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톈진 지현 파룬궁수련자 쑨수화, 부당한 형 선고받아

[명혜망](톈진시 통신원) 톈진시 지현 허우자잉향 푸좡쯔촌의 58세 파룬궁수련자 쑨수화(孫淑華)가 2024년 7월 19일에 지역 관리들로부터 1년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고 벌금 1만 위안을 부과받았다. 쑨수화는 2009년에도 불법적으로 1년의 강제노동 처분을 받고 톈진 여자노동수용소에서 박해당한 바 있다.

1966년 11월 20일에 태어난 쑨수화는 톈진시 지현 허우자잉진 푸좡쯔촌에 거주하고 있다. 그녀는 1998년 말부터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 수련을 시작했고, 곧 만성 안구 질환, 심열, 부인과 질환, 경추 증식증, 요통 및 기타 고질적인 질병이 사라졌다. 중공(중국공산당)이 파룬궁을 박해한 후, 쑨수화는 파룬궁 수련을 견지한다는 이유로 중공 당국에게 괴롭힘과 납치, 불법 구류, 강제노동 처분을 받아 노동수용소에서 잔인한 정신적, 육체적 고문을 당했다. 그녀의 연로한 부모님은 두려움 속에 세상을 떠났다.

다음은 10년 전 쑨수화가 자술한 박해 받았던 경험이다.

나는 1998년 말에 수련을 시작했고, 수련 후 좋은 사람이 되는 이치를 알게 되었다. 나는 진선인(真·善·忍)에 따라 자신을 요구하고 마음을 수양하고, 일에 마주치면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해주어야 하며, 갈등에 직면했을 때 자신의 잘못을 찾고, 항상 진선인 법리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도록 엄격하게 스스로에게 요구해야 함을 깨달았다. 파룬궁의 신기한 건강 효과로 인해 안구 질환, 심열, 부인과 질환, 경추 증식증, 요통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모두 사라졌다. 나는 매일 즐겁고 유쾌한 심정으로 편안한 삶을 살게 되었고 가족은 매우 화목하게 지냈다.

1999년 7월, 장쩌민과 그의 공범들은 내가 믿음을 견지했다는 이유로 잔인한 박해를 가했다.

2009년 4월 13일, 나는 쌍쯔 정기 시장에서 쌍쯔 파출소 경찰에 납치됐다. 오후에 지현 공안국 경찰이 날 집으로 끌고 가 불법 가택수색을 했다. 그날 밤 10시, 나는 지현 구치소로 보내져 40일 넘게 불법 감금됐다. 그 과정에서 파출소와 지현 공안국 경찰은 나에게 자백을 강요하고 지문을 종이에 찍도록 강요했으며 변호사를 선임해도 소용없을 거라고 말했다.

나는 장애가 있어서 걷기가 불편해 지팡이를 짚고 걸었다. 구치소에 도착하자마자 경찰이 지팡이를 빼앗아 움직일 수 없었고, 매일 침대에 앉아 있다 보니 두 다리와 발이 움직이지 않아 무릎 아래부터 차갑고 저리고 붓기 시작해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결국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일어설 수 없었다. 내가 구치소장에게 상황을 설명하자 그는 책임지기 두려워 다음날 이른 아침 1년 2개월의 불법 강제노동 처분서를 보내왔다. 구치소를 나왔을 때 내 다리는 더 이상 정상적으로 발걸음을 내디딜 수 없었다.

톈진 여자노동수용소에 도착했을 때 나는 혼자 1대대에 감금되어 있었다. 마약 중독 수감자 양원화와 보조 교육원 2명이 매일 나를 강제로 세뇌하고 대법 사부님을 비방하는 말을 듣게 하고, ‘3서(三書, 수련 포기 각서)’ 작성, 감옥 규칙 암기, 사상 보고서 작성, 월간 요약문을 작성시켰다. 4개월 동안 박해해도 나는 ‘3서’를 쓰지 않았다. 대장은 감시원 죄수들을 불러 “잘해라, 잘하면 형량을 줄일 수 있다”라고 했다.

이런 식으로 감시원 죄수와 보조 교육원, 팀장 웨이후이가 연합해 나에게 압력을 가하며 괴롭혔다. 양원화는 오래 서 있게 하거나 앉아 있게 하는 두 가지 극단적 방법으로 협박했다. 매일 새벽 5시부터 벽 모서리를 마주하고 아침밥을 먹을 때까지 서 있어야 했고 아침밥을 먹을 시간은 3분뿐이었다. 점심을 먹을 때까지 계속 서 있어야 했는데 점심도 3분 안에 먹어야 했다. 저녁밥을 먹을 때까지 또 계속 서 있어야 했고 저녁밥 먹는 시간도 3분이었다. 그 후 모든 감방 수감자들이 목욕을 다 끝낼 때까지 서 있다가 나에게 20분 동안의 목욕 시간을 주었다. 목욕하고 나면 밤 12시까지 서 있어야 했고 그제야 팀으로 돌려보내 자게 했다. 이렇게 나는 하루에 17~18시간씩 한 달 넘게 서 있는 고문을 당했다. 이어 머리를 벽에 대고 서기, 코끝을 벽에 대고 서기, 배를 벽에 대고 서기, 발끝을 벽에 바싹 붙이고 서기 등 하루에 7~8시간씩 갖은 고문을 받았다.

한참 서서 고문받다가 이번에는 세 다리 의자에 앉아 허리를 곧게 펴고, 두 다리를 쭉 펴고, 두 손을 무릎에 올리도록 했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면을 응시하게 했고, 고개를 숙이거나 눈을 감거나 누구와 대화하거나 누구를 쳐다보면 안 됐고, 어기면 손으로 머리를 때렸다. 하루에 17~18시간씩 이렇게 앉아 있어야 했고, 때로는 물도 못 마시고 거의 음식도 먹지 못했다. 내가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지 않았기에 화장실에 가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전향(수련 포기)’하지 않은 모든 수련자는 ‘엄격한 관리’ 박해를 받았다. 수용소 경찰은 파룬궁수련자를 직접 구타하고 한겨울에는 감시원 죄수에게 수련자를 밖으로 끌고 나가 몇 시간씩 추위에 떨게 했다. 일부 수련자는 야만적인 강제 음식물 주입을 당했다.

또한 대장은 가족 정을 이용해 나에게 ‘전향’을 강요했다. 가족이 면회 올 때마다 대장은 남편에게 어린 딸과 아들을 데려오라고 강요했다. 두 아이는 눈물범벅이 되어 울었고 차멀미로 토했다. 이 때문에 남편은 나에게 불만을 쏟아냈다.

나는 수용소에서 꽃을 끈으로 꿰기, 장신구 상자 붙이기 등 같은 강제노동을 하면서 독방에 갇혀 엄격한 관리를 받았기에 정말 하루하루가 3년 같았다.

2009년 4월 13일 내가 납치된 후부터 2010년 6월 15일에 불법 강제노동이 끝날 때까지 꼬박 1년 2개월이 걸렸는데, 수용소 측은 불법적으로 이틀을 더 감금했다.

집으로 돌아온 후 남편은 여러 번 이혼을 요구했다. 언니도 파룬궁 수련을 했다는 이유로 불법적으로 4년형을 선고받았다. 연로한 부모님은 두 딸의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아버지는 2012년에, 어머니는 정신질환을 앓다 얼마 후 돌아가셨다.

집에 돌아온 지 1년쯤 지난 어느 날, 톈진 ‘610사무실'(장쩌민이 불법적으로 설립한 파룬궁 박해기구), 쌍쯔 파출소, 허우자잉 파출소의 경찰 7~8명이 우리집에 들이닥쳐 불법 가택수색을 했다. 한 여경은 내가 명혜망에 기사를 썼는지 캐물었다. 쌍쯔 파출소 경찰은 컴퓨터가 있다며 집 구석구석을 뒤졌고 연공하지 않겠다는 보증서에 서명하지 않으면 끌고 가겠다고 위협했다. 그들의 행동에 시아버지는 너무 무서워 바닥에 앉은 채 일어나지 못하셨고, 시어머니는 온몸을 떨며 눈물을 흘리며 말씀도 못 했다. 그 여경은 명혜망에서 내 이름을 또 보게 되면 날 찾아오겠다고 했다. 다음 날, 허우자잉 파출소에서 경찰 두 명이 또 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허우자잉향 정부에서 온 남자 둘과 여자 한 명이 집으로 찾아와 또 괴롭혔다.

2014년에는 경찰 4명이 집에 찾아와 아무 증명서도 제시하지 않고 어느 기관에서 왔는지도 밝히지 않은 채 집을 수색했다. 시어머니는 너무 무서워 벌벌 떨면서 얼굴이 붉어진 채 말씀도 하지 못하셨다.

우리 가족은 매일 공포에 떨며 조마조마하게 살았다. 언제 누가 우리를 괴롭히러 올지 몰라 감히 대문도 열지 못하고 공포 속에 나날을 보냈다.

 

원문발표: 2024년 8월 28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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