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미국 대법제자
[명혜망] 저는 중국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를 수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정진하지는 못했습니다. 오랫동안 주변의 노수련생들이 ‘어르고 달래서’ 수련했고 ‘끌어당겨서’ 수련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항상 속인들 속에서 명리정(名利情-명예, 이익, 정)에 깊이 빠져 스스로 헤어 나올 수 없었고 특히 일을 대할 때 더욱 그랬습니다.
새롭게 정진하기 시작하다
2019년 중공 바이러스(우한 폐렴) 전염병이 발생하자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정법이 이미 막바지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잘 알기에 ‘나는 정말 이 만고의 인연을 놓치려고 하는가?’라고 자문했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듯 저는 반년 동안의 둘째 출산휴가 기간을 이용해 매일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공부와 연공을 하며 속인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대법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매일 한 글자 한 글자씩 공부하며 속도를 추구하지 않았고, 한 글자, 한 구절만이라도 정신을 집중하지 못했으면 모두 다시 한번 새롭게 읽었습니다.
그 기간 저는 정말 법공부를 하면서 글자마다 마음에 와 닿았고 사부님께서도 법리를 하나씩 제 머릿속에 펼쳐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한편으로 법을 읽으면서 이 법리들을 왜 이전에 보지 못했는지 감탄했습니다. 매일 법에 잠겨 있어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책을 들고 법공부를 하기만 하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되돌아가려고 하니 교란도 생겼습니다. 시련이 왔고 갑자기 시어머니는 손자의 진로에 영향을 미칠까 봐 걱정된다는 이유로 제 수련을 반대하기 시작했고, 더욱이 제가 아이에게 법을 가르치는 것을 반대하셨습니다. 아이를 데리고 우리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는데 시어머니가 울고불고 시아버지와 시댁 식구들 모두에게 압력을 넣었고, 결혼 10년 동안 저와 싸우지 않았던 남편이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습니다. 시어머니의 온갖 비난에 남편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했고 저에게도 눈살을 찌푸렸으며, 언제든 이혼할 준비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앞서 큰아이는 병원에서 ‘과잉행동장애(ADHD)’ 의심 진단을 받았는데 TV를 보는 시간 외에는 1분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둘째 아이를 낳는 동안 큰아이가 TV를 오래 보다 보니 전자기기 스크린을 보면 자꾸만 눈을 깜빡이고 눈물을 흘려 학교 선생님께서 여러 번 찾아와 이 상황을 얘기해 주셨습니다.
저는 아이를 집으로 데려온 후 모든 전자 제품 사용을 중단하고 매일 아이를 데리고 법공부를 하고 놀이하며 운동을 하고 바둑을 두며 전통문화를 읽었습니다. 또한 저는 출근하고 집안일을 하며 요리하고 몇 개월 안 된 딸을 돌봐야 했습니다. 가끔 힘들 때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울다가 일어나서 일을 했습니다.
남편은 전혀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남편이 한밤중까지 술을 마셨고 아이가 한밤중까지 울고 보챈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심성을 지키지 못해서 몇 마디 말다툼했습니다. 그는 화가 나서 집안의 모든 휴대폰을 부수고 부엌에 가서 칼도 가져오려고 했습니다. 이 가정은 깨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분노와 억울함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고, 10년 동안 시어머니의 빚을 갚아드리고 집과 차도 사드렸으며 아이도 키웠는데 결국 이런 결말이 되고 말았다고 생각했니다.
제가 집착하는 것은 정이고 속인의 행복하고 화목한 삶을 동경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끊임없이 법공부를 하고 발정념을 하며 안을 찾고 수련생과 교류하며 정념으로 가정의 난관을 대했습니다.
저는 남편과 시어머니, 시아버지에게 끊임없이 이치를 설명하기 시작했고, 그들에게 대법에 대한 저의 확고한 신념을 알렸으며, 또한 결혼 생활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파룬따파를 수련하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더욱 좋은 가치관을 가르치고 교육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한 파도가 가라앉지 않았는데 또 다른 파도가 일어났습니다. 사악한 ‘제로화 박해’가 시작되었고, 악질 경찰들은 4개월에 걸쳐 문을 부수고 24시간 저를 감시하기 시작했으며, 그동안 몇 차례 문을 부수고 저를 납치하려 했습니다. 그들이 우리 집에서 저지른 악행이 성공하지 못하자 제 직장에 가서 감시하고 소란을 피웠으며 상사를 찾아갔습니다.
상사가 저를 불러 면담하며 신앙을 포기하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상사님, 예전에 어떤 고위 간부께서 공개적으로 제가 우리 시 회사의 운명을 구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그건 업무에 대한 저의 헌신과 책임감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를 신뢰해주셔서 비용을 책임지는 중책을 맡겼습니다. 지난해에 저는 3,800만 위안의 지불 비용을 책임졌고, 단 한푼의 뒷돈도 받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냐고 물으셨을 때 ‘제게 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답변 드렸습니다. 오늘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신앙은 바로 파룬궁입니다.” 상사는 이 말을 듣고 더 이상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이후 경찰이 계속해서 상사를 괴롭히면서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저에게 계속 부서장직을 맡아달라고 설득하던 일이 크게 바뀌어 상사는 저를 피하기 시작했습니다. 1년 후, 제 이름은 회사의 정리해고 명단에 올랐습니다.
그 1년 동안 저는 허수아비 ‘부사장’이 되었고, 사무실은 원래의 ‘문전성시’에서 ‘쓸쓸하기 그지없는’ 곳으로 변했습니다. 비록 권한은 없어졌지만 업무 책임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 제가 이전에 관리했던 모든 영역이 이제는 누구나 저에게 맡길 수 있는 일거리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제가 수련해야 할 부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체면을 차리려는 마음, 명예, 이익, 상사가 되려는 마음, 남을 부리려는 마음, 칭찬 듣기를 좋아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관리직에서 일선 업무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저는 모든 사람이 저에게 맡긴 일을 성실하게 수행했고 절대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태도 변화에 직면해서도 마음을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일이 있으면 했고 일이 없을 때는 작은 사무실에 앉아서 법공부를 하고 외우며 발정념을 했습니다. 매일 출퇴근길 운전하면서 법을 외우고 ‘홍음’을 암송했으며, 집안일 할 때는 사부님 설법 녹음을 들었습니다.
사악의 교란은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그들은 뒤쪽 계단에 숨어 납치를 시도하거나 제 출근길을 미행하거나 아이의 유치원 문 앞에서 감시하거나 한밤중에 와서 자물쇠를 따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위험한 상황에서 모두 사부님의 보호 아래 무사히 넘길 수 있었습니다. 저는 매일 퇴근하고 차를 몰고 집에 갈 때 경찰이 아래층에서 적게는 두세 명, 많게는 일곱, 여덟 명까지 감시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어머니(수련생)와 농담 삼아 “매일 아침마다 한 번씩 생사를 초월하는 결심을 해야 해요”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저와 어머니는 처음에는 두려워하고 피하다가 나중에는 직접 맞서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몇 차례 경찰과 직접 대면하는 과정에서 현지 수련생들의 발정념 도움으로 사악을 부정하고 박해에 가담한 사람들에게 박해에 동참하지 말라고 설득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4개월간의 교착 상태 끝에 사악은 흩어져 사라졌습니다.
주변에 우리 큰아이와 같은 눈 증상을 가진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는 안과 병원에서 오랫동안 치료를 받고 많은 돈을 들였지만 의사는 단지 증상을 완화할 수 있을 뿐 원래대로 회복은 불가능하다고 했고 결국 안경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아이의 눈은 지금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의 도움과 아이에 대한 저의 헌신과 인내로 시댁 식구들은 점차 아이의 발전과 변화를 목격하게 되었고, 가정의 어려움은 점점 완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경찰의 괴롭힘 과정에서 많은 직장 동료들이 제 신앙에 대해 알게 되었고, 저는 진상을 알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회사 정리해고 전후 시기에 주변 인연 있는 동료들 모두가 삼퇴(중공 당·단·대 조직 탈퇴)를 했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시기의 어느 날 아침, 세수를 하다가 조용히 눈물을 흘렸습니다. ‘수련이 왜 이렇게 힘들까?’ 그 순간 사부님의 법이 즉시 제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수련의 길에 고생 있음이 아니라 생생세세 업력이 가로막음이로다”(홍음-인과).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고 사부님께서 정말 시시각각 제자의 일사일념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리해고를 당한 후 수입이 없어졌고 전에 투자용으로 산 집은 아직 대출금이 남아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남편의 보잘것없는 수입으로는 어떤 것도 충당하기에 부족했습니다. 이때 업계 3위 안에 드는 한 회사에서 연봉 50만 위안(약 9,500만 원)에 부서장직을 제안했습니다. 아침 연공 시간에 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3년만 하면 대출금을 갚을 수 있을 텐데, 돌아와서 다시 수련해도 늦지 않아.’ 하지만 저는 그 자리에 가면 명예와 이익에 빠질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일하는 이 업계는 아침 일찍 출근해서 늦게 퇴근하기 때문에 아이를 다시 시어머니 집에 맡겨야 하고,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저는 그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빚을 청산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시세보다 낮은 가격으로 집을 급매했고, 100만 위안(약 2억 원) 이상의 손해를 보았습니다. 집을 판 후 햇살 아래 서서 깊은 숨을 내쉬었습니다. 정말로 빚에서 벗어나니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청빈한 생활이 힘들게 느껴지진 않았지만 15년간의 직장 경력을 포기한 것에 대해 집에서 혼자 크게 한바탕 울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자아를 증명하려는’ 집착이었지만, 당시에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여유로운 환경은 심성에 대한 요구가 더 엄격하다
1. 첫 번째 대법 항목에 참여
미국에 와서 첫 번째 대법 항목에 참여했을 때, 그 설레는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첫날 오후 집에 돌아온 후에도 온몸의 세포가 떨릴 정도였습니다. 항목에서 일정 기간 배운 후, 수련생이 저에게 새로운 임무를 맡겼는데 뜻밖에도 이 일이 제가 이전에 속인 사회에서 하던 일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너무나 감격스러웠습니다. 이렇게 오랜 업무 경험이 뜻밖에도 대법 항목에 쓰일 수 있다니 말입니다. 항목에서 다른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일을 저는 오히려 손쉽게 해낼 수 있었고 모든 경험을 총동원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계속해서 수련생들에게 말했습니다. “이런 것들은 제가 다 할 줄 알아요. 모르는 게 있으면 저에게 물어보세요!” 알고 있는 것은 모두 말했고 말할 때는 남김없이 다 말했습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이 제가 자신을 과장한다고 여길까 봐 걱정됐습니다. “저는 정말 대단해요. 저는 아주 굉장한 업적을 이룬 적이 있어요”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환희심, 과시심, 자아를 실증하려는 강렬한 마음을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한 채, 오로지 법을 위해 헌신한다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법의 요구에 부합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저와 수련생들 사이에 간격이 생겼고 나중에는 심성 갈등도 점점 더 첨예해져서 결국 저는 이 항목을 그만둬야 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후 며칠 동안 저는 너무나 고통스러워 앉아서 밥 한 끼 먹을 힘조차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어떤 법리도 떠올릴 수 없었고, 부정적인 감정이 저의 모든 공간장을 가득 채워 더 이상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신사신법(信師信法), 신사신법……’ 네 글자만을 반복해서 되뇌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저는 여전히 마음을 풀 수 없었고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마음속에 큰 돌덩이가 막힌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끊임없이 안으로 찾았습니다. 한동안 법공부를 하고 한 가지 법리를 깨닫거나, 다른 수련생의 교류 문장 한 편을 볼 때마다 다시 모든 세부적인 사항과 경과를 돌이켜보면서 도대체 자신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양파 껍질을 벗기듯 자신의 집착심을 한 겹 한 겹 찾아냈습니다.
저는 정말로 신사신법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을까요? 제가 예전에 이해한 신사신법은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도움이 필요할 때 사부님을 떠올렸는지, 병업(病業)의 고비를 넘길 때 신사신법할 수 있는지, 위험에 처했을 때 신사신법할 수 있는지였습니다. 사실 이는 모두 사부님께서 저를 보호해주시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한 수련생이 제게 보낸 ‘한 신선의 눈으로 본 대법제자’(https://www.minghui.or.kr/archives/xiulian/57325)라는 글을 보고 나서야 저는 깜짝 놀라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스스로 필사적으로 항목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밤을 새워가며 기획서를 작성했으며, 경제적 어려움으로 밥 먹기도 힘들고 자동차 기름값도 겨우 내면서도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겪은 여러 번의 어려움을 모두 자신의 ‘사람의 경험’으로 해결했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사람의 방식으로 분투한 것이지, 법 안에서 지혜를 찾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신사신법이 아니었습니다.
수련생과의 심성 갈등에 부딪혔을 때 억울함을 느꼈고, 마음의 평형을 잃어 ‘왜 날 이렇게 대하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입으로는 법을 위한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자신이 어떻게 노력했는지, 얼마나 불공정하게 대우받았는지를 강조했습니다. 일에 부딪히면 진정으로 수련하지 않고 사람의 방식으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고비를 넘지 못해 원망이 생기고 또 신사신법을 핑계로 사부님께서 자신을 도와 난제를 해결해주시기를 바랐습니다.
2. 법 암기
지난 몇 년 동안 저는 매우 고통스럽고 억압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마치 매일 짙은 안개 속에서 살아가는 것 같았고, 매일 이런 ‘짙은 안개’ 같은 업력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왜 그런지 몰랐지만, 매일이 고통스럽고 괴로웠습니다. 매일 아이를 데려다 주러 나가면서 ‘또 하루가 시작됐는데 정법은 언제 끝날까? 이런 날들은 언제 끝날까?’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끔 남편과 외출할 때도 무심코 한숨을 쉬면 남편이 “왜 또 한숨을 쉬어요?”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아, 의식하지도 못했어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눈앞의 산은 이렇게 아름답고 햇빛은 그토록 눈부신데도, 마치 저와는 한 공간을 사이에 둔 것 같아 항상 억눌리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교류 문장에서 수련생들이 매일 법에 용해되는 기쁨을 읽으면서 저는 왜 그런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지 궁금했습니다.
나중에 법공부 팀의 수련생들이 제안해서 저는 법공부 방식을 법 암기로 바꿨습니다. 외우려면 매 단락마다 생각을 매우 집중해야 하고 조금의 잡념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기억나는 게 있는데, 어느 날 법을 외우던 중에 한 수련생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저는 즉시 전화를 끊고 수련생에게 “법 공부 중이에요. 나중에 연락드릴게요”라고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이렇게 짧은 순간에도 그 단락의 법을 외우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계속 암송하면서 시간이 지날 때마다 가끔 그런 법에 용해되는 행복감을 느꼈지만 아주 짧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깨어나면 그 억눌린 감정이 다시 몰려왔습니다.
몇 주 전, 법을 배우는 과정에서 저는 의자에 앉아 법을 외우고 있었는데, 갑자기 ‘휙’ 하고 제 공간장의 ‘안개’가 흩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흩어지는 과정은 마치 호수의 잔물결처럼 저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과정은 매우 빨랐지만 제 느낌은 매우 또렷했습니다. 저는 조금 멍해져서 방금 전의 느낌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곧이어 깨달았습니다. 자비로운 사부님께서 저를 도와 업력을 없애주신 것입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다시는 예전의 억눌림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밖에 나가니 햇살이 직접 제 몸을 비추는 것 같았고, 저는 마침내 수련생들이 말하던 그 매일 법에 용해되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3. 진상을 알리면서 자신을 수련하다
저는 RTC 전화 플랫폼에서 진상을 알리기 시작했는데 처음 직면한 문제는 일찍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겨울철에는 매일 아침 4시에 일어나 꾸준히 견지했습니다. 섣달그믐날이 다가오자 마음속으로 게으름을 피우려는 핑계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설날에 전화를 받을 사람이 있을까?’ 어머니는 “전화는 연중무휴야. 섣달그믐날에도 전화해야 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또 생각했습니다. ‘친구 집에서 설날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는데, 너무 늦게 돌아오면 다음 날 일어나지 못할 텐데.’ 역시나 집에 도착해서 씻고 나니 새벽 2시가 넘었습니다. 침대에 누워 ‘2시간도 안 돼서 전화를 걸어야 하는데, 못 일어난다고 해도 이해할 만하지 않을까?’ 그런데 딸아이가 한밤중에 침대에 오줌을 싸서 침대 시트와 이불, 심지어 제 옷까지 다 젖고 말았습니다. 저는 급히 일어나 침대 시트와 옷을 빨리 갈아입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시계를 보니 정확히 새벽 4시였습니다. 저는 깨달았습니다. 사부님께서 하루도 게으름 피우면 안 된다고, 빨리 일어나 진상 전화를 하라고 일깨워주신 것이었습니다.
처음 전화를 걸 때는 입으로는 진상을 알리면서도 머릿속은 온갖 사상업(思想業)과 집착심으로 가득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진상을 알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배척했습니다. 점차 나쁜 물질은 줄어들고 하는 말은 점점 더 순수해졌습니다. 전화를 거는 과정은 마음을 닦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기억나는 게 하나 있는데, 어느 날 아침 내내 전화를 걸었는데 상대방이 전화를 받자마자 끊어버리거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계속 말하고 또 말했습니다. 마침내 한 사람이 전화를 받더니 “미친 사람!”이라고 한마디 하고 끊어버렸습니다. 저는 무의식중에 웃음이 나왔습니다. 아, 드디어 누군가가 저를 상대해 주었구나 싶었습니다.
물론 더 많은 것은 사람을 구하는 기쁨이었습니다. 때로는 당원을 만나 삼퇴를 이야기한 후 그가 “좋습니다”라고 분명히 말할 때도 있었습니다. 마치 그를 구원할 이 전화를 기다려왔다는 듯이 말이죠. 어떤 이들은 순박한 농민들로, 진지하게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따라 읽었습니다. 한동안 학생들이 진상을 많이 들어주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어머니께 “오늘은 탈퇴 상황이 어땠어요?”라고 여쭈었더니 어머니는 “모두 아이들이 진상을 들어줬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겨울방학이 끝나고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이런 기회가 없어질 거예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때로는 정세가 매우 빠르게 변화하는 것 같아 몇 주만에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전화로 사람을 구하는 것은 한 수련생이 다른 수련생에 이어 다른 각도에서 중생 배후의 악령을 제거하는 거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전화로 사람을 구하는 것이 마치 구명선을 타고 망망대해에서 아직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수색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아이가 둘이라 생활과 법 실증을 잘 조화시켜야 했습니다. 우선 우리는 매주 일요일 하루 종일 법 실증을 하기로 했지만, 아는 수련생이 많지 않아 주말이 다가올 때마다 ‘주말에 어디 가서 법을 실증할까?’하고 걱정하곤 했습니다. 만약 그 주에 어디서 활동이 있다고 수련생이 미리 알려주면 우리는 ‘아, 주말에 법을 실증할 곳이 생겼다!’하며 매우 기뻐했습니다.
점차 수련생들이 우리에게 구원 활동에 참여하라고 권유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해변에서 서명을 받다가 나중에는 션윈(神韻) 전단지를 배포하고, 그 후에는 션윈 홍보용 문고리를 걸러 다녔습니다. 이렇게 매주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보냈습니다. 일요일에는 진상을 알리러 가고, 토요일에는 하루 종일 두 아이를 돌봐야 했지만 그 시간도 낭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매주 토요일 법공부하러 갈 때 2시간 일찍 나가 신문을 배포하며 진상을 알렸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한 수련생이 제게 영상 제작 그룹에 참여해 보라고 제안했습니다. 이후에 다른 수련생은 요리 영상을 찍어보라고 격려해줬는데, 이렇게 해서 저는 정말 가정도 돌보고 법 실증에도 참여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점차 법공부 팀, 법공부 플랫폼, 그리고 다양한 시간대와 형식의 진상 알리기와 법 실증 항목들이 하나둘 저의 일상 시간과 절묘하게 결합되어 갔습니다.
제자는 사부님의 무량하신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경각심을 가져야 할 이 시기에, 역사의 마지막 순간에 제자가 아직도 최선을 다해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어 만고의 기연을 놓치지 않게 해주셨습니다.
층차가 한정되어 있어 법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롭게 지적해주시길 바랍니다.
원문발표: 2024년 10월 1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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