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혜망](랴오닝성 통신원) 파룬궁 수련을 고수했다는 이유로 13년 넘게 억울한 옥살이를 당한 수련자 장수샤(張淑霞)가 지난 7월 12일 시장에서 장을 보다 경찰에 납치됐다.
그녀는 톄링시 구치소에 불법 구금된 지 한 달이 넘었다. 현재까지도 경찰은 그녀를 석방하지 않고 있으며, 사법적 박해를 가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장수샤는 1963년 9월 9일생으로 올해 61세이며, 랴오닝성 톄링시 칭허구에 살고 있다. 그녀는 1996년 파룬궁 수련을 시작했고 여러 해 동안 앓았던 신경쇠약과 부인과 질환 등이 치료도 하지 않았는데 나았다. 그녀는 진선인(真·善·忍)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어 항상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했고, 가정이 행복하고 이웃과 화목했으며, 가정과 직장, 이웃 사이에서 모두가 인정하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1999년 7월, 중공이 파룬궁에 대한 광적인 박해를 시작한 후 장수샤는 수련을 고수하고 진선인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중공의 잔혹한 박해를 받았다. 그녀는 여러 차례 구치소와 노동수용소, 감옥 등에 불법 구금됐고, 총 13년이나 억울한 옥살이를 당했으며 그 기간 고문과 모욕을 당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경찰이 이번에 장수샤를 납치한 구실은 그녀가 과거에 박해했던 경찰과 정부 관리들을 법에 따라 고소했다는 것이다. 2021년 2월 27일, 중공 최고인민법원 사이트인 ‘최고판례지침’은 ‘공안·검찰·법원·경찰 전용 12가지 죄목’을 공표했다. (1) 사익을 위해 법을 왜곡하는 죄 (2) 민사·행정 재판에서 법을 왜곡하는 죄 (3) 판결·재정 집행 직무유기죄 (4) 판결·재정 집행 직권남용죄 (5) 법을 왜곡해 중재하는 죄 (6) 구금 중인 사람을 사적으로 풀어주는 죄 (7) 직무유기로 구금 중인 사람이 도주하게 한 죄 (8) 사익을 위해 감형·가석방·집행유예를 부당하게 하는 죄 (9) 사익을 위해 형사사건을 이송하지 않는 죄 (10)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하는 죄 (11) 폭력으로 증거를 수집하는 죄 (12) 구금 중인 사람을 학대하는 죄. 또한 “종신 책임 추궁제를 수립해 오판·미제사건을 일으킨 자에게 종신 책임을 추궁한다”고 밝혔다. 신고 핫라인(12337)도 같은 날 정식 개통됐다. 이에 장수샤는 법에 따라 그동안 그녀를 박해했던 관련자들의 위법 행위를 고소했는데, 여기에는 마싼자 노동수용소 여자 제2소 소장 쑤징도 포함됐다. 그러나 그녀가 기다린 것은 억울한 사건의 해결이 아니라 또다시 납치당하는 보복이었다. 이것이 바로 중공 악당이 말하는 이른바 법률이며, 진짜 범죄자들은 악당의 비호 아래 법망을 빠져나가고 있다.
다음은 장수샤가 직접 진술한 여러 해 동안 박해 받은 구체적인 사실이다.
1. 1년 5개월 불법 강제노동
1999년 10월 28일, 나는 베이징에 가서 대법을 위해 억울함을 호소했다가 베이징 주재 톄링시 사무소 직원들에게 납치돼 톄링시 칭허구 공안국으로 끌려갔다. 국보대 대장 류융런과 경찰 양레이가 불법으로 날 심문했고, 류융런은 전기봉으로 날 협박하고 추행했다. 나는 칭허 구치소에서 30일간 불법 구류됐고, 그 기간 왕 씨 성의 여경이 날 체벌해 두 번이나 무릎 꿇게 했는데 매번 약 2시간씩이었다. 그 후 나는 또 직장의 호텔로 끌려가(남편도 함께 납치됨) 6일간 불법 구금됐고, 다시 톄링 노동수용소로 끌려가 1년간 불법 강제노동을 당했다.
톄링 수용소에서 왕즈빈 대장은 나에게 (수련과 법 외우기) 위반을 인정하도록 강요하기 위해 내 다리와 등을 전기봉으로 때렸고, 나는 너무 아파서 비명을 지르며 탁자 모서리에 쓰러졌다.
동북의 섣달은 특히 추웠고 밖에서는 물방울이 떨어지면 얼음이 됐다. 경찰은 나와 20여 명의 대법제자들을 밖에 나가 도랑을 파도록 강요했는데, 그것은 남자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우리가 곡괭이로 한 번 찍으면 겨우 작은 점 하나만 파였다.
1999년 섣달 23일(소한), 톄링 수용소는 우리 수감된 대법제자 20명을 집단으로 랴오양 노동수용소 여자 대대로 이송했고, 간수들은 우리에게 식품을 모두 쓰레기통에 버리도록 강요했다.
한번은 감방에서 간수 류웨이가 우리에게 볼펜과 경문이 있다는 이유로 날 악랄하게 한 대 때렸고, 나는 순간 눈앞이 아찔했으며 앞니 한 개가 부러졌다. 나중에 간수들이 우리에게 대법을 비방하는 자료를 읽으라고 강요했는데 나는 읽지 않았다. 쑨아이친 대장이 날 사무실로 불러 말했다. “오늘 너를 본보기로 삼겠다.” 그녀는 전기봉으로 날 지졌고 전기가 떨어지자 전기봉으로 때렸다. 내 등을 때려 온통 시퍼렇게 멍이 들었고, 구두로 날 걷어차 넘어뜨린 뒤 얼굴을 사정없이 때려서 어금니가 전부 흔들렸다(집에 와서 보니 이가 흔들려 더 이상 쓸 수 없어 윗니를 모두 뽑고 틀니를 했다).
랴오양 노동수용소 간수들은 우리에게 노예노동을 강요했고 매일 밤 11시까지 일하게 했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작업을 마치지 못했고 때로는 새벽 2~3시까지 일했다. 나와 대부분 수련자들의 손가락 끝이 벗겨져 속살이 드러났고, 손가락 끝이 모두 휘어졌으며, 발과 다리가 부었다 빠졌다 했다.
간수들은 또 우리에게 랴오양에 10여 년간 쌓인 쓰레기를 치우도록 강요했다. 악취가 심해 많은 대법제자들이 메스꺼워하고 구토했다… 가장 힘든 일은 차에 짐을 싣는 것이었다. 매일 3~4대의 차에 10톤이 넘는 폐철을 실어야 했다. 여름 기온이 37~38도에 달할 때, 나와 류빙, 천위즈, 인리핑은 더워서 수건과 조끼를 물에 적셔 두르고 입었다. 밤에 작업을 마친 후에도 계속 수공예품을 만들어 밤 11시까지 일해야 했고 때로는 작업하다 망가진 면장갑을 꿰매기도 했다. 그 고생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나는 이 평생 그렇게 많은 일을 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전향’을 거부해 톄링과 랴오양 두 수용소에서 총 159일의 기간 연장을 당했다.
2000년 10월 20일, 나는 톄링과 랴오양의 대법제자 20여 명과 함께 또다시 집단적으로 마싼자 노동수용소로 이송됐다.
2. 5년 불법 판결
2001년 12월 25일, 나는 직장 상사 관잉제에게 속아 문을 열어주었고 경찰 류융런, 왕슈펀 등이 집에 들이닥쳐 불법으로 가택수색을 했다. 그들은 29인치 창웨이 TV, VCD 플레이어, 녹음기 1대, 휴대용 라디오 2대, 자녀의 컴퓨터 게임 CD를 포함해 약 3천 위안 상당의 물건을 빼앗아갔다. 나는 경찰에게 납치돼 칭허 구치소로 끌려갔다. 나는 또다시 그들에게 잡혀 감옥에 갇혀 지난번 불법 강제노동 때의 처참한 경험을 겪을 수 없다고 생각해 죽기 살기로 저항했다. 구치소 측은 내가 죽을까 봐 겁이 나 이튿날 날 풀어줬다. 남편은 연루될까 봐 나와 이혼했고 나는 집 없이 떠돌아다녀야 했다.
2002년 8월 1일, 나는 톄링 시내에서 진상을 알리다 다시 마수에 잡혔고 톄링 인윈구 경찰에게 납치됐다. 주머니에 있던 920위안을 빼앗겼다(나중에 200위안만 입금해줬다). 톄링 공안국 경찰 쑨리충이 날 톄링시 구치소로 납치했다.
칭허 형사 왕이 등이 나를 불법 심문했고 인윈구 공안분국 4층에서 나를 고문해 자백을 강요했다. 그들은 내 양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머리 위 난간에 수갑을 채우고, 한쪽 발을 들어 올려 난간에 묶었다. 전기봉으로 내 머리와 손을 때렸고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시달렸다. 극도로 쇠약해진 내 몸은(이미 3일간 단식했음) 배가 너무 아파 참을 수 없었고, 전기봉으로 때려 바지에 대변을 봤다. 나중에 경찰 류융런과 양레이가 내 손을 잡아당겨 서명하라고 했지만 나는 주먹을 꽉 쥐고 서명을 거부했다. 그는 화가 나서 내 손가락을 미친 듯이 꺾었고 류융런은 화가 나서 내 뺨을 때렸다. 나는 그에게 경고했다. “손가락이 부러져도 서명하지 않겠어요.” 구치소의 장 소장이 말했다. “서명하기 싫으면 하지 마.”
톄링 구치소에서 죄수 펑원옌이 경찰의 사주를 받아 내 얼굴을 마구 때렸고, 내가 단식으로 박해에 저항하자 내 꼬리뼈를 발로 차서 다치게 했다. 내가 죄수복을 입지 않자 그들이 나에게 수갑을 채웠고 일주일 동안 발에 족쇄를 채웠다. 나는 노예노동을 거부했고 쇠사슬에 묶였다. 쇠사슬은 60cm도 안 되는 길이였고, 내 목과 왼발을 함께 묶었으며 그 상태로 일하도록 강요했다. 나는 땅에 쪼그리고 앉아 천천히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두 감방의 10여 명의 수련자들이 단체로 단식해 부당한 대우에 항의했다. 경찰들은 우리에게 대표 한 명을 뽑아 그들과 대화하라고 요구했다. 내가 나서서 왕 씨 성의 경찰에게 말했다. “장쩌민이 당신들을 이용해 대법제자들을 박해하고, 당신들은 범죄자들을 이용해 좋은 사람들을 박해하고 있습니다. 당신들 모두 죄가 있습니다.” 3일 후, 구치소 의사 첸다펑이 나에게 강제로 음식물을 주입했고, 세면대 가득한 수돗물을 주입했다. 그런 다음 또다시 내 목과 왼발을 함께 묶었고 혼자서는 화장실도 갈 수 없었다. 죄수 펑원옌은 다른 죄수들이 내 소변을 받아주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톄링 칭허구 법원에서 재판할 때, 공안국은 ‘진상 편지’ 한 통을 증거로 제시하며 내가 보낸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편지를 보낸 적이 없었고 내 필체도 아니었다.(진상을 알리는 편지를 쓴 것도 물론 범죄가 아니다.)
2003년 3월 13일, 나는 불법적으로 5년 형을 선고받았고 선양 여자 감옥에 불법 구금됐다.
3월 16일 밤 9시, 죄수들이 모두 잠들었을 때 장옌핑, 란구이훙, 왕시우란, 장위옌 등이 날 화장실로 불렀다(감옥의 화장실과 세면장은 대법제자들을 학대하는 전용 장소). 동북의 초봄 밤은 특히 추웠고 기온은 영하 10도 이하였다. 죄수들은 모두 솜옷을 입고 있었지만 나는 얇은 속옷 한 겹만 입고 있었다. 그들은 번갈아가며 빗자루와 화장실 청소용 가시 달린 솔로 내 엉덩이를 세게 때렸다. 장위옌이 말했다. “한 사람당 50대씩 때려.” 장위옌은 때리면서 미친 듯이 웃으며 말했다. “이 사람 왜 이렇게 맞아도 끄떡없지?” 내 엉덩이는 온통 시퍼렇게 멍이 들어 성한 곳이 없었다. 장위옌이 말했다. “위로 때려, 일하는 데 지장 주지 말고.” 란구이훙은 또 내 허벅지를 꼬집었고, 내 허벅지 안쪽은 온통 멍이 들어 성한 곳이 없었다. 그들은 또 내 얼굴을 때리고 물을 가득 채운 플라스틱 통을 내 등에 올려놓고 양손을 어깨 위로 들어 균형을 잡도록 강요했다. 장옌핑은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을 내 몸에 부었고, 나는 추위에 온몸이 떨렸으며 이가 딱딱 부딪쳤다.
2003년 11월, 내가 쓴 ‘사상 보고서’에서 죄수들이 나에게 식품을 요구하고 때리고 욕하고 화장실도 가지 못하게 한 일과 ‘천안문 분신자살’ 사건이 조작됐다는 것을 폭로했다. 죄수 란구이훙이 감방에서 날 독하게 때렸고, 7~8명이 둘러싸고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바닥에 널브러뜨렸으며, 또 내 허벅지를 꼬집었다. 내가 필사적으로 소리를 지르자 내무 담당 죄수 류쥔화가 일이 커질까 봐 그들을 제지했다. 그래서 죄수 레이시우빙은 내가 자는 동안 내 틀니를 훔쳐갔다(매일 밤 나는 틀니를 빼서 물컵에 담가 두었다). 그들은 내가 밥을 먹지 못하게 해 ‘전향’하도록 협박했고 또 날 쪼그려 앉게 했다.
3. 1년 9개월간의 불법 강제노동
2006년, 칭허 공안국에 1천 위안을 갈취당했고(영수증 없음), 또 불법 가택수색을 당해 파룬궁 서적, 사부님 법상, 휴대폰 1대(가치 1,600위안) 등의 물품을 빼앗겼다.
2006년 10월 28일 오후 2시경, 나는 거리에서 집으로 돌아오다 두 명의 잠복 경찰에게 강제로 경찰차 앞으로 끌려갔다. 나는 땅바닥에 앉아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라고 외쳤다. 한 경찰이 손으로 내 입을 막고 훙치 파출소로 납치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한 경찰이 내 머리카락을 잡고 세게 벽에 박았고 나는 어지럽고 머리가 아팠다. 또 내 팔을 뒤로 묶어 차가운 쇠의자에 10여 시간 묶어두었다. 경찰은 두 개의 전기봉으로 내 입을 때리고 두 개의 전기봉으로 배를 때렸다. 나는 전기 고문을 당해 입안에 물집이 가득 생겼다. 칭허 국보대 대장 리멍 등이 우리 집 열쇠를 빼앗아 갔고, 파룬궁 서적 몇 권, 사부님 법상 1장, 휴대폰 1대 등의 물건을 빼앗아갔다. 카이위안시에서 한 달 동안 구류된 후 선양 마싼자 노동수용소로 보내져 1년 9개월 동안 불법 강제노동을 당했다.
마싼자 노동수용소에서 대법제자들은 싼 노동력처럼 노예 취급을 받았다. 여기서 우리는 자유도, 인권도 없었고, 때로는 배불리 먹지도 못하고 따뜻하게 입지도 못했으며, 과중한 노동에 시달렸다. 내가 집에 돌아가기 28일 전, 날 가장 그리워하던 80대의 어머니가 한을 품은 채 영원히 세상을 떠나셨다. 내 마음속 고통은 어떤 돈으로도 보상할 수 없다.
4. 또다시 2년 불법 강제노동
2011년 10월 6일, 나는 칭허에서 진상을 알리다가 국보 경찰 왕싱쥔에게 미행당했다. 그는 뒤에서 내 손을 잡고 전화를 걸어 경찰차를 불러 날 강제로 차에 밀어 넣었다. 왕싱쥔이 내 왼쪽 발목을 꺾어 다치게 했고, 나는 훙치 파출소로 납치됐다. 이 기간에 그들은 우리집 열쇠를 빼앗아갔다. 집에 가서 많은 파룬궁 서적, 설법 CD, MP3 등의 물건을 빼앗아갔다. 다음 날 이웃이 경찰 무리가 또다시 우리집에 올라가는 것을 보았고, 집안이 엉망진창이 됐다고 한다. 나는 또다시 강제로 지문과 손바닥 자국을 찍었고, 결국 운전사 리톄와 국보대 대장 왕싱쥔, 자오바이펑 등 6명에 의해 톄링시 구치소로 납치됐다. 가는 도중에 나는 그들에게 인과응보를 이야기했는데 자오바이펑이 말했다. “죽으면 죽는 거지.” 나는 말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당신에게는 가족도 있잖아요.” 자오바이펑이 독하게 내 얼굴을 꼬집으며 말했다. “너 날 저주하는 거야?” 가는 내내 나는 “파룬따파하오”를 외쳤고 경찰 왕충이 손으로 내 얼굴을 때렸다. 톄링시 구치소 입구에서 왕싱쥔이 날 쪼그려 앉히더니 두 다리로 내 두 팔을 끼고 손으로 세게 내 턱을 비틀었다. 나는 너무 아파서 비명을 질렀다. 나는 정말 이런 고통을 견딜 수 없어서 사무실에서 옆에 있는 책상으로 머리를 박았고 머리가 책상 모서리에 부딪혀 피가 줄줄 흘렀다. 경찰이 날 톄링시 병원으로 끌고 가 세 바늘을 꿰맸다. 경찰 왕싱쥔이 나를 속여 말했다. “CT를 찍어서 국장에게 보여주고 집에 보내줄게.” 결국 날 다시 톄링 구치소로 보냈다.
감방에 가서 내 손과 발을 대자 모양으로 바닥 고리에 수갑으로 채웠고 대소변을 세면대에 받아야 했다. 나는 단식으로 박해에 저항했다. 4일 후(10월 9일) 국보 대장 왕싱쥔, 자오바이펑 등 6명이 날 선양 마싼자 노동수용소로 납치해 2년간 불법 강제노동을 시켰다.
마싼자 노동수용소로 가는 도중에 나는 수갑에서 손을 빼내 머리의 상처를 긁었고, 경찰 왕충이 내 얼굴을 때리고 주먹으로 왼쪽 갈비뼈를 때려 한 달 넘게 왼쪽으로 돌아눕지도 못했다.
마싼자에 도착해 건강검진할 때 혈압이 높아 구치소 의사가 입소를 거부했고, 선양 제4병원에 가서 머리와 허리 CT 등 검사를 받으라고 했다. 남자 경찰 4명이 내 머리와 팔을 누르고 강제로 주사기 한 대 분량의 피를 뽑았다. 경찰 왕싱쥔은 선양의 아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뒷문을 통해 건강검진 없이 바로 입소시키기로 했다. 밤 9시가 넘어 나는 선양 마싼자 노동수용소로 납치됐고, 칭허 국보 경찰이 날 4층으로 끌고 가 직접 감방 침대에 수갑을 채웠다. 10시간이 넘는 이동으로 어지럽고 가슴이 답답했으며 기력이 없었다.
마싼자 노동수용소는 소위 100% ‘전향’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 대장이 온갖 수단을 동원해 파룬궁수련자들에게 수련 포기 각서를 쓰도록 유인했다. 현혹된 런시우제가 내 손을 잡아끌며 삼서(수련 포기 각서)에 서명하라고 했지만 내가 서명하지 않자 내 이마를 때렸다. 이혼한 남편이 날 면회하러 왔을 때 장환 대대장이 삼서를 들고 서명하지 않으면 면회를 못하게 했다.
2011년 10월 31일, 장레이 대대장이 날 비밀 암실로 불러 4~5명의 대장들이 나를 ‘전향’시키려 했다. 부소장 장쥔이 말했다. “네가 서 있는 게 너무 편해 보이는구나. 쪼그려 앉아!” 나를 2시간 동안 쪼그려 앉게 했고, 다음 날 오후에도 2시간 동안 쪼그려 앉게 했다. 스위 소장이 나를 ‘전향’시키려 했지만 내가 흔들리지 않자 장레이는 화가 나서 자오샤오제와 함께 면 끈으로 내 양손을 꽉 묶었고, 순식간에 온 손이 보라색으로 변했다. 양손을 벌려 각각 위층 침대의 두 개의 긴 모서리 쇠에 수갑을 채웠다. 위층 침대에는 판자가 없었고, 나는 침대 머리에 서서 힘껏 팔을 최대한 늘렸다. 순간 팔과 앞가슴, 등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고 숨이 막힐 것 같아서야 그들이 멈췄다. 장레이가 나에게 삼서를 쓰고 수련자들 앞에서 읽으라고 강요했고 장환이 나를 겁주며 말했다. “울지 마.” 읽은 후 나는 엉엉 울었고, 고통의 심연에 빠졌으며 내 정신적 압박감은 극에 달했다…
2011년 12월 28일, 랴오닝성 노동교양국에서 업무 점검을 왔고, 수련자들에게 강제로 대법을 비방하는 문제에 답하게 했다. 랑 씨 처장이 나와 대화를 나눴고, 대대의 장레이와 장쥔이 날 위협해 고문받은 일을 말하지 못하게 했다. 장레이가 방에 있어서 나는 고문 받은 일을 감히 말하지 못했다. 나는 대장들이 요구한 대로 완전히 하지 않았고, 경찰 장리리가 날 욕하며 업보를 당했다고 했다. 장레이는 날 작은 암실로 불러 사부님을 욕하게 하고 녹화하려 했다.
2012년 3월 16일, 사오(邪悟)한 수련자 왕원훙이 강의를 하며(대법을 비방하는) 나에게 질문에 답하라고 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경찰 장리리가 날 사무실로 불러 화가 난 듯이 고함을 질렀다. “너 막대기로 맞고 싶어!” 그녀는 날 주먹과 발로 때렸고 다리를 차서 멍이 들었으며 얼굴도 부어올랐다. 왕원훙은 한밤중에 일어나 날 지켜보며 누워서 가부좌를 하지 못하게 했다. 경찰 왕광윈, 쑨딩위안도 자주 날 욕했다.
내 혈압이 120/200이었다(고혈압 증상은 없었다). 경찰 왕광윈이 죄수 멍만만에게 내가 약을 먹는 것을 지켜보라고 했다. 내가 약을 먹지 않자 왕광윈이 날 위협했다. “네가 죽으면 누가 책임지겠어. 약을 먹지 않으면 개구기로 먹일 거야. 아니면 링거를 맞거나 기간을 연장할 거야.” 위생소의 가오 의사가 화를 내며 날 강제로 전원시키려 했고 나는 울었다. 왕광윈이 날 속여 말했다. “불필요한 검사는 하지 않을 거야.” 마싼 병원에 도착하자 의사가 나에게 물었다. “평소에 말하기를 좋아하고 화를 잘 내나요?” 나는 말했다. “대장이 우리에게 말하지 못하게 하잖아요!” 내가 사실대로 말하자 왕광윈은 화를 냈고 나중에 트집을 잡아 날 욕했다. 경찰이 강제로 나에게 소변검사, 심전도, 심장 초음파 등 검사를 받게 했고, 총 255위안의 검사비를 갈취했다. 8개월 동안 총 6~700위안의 의료비를 갈취당했다. 나중에 혈압이 65/130 정도 되자 어지러워 약 복용을 중단하겠다고 요구했다. 왕광윈과 쑨딩위안이 하루에 네 번이나 나를 욕하며 말했다. “네가 밖에서 죽으면 나는 오히려 꽹과리를 치며 춤출 거야. 넌 너무 편하게 살고 있어. 뺨맞고 싶어? 또 약 먹기 싫다고 하면 널 때릴 거야!” 그녀는 또 나에게 약을 강제로 먹이겠다고 했다. 당직 경찰 장리리는 약 먹을 때 내 혀를 위아래로 검사했다. 그녀가 말했다. “이가 빠져서 못생겼네.” 내가 말했다. “박해로 인한 거예요.” 며칠 후 장레이가 당직일 때 약을 먹고 나서 나를 벌 서게 했고 무섭게 째려보며 소리쳤다. “이는 어떻게 빠진 거야? 누가 날 박해했다고? 넌 모함하고 있어. 박해하지 않았는데 박해했다고 하니 그럼 진짜로 박해해 주겠어!” 정말 흑백이 전도된 상황이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단체로 화장실을 갔다. 한번은 내가 참지 못해 바지에 소변을 봤는데 수감자 감시원 딩쉬쿤이 날 가지 못하게 했다. 그녀는 내가 규율 위반을 인정하고 칠판에 공개하면 가게 해주겠다고 했다. 같은 방의 수련자들이 매우 화가 나서 모두 딩쉬쿤을 비인간적이라고 욕했다. 경찰 왕광윈은 이 일의 영향이 좋지 않다고 생각해 날 한바탕 꾸짖었다.
장기간의 육체적, 정신적 고문으로 내 정신적 압박이 매우 컸고, 자주 악몽에 시달려 놀라 깨어났으며, 놀라서 큰 소리로 외치는 바람에 온 층에서 들을 수 있었다. 집에 돌아가기 며칠 전, 노동수용소 기율감찰과에서 날 찾아와 반영할 상황이 있는지 물었지만 나는 기간이 연장될까 봐 맞고 욕먹은 일, 체벌, 고문 등의 상황을 감히 말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수련자들도 감히 말하지 못했다. 떠날 때 ‘선양시 직업기술 훈련 수료증’이라는 책 한 권을 주었는데, 이는 선양시 노동 및 사회보장국에서 만든 위조 증명서였다. 올 때 준 돈 카드에 10위안의 보증금이 있었는데 집에 갈 때 준다고 했지만 주지 않았다.
내가 여러 차례 박해를 받아 가족들에게 너무 큰 상처를 주었다. 어머니는 두려워서 수련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건강이 점점 나빠져 임종 때도 가장 그리워하던 딸을 보지 못한 채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나셨다. 남편은 연루될까 봐 어쩔 수 없이 나와 이혼했다. 20대의 아들은 TV의 거짓 선전에 속아 엄마와 한 방에 있기를 두려워하며 엄마가 자신을 목 졸라 죽일까 봐 걱정했다. 여동생이 추운 날씨에 눈을 맞으며 내 아들을 데리고 랴오양에 와서 날 면회하려 했지만 만나지 못했다. 아마 2002년쯤 경찰이 수련하지 않는 내 여동생을 하룻밤 가뒀다. 2011년에는 여동생이 몇 시간 동안 갇혔다. 집안의 친척들과 친구들 모두 나 때문에 걱정하고 두려워했고, 형수와 조카딸도 경찰의 괴롭힘을 받았다.
5. 또다시 3년 불법 판결
2016년 12월 14일, 장수샤, 우둥후이, 양 씨 등 세 명의 수련자가 칭허구 장샹진에서 진상 달력을 배포하다 악인의 고발로 칭허구 공안국과 장샹진 파출소 경찰에게 납치되어 톄링 구치소에 불법 구금됐다. 톄링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할 때 장수샤가 피 뽑는 검사에 협조하지 않자 국보 경찰 자오바이펑에게 구타당하고 뺨을 세게 맞았으며, 다른 왕 씨 성의 여경도 장수샤의 가슴을 주먹으로 때렸다. 자오바이펑은 큰소리로 말했다. “장수샤는 ‘상습범’이고 ‘전과’가 있다!(여러 차례 납치되어 박해받은 것을 가리킴)” 장수샤와 우둥후이는 톄링 구치소에 불법 구금됐다. 양 씨는 건강검진에 불합격해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갔다.
2017년 5월 12일, 톄링시 칭허구 법원이 장수샤에 대해 불법 재판을 열었다. 당시 장수샤의 혈압이 220~240까지 올랐지만 법정은 재판을 강행했다. 두 변호사가 장수샤의 족쇄를 풀어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지만 쑨디 재판장은 그들의 소관이 아니라고 핑계를 댔다. 변호사들이 관련 법률 조문을 낭독하고 장수샤도 족쇄를 풀어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자 쑨디는 마지못해 풀어주었다.
칭허구 검찰원의 바이잉 여자 검사가 소위 증거라며 5개의 호신부 장식품, 선전 카드 8장, 진상 내용이 인쇄된 지폐 12장, 진상 달력 3권과 주민들에게서 회수한 3권을 합쳐 총 6권을 법정에 가져와 큰 소리로 장식품에 적힌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真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낭독했고, 달력과 카드, 지폐에도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 천멸중공(天滅中共-하늘이 중공을 멸망시킬 것), 삼퇴(공산당의 3가지 조직 탈퇴)하면 평안하다” 등의 내용이 있다고 말했다. 쑨디 재판장은 계속해서 장수샤에게 죄를 인정하도록 유도했고, 바이잉 검사도 죄를 인정하면 가볍게 처벌하고 인정하지 않으면 중형에 처하겠다고 말했다.
장수샤는 법정에서 그녀를 불법 체포한 자오바이펑 경찰이 법 집행 과정에서 범죄를 저질렀다고 고발했고, 경찰이 그녀를 구타한 과정과 자신이 사부님 말씀을 듣고 덕을 중시하며 선행을 했다고 말했을 때, 쑨디 재판장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장수샤)이 누구를 고소하고 고소하려면 이 일이 끝난 후에 자료를 정리해서 하세요. 당신이 말한 것을 우리는 보지 못했습니다.”
변호사들이 장수샤를 위해 무죄 변호를 했고 이유와 근거가 충분했다. 변호사들은 체포 과정이 불법이었다고 지적하고 증인이 제공한 증거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했으며, 증인이 법정에 출석하지 않았다고 했다. 설령 증인이 법정에 와서 증언했다 하더라도 장수샤는 무죄라고 했다. 그녀는 어떤 법률도 위반하지 않았고 그녀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도 없다고 했다.
변호사가 정식으로 변호를 시작하자마자 몇 마디 하지 않았는데, 쑨디 재판장은 점심시간이 다 되었다는 이유로 휴정을 선언했고, 장아이나, 장슈위안, 마슈친 등 5명의 증인을 찾은 후 다시 재판을 열겠다고 했다.
5월 19일, 법원은 다시 한 번 재판을 열어 장수샤에게 3년 형을 불법 선고했다. 장수샤는 항소했지만, 톄링시 중급법원은 법률을 무시하고 원심을 불법적으로 유지했다. 장수샤는 랴오닝성 여자 감옥으로 끌려가 박해당했다.
이로써 장수샤는 총 11년 9개월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원문발표: 2024년 8월 31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4/8/31/481414.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4/8/31/48141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