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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망을 내려놓고 선(善)과 사랑을 수련해내다

글/ 해외 대법제자

[명혜망] 이 글은 션윈(神韻) 공연 극장을 대관하는 과정에서 겪은 체득을 교류하고자 쓴 것이다.

1. 원망심에서 깨달은 것

대법제자로서 자비의 경지에 도달했는지 스스로 돌아보았다. 자비에 이르지 못했다면 사회에서 보여준 모든 행동이 선(善)과 사랑을 담고 있을까? 사부님의 가르침과 비교해보니 선과 사랑, 그리고 자비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법제자가 진정한 선을 수련하려면 원망과 원한의 마음을 철저히 버려야 한다.

우리는 “악자(惡者)는 질투심의 소치”(정진요지-경지)라는 것을 알고 있다. 질투심, 원망, 미움은 모두 악의 표현이며 선이 결여된 상태다. 질투심은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을 시기하는 것이고, 원망과 미움은 자신의 이익이나 관념에 부합하지 않을 때 마음의 균형을 잃는 것이다.

원망과 미움은 선이나 사랑과 상반되므로 자비심이 생길 수 없다.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미워한다면 자비가 부족한 것이니, 사람을 구하기는커녕 오히려 멀어지게 만들 것이다. 따라서 법에 비추어 자신의 잘못을 발견했다면 즉시 고치고 법에 맞게 바로잡아야 한다.

2. 곤혹

우리 지역에 두 극장이 있는데, 그중 한 곳에서 션윈 공연을 진행한 적이 있다. 이 극장은 션윈 공연에 적합한 편이었다. 하지만 공연 당시 극장의 중간 책임자가 비협조적이어서 어려움을 겪었다. 수련생들이 극장 고위 경영진을 찾아가 진상을 알리는 등 노력한 끝에 어느 정도 원활히 진행할 수 있었다.

당시 그 중간 책임자는 션윈 공연에 매우 비협조적이고 불친절했으며, 수련생들 말로는 횡포를 부리고 적대적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심지어 수련생들이 경영진과 합의한 조건마저 뒤집어 션윈이 더 이상 그 극장에서 공연할 수 없게 만들었다.

수련생들의 전언에 따르면, 이 중간 책임자는 약속을 쉽게 어기고 말을 바꾸며 횡포를 부리고 권한을 넘어서는 행동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수련생들은 그의 인품에 문제가 있다고 여겼다. 어떤 수련생은 그가 션윈의 구원 사업을 방해한다고 여겨 극장 이사회에 그를 비난하는 편지를 보내 해고를 요구했고, 많은 수련생이 그의 해고를 위해 발정념까지 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그 중간 간부는 극장을 떠나기는커녕 오히려 승진하여 극장의 총책임자 역할까지 맡게 됐다.

사부님께서는 ‘2003년 정월대보름설법’에서 “어디에 문제가 나타나면 그곳이 바로 진상을 알릴 필요가 있는 곳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극장 중간 책임자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그에게 직접 가서 진상을 알려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수련생들은 그를 제쳐두고 최고 경영자를 찾아가 진상을 알리고 합의까지 이끌어냈다. 수련생들은 “그 중간 책임자가 션윈의 구도 사업을 방해하니 더 이상 죄를 짓지 못하도록 발정념을 했다”고 말했다. 당시 나는 ‘그에게 직접 진상을 알리고 자신을 되돌아보며 수련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극장 대관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기에 깊이 생각하지 않았고 그 일은 그렇게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돌이켜보면, 수련생들이 진상을 알렸고 그 중간 책임자도 처음에는 협조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태도를 바꿔 약속을 뒤집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진상을 알렸는데도 이런 결과가 나왔다면 이는 우리의 수련 상태를 비춰주는 거울이 아닐까? 우리 수련인의 공간장을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

어떤 말을 듣거나 어떤 일을 당했을 때, 그 속에 우리가 수련해야 할 요소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그가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고 선하지 못한 언행을 한 것은 우리가 평소 일상에서 ‘진(眞)·선(善)·인(忍)’ 중의 ‘선(善)’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탓은 아닐까?

그가 약속을 번복한 것은 우리가 ‘진선인’의 ‘진(眞)’을 수련하지 못했음을 일깨워주는 것은 아닐까? 그의 월권 행위는 우리가 평소 ‘진선인’의 ‘인(忍)’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그의 인품이 좋지 않다고 불평하고, 더 이상 죄를 짓지 못하게 하려고 그가 떠나기를 바라며 ‘발정념’을 했다면 그런 발정념이 과연 효과가 있었을까? 오히려 역효과를 낳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명혜망에서 이와 비슷한 내용의 글을 본 적이 있다. 한 중국 수련생의 사람을 구하려는 대선대인(大善大忍)의 마음이 감옥경찰을 감화시켜 악행을 멈추게 했고, 그 경찰은 선념이 일어나 대법 박해와 무관한 다른 부서로 전근갔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중국에서 사람을 구하는 ‘대선대인의 마음’은 일종의 경지다. 이런 경지는 악행을 저지르던 경찰의 마음을 움직여 악을 버리고 선을 따라 박해하는 자리를 완전히 떠나게 한 것이다. 이는 구원 사업을 방해하는 사람이 더는 죄를 짓지 못하도록 그의 해고를 바라며 발정념을 하는 것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지 않을까?

진상 전화로 삼퇴(三退, 중국공산당의 3가지 조직 탈퇴)를 권유하는 과정에서도 수련생들 간에 교류가 있었다. 중생들의 반응이 바로 우리 자신의 수련 상태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전화를 받은 사람이 “돈을 주면 들어주겠다”고 했을 때, 수련생은 즉시 자신을 돌아보며 돈과 이익에 대한 집착을 찾아 빨리 제거했다.

어떤 이가 “아내를 찾아주면 고려해보겠다”고 했을 때, 수련생은 곧바로 자신의 색욕심을 찾아 수련했다. 또 진상을 듣지 않고 떠들며 욕하고 중공 악당을 옹호할 때는 자신의 쟁투심과 당문화(공산당 문화)를 찾아 없앴다.

만약 우리가 높은 자리에서 ‘나는 너를 구하러 왔다’는 생각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그들의 품행이 좋지 않고 깨달음이 부족하다며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조건 없이 안으로 찾아 수련할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집착을 제거하지 못하고 심성을 높이지 못하며 수련인의 공력을 강화하지 못한다면, 사람을 구하는 효과는 미미할 수밖에 없다.

극장 책임자가 보여준 불친절, 적대감, 월권, 좋지 않은 인품 등은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다. 이를 통해 자신이 ‘진선인’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면을 수련하여 진정으로 제고했다면, 구세력은 대법제자를 시험할 이유가 없다고 여겨 그 배치를 거두고 그를 다른 곳으로 전근시켰을 것이다.

이런 결과는 원망심으로 발정념을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대법제자들이 ‘진선인’에 동화되어 자신을 수련하고 심성을 높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것이다.

층차의 관점에서 볼 때, 원망과 증오는 초기 단계로서 부러워하는 질투심과 미워하는 시기심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즉, 마음의 평형을 잃은 상태에서 나타나며, 쟁투심과 자신이 뛰어나다고 여기는 마음에서 생겨난다. 원망과 증오는 좋지 않은 마음의 표현인데, 이런 마음으로 발정념을 한다면 ‘진선인’에 동화되어야 하고 우주의 모든 바른 요소에 책임져야 하는 대법제자의 초심과 얼마나 큰 차이가 있겠는가?

우리가 그 극장 중간 책임자를 원망하며 그의 상사에게 해임을 요구한다면, 그래서 실제로 그가 일자리를 잃는다면 우리를 향한 그의 원한이 얼마나 크고 깊어지겠는가? 그가 그 마음을 풀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를 구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그의 상사에게 그를 불평하며 원망하는 것은 강자의 쟁투심이고, 악으로 악을 다스리려는 당문화의 표현이 아닌가?

그가 아무리 나쁘더라도 그 역시 사부님께서 구하시려는 생명이다. 우리가 그를 원망하며 그를 해고하라고 요구한다면, 이는 사부님께서 구하려는 사람을 적으로 간주해 반대편으로 밀어내는 것이 아닌가?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대법제자와 한 수련인으로서, 내가 말하건대 수련인은 적이 없다. 당신들은 오로지 사람을 구원하는 몫이 있을 뿐, 사람의 수단과 사람의 이치로 사람을 징벌하고 사람을 판결(判決)하는 몫은 없다. 이것은 근본적인 문제이다.”(각지 설법7-시카고시 법회 설법)

3. 각성

작년 7월, 수련생들은 내가 극장 공연 책임자와 연락을 취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나는 여러 차례 이메일을 보내고 전화와 메시지를 남기며 그와 연락을 시도했다. 물론 그에게 진상을 알리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연락이 닿지 않자 나는 자신을 돌아보았다. ‘어디에서 틈을 보였을까?’ 그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고, 강철도 녹일 수 있는 자비심도 부족했기에 그의 명백한 일면과 소통하기에는 아직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수련생이 “시장에게 편지를 써서 압력을 넣어보자”는 의견을 냈다. 시장에게 편지를 쓰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 취지가 여전히 불평의 요소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문제임을 알았다. 시장의 압력으로 사람을 굴복시키려 하기보다는, 수련자로서 안으로 찾아 원망과 불만을 근본적으로 제거하고 선을 넘어서는 자비로 감화시켜 구원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우리는 시장에게 이메일을 보내 답변을 받았고, 그 이메일은 극장 총관리인에게 전달됐다. 우리는 선입견 없이 그를 찾아가 그와 그의 보좌관에게 진상을 알렸다. 하지만 갈등이 있었던 그 중간 책임자와는 만나지 못해 문제를 해결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이는 각 층차의 표현에서 아직도 극복하기 어려운 객관적인 어려움이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쩌면 이는 결자해지(結者解之)해야 할 문제일지도 모른다. 법에 부합하지 않는 사상과 사람마음은 정말로 착실하게 닦아 없애야 한다.

대법제자와 일반인 사이에는 구원하는 자와 구원받는 자의 관계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정말로 그들을 원망해선 안 된다. 우리가 사람을 원망할 때 우리는 자신을 그들의 층차로 낮추는 것이다. 마치 기(氣)와 기(氣) 사이에 제약 작용이 없는 것처럼, 중생의 그 층차로 낮아진다면 어떻게 중생을 구할 수 있겠는가?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수련자의 금기(禁忌)로서 반드시 닦아 없애야 한다. 이런 마음을 갖고는 수련 성취할 수 없다. 대법제자는 진·선·인을 수련하고 있고, 그것은 진선인의 특성과는 상반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대법이 만든 이타적인 생명이다. 자비롭게 대중에게 진상을 알려 구원받게 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다. 그들을 무시하거나 그들을 적대시할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다. 사람은 매우 약하므로 다른 공간의 나쁜 요소에 쉽게 통제된다. 우리는 선을 권할 뿐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오직 선량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심성을 제고하고, 선과 사랑하는 마음을 갖도록 노력해야만 비로소 최후에 대법제자의 내면에 반영된 자비심을 지닌 수련자가 될 수 있다.

적절하지 않은 부분은 수련생 여러분께서 바로잡아주시길 바랍니다.

 

원문발표: 2024년 10월 1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4/10/15/48057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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