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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얻은 후부터 수련한 경험

글/ 홍콩 대법제자

[명혜망] 나는 어릴 때부터 몸이 허약해 빈혈에 시달렸다. 19살에 B형 간염에 걸렸고, 3년 후 간비대와 간경화로 발전해 병세가 심각해져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상태였다. 그때 파룬궁을 갓 수련하기 시작한 사람이 대법 서적 ‘전법륜(轉法輪)’을 건네주며 말했다.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읽어보세요.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전법륜’을 처음 읽고 나서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만 이해했는데, 신기하게도 내 몸이 정상으로 회복됐고 간비대와 간경화가 사라졌다. 그 후 광저우에서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장사를 하느라 더는 대법 책을 보지 않았다.

둘째 아이를 낳고 나서 갑자기 허리를 펴고 걸을 수 없어 90도로 굽히고 걸어야 했다.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시는 걸 보고 내가 죽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 병원에 갔다. 복도에서 의사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먼 공간에서 진선인(真·善·忍) 세 글자가 날아와 내 이마로 들어갔다. 그 순간 허리가 펴져 집으로 돌아왔다. 빈혈도 이렇게 나았다.

그때 사악이 하늘을 덮을 듯이 파룬궁을 모함했지만 난 그런 사악한 뉴스를 하나도 보지 않았다. 2004년에 그 수련생이 날 찾아와 홍콩에 가서 파룬궁수련생들을 찾아 연공하라고 했다. 공원에서 그들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2005년에 홍콩에서 수련생들을 만나 법공부와 연공을 시작했고, 자녀들도 따라서 법을 얻었다.

진상을 알리고 삼퇴를 권하다

2006년, 수련생이 와서 나의 삼퇴(중공의 3대 조직인 공산당, 공청단, 소선대 탈퇴)를 도와줬다. 홍콩 수련생들이 친척과 친구들에게 삼퇴를 권하라고 해서 나는 수련생들이 날 도와준 방식을 배워 친척과 친구들에게 삼퇴를 권했다.

2005년부터 2008년까지 우리는 광저우와 홍콩을 오갔다. 때로는 대법 서적, ‘대기원’ 신문, ‘명혜주보’를 광저우로 가져가 가게에 두고 손님들이 보게 했다. 어떤 손님은 “이런 신문들을 여기 두면 무섭지 않아요?”라고 물었다. 나는 “무섭지 않아요. 이건 다 진실한 이야기예요”라고 대답했다.

2008년 어느 날 밤, 컴퓨터로 박해 진상을 보게 됐다. 법 전수부터 박해, 그리고 반(反)박해 과정을 보고서야 대법제자가 세 가지 일을 해야 하고, 진상을 알리고 중생을 구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날 밤의 심정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을 단번에 알게 됐고, 내 생명 깊은 곳에서 진정으로 깨어났다. 온 존재가 새롭게 씻긴 것 같았다. 사부님께서 날 버리지 않으셨음에 감사했다. 나는 진정으로 수련하기로 결심했고 사부님의 요구대로 세 가지 일을 잘하기로 했다. 정법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나에게도 아직 수련할 기회가 있었다. 그날 밤 ‘공산당에 대한 9가지 평론(九評共産黨, 9평)’을 다 읽었다.

다음 날부터 가게에서 진상을 알리고 삼퇴를 권하기 시작했다. 내가 아는 사람이 많아서 그들을 구하고 싶었다. 진상을 알리는 것 외에도 진상 편지를 쓰고, 인터넷 차단 우회 프로그램 CD, ‘9평’ CD, 션윈 공연 CD를 만들고, 진상 지폐를 만들어 유통시키는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해 사람들을 구했다.

가게에 오는 손님들에 따라 다른 진상 자료를 나눠줬다. 내가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때는 정말 시간을 아껴 써서 밥 먹을 시간도 아까워했다. 점심을 저녁에 먹는 일이 잦았고 직원들이 밥을 데우고 가져왔다 도로 가져가곤 했다.

좋은 상인이 되다

남편은 홍콩 사람이었다. 그가 사업을 한다는 소문이 빨리 퍼져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돈을 빌리러 왔고 우리 친척들도 내게 계속 돈을 요구했다. 때로는 남편이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고 싶어 하지 않으면 내가 화를 내기도 했다. 우리 둘 다 장사를 할 줄 몰라서 계속 적자였고 더는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남편은 계속 홍콩에서 돈을 가져와 지출을 메웠고 이런 상황이 2005년까지 계속됐다.

2005년에 홍콩에 갔을 때, 홍콩 신분증을 받으려면 한 달을 꼭 채워 살아야 했다. 홍콩 친척들의 태도가 그리 좋지 않다는 걸 느꼈다. 어느 날 시누이가 전화하는 걸 듣게 됐는데 둘째 아주버니가 곧 파산할 거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비록 수련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법을 수호하고자 하는 마음이 강했다. 그래서 사부님께 “사부님, 어떻게 장사를 해야 할까요?”라고 여쭈었다. 그러자 곧바로 사부님께서 “진선인으로 하라”고 말씀하시는 걸 들었다. 나는 매우 감동했다.

광저우로 돌아와서는 마치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장사를 잘할 수 있게 됐다. 1년 후 매출이 급증했고, 2008년에는 정점을 찍었다. 동시에 ‘악덕 상인’이라는 관념을 바꾸고 스스로에게 엄격히 요구하며 좋은 상인이 되려고 노력했다.

수련은 매우 엄숙하다

당시 중국의 사악한 환경에서 무사히 지나올 수 있었던 것은 정념 외에도 순수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낮에는 가게에서 진상을 알리고 삼퇴를 권하고, 밤에는 가게에서 진상자료를 만들었다. 9시에 시장 전기가 끊기기 전에 반드시 물건을 정리하고 집에 가야 했다. 때로는 몇 대의 프린터가 동시에 진상자료를 만들었는데, 각 프린터의 작업 시간을 파악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때 반드시 정념이 강해야 하고 머리가 맑아야 했으며 각 단계에서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됐다. 제작한 CD는 하나씩 검사해야 했고 검사 후 포장했다.

반드시 밤 9시 전에 모든 진상자료를 만들고 분류하고 정리해야 했다. 전기가 끊기면 바로 떠나는데 가게가 시장 관리소 맞은편에 있었기 때문이다. 보안요원이 정전 후에도 누군가 있다는 걸 발견하면 문을 두드리고 물어볼 것이기 때문이다.

자료를 만들 때마다 발정념을 하면서 기계와 소통했다. 어떤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기계가 고장 났다. 기계가 고장 나면 사부님께 도움을 청하고 동시에 자신의 잘못을 찾았다. 깨닫고 나면 기계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늘 안으로 찾는 것이 자발적인 수련 기제가 됐다.

자료점 운영은 매우 순조로웠고 나도 진상자료를 매우 소중히 여겼다. 대부분의 자료는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나눠줬다(가족과 직원들도 자료 배포를 도왔다). 한번은 ‘시장 상점 안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구할까?’라고 생각했다. ‘밤에 문 밑으로 자료를 밀어 넣을까.’ 시험 삼아 한 부를 밀어 넣어봤다. 집에 돌아와서 마음이 불편했다. 안에 넣은 것이 대법 자료인데 문 밑으로 밀어 넣는 게 떳떳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른 아침에 시장에 가서 자료를 문 밑에서 꺼냈다.

시험과 관문을 만나면

수련하기 가장 어려운 것은 ‘조급함’과 ‘내 마음대로 하려는’ 마음이었다. 이런 마음을 수련할 때면 많은 심성 시험이 나타났다. 때로 직원 몇 명이 와서 이것저것 지적하면 마음이 불편해졌고 그러면 경찰차가 문 앞에 왔다. 즉시 사부님께 잘못을 인정했다. ‘사부님,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사부님 저를 구해주세요!’ 반드시 고쳐야 했다. 밖에 나가 경찰과 인사를 나누고 “무슨 일이세요?”라고 물었다. 경찰은 별일 없는 걸 보고 다시 차를 타고 갔다.

고치지 않으면 경찰이 다시 올 것임을 알았기에 반드시 마음을 닦아야 했다. 심성을 제고해야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때 사부님께서 한 경찰을 배치해 보호해주셨다. 누군가 신고하면 이 경찰이 먼저 왔다. 경찰은 연락처를 남기고 일이 있으면 자신에게 연락하라고 했다.

어느 날에 나는 내 두려운 마음을 없애야 했다. 시장 경비원 두 명이 가게에 와서 관리소로 가라고 했다. 경찰이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한다고 했다. “알겠습니다”라고 말하고 그들과 함께 갔다. 갑자기 두 다리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한 경비원이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이것은 사부님께서 그의 입을 빌려 하신 말씀임을 알았다. 신기하게도 두려운 마음이 이렇게 사라졌다. 이전에 경찰이 가게에 와서 찾았을 때 2층 창고에 올라가 발정념을 했었는데, 축구공만 한 베이지색 두려운 마음이 튀어나와 앞에 있는 걸 봤다. 그날 이렇게 큰 두려움을 사부님께서 순식간에 없애주셨고 관리소에 가서 진상을 알리고 돌아왔다.

또 한번은 관리소에서 불렀는데 계속 가게에서 이런 말을 하면 이 시장을 폐쇄해야 하고 200여 개의 상점이 연루될 거라고 했다. 나는 말했다. “이게 무슨 논리예요? 공산당만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죠. 공산당은 곧 멸망할 겁니다.” 나는 구이저우성에서 발견된 중공이 망한다는 예언석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는 듣고 매우 기뻐하며 문밖까지 배웅해줬다.

홍콩으로 돌아가다

2020년 초 어느 날, 인터넷 차단 우회용 CD 두 장을 파출소장에게 줬다. 그 후 문 앞에 경찰차 몇 대가 와서 날 파출소로 데려갔고 10일간 불법 구류한 뒤 홍콩으로 돌려보내겠다고 했다.

유치장에 있은 지 3일째 되던 날, 함께 감금된 10여 명을 거의 모두 삼퇴시켰다. 더 이상 여기 있을 의미가 없다고 느껴 큰 소리로 외쳤다. “나가고 싶어요. 여기 있기 싫어요!” 그들은 10여 명의 경찰을 보내 대화를 나누게 했고 나는 그들에게 장쩌민과 함께 매장되지 말라고 말했다. 같은 방에 있던 사람들은 옆방으로 옮겨졌고 계속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들에게 삼퇴를 권했고 곧 다른 방으로 옮겨졌다.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면 그들에게 진상을 알리고 삼퇴를 권했다. 때로는 모두 함께 내가 들려주는 ‘천안문 분신자살’ 날조극의 진상과 대법 진상을 들었다.

유치장에서 나올 때 문 앞에서 경찰차 몇 대가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경찰이 많이 있었고 그들에게 웃으며 말했다. “수고하십니다.” 경찰들도 웃었고 홍콩으로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가게에 가서 돈을 좀 가져가라고 했다. 홍콩에 돌아가려면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현장에 있던 가족과 직원들이 보러 왔고 그들은 보고 “괜찮네요, 오히려 살이 좀 쪘네요”라고 말했다.

가는 길에 경찰들에게 진상을 알리고 홍콩에 오면 차를 한잔하자고 했으며,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들은 모두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기차에 올랐을 때 차표 값을 그들에게 주었는데 그들은 다시 기차로 던져 주며 차표를 사주기로 했다고 했다. 서로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

기차에 사람이 없는 걸 보고 한바탕 울고 싶었다. 잘하지 못해서 홍콩으로 돌아가게 된 것 같았다. 사람을 구하는 데만 신경 쓰고 법공부는 적게 하고 연공은 더 적게 했다. 발정념과 사람 구하는 것만 중요하게 여겼다. 홍콩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아는 사람들이 모두 본토에 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누군가 물었다. “어디 불편하세요?” 옆에 앉은 사람이었다. 그에게 진상을 알리고 삼퇴를 권했다. 그는 당원이었고 계속 왕래하며 사업하는 사람이었다.

홍콩 기차역에서 나오자 노란색 대법 현수막이 눈앞에 나타났고 금빛이 반짝였다. 마치 날 부르는 것 같았고 감격에 눈물을 흘렸다. 수련생에게 다가가 우리는 같은 수련생이라고 말했다. 먼저 웡타이신(黃大仙) 진상 거점에 가서 수련생들이 어떻게 진상을 알리는지 보았고, 홍콩에서 어떻게 진상을 알려야 할지 알게 됐다. 이어서 몽콕(旺角) 진상 거점에 가서 진상을 알렸다.

2012년 7월, 청관회(靑關會)가 홍콩의 여러 곳에 대법을 비방하는 현수막을 걸기 시작했다. 우리의 마음은 큰 충격과 고통을 받았고 매일 진상 거점에서는 정사(正邪) 간의 대결이 있었다. 정법시기 대법제자로서 어떻게 법을 실증할 것인가가 우리 모든 대법제자의 엄중한 시험이 됐고, 우리 몇몇에서 10여 명의 수련생이 청관회를 고소하고 사부님의 결백을 되찾는 길을 걸었다…

우리는 전면적으로 주류 사회에 진상을 알리고 사람들을 구했다. 우리는 다양한 진상 편지를 써서 여러 부서에 편지를 보내고, 이메일을 보내고, 면담을 약속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진상을 알렸다. 소송 비용을 마련할 수 없다고 느끼곤 본토에서의 사업을 떠올렸다. 청관회의 출현으로 처음으로 사악이 백주에 대법을 비방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을 즉시 저지하고 사악을 해체하지 못해 매우 고통스러웠다.

자비와 위엄이 공존하는 가운데 진상 거점의 수련생들은 매우 확고했다. 사악이 소멸하지 않는 한 정념도 멈추지 않았다. 홍콩에서 소송이 시작되지 못했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장쩌민을 고소할 때 우리 수십 명의 수련생들은 대법을 박해한 청관회 두목과 전 행정장관을 함께 고소했다.

남편이 돌아온 후 물었다. “왜 모든 물건을 다 주고 돈도 다 줬어요? 당신 몫을 줬으면 됐지, 왜 남의 몫까지 줬어요?” 그가 대답했다. “당신 아직 젊은데(그때 30대였음) 일하기 싫어?” 그때 이해했다. 남편의 가족은 대가족이라 제가 일을 하지 않으면 가족들에게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고, 게다가 아이도 어렸다. 그는 줄곧 내가 일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내 수련의 길이 새롭게 배치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일해야 한다면 매체에 들어가야겠다.’ 본토에서 10년간 훈련받은 것이 쓸모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수련생이 다시 날 부를 때 이번에는 매체에서 일하기로 동의했다. 매체에 들어가기로 했지만 마음은 계속 복잡하고 불안했다. 때로는 ‘돈을 벌어 소송하는 것도 홍콩 사람들을 구하는 거야’라는 등의 이유로 스스로를 설득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매체에 들어가 영업을 하기로 했다.

매체에 막 들어갔을 때 두 친구가 내가 일하러 간다고 생각해서 돈을 주겠다며 홍콩에서 사업을 하고 사장이 되라고 했다. 나는 거절했다. 그중 한 명은 내가 가게를 열고 싶어 하지 않는 걸 보고 차를 살 돈을 나에게 주었다. 그 친구가 직장을 바꿔 집 근처로 가게 되어 더 이상 차가 필요 없어졌다고 했다. 이 두 친구는 모두 내가 예전에 본토에서 일할 때 서로 도왔던 사람들이었다. 난 생활비의 일부는 예전에 다른 사람들에게 빌려준 돈을 돌려받아 충당하려 했다. 하지만 매체에 들어가 영업을 시작하면서 예상치 못한 비용이 많이 들었다. 결국 이 시기가 내 인생에서 오히려 자신의 돈을 가장 많이 쓰게 된 때가 됐다. 처음에는 6년간 매체에서 일하고 나올 계획이었지만 아직 수련을 잘하지 못해 성과를 내지 못했기에 이제 두 번째 6년을 향해 가고 있다.

나는 깨달았다. 사람이 신으로 수련하는 것은 정말 엄숙한 일이다. 그러니 우선 좋은 사람이 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고, 그다음 진정한 수련인이 되어 진정으로 수련해내야 한다.

개인적인 체득이고 맞지 않는 점은 지적해주시길 바란다.

 

원문발표: 2024년 8월 2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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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4/8/20/47169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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