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구술, 수련생 정리
[명혜망] 저는 1960년대 말에 작은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집안 형편이 괜찮아서 어려서부터 고생을 모르고 자랐고, 성인이 되어서는 대형 주류 공장에 취직했습니다. 20대까지는 평탄하고 별다른 곡절이 없었는데, 90년대 초 결혼 후 삶에 잔잔한 파문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장남이었고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었는데, 시부모님이 남편을 좋아하지 않아 당연히 저도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1993년 9월 말에 산후조리를 했는데 그해는 유난히 추웠습니다. 시부모님은 난방기를 설치해주지 않으셔서 밤에 자면 코끝이 시려 이불을 덮어야 했습니다. 시어머니는 제 산후를 돌보지 않으셨고 시할머니께서 보름 동안 돌봐주신 후 나머지 보름은 제가 직접 식사를 해결했습니다. 무엇을 만져도 차가웠고 한기가 온몸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습니다. 점차 양손 관절에 이상이 생겼고, 출산 한 달 후에는 사지가 저리고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의사는 류머티즘이라고 했습니다. 산후에 생긴 병은 치료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게다가 출산 전부터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아 저혈압, 빈혈, 어지럼증 등의 증상이 있었는데, 앉았다 일어나거나 쪼그려 앉았다 일어날 때마다 눈앞이 캄캄해져서 넘어질까 봐 다시 앉곤 했습니다.
아버지가 의사셔서 약도 주시고 침도 놔주시고 적외선 치료도 하는 등 정성껏 치료해주셨지만 효과가 별로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침대에 누워있을 때면 누군가 다리를 잡아당기며 돌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 매우 불편했습니다. 걷다가 갑자기 다리에 힘이 빠져서 그 자리에 서서 다리를 움직여야 했고, 무릎 관절에서 ‘뚝뚝’ 소리가 난 후에야 다시 걸을 수 있었습니다. 성(省) 병원에도 가서 여러 가지 치료를 받았고 양약이 안 되면 한약으로 바꿔보기도 했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벌침 요법’도 시도했는데, 심할 때는 벌 네 마리, 가벼울 때는 세 마리로 다리를 쏘게 했습니다. 무릎이 심하게 부어올라 괴로웠고 여러 번 시도해도 차도가 없었습니다. 방법이 없어서 향을 피우고 점을 치고 풍수도 보았습니다. 이전에는 믿지 않았던 것들을 모두 시도해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젊은 나이에 직장 동료들은 저를 ‘큰 약병’이라고 불렀습니다. 1995년쯤에는 오른쪽 눈에 누낭염이 생겨 비루관이 막혀서 시립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는데, 코뼈를 일부 절제하고 비루관을 삽입했지만 나아지지 않아 계속 눈물이 흘렀습니다.
1999년 정월에 마을에서 한 분이 파룬궁 사부님의 설법 비디오를 틀고 9일 학습반을 열었는데 시아버지께서 배우러 가셨습니다. 시아버지의 중병이 아주 빨리 나아져서 당시 우리 인근 여러 마을에 화제가 됐습니다. 시어머니도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 수련을 시작하셨습니다. 이런 일이 제 눈앞에서 벌어졌지만, 저는 당시 아무것도 믿지 않아서 전혀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돈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만 믿고 더 많은 돈을 벌 방법만 찾았습니다. 게다가 시부모님이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시부모님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4월이 되자 마을의 다른 집에서도 사부님 설법 비디오를 상영한다고 했습니다. 시어머니께서 가서 배우라고 권하셨고, 마침 우리집에 있던 둘째 언니도 “혹시 효과가 있을지 모르니 한번 가보라”고 권했습니다. 저는 체면치레로 한번 보자는 마음에 남편과 함께 갔습니다. 역시 9일 학습반이었는데, 첫날 저는 보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제가 5~6살 때 급성 뇌염을 앓았는데 다행히 아버지께서 일찍 발견하시고 한꺼번에 40여 대의 침을 놓아주셔서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 후로 자주 두통이 있었고 아버지께서 침을 몇 번 놓아주셨습니다. 나중에 법공부를 하면서 알게 됐는데, 사부님께서 제 머리를 조절하시느라 저를 수면 상태로 들어가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당시 우리는 먼저 연공을 하고 나서 법공부를 했습니다. 법공부할 때 사람들은 서로 자리를 양보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저는 속으로 ‘이 사람들은 어쩌면 이렇게 좋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법을 얻었습니다.
그해 우리 가족은 2무(1무는 약 200평) 넘는 밀을 심었는데 모두 남편과 제가 손으로 수확했습니다. 제가 남편보다 더 빨리 베었습니다. 다 베고 나서 우리 둘은 각자 밀단 5~6개를 긴 밧줄로 묶어 등에 짊어지고 날랐고, 저는 때로는 손에 두 개를 더 들고 다녔습니다. 그런 다음 옥수수를 심었습니다. 가을이 지나고 나서 저는 놀라워서 남편에게 “일을 마쳐도 피곤하지 않고, 다리도 아프지 않고, 눈앞이 캄캄하지도 않아요. 제가 나았어요!”라고 말했습니다. 파룬궁을 수련한 지 겨우 한 달 남짓했을 때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저는 대법이 사람을 수련하게 하는 것임을 몰랐습니다. 건강도 좋아지고 기분도 좋아졌습니다. 집안일이 바빠지자 일하느라 학습을 가지 않았고, 책도 치워두었다가 바쁜 시기가 지나면 다시 공부하러 갔습니다.
1999년 7월 20일, 중공 악당이 대법을 광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하면서 수련 환경이 없어져 우리도 수련을 중단했습니다. 곧 원래 있던 병이 재발해서 너무 괴로울 때는 책을 꺼내 법공부하고 잠시 연공을 했고, 괴롭지 않으면 책을 치워뒀습니다. 배웠다 멈추기를 여러 번 반복했는데, 신기하게도 제가 법공부하고 연공만 하면 기적처럼 건강이 좋아졌습니다.
2001년 음력 12월 25일, 제 왼쪽 얼굴과 눈이 부었는데 저는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틀이 지나자 부기가 더 심해져서 왼쪽 눈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됐습니다. 음력 12월 30일 오후가 되자 머리가 칼로 찌르는 것처럼 너무 아파서 저녁도 먹지 못했습니다. 저녁 6시 30분쯤 구토가 나기 시작했고 왼쪽 눈 밑에 작은 구멍이 생겨 피가 흘렀습니다. 남편은 겁이 나서 마을 의사를 부르려고 했습니다. 저는 상황을 분명히 알고 있어서 두렵지 않았습니다. 토하고 나니 속이 편해졌고 머리도 덜 아팠으며, 사과 반 개를 먹을 수도 있었습니다. 설날 이틀째가 되자 왼쪽 얼굴과 왼쪽 눈이 많이 좋아졌고 작은 구멍도 아물어서, 정상적으로 친정에 가서 세배도 드렸습니다. 나중에는 오른쪽 콧속에 이물감이 자주 들어 코를 풀고 기침을 해야 했는데, 붉고 하얀 살덩어리를 여러 번 토해냈습니다. 수술 후 삽입한 관에서 찬바람이 자주 나와 매우 불편했는데 몇 년이 지나자 이런 증상들도 점차 호전됐고 비루관 부위도 불편함이 없어졌습니다.
대법은 제 몸을 정화해줬을 뿐만 아니라 제 사상도 향상시켰습니다. 시아버지는 시동생을 편애해서 모든 걸 그에게 주셨습니다. 시동생이 처음 집을 살 때 시아버지는 돈을 다 주시고 제 남편에게는 할머니한테 가서 빌리라고 하셨는데, 저는 이 일을 항상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법을 얻었지만 그 마음을 내려놓기가 어려웠습니다. 남편이 저를 데리고 수련생들과 교류하러 갔을 때 저는 문득 깨달았습니다. ‘내가 법을 얻고 몸도 정화됐으니, 이게 무엇보다 좋은 게 아닌가? 나는 더 이상 다투지 않겠다.’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시어머니는 말년에 자신을 돌볼 수 없게 되셨습니다. 한동안 저는 낮에 혼자서 시어머니를 돌봤습니다. 목욕을 시켜드리고, 대소변 보실 때 부축해드리고, 빨래도 해드리고, 맛있는 음식도 해드렸습니다. 한번은 우리 집에서 시아버지께서 시어머니를 부축해 화장실로 가시다가 시어머니가 참지 못하고 가면서 실수를 하셨는데, 시아버지께서 큰소리로 저를 부르셨습니다. 저는 방에서 뛰어나와 시어머니를 부축해 화장실로 모시고 갔고 시아버지는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저는 시어머니를 깨끗이 씻겨드리고 바닥의 변도 닦았습니다. 시어머니는 감격해서 제 이름을 부르시며 제 마음씨가 착하다고 하셨습니다.
대법이 제 몸에서 나타난 기적은 수없이 많습니다. 나중에 우리 부부도 많은 박해를 받았지만, 대법의 진실함과 아름다움, 신성함은 우리 마음속에 뿌리내려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원문발표: 2024년 11월 9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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