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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업(消業) 중 사람의 관념을 전환하다

글/ 일본 대법제자

[명혜망] 최근 주변의 여러 수련생이 각기 다른 정도의 소업 상황을 겪고 있고, 저 역시 소업 과정을 경험하면서 끊임없이 사람의 관념을 전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련생들과 공통적으로 겪는 현상들에 대해 적어보고,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인식을 함께 토론해보고자 합니다.

소업이 막 시작될 때는 대체로 우리의 정념이 비교적 강해서, 이것이 병이 아니라 소업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속 시간이 길어지거나 반복되거나 심지어 악화되면 마음속으로 의구심이 들기 시작합니다. ‘내가 어디서 잘못한 걸까? 왜 분명히 노력하고 있고, 분명히 ‘병’으로 여기지 않았는데도 상태가 좋아지지 않는 걸까?‘

사부님께서는 『전법륜』 제6강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내가 창춘(長春)에서 학습반을 열 때 근기가 아주 좋은 한 사람이 있었는데, 정말로 쓸 만한 사람이어서, 나도 이 사람이 마음에 들었다. 그의 난을 좀 크게 하여, 그가 빨리 갚아버리고 개공(開功)하게 하고자 나는 이렇게 할 준비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갑자기 뇌혈전에 걸린 증상과도 같이 거기에서 단번에 쓰러져, 움직일 수 없고 사지가 말을 잘 듣지 않는 것 같아 병원에 보내 응급치료를 했다. 그런 후 그는 병상에서 내려와 걸을 수 있었다.”

예전에 이 예를 공부할 때, 저는 이 수련생의 오성이 아쉽다고만 생각했고 소업을 좋은 일로 여기지 않았다는 점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앞부분에 사부님께서 하신 말씀을 간과했습니다. “나도 이 사람이 마음에 들었다. 그의 난을 좀 크게 하여, 그가 빨리 갚아버리고 개공(開功)하게 하고자 나는 이렇게 할 준비를 했다.”

이번에 저는 문득 깨달았습니다. ‘난을 좀 크게 하는 것’은 좋은 일 아닌가요? 그를 빨리 빚을 갚고 개공하게 하려는 것인데 이는 아주 좋은 일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표면 공간에서 소업이 마치 다시 악화된 것처럼 보이거나, 지속 시간이 길어진 것만 보고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소업이 수련인에게 좋은 일이라는 점을 근본적으로 인식하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정말로 소업을 좋은 일이라고 여긴다면, 좋은 일이 더 많아지고 오래 지속되는 것을 두려워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또한, 마음이 불안해지는 것은 대개 사람의 관념 때문입니다. 가부좌할 때 다리가 아픈 것도 소업이고, 때로는 매우 심하게 아프지만 우리는 모두 참을 수 있고 마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병업을 소멸할 때 증상이 조금 심해지고 오래 지속되면 마음이 불안해질까요? 사람의 관념으로 보면 가부좌할 때 다리가 아파도 죽지 않지만, 이른바 ‘병’은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관념은 속인의 것이고 잘못된 것이며, 수련인이 버려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소업 중에 분명히 자신이 깨달았다고 생각하는데도 증상이 순식간에 사라지지 않고, 비록 완화되고는 있지만 그 고통은 실제로 느껴지기 때문에 시간이 길어지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이번 소업 과정에서 저는 매번 고통이 올 때마다 자신의 주의식이 충분히 강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예를 들어 감옥에서 악질 경찰이 박해할 때, 악인이 다가와 폭력을 가하려는 것을 보면 우리는 모두 매우 강한 정념으로 그 배후의 사악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체적 고통이 올 때는 구세력이 벌레나 세균 등 온갖 잡다한 것들을 이용해 대법제자를 박해하고 있지만, 이때는 우리가 육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주의식이 그렇게 강한 정념으로 제거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로는 아프고 불편해지면 오히려 속인의 방법으로 완화시키려 합니다. ‘좀 누워있자’, ‘좀 문질러보자’, ‘따뜻한 물을 좀 마시자’ 등 속인의 관념이 다시 올라옵니다.

소업은 명명백백하게 고생을 겪는 것이지만 구세력은 대법제자를 시험한다는 구실로 끼어들어 방해하며, 많은 가상을 만들어내 우리의 정념을 흔들어놓으려 합니다. 이 모든 것을 사부님께서는 인정하지 않으시고 우리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육안으로는 그들이 가상을 연출하고 공격하는 것을 볼 수 없지만 우리는 여전히 매우 강한 정념으로 교란을 제거하고 그들을 인정하지 않아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사부님을 믿고 법을 믿는 것입니다. 사부님께서는 반복해서 수련인에게는 병이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이 말씀을 어느 정도로 믿고 있습니까? 정말로 ‘태양이 동쪽에서 뜬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된 것입니까? 만약 누군가 와서 “공기 중에 산소가 없다!”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모두 하하 웃으며 그가 헛소리를 한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 “당신이 병에 걸렸을 수도 있어!”라고 말한다면 우리도 하하 웃어야 하지 않을까요? 너무 우스운 일이지요. 수련인이 어떻게 병에 걸릴 수 있겠습니까?

소업은 비록 고통스럽지만 오늘날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전과는 다릅니다. 사부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위해 많은 업력을 없애주셨고 각 층차에 남겨진 업력은 모두 우리가 제고하는 데 쓰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법공부의 중요성을 알고 있지만 소업의 고통 속에서 고생을 두려워하는 마음,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구하는 마음, ‘왜 아직도 좋아지지 않지?’하는 의심을 품고 법공부를 하는 것은 모두 자신이 자신을 교란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심성이 제고되지 않으면 업력도 당연히 전환되지 않고 상황도 계속 지속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과 관념을 내려놓고 법공부를 하며, 사부님을 믿고 법을 믿는 마음이 반석같이 흔들리지 않으며, 자신의 업력에 대해 원망 없이 고통을 참고 정진하는 것, 우리는 이를 해냈습니까? 만약 해내지 못했다면 어떤 관념이 우리를 방해해 해내지 못하게 한 것일까요? 안으로 찾아 그것을 찾아내고 없애버립시다.

이상은 제 현재 층차에서의 제한된 인식입니다. 부적절한 부분이 있다면 수련생 여러분의 자비로운 지적을 부탁드립니다.

 

원문발표: 2004년 9월 2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4/9/25/48202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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