 싫어하며, 정에서 파생된 각종 집착심으로 인해 이런 사람마음의 지배를 받고 집착에 이끌려 이렇게 저렇게 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안전 문제에서 법을 기준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 정과 사람 마음의 집착으로 판단하고 결정하게 된다. 또 하나는 자아를 고집하고 자아를 중심에 두어 자신의 인식이나 상상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그럼 자신이 안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면 곧 안전 문제가 없다고 여기게 되어, 안전 문제를 대할 때 실제 상황에 근거해 이성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아는 것이나 상상하는 상황에 근거해 하게 된다. 예를 들어, 휴대폰와 위챗 등의 소프트웨어가 사악에 의해 쉽게 감시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거나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을 때는, 휴대폰나 휴대폰 소프트웨어로 수련생과 연락하는 것이 안전 문제가 없다고 단정 짓고 감히 그렇게 한다. 또 자신의 ‘은어’는 사악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고 자부하거나 사악이 자신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라고 스스로 상상하면서, 실제로는 그 ‘은어’가 사악이 들으면 바로 무슨 뜻인지 알 정도로 이미 명백하고, 그런 행동을 사악이 보면 바로 진상자료를 교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정도인데도, 여전히 자신이 하는 말과 일을 사악이 전혀 모르고 자신은 매우 안전하다고 여긴다.

이 두 가지 원인은 사람들이 명백한 안전 문제에 직면했을 때 이것이 안전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해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만든다. 이럴 때는 이면의 원인을 감추기 위해 흔히 ‘정념이 강하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정념은 대법에서 나오는 것인데, 사부님 말씀을 듣지 않고 법의 요구대로 하지 않는데 그것이 정념이겠는가? 이는 내게 동화 이야기 ‘황제의 새 옷'(벌거벗은 임금님)을 떠올리게 한다. 이야기 속의 황제는 자신이 화려한 새 옷을 입고 황제의 화려함과 위엄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주위 사람들 눈에는 전혀 다른 광경이었고, 실제 상황은 황제의 느낌과 정반대였다. 사실 수련생이 명백한 안전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본인은 아마도 자신이 두려워하지 않고 정념이 강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다른 대법제자들이 법으로 가늠해보면 당신이 이성적이지 못하고 법에 있지 않다는 것을 명백히 볼 수 있으며, 박해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뒤에서 당신을 비웃을 정도다. 그래서 대법제자는 안전 문제에서 자신의 상상대로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상상이 실제 상황과 같지 않을 수 있고, ‘자아’의 인식은 사악에게 아무런 효과도 없다. 오직 법에서 이성적으로 대해야만 진정으로 자신과 수련생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고, 진정으로 자신과 수련생, 중생에 대해 책임지는 것이다.

이런 여러 해 동안 안전에 주의를 기울이는 과정에서 나는 또 깨달았다. 안전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겉보기에는 몇 가지 표면적인 행동을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수련과도 관계가 있다. 예를 들어 휴대폰 배터리를 빼거나 도청을 방지하기 위해 휴대폰을 다른 곳에 두려고 궁리하는 것이 휴대폰을 신경 쓰지 않는 것보다 분명히 더 신경 쓰이고 수고스러운데, 이면에는 안일심과 귀찮아하는 마음,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당문화가 있다. 또 자료점에 갈 때 휴대폰을 가져가지 않으면 가족들이 이해하지 못할까 걱정된다든가 하는 여러 가지 우려가 있는데, 이면에는 모두 사람의 정과 사람의 이치가 있다.

다시 말해서, 안전 문제에 직면했을 때는 이면의 사람마음이 드러나게 되는데, 이때 사람마음의 말을 들을 것인가, 아니면 사람마음을 포기하고 사부님 말씀을 들을 것인가? 자신의 인식을 고집할 것인가, 아니면 ‘자아’를 포기하고 법 위에서 이성적으로 인식할 것인가? 이 모든 것이 자신을 수련하는 과정이다.

 

원문발표: 2024년 11월 1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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