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이 글은 제 아들이 역경 속에서 직업고등학생에서 우수한 박사 졸업생으로 변모한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불가능해 보였던 일이 가능해졌고, 희망이 없다고 여겨졌던 아들이 모두의 부러움을 사는 존재가 됐습니다. 이 글을 통해 대법의 비범함과 사부님께 대한 감사를 전하고자 합니다.
1. 큰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의지
중국 같은 환경에서 수련하는 것은 대법에 대한 확고한 신념 없이는 어려운 일입니다. 저도 여러 차례 감금과 박해를 겪었고, 가정의 난관으로 인한 고통도 겪었습니다. 단순히 모든 것을 잃은 것을 넘어, 그 보이지 않는 압박과 고통은 일반인으로서는 상상도, 감당도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오늘까지 저를 지탱해 준 것은 오직 이 대법뿐이었습니다. 그 큰 고통 속에서 제 몸의 모든 세포가 붕괴 직전에 있는 것 같았고, 오늘을 버티면 내일은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습니다. 때로는 몸이 너무 허약해져서 심장이 언제 멈출지 모를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죽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길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대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중생을 구하는 데 더 큰 어려움을 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몸이 너무 허약해서 일어날 수도 없었고, 곁에 아무도 없어서 며칠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굶어 죽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대법제자들은 감옥에서 오랜 기간 단식해도 굶어 죽지 않았으니 저도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고, 실제로 배고픔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이었고 희망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들의 상황 또한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억압적이고 차가운 가정 분위기 속에서 심신은 극도로 지쳐있었습니다. 밤마다 잠들지 못하고 무의식중에 한숨만 내쉬던 아들은 한 번도 웃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며 저의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들의 성적이 어떠했을지는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아들은 직업고등학교 진학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주변 사람들은 모두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넌 상관하지 마. 그쪽(내가 불법적으로 노동수용소에 갇혀 박해받을 때 이혼한 남편) 가족이 알아서 할 테니.” 하지만 저는 차마 그럴 수 없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저와 함께 수련해 온 순수한 대법제자인 아들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생활고와 경제적 부담을 덜기 위해 아들을 포기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아들 역시 어려움 속에 있었습니다. 만약 제가 아들을 포기했다가 나중에 후회하게 된다면 그때는 만회할 기회조차 없을 터였습니다. 설령 저 자신이 극한 상황에 처해 한 푼도 없이 먹고 마실 것조차 없어 거리에서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게 된다 해도 후회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더군다나 세상 사람들도 “하늘은 사람의 길을 막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저는 대법제자로서 나쁜 일을 한 적이 없으니 하늘이 제 길을 막을 리는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원망도 후회도 없이, 일단 눈앞의 일들을 잘 해결해 나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2. 마음을 닦고 집착을 버리니 상황이 달라지다
어린 대법제자를 올바로 이끄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나 우리 같은 가정 형편과 처지에서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아들이 직업고등학교에 진학하자 주변에서는 더 이상 기대를 하지 않게 되었고 간섭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간섭에서 벗어나니 오히려 제가 원하는 방식대로 아들을 지도할 수 있게 됐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제가 생각했던 것처럼 순탄치 않았습니다. 아들은 밤낮으로 게임에만 빠져 지냈고, 공부는 물론 법공부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제 마음은 심하게 동요되었고 말하는 것도 통제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나오는 말들이 좋은 효과를 가져올 리 없었습니다. 온갖 이치를 다 들먹여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지요. 저는 더 이상 어찌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이 아이는 정말 구제불능인 걸까? 회유도 강압도 통하지 않다니!’ 그러다 문득 깨달았습니다. 아들을 바꾸려 하기보다는 저 자신을 바꾸는 게 낫겠다고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명확히 알지 못했지만 수련자로서 어떤 일에 부딪혀도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것만은 분명했습니다. 저는 아들이 게임을 할 때도 더 이상 휘둘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아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고, 차라리 침묵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점차 제 마음도 평온해졌고, 아이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치 하루아침에 아들을 이해하게 된 것 같았습니다. 그의 고통을, 그의 무력감을, 그리고 왜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게임으로 도피하려 했는지를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아들이 자신의 고통을 마비시키고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는데 제가 그마저 무자비하게 빼앗으려 했으니 아들에게는 얼마나 잔인한 일이었을까요! 이렇게 선의로 이해하게 되자 자연스럽게 제 태도도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아들이 오래 게임을 할 때면 일부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아들 정말 힘들겠다. 이렇게 오래 게임을 하니 얼마나 피곤할까. 우리 아들 보양식이라도 해줘야겠네.” 때로는 아이의 기분을 살펴 가며 적절한 타이밍에 이런 말도 했지요. “우리 아들은 아직 공부를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공부를 시작하면 아무도 따라올 수 없을 거야. 다른 애들처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공부할 필요도 없어. 조금만 해도 그들을 훨씬 앞지를 수 있을 테니까. 우리 아들은 머리가 좋잖아, 컴퓨터보다도 더 빠르게 처리할 수 있을 거야.”
점차 아들에게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스스로 공부를 시작했고 자발적으로 법공부도 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을 하든 제 입장에서 생각하고 배려하게 되었지요. 정말로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되면, 그 사람도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쌓아온 수련의 기초가 있었고 깨달음도 좋았기에, 아들의 제고는 매우 빨랐습니다! 이제는 제가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제 수련의 길에서 훌륭한 조력자가 되어주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비교하며 수련했고, 제 부족한 점을 발견하면 아들은 선의를 갖고 지적해주었습니다. 제가 어떤 문제에 부딪혀 해결책을 찾지 못할 때면 아들은 “그렇다면 사부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라고 물었습니다.
아들은 저에게도 높은 기준을 요구했습니다. 평소 제가 다른 부모들처럼 잔소리를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때로는 아들이 제 말이 많다고 느낄 때가 있었습니다. 제가 “다른 부모들을 봐. 얼마나 잔소리가 심한데, 난 그래도 많이 자제하고 있잖아”라고 말하면, 아들은 말을 끊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마세요. 전 다른 수련생들이 어떤지도 모르고 다른 사람들을 보지도 않아요. 오직 사부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만 봐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아들의 말이 맞다는 걸 알았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도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한번은 제가 뭔가 말을 하려고 하자 아들이 말을 가로막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굳이 말로 해야 할까요?” 그리고는 사부님의 법을 인용했습니다. “그 각자들은 상호 간에 만나 두 사람이 웃기만 하면 무엇이든 모두 안다.”(전법륜) 당시 저는 약간 불쾌한 마음으로 “아직 수련 성취하지도 못했으면서…”라고 대꾸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에야 비로소 그 말씀의 진정한 함의를 제 층차에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법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점차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아들이 저에게 하는 요구가 아니라 사부님께서 저에게 요구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수련의 길에서는 우연한 일이란 없으니까요. 저는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이렇게 제 수련을 촉진시켜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에 말입니다.
물론 아들 역시 자신에게 그만큼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습니다. 한번은 우리가 교류할 때 반 친구 한 명이 늘 앞에서든 뒤에서든 자신의 험담을 한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그 친구가 전체 학생들과 선생님 앞에서 아들에 대해 거짓말을 늘어놓았습니다. 그 순간에는 마음속의 평정을 완전히 유지할 순 없었지만, 아들은 묵묵히 참으며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계속해서 자신에게 되뇌었습니다. ‘그는 내 심성을 제고시키는 데 도움을 주고 있어!’ 그러자 선생님은 참지 못하고 그 친구를 꾸짖으셨습니다. 그 후에도 아들은 그 친구를 원망하지 않았고, 졸업과 대학 입시를 앞둔 시기에 오히려 자발적으로 방과 후에 그 친구의 공부를 도와주었습니다. 어느 날 선생님이 이 모습을 보시고는 그 친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봐라, 누가 너한테 이렇게 잘해주니? 너도 쟤한테 잘해줘야 해.” 이 선생님은 훗날 제 아들이 대학원에 합격했을 때 감격해 말씀하셨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학생을 다시 만나기 힘들 겁니다.” 이를 통해 아들이 선생님 마음속에 얼마나 특별한 존재였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아들도 수련 과정에서 때로는 혼란스럽고 이해되지 않는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대학 재학 시절, 어느 날 아들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왜 다른 학생들이 우리 학교를 나쁘게 말할 때마다 제 마음이 불편할까요?” 당시 저는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홍음’을 펼쳐 보았는데, “속인의 고락 생각하지 않음이 수련자요 세상득실 집착하지 않음이 나한이로다”(홍음-삼계를 벗어나다). 이 구절을 보는 순간 깨달았습니다. 곧바로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알았어. 네가 그 학교의 좋고 나쁨에 너무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야.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학교를 나쁘게 말할 때 네 마음이 불편한 거야.” 아들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깨달았습니다.
3. 대법으로 새롭게 태어나 모두가 감탄하다
사부님께서는 우리를 인생의 나락에서 건져내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최상의 것을 주셨습니다. 지금 저는 안정된 생활과 경제적 기반을 갖추게 되었고, 아들 역시 처음에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던 직업고등학생에서 이제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박사 졸업생이 되어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는 과거 우리를 달갑지 않게 바라보던 사람들을 크게 놀라게 했습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이 모든 과정이 다른 아이들처럼 특별한 노력 없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다른 부모들처럼 자녀 교육을 위해 따라다니며 공부시키거나, 과외 교사를 구하거나, 소위 경험 많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전공과 학교 선택을 상담하는 등의 수고를 들이지 않았습니다. 전 과정에서 어른들이 신경 쓸 일이 전혀 없었고 아들이 스스로 걸어왔습니다. 그 과정에서는 신기한 일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사부님께서 주신 것임을 깊이 알고 있습니다!
때로 다른 수련생들이 자녀에 대한 집착을 보일 때면, 순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망설여집니다. 몇 마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수련생 여러분, 그것은 당신의 수련을 위한 것입니다! 내려놓아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사실 사부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단지 우리의 마음이 비워지지 않아 일시적으로 얻지 못하거나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것뿐입니다. 오직 진지하게 법공부를 하면 무엇이든 얻을 수 있습니다. 법 안에는 모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지만 오직 내려놓아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위덕과 인연이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끊임없는 수련과 제고 과정에서 저는 점차 어떤 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바로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감지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대개 제가 알게 되는 일들은 그 부분에 대한 집착심을 내려놓았을 때만 알 수 있었습니다. 아직 집착이 있을 때는 전혀 알지 못했지요. 예를 들어, 몇 년 전부터 저는 아들이 나중에 매우 성공할 것이며 일반 사람들을 훨씬 뛰어넘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차례로 대학원과 박사과정에 합격했을 때도 특별히 기뻐하거나 놀라지 않았습니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이미 오래전에 일어났던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반인들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믿기 어려워했고 심지어 어떤 이는 제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네 뒤에서 누군가가 널 밀어주고 있다는 걸 느끼지 못했니?” 그렇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이건 너무나 운이 좋은 일이었던 거죠! 분명 어떤 신비한 힘이 뒤에서 도와주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오늘 제가 이 글을 쓴 것은 대법의 비범함과 사부님의 위대함을 실증하기 위해서입니다! 제자인 제가 무슨 덕과 능력이 있어 사부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겠습니까. 오직 더욱 정진하여 앞으로의 길을 잘 걸어가는 것만이 사부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일 것입니다! 이 기회를 빌려 사부님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부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원문발표: 2024년 10월 2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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