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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본귀진(返本歸眞)의 길을 걷게 된 기술자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저는 대약진 운동과 3년간의 대기근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영양실조로 온몸이 붓고 핏기 없는 얼굴에 머리카락이 누렇고 거칠었습니다. 어른들은 제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라고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기혈(氣血)의 부조화로 인해 거울 속 핏기 없는 얼굴과 얇은 머리카락을 볼 때마다 자존감이 매우 낮아졌습니다. 허약한 어머니는 여섯 자매를 낳으셨고, 부모님은 수입이 매우 적어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세 아이를 낳은 후 넷째, 다섯째, 여섯째를 낳을 때마다 큰 병을 앓으셨습니다.

조용히 눈물 흘리시는 아버지와 무표정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계신 어머니를 보면서 마음이 너무 아프고 우울했습니다. 성격도 내성적이고 위축되어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제 유일한 행복은 독서였습니다.

제가 자랄 때는 중공 악당의 운동이 많았고 독서무용론이 유행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독서를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책이 너무 적어서 책 한 권을 찾는 게 보물찾기 같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전통문화 서적은 볼 수 없었고 공산당 선전물만 있었습니다. 운동이 시작되면 학교에서도 비판문을 쓰게 해서 모르는 사이에 무신론과 공산당 문화가 제 생명을 잠식하고 있었습니다.

대학 입학시험이 재개되어 저는 전자공학 중점대학에 합격했습니다. 졸업 후 전자 연구소에 배치되어 기술 업무를 맡았습니다. 학교 성적이 우수해 우수 인재로 인정받아 해외 연수를 다녀왔습니다. 경력은 순조로워 90년대 초에 고위직으로 승진했습니다.

하지만 건강과 정신 상태는 좋지 않았습니다. 만성 불면증, 불규칙한 생리, 결혼 후 임신이 안 되고 남편과 성격 차이로 자주 다투었습니다. 큰 병은 없었지만 잔병치레가 잦았고 나중에는 두통과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삶이 혼란스럽고 무의미하게 느껴져 때로는 일찍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당시 기공 붐이 일어났을 때 직장에서도 기공을 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처음에는 미신적이고 허황하다고 여겨 무시했습니다. 나중에 전통문화가 심오하고 중국 기공이 대단하다는 말을 듣고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기공 책을 읽고 동작을 따라하니 몸에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이마에 색색의 기 덩어리가 소용돌이치고 몸에 뜨거운 것이 흐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우리 생명과 밀접하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이 아직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영역의 신비는 직접 수련해야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기공 책에서 기공은 혼자 수련하면 안 되고 사부의 지도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사부를 찾아 여러 기공을 접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의문만 커졌으며 몸 상태도 더 나빠졌습니다. 절망 속에서 ‘내가 찾는 사부님은 어디 계시고, 날 가르칠 사부님은 누구신가’라고 외쳤습니다.

1998년 설날, 그날을 절대 잊을 수 없습니다. 친구 집에 갔는데 파룬궁이라는 아주 좋은 기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친구가 파룬궁 책을 건네주며 사부님께서 어느 지역에서 설법하신다고 했습니다. 책을 펴자 사부님 사진이 있었고 온몸을 감싸는 에너지를 느꼈습니다. 그 기운에 휩싸여 친구 말도 안 들리고 단숨에 책을 다 읽었습니다. 다 읽고 나서 흥분해서 친구에게 “내가 찾던 사부님을 찾았어!”라고 말했습니다. 친구가 공법 비디오를 빌려줬고 그때부터 대법이 인도하는 반본귀진(返本歸眞, 진정한 자신의 본원으로 돌아감)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파룬궁의 신기한 효과가 제게 나타났습니다. 친구 집에서 돌아온 다음날 비디오를 보며 다섯 가지 공법을 배웠습니다. 포륜(抱輪) 자세를 처음 취했을 때 이마에 푸른빛이 나타났는데, 너무 신기해서 팔을 내리기 싫어 2시간 동안 포륜했습니다. 다리를 틀고 정공할 때 전에는 반가부좌만 해도 다리가 뻣뻣했는데 이번엔 점차 부드러워져 결가부좌를 할 수 있었습니다.

대법 책을 처음 읽고 공법 영상을 본 짧은 시간에 불면증과 두통이 사라졌습니다. 다른 기공에서 경험하지 못한 것이었고 파룬궁을 수련하게 된 것이 정말 행운이라고 느꼈습니다.

파룬궁 주요 수련서인 ‘전법륜(轉法輪)’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인생의 고뇌와 기공에 대한 의문들이 이 책에서 해답을 얻었고, 모든 고난이 과거의 잘못으로 생긴 업력 때문이란 걸 알게 됐습니다. 그 후 인생관이 크게 바뀌어 명예와 이익에 담담해지고 좋은 일만 하며 남을 먼저 생각하게 됐습니다.

예전에는 매년 부서 평가 때 자신만 우수한 사람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고 다른 사람은 추천하지 않았습니다. 파룬궁을 배운 후에는 다른 사람을 추천하기 시작했습니다. 중병에 걸린 아이가 있는 동료에게 1년치 의료비 전액을 기부했는데 직장에서 제가 가장 많이 기부했습니다. 재해 지역 기부 때도 제가 가장 많이 냈습니다. 이런 일들이 직장에 반향을 일으켜 방송국 기자가 와서 제 선행을 취재했습니다. 저는 기자에게 파룬궁 수련으로 건강해지고 좋은 사람이 되는 이치를 깨달아 이렇게 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아파트 근처 거리에 노점상들이 항상 자리 잡았지만 아무도 청소하지 않아 쓰레기가 쌓여 있었습니다. 당시 우리 지역에 연공장이 없어서 몇몇 수련생들과 그 거리에서 법을 알리기 위해 연공하기로 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거리를 청소하고 쌓인 쓰레기를 치웠습니다. 쓰레기가 너무 많아 트럭 기사가 운반비를 요구했지만 제가 내겠다고 하자 그냥 가져갔습니다. 나중에 기사들은 파룬궁수련생의 선행임을 알고 무료로 치워줬습니다. 매주 연공을 하며 거리를 청소해 더 이상 쓰레기가 쌓이지 않았고 어떤 이들은 우리를 ‘레이펑(雷鋒, 공산당이 내세운 모범인물)’이라고 칭찬했습니다.

진상을 알려 중생을 구하다

1999년 7월 장쩌민이 파룬궁 박해를 시작했습니다. 경찰서, 보안부, 당위원회, 제 부서에서 저를 회의실로 불러 태도를 밝히라고 했습니다. 저는 눈물을 흘리며 “건강을 위해, 좋은 사람이 되려고 파룬궁을 수련하는데 뭐가 잘못됐나요? 왜 포기해야 하나요?”라고 말했고 그들은 해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편할 날이 없었고 사흘이 멀다 하고 찾아와 대화를 요구했지만 저는 단호하게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경찰서와 직장이 결탁해 박해를 강화했습니다. 직장에서 평가 불합격 처리하고 임금과 보너스를 삭감해 겨우 생활비만 줬습니다.

그 후 당에서 제명되고 직위 해제됐지만 출근해서 사상 보고서를 썼고 파룬궁 수련 체험과 인식을 적었습니다. 직장 서기는 저를 ‘전향’(수련 포기)시킬 수 없다고 여겨 지역 경찰서와 결탁해 괴롭혔습니다. 경찰서는 제 자유를 제한하려 세뇌반에 보내고 무단 구금했습니다.

2001년 부당한 박해 속에 베이징에 가서 청원했다가 돌아와 1년간 강제노동 교육을 받았습니다. 2015년 많은 파룬궁수련생들과 함께 장쩌민의 파룬궁 박해를 고소했다가 공안에 납치돼 불법 재판으로 3년 형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박해를 당했습니다.

출소 후에도 지역사회와 경찰서의 지속적인 괴롭힘으로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직장에서 해고돼 연금을 잃고 생계 수단이 없어져 생활을 위해 집을 팔았습니다.

박해를 막고 중생이 거짓말에 속고 무고한 이들이 연루되는 것을 막으려 대법제자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진상을 알리고 삼퇴(三退, 공산당의 3가지 조직 탈퇴)를 권하며 사람들을 구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파룬궁 수련의 수혜자로서 파룬궁을 옹호하며 진선인(眞·善·忍)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박해 초기 직장, 경찰서, 공안국, 세뇌반에서 파룬궁에 대한 인식을 쓰거나 대화할 때 파룬궁 진상을 알리고 파룬궁이 국가와 국민에게 백 가지 이로움은 있어도 한 가지 해로움도 없는 좋은 공법이라고 알려주는 것이 제 책임이라고 여겼습니다.

이 과정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정념으로 행동했고 사부님께서 가지(加持)해주셔서 지혜가 열려 말을 잘 못하던 제가 많은 이치를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고 대법을 실증하고 박해를 폭로하는 글도 몇 편 썼습니다.

박해 초기에 우리 도시 각 지역의 ‘완고한’ 파룬궁수련생들을 한곳에 모아 ‘교육’(세뇌)을 시켰는데, 사실상 감시와 구금이었습니다. 세뇌반에 들어가자마자 인식을 적으라고 했습니다. 당시 세뇌반은 하루 종일 갇혀있지는 않고 밤에는 귀가할 수 있었습니다. 저녁에 파룬궁에 대한 제 인식을 솔직하게 적었습니다.

글을 다 쓰자 갑자기 몸이 투명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마음이 매우 맑아졌습니다. 그 느낌은 다음날 세뇌반에 갈 때까지 지속됐습니다. 사부님께서 생명의 승화를 체험하게 해주셨고 제가 옳은 일을 했다고 느꼈습니다. 저는 그 글을 제출했습니다.

당직 경찰은 평소 매우 사나운 사람이었지만 그가 저를 부르자 저는 마음이 매우 평온했고 오늘 경찰이 아무리 사납게 대해도 항상 미소 짓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사무실에 들어가니 제가 쓴 글이 책상 위에 있었고 그가 이미 읽은 것 같았습니다.

사부님께서 저를 최상의 상태로 조정해 주셔서 전혀 두렵지 않았고 마음가짐이 바르니 그런 바른 에너지장에서 경찰은 나쁜 면을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그는 저를 앉히고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바라보다가 마침내 “당신은 깨달음이 좋군요. 돌아가세요”라고 했습니다. 이후 그 경찰을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전혀 사납지 않았습니다.

2001년 베이징 청원에서 돌아와 구치소에 갇혔을 때, 저는 사법 절차를 전혀 몰라서 경찰들이 계속 바뀌어가며 저를 만나는 이유를 몰랐습니다. 어느 날 늦은 밤 경찰 두 명이 와서 질문하겠다며 종이와 펜을 꺼냈습니다.

저는 파룬궁이 무엇인지, 어떤 혜택을 받았는지, 파룬궁 박해의 결과가 어떨지 계속 얘기했습니다. 그들은 펜을 들지 않고 조용히 경청했습니다. 마지막에 그들은 알려줘 고맙다며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았다고 했습니다. 또 “보세요, 우리는 기록하지 않았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파룬궁을 바르게 이해하고 저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 한다는 것에 매우 기뻤습니다.

정법 노정이 진전되고 공산당의 파룬궁 박해가 지속되는 동안, 저는 여러 방법으로 진상을 알리고 전했으며, 제 장점을 살려 수련생들과 협력해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하며 대법제자의 사명을 이행했습니다. 구체적인 진상 알리기와 법 실증 활동은 자세히 말하지 않겠지만, 진상을 알릴 때 중생이 진상을 명백히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서 중생이 진상을 깨닫고 대법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복을 받는 정도가 결정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제 사례를 하나 들겠습니다.

한 농촌 사람은 본래 부유한 집안이었지만 아버지가 공산당에 탄압받아 어머니와 단둘이 살게 됐습니다. 그는 자주 괴롭힘을 당하다 강제로 일하러 나갔고 그곳에서 만난 여성과 가정을 이뤄 딸을 낳았습니다. 혼자 생활이 힘들어진 어머니가 그를 불러 집을 지었고, 나중에 2층 집을 지었지만 자금 부족으로 벽돌 한 장짜리 벽으로 지었습니다.

2006년 어느 날 그가 처음 우리집에 왔을 때 저는 TV로 진상 DVD를 보여드렸습니다. 그는 보고 나서 동의했고 자신도 파룬궁 테이프 한 세트를 보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당시 마을에서 파룬궁 자료를 파괴할 때 ‘진선인’ 글자가 적힌 테이프를 보고 너무 좋아서 파괴되는 게 아까워 몰래 가져가 집에 보관했다고 합니다.

그의 이런 선한 마음이 우리와 선연을 맺었고, 그는 파룬궁 진상 자료를 매우 좋아했습니다. 가족들도 모두 공산당 조직을 탈퇴했고 9자 진언(眞言)이 적힌 호신부(護身符)를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친한 친구들에게도 진상 자료를 보여줬습니다.

2008년 대지진 때 그가 사는 곳은 큰 피해를 입어 마을 집의 80%가 무너졌지만, 그의 집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집보다 훨씬 좋은 이웃집이 무너진 것에 놀랐습니다. 그는 파룬궁이 자신을 보호한다는 걸 진심으로 체험했습니다.

게다가 그의 딸은 지진 직전 갑자기 배가 고파 기숙사를 나와 길거리로 갔는데, 지진이 일어나 기숙사는 무너졌지만 딸은 무사했습니다. 딸은 나중에 유능한 청년과 결혼했고 지금은 그의 마당에 건물 3채를 지어 임대해 수입이 많아져 날로 살림이 좋아지고 있습니다.

장쩌민이 공산당을 조종해 오늘날까지 파룬궁을 박해하고 있습니다. 저는 심한 박해를 받았지만 법공부를 통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잃었어도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가장 아름다운 것임을 알게 됐습니다. 진정으로 박해받는 자는 박해자들이며 그들은 생명의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우리 대법제자들은 자신을 잘 수련할 뿐 아니라 진상을 알려 중생을 구하고 사람들을 구하는 책임과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무신론자이자 인생에 방황하던 과학기술자에서 대법 수련자가 된 저는 지난 20여 년간 법을 실증하고 박해에 반대하는 과정에서 많은 일을 겪었고 많은 사람의 마음과 관념이 드러났으며 여러 번 넘어졌습니다. 하지만 사부님의 자비로운 법리가 거듭 저를 일으켜 세워 안으로 찾게 하고 끊임없이 바로잡아 성숙해지게 했습니다.

이번 글쓰기를 통해 초기의 순수한 상태를 되찾았고, 앞으로도 그런 상태로 정진하여 마지막 길을 안정되고 바르게 걸어 사부님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합니다.

 

원문발표: 2024년 10월 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4/10/3/48208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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