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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촨성 쑤이닝시 파룬궁수련자 양쓰전, 궈춘팡 등 6명 납치돼

[명혜망](쓰촨성 통신원) 쓰촨성 쑤이닝시의 파룬궁수련자 샤오원쉐(肖文學·남·70)와 그의 아내 양쓰전(楊思珍·여·70) 부부가 16년간의 강제 유랑 생활 중이던 2024년 10월 14일, 경찰의 미행 끝에 납치돼 가택수색을 당했다.

이날 궈춘팡(郭春芳·여·55)도 함께 납치됐으며, 이들이 거주하던 집의 집주인 부부도 경찰에 의해 납치되고 가택수색을 당했다. 경찰은 주변에서 잠복하다가 그 집을 방문한 파룬궁수련자 양밍화(楊明華·남·60대)까지 연이어 납치했다.

샤오원쉐는 1954년 11월생이고 양쓰전은 1954년 12월생으로, 이들은 쑤이닝시 난창 마중링촌에서 채소농사를 지었다. 마을이 철거된 후에는 촨산구 푸위안로 싱원소구로 이주했다. 양쓰전은 1998년 2월에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녀는 심근경색, 심각한 방광 충혈, 사지 무력증 등 10여 가지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약물 치료도 효과가 없어 가정의 얼마 안 되는 수입마저 모두 약값으로 써야 했고, 돈을 빌려 병원을 다녀야 했다. 하지만 파룬궁 수련을 시작한 후 진선인(眞·善·忍)의 원칙에 따라 자신을 엄격히 단련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질병이 저절로 나았고, 정신적 경지가 높아졌으며 가정도 화목해졌다. 1999년 3월에는 샤오원쉐도 파룬궁 수련을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건강 문제도 모두 해결됐다.

샤오원쉐와 양쓰전 부부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강제로 집을 떠나야 했으며, 그때부터 지금까지 유랑 생활을 하고 있다. 수련자 궈춘팡은 본래 다잉현 후이마진의 우수 교사였으나 10여 년간 강제 유랑 생활을 해야 했다. 이들은 텐펑가의 한 민가 위아래층에 살고 있었는데, 2024년 10월 14일 쑤이닝시 국보(국내안전보위대: 파룬궁 탄압 담당 공안기구)와 공안, 다잉현 공안국 소속 경찰 20여 명에게 납치돼 가택수색을 당했다. 불법 체포 과정에서 경찰은 세 명의 수련자들을 강제로 끌어내 머리에 자루를 씌웠으며, “4개월 넘게 미행했다. 한 명이라도 놓치지 않겠다”며 위협했다. 이들 세 명의 수련자는 현재 다잉현에 불법 구금된 것으로 알려졌다.

1. 샤오원쉐, 양쓰전 부부의 박해와 16년간의 유랑 생활

1999년 7월 20일 중국공산당(중공)이 파룬궁에 대한 탄압을 시작한 이래, 양쓰전은 여덟 차례 납치돼 감금됐고, 네 차례 세뇌반에 갇혔으며, 수차례 가택수색과 괴롭힘을 당했다. 한 번은 거리에서 공개적으로 수모를 당했고, 강제노동을 당했으며, 호적이 말소되어 신분증도 발급받지 못한 채 16년간 강제 유랑 생활을 해야 했다. 이로 인해 가족들도 정신적 고통과 경제적 손실을 겪었으며, 늘 공포 속에서 살아야 했다.

다음은 양쓰전 노인이 진술한 박해 사실의 일부다.

1999년 7월, 장쩌민이 전국적인 파룬궁 박해를 시작했다. 같은 해 12월 25일, 난창진 정부 관리들과 진페이(陳飛), 마을 간부 리샹(李祥) 등이 나와 다른 파룬궁수련자들을 불러 모아 개별적으로 태도 표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모인 수련자들이 모두 “파룬궁이 이렇게 좋은데 계속 수련하겠다”고 하자 박해가 시작됐다.

2000년 3월 4일, 양쓰전이 밭에서 일하고 있을 때 하층 간부들과 파출소 직원 7~8명이 그녀를 납치해 룽핑 세뇌반으로 끌고 갔다. 당시 세뇌반에는 20여 명의 수련자들이 불법 구금돼 있었다. 지도부 관리들은 파룬궁수련자들에게 “이번에는 장쩌민의 명령이다. 파룬궁수련자들을 체포해 전향(수련 포기)시키고 다시는 수련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다. 설득이 안 되면 압박하고, 압박이 안 되면 때려서라도 굴복시켜야 한다”면서 파룬궁수련자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육체적으로 고문하겠다”며 위협했다. 소장 쑨창싱(孫長興)은 “당신들이 닭이나 오리를 훔쳐도 상관하지 않겠다”고 했고, 정법위원회의 런파융(任發勇)은 “도박은 해도 되지만 파룬궁 수련은 안 된다”며 “전향하지 않으면 각종 조치를 취하겠다”고 협박했다. 캉자량(康家亮)은 “너희 가정을 파탄 내고 사람도 망하게 할 것이다. 우리는 장쩌민의 밥을 먹었으니 장쩌민을 위해 일해야 한다. 위에서 내린 정책은 죽이지는 말고 불구만 만들라는 것이다. 혹시라도 죽이게 되면 끌고 가서 묻어버리면 그만”이라고 했다.

3월 7일, 여성 파룬궁수련자 10명은 한 방에 갇혀 구타당했고, 남성 파룬궁수련자 6명은 맨발로 밖에 서서 비를 맞아야 했다. 비는 매우 세차게 내렸고 날씨도 추웠지만 그들의 몸은 물에 불어 퉁퉁 부어올랐다. 16명의 수련자들에게 하루에 제공된 쌀은 세 근도 되지 않았고, 한 끼 식사량으로는 몇 명이 먹기에도 부족했다. 배가 고파도 찬물로 허기를 달래야 했고 시멘트 바닥에서 잠을 자야 했다. 관리자들은 갖가지 수단으로 파룬궁수련자들을 전향시키려 했다.

3월 9일 저녁 식사 후, 당직자 한 명[별명이 허마즈(賀麻子, 마마 자국이 있는 허씨)]이 내게 파룬궁이 좋은지 물었다. 내가 좋다고 대답하자 폭력배 세 명이 달려들어 주먹과 발로 구타했고, 다른 수련자들은 방에 가두고 문을 잠갔다. 수련자 장슈룽(張秀容)이 “그녀를 때리지 마세요.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라고 하자, 그들은 곧바로 장슈룽도 끌어내 구타하며 머리를 발로 밟고 의자로 마구 때렸다. 당시 큰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온몸이 진흙투성이가 된 우리 둘을 손으로 바닥을 짚고 거꾸로 서 있게 했다.

주변에 구경하는 군중이 많아지자 그들의 만행을 비난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이에 그들은 군중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날 3층 사무실로 끌고 가서 폭행했다. 폭행에 가담한 사람은 저우춘훙(周春紅), 펑밍화(彭明華), 허마즈, 저우쑹바이(周松柏)와 이름을 모르는 두 명(마지막 세 명은 지역 정부가 돈을 주고 고용한 지역 폭력배)이었다. 그들은 나를 의자 위에 무릎 꿇게 하고 저우춘훙이 “파룬궁이 사교(사이비교)냐?”라고 물었다. 내가 “아닙니다”라고 하자 파룬궁이 사교라고 말하고 수련하지 않겠다고 하라고 강요했다. 내가 거부하자 그들은 3시간이 넘도록 잔인하게 폭행했다. 의자는 여러 개가 부서졌고, 빗자루 막대기도 한 아름은 부러졌으며, 머리카락도 많이 뽑혔다. 머리가 너무 맞아 두피가 두개골에서 분리됐고, 잇몸도 어긋나고 입 안이 다 헐었다. 나는 바닥에 쓰러져 피를 토하고 대변으로도 피가 나왔으며, 얼굴은 변형되고 온몸이 멍들어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가족들이 와서도 나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고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다음날 정부 각 부서에서 와서 보고는 피 묻은 옷을 입고 말할 수 없이 부어오른 얼굴을 한 내 모습에 놀라 도망쳤다. 난창진 당위원회 서기 가오쉰(高勛)과 캉자량(康加亮), 자이창뱌오(翟昌彪)는 우리 가족에게 5000위안을 내고 나를 데려가라며, 내가 ‘완고한 분자’이자 위험인물이라 중형에 처할 것이라고 했다. 가족들이 관계를 동원해 1000위안과 생활비 160위안을 냈고, 3월 17일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후에도 불법 행위자들의 괴롭힘은 계속됐다.

2000년 7월 18일 정오, 나와 남편이 집에서 ‘전법륜’을 보고 있을 때 난창 파출소 소장 펑광궈(奉光國)와 천페이(陳飛), 런파융(任發勇) 등 7~8명이 집에 들이닥쳐 강제로 가택수색을 하며 이곳저곳을 뒤졌다. 몇 명이 주먹과 발로 나를 때렸고, 10대인 내 딸이 “엄마의 상처가 이제 겨우 나았는데 또 때리느냐”고 하자 딸까지 강제로 끌고 가 경찰차에 태웠다. 각각 다른 곳에 감금됐는데, 딸은 파출소에 갇혔고 나는 룽핑 세뇌반으로 끌려가 박해를 받았다. 책임자 자이창뱌오와 캉자량, 리샹(李祥)은 파룬궁수련자들을 마구 욕했다. 그들은 모욕하면서 “우리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면 베이징에 가서 장쩌민을 찾아가라. 파룬궁을 규정한 것은 그다. 민원실이 있어 너희를 접대할 것”이라고 했다.

2000년 12월 20일, 나와 다른 수련자들은 베이징으로 민원을 가기로 했다. 12월 30일, 민원실에도 도착하기 전에 허베이성 바이먀오 검문소에서 불법 납치돼 산허 파출소로 이송됐다. 경찰은 구타와 욕설을 가하며 이름과 주소를 말하라고 강요했다. 내가 말하지 않자 온몸의 옷을 벗기고 돈 한 푼도 남기지 않았다(다른 수련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수련자들을 세 대의 차에 실어 텐진 교외의 한적한 곳에 버렸고, 공안 차량이 호송했다. 각지의 룬궁수련자들은 밤새도록 걸어 다시 베이징에 도착했고, 다음 날 오전 9시경 중산공원에서 지하철 시단 파출소 경찰에게 납치됐다. 경찰이 베이징에 온 이유를 묻자 나는 파룬궁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사부님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민원실을 찾아왔다고 했다. 경찰이 지역에서 민원하지 않은 이유를 묻자 나는 지역에서 파룬궁수련자들을 어떻게 학대했는지, 지방 관리들이 우리보고 베이징 민원실을 찾아가라고 했다고 설명했다. 경찰의 위선적인 회유에 넘어가 결국 이름과 주소를 밝혔고, 그들은 즉시 쑤이닝시 베이징사무소의 미(米)씨와 류란(劉蘭)에게 연락해 데려가게 했다.

2001년 1월 7일, 난창 파출소의 리쉬(李旭), 런파융, 대대지부 서기 쩡쭈싱(曾祖興)이 우리를 데려가 파출소에 가뒀다. 무장부장 천페이는 또다시 구타하고 욕설을 퍼부었으며, 다음 날 우자완 구치소로 보내 두 달간 박해했다.

2001년 2월 23일, 각 기능부서 간부들과 경찰, 소방관, 교통경찰, 무장경찰, 파출소 직원들을 동원해 불법 구금된 수련자들을 거리로 끌고 나와 조리돌림시켰다. 운동장에서 선고식을 열어 파룬궁수련자들을 모욕했고, 시내 초등학교 5학년 이상 학생들까지 모두 참석하게 해 무고한 학생들이 거짓말에 중독되어 파룬궁을 적대시하게 만들었다. 무장경찰은 총을 메고 나와 다른 파룬궁수련자들(총 40여 명)을 강제로 묶어 단상으로 끌고 올라가 머리를 90도로 숙이도록 강요했다. 나는 불법적으로 1년의 강제노동을 선고받았고(다른 수련자들도 각기 다른 형량의 강제노동이나 감시 처분을 받았다), 쓰촨성 즈중 난무쓰 여자 노동수용소로 보내져 박해를 받았다. 수용소 안에서도 비인도적인 대우를 받았고, 돌아온 후에도 마음대로 괴롭힘을 당했다.

2002년 9월 26일 밤, 난창진 파출소의 펑광궈, 저우춘훙, 펑밍화 등이 우리 집에 강제로 들어와 가택수색을 하고 ‘전법륜’ 한 권을 가져갔으며, 또다시 나를 수용소로 끌고 가 박해했다.

2002년 11월 1일 새벽 6시, 중공 16차 전국대표대회 기간에 난창진 파출소와 각 기능부서 직원들, 펑광궈, 샤오쿤룽(여), 자이창뱌오 등이 다시 나를 불법적으로 체포해 룽핑 세뇌반으로 보내 15일간 구금했다.

2003년 7월 4일, 내 딸이 병원에서 출산하던 날 나는 집에 없었는데 자이창뱌오가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강제로 가택수색을 하고 이곳저곳을 뒤졌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2003년 11월 23일, 나와 남편이 서훙에서 다른 사람에게 채소 재배 기술을 지도하며 밭에서 일하고 있을 때 난창 파출소와 시 공안국 직원들이 마을 관리, 자이창뱌오, 펑밍화, 마을 치안주임 펑밍(린) 등과 함께 와서 속임수로 차에 태웠다. 차에 오르자마자 자이 씨는 오늘 세 대의 차가 나를 잡으러 왔는데 다른 두 대는 주차장에 있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또다시 쑤이닝시 베이먼(숭상과학) 세뇌반으로 끌려가 두 달 넘게 불법 구금되어 세뇌 박해를 당했다. 교장 왕안량(王安亮)과 610 두목 두 명의 이름이 모두 탕융(唐勇)이었다. 안에는 모두 젊은 행정 간부들과 각지 파출소의 젊은이들이 있었고, 그들은 구타와 욕설, 각종 수단으로 파룬궁수련자들을 전향시키려 했다.

2004년 2월 27일 밤, 내가 세뇌반에서 돌아온 지 한 달 만에 난창 파출소 직원들과 각 부서 관리들이 찾아와 문을 열라고 했다. 수련하지 않는 딸이 그들을 무례하게 대하며 문을 열어주지 않자, 그들은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떠났다.

2004년 호구(호적)부를 갱신할 때 난창 파출소는 내가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이유로 호적을 말소했다. 각 부서를 찾아다녔지만 모두 책임을 회피하며 모른다고 했고, 나는 이 기회에 그들에게 파룬궁의 진상을 알렸다. 2008년 마을에서 토지를 매각할 때는 호적이 있어야 돈을 받을 수 있었는데, 많은 노력 끝에 4월에 호적을 회복했다. 하지만 경찰이 나를 납치하려 하자 20여 일간 피신 생활을 해야 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기간(7월 6일 정오), 안쥐구 파출소의 샤오 주임 일행이 경찰차를 타고 와서 날 체포하려 했고, 불법으로 가택수색을 해 컴퓨터와 프린터 등 개인 물품을 가져갔다. 나는 그때 도망쳤는데, 7월 6일 오후 1시경 도망친 그날 오후에 경찰차 여러 대가 와서 수십 명의 악인과 경찰들이 분노에 차서 이웃과 친척집까지 수색하며 날 찾아다녔다. 그날 밤에도 차를 몰고 와서 큰소리로 “파룬궁을 잡아라, 한 명 잡으면 경제적 보상(500~1000위안)을 주겠다”고 외쳤다.

2008년 12월 28일 밤 10시경, 악질 경찰 7~8명이 내 집에 들이닥쳐 위아래층을 뒤졌으나 찾지 못하자 “우리는 재조사하러 왔다”며 가족들을 위협했다. 이렇게 해서 나와 남편은 지금까지도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밖에서 떠돌며 공포에 시달리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2. 궈춘팡의 5년 옥고와 강제 유랑 생활

궈춘팡은 1969년 3월생 여성으로, 쑤이닝시 다잉현 후이마진 제2중심초등학교 교사였다. 1998년 7월부터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여러 질병을 앓고 있었고 비관적이고 염세적이었으며 건강은 계속 악화됐다. 그러나 법공부와 연공을 통해 매우 짧은 시간 안에 여러 질병이 저절로 나았고, 이후 성격이 온화하고 명랑해졌으며 가정이 화목해지고 이웃과도 화합하게 됐다. 직장 상사와 동료들과의 관계도 좋아졌고, 더욱 성실하고 묵묵히 일했으며, 방과 후에는 장기간 학생들에게 무료로 보충수업을 해주었다. 1999년 6월 초등학교 졸업시험에서 전교 2등의 좋은 성적을 거두어 학교의 명예를 높였고, 상급 지도자와 사회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궈춘팡은 여러 차례 학교에서 ‘선진 교육 공작자’, ‘우수 지도교사’, ‘선진 교사’ 등의 명예 칭호를 받았고, 해당 학교의 교직원과 학생, 사회로부터 깊은 신뢰를 받았다.

1999년 7월 20일, 중공의 우두머리 장쩌민은 자신이 직접 불법으로 만든 테러 조직 ‘610’을 통해 전국의 파룬궁수련자들에 대한 잔혹한 박해를 시작했다. 공안, 군대, 경찰이 적극 가담해 파룬궁수련자들을 마음대로 납치하고 감금했으며, 극도로 잔인한 수단으로 진선인을 믿는 선량한 사람들을 대했다. 수백만의 파룬궁수련자들이 불법 노동교양, 판결, 세뇌반과 정신병원 감금, 심지어 생체 장기적출까지 당했다.

2000년 6월, 궈춘팡이 쑤이닝에서 중국어 전공 시험을 보고 있을 때 아침에 다른 파룬궁수련자들과 공원에서 아침 연공을 하다가 난먼 파출소에 체포됐다. 이후 현지 파출소와 직장 상사들에 의해 마을 사무실로 끌려갔고, 신념을 포기하지 않자 현지 구류소로 끌려가 이틀 후에야 보석으로 풀려났다. 2000년 7월, 학교가 방학을 시작하자마자 현지 파출소는 그녀를 현립민중학교로 끌고 가 강제 세뇌를 진행했다. 2000년 말, 현지 파출소와 교육국 정법위원회 서기가 직접 궈춘팡의 집에 들이닥쳐 ‘전법륜’을 빼앗고 어린 아들을 위협했으며, 결국 가족이 1000위안의 보증금을 내고서야 그만두었다.

2001년 11월 11일, 궈춘팡은 진상을 알리는 자료를 배포하다 쑤이닝 난창 파출소에 체포됐다. 다음날 쑤이닝 링취안사 구치소로 이송됐고, 이후 우자완 구치소로 옮겨졌다. 2002년 3월 7일에는 쓰촨성 즈중 난무쓰 여자 노동수용소로 이송됐다. 수용소에서 그녀는 강제 세뇌와 장시간 군자세로 서있는 처벌을 받았고, 이로 인해 다리가 부어올랐으며 어깨 관절염이 재발했다. 발이 너무 아파 서 있을 수도 없었다. 또한 장기간 격리되어 세면과 설거지, 빨래도 금지당했고, 휴식과 수면도 오랫동안 박탈당했으며, 화장실도 마음대로 가지 못했다. 궈춘팡이 세뇌에 저항하자 3일간 독방에 갇혔다. 노동수용소에서 돌아온 후에도 늘 공포 속에서 살아야 했다.

2003년 12월, 현지 파출소는 밤 10시에 궈춘팡의 직장 숙소에 들이닥쳐 이곳저곳을 뒤지고 서명을 강요했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체포하려 했으나, 그녀가 이치를 따져 항변하자 가까스로 납치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2004년 6월, 궈춘팡은 또다시 현지 국보 경찰의 괴롭힘을 당했고 학생들을 가르치지 못하게 됐다. 납치 시도가 있자 그녀는 미리 도망쳐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2006년 2월 20일, 궈춘팡은 진상을 모르는 사람의 모함으로 현지 국보 경찰에게 폭력적으로 체포됐고 가택수색을 당했다. 그날 저녁 현지 구치소로 끌려갔다가 쑤이닝 융싱 구치소로 이송됐다. 여자 경찰의 지시로 몇몇 건장한 남자들이 ‘용 의자'(죄수를 처벌하는 특수 철제 의자)를 가져와 궈춘팡을 강제로 의자에 묶어 3일 밤낮을 앉혀두었다. 화장실도 가지 못하게 했고, 구치소장까지 감방에 와서 모욕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의자에서 내려온 후에는 발이 부어올라 서 있지도 걷지도 못했지만, 경찰은 여전히 강제노역을 시키고 감방 규칙을 외우게 했다.

2006년 9월, 궈춘팡은 현지에서 불법으로 5년 형을 선고받았다. 2007년 7월 15일, 쓰촨성 룽취안이 청두 여자 감옥으로 이송됐다. 감옥에서는 강제노역과 세뇌를 당했고, 식품 구매가 금지됐으며, 신체의 자유가 제한된 채 모욕과 비방을 당했다.

궈춘팡이 억울하게 감옥에 있는 동안인 2007년 3월, 그녀의 남편은 변호사를 데리고 감옥에 와서 이혼을 강요했다. 2007년 7월에는 그녀의 어머니가 침대 밑에서 비참하게 돌아가셨는데, 아무도 모르다가 며칠이 지나서야 이웃이 발견해 외지에서 일하던 형제에게 연락해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직장 상사들과 교육국장은 연루되어 모두 직위를 박탈당했다. 또한 현지 파출소는 아무도 모르게 그녀의 호적을 이웃 현의 마을로 옮겼다. 궈춘팡이 집에 돌아와 현지 파출소에 문의했지만 모두 모른다고 발뺌했고, 결국 그녀가 강력하게 요구한 후에야 호적을 되돌려놓았다.

5년간의 박해로 궈춘팡의 머리카락은 하얗게 세었고, 얼굴은 늙어버렸으며, 몸은 쇠약해졌다. 청력과 기억력이 크게 감퇴했고 반응도 느려졌으며, 기력도 없어졌다. 일반인이 상상하기 힘든 고통을 겪었고 직장에서도 공직을 박탈당했으며, 남편과 이혼하고 부모님도 모두 잃어 궈춘팡은 의지할 곳 없는 빈털터리가 됐다.

2011년 3월 8일, 궈춘팡이 감옥에서 돌아온 지 19일 만에 현지 파출소와 마을 정부, 마을 반(反)사교 담당관이 그녀를 속여 파출소로 데려갔다. 잠시 후 현 정부와 공안 부서에서도 많은 사람이 왔고, 신원을 알 수 없는 10여 명이 그녀를 둘러쌌다. 그들은 최저생활보장과 일자리를 해결해주겠다며 세뇌반에 가서 ‘학습’하라고 했다. 궈춘팡은 그 자리에서 그들의 음모를 간파하고 기회를 보아 도망쳤다.

다시 박해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궈춘팡은 고향을 등지고 멀리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하며 어려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원문발표: 2024년 10월 22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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