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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은 어른들에게 칭찬받기 위한 것이 아니다

글/ 미국 플로리다 대법제자

[명혜망]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1997년 어머니를 따라 수련을 접하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어른들의 인도로 수련을 시작했기에 법공부와 연공을 따라 하긴 했지만, 《전법륜》과 설법도 보고 《홍음》도 외웠지만 어른들의 칭찬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 더 컸습니다.

그 당시 저에게 수련은 너무나 따분하고 재미없는 것이었습니다. 그토록 많은 집착심을 버려야 한다니, 너무 어려웠고 다 버리면 인생에 무슨 즐거움이 남을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만하며 수련 원만이라는 원대한 목표는 어머니 같은 정진하는 수련생에게 맡기고, 속담에 ‘한 사람이 도를 얻으면 닭과 개도 승천한다’고 하니, 닭과 개도 승천하는데 직계 가족인 내가 수련을 못해도 그리 나쁜 귀착점은 아니겠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숙제를 하는 마음가짐으로 처음 2년을 수련했습니다. 성인이 되어 그 시기를 돌아보니 놀랍기 그지없었습니다. 우리가 법을 얻은 뒤 박해가 시작되기까지, 엄밀히 말해 제 수련 기간은 2년도 채 되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제게는 무척 길게 느껴졌습니다. 적어도 3~4년은 수련한 것 같았습니다. 책에서 본 법리는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고, 이후 경험과 지식이 쌓이면서 어린 시절 읽었던 법리를 끊임없이 검증하게 됐습니다.

박해가 시작된 후, 우리 가족 중에 수련자가 많다는 이유로 연이은 중공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대법 서적은 모두 중공에 압수당하고 손으로 쓴 필기만 남았습니다. 어머니와 이모도 납치되셨죠. 집안이 밤낮으로 불안해 법공부도 들쑥날쑥해졌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이후 학업 부담이 눈에 띄게 가중됐고, 고등학교 때는 같은 반 친구가 제 플레이어에 설법 녹음이 있는 걸 발견해 큰 소동이 날 뻔했습니다. 그래서 박해 초기 몇 년 동안 저는 수련인이란 신분을 서서히 잊고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한편으로 어머니도 숙제 검사하듯 매일 제 법공부 상황을 확인할 여유가 없었고, 다른 한편으로 외부 환경도 열악해 중국 내에서 수련하기엔 위험이 너무 컸습니다. 평범한 사람으로 사는 게 훨씬 편했죠. 게다가 세상은 그토록 화려하고 매력적인데 젊을 때 마음껏 누리고 즐기지 않을 이유가 있나요!

제가 이렇게 청춘을 적극적으로 즐기고 있을 때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고2 어느 토요일, 저는 즐겁게 하교해 주말을 보내러 집에 왔습니다. 그런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진상 자료를 배포하다 어머니가 납치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청춘의 경쾌한 멜로디가 갑자기 멈췄습니다. 어머니는 구치소에서 단식 항의를 하셨고, 우리는 만나지도 못한 채 매일 걱정만 했습니다. 고3 개학 첫 2주, 어머니는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재판 후 저는 구치소로 어머니를 뵈러 갔는데 도착해서야 이 모든 게 ‘610(파룬궁 탄압 기구)’의 계획이란 걸 알았습니다. 물론 우리 모녀를 만나게 해주려는 게 아니라, 제가 어머니를 설득해 판결에 따르고 단식을 중단하게 하려는 속셈이었죠. 제가 거부하자 저의 신분은 ‘설득자’에서 ‘인질’로 바뀌었습니다. ‘610’은 어머니를 협박하며 중공의 말을 듣지 않으면 저를 계속 구치소에 가둘 거라고 했습니다. 결국 어머니는 타협하고 저를 보내달라고 애원하셨습니다. 구치소를 나서자마자 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한편으론 뼈만 앙상하게 남은 어머니의 모습에 너무나 가슴 아팠고, 다른 한편으론 저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라고 느꼈습니다.

만약 성인이 된 후의 제가 당시 상황을 마주했다면, ‘610’ 그 무리야말로 쓸모없는 존재, 그것도 쓸모없는 존재 중에서도 가장 쓸모없는 존재라고만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 당시 저에겐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학교로 돌아온 후 한동안 아무리 열심히 해도 성적은 바닥을 쳤고, 고3 1학기에 고교 3년 중 최악의 성적을 냈습니다. 그해 저는 18번째 생일을 막 지냈는데 이모마저 자료 배포로 납치되셨습니다. 그 후 이모는 기적적으로 탈출했지만 종적을 감추셨습니다.

고3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춥게 느껴졌습니다. 긴장된 학업, 연이은 박해, 산산조각 난 가정, 그리고 마치 운명처럼 찾아온 뼈에 새겨질 듯한, 하지만 자멸할 수밖에 없는 짝사랑까지.

고3 전반기를 저는 이런 고통 속에서 보냈습니다. 학교에선 열심히 공부했지만 성적은 전혀 오르지 않았고, 한편으론 통제할 수 없이 절망적인 짝사랑에 빠져 있었죠. 당시엔 주말에 하루만 쉬었는데 집에 돌아오면 썰렁한 방 안에서 저와 아버지는 서로 얼굴만 쳐다보며 우울해했습니다. 매주 일요일 오후면 책상에 앉아 문제를 풀었습니다. 사실 학업 효율이 형편없어서 오후 내내 아무것도 못 했죠. 책상은 창문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보냈습니다. 바로 그런 우울한 일요일 오후, 이리저리 생각하다 문득 깨달았습니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내려와 사람을 제도하시는 이유는 인생이 정말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이구나.’

이렇게 간단한 이치였습니다. 대법 법리에서 이미 여러 번 설명했고 어릴 때 책을 읽을 때도 분명 봤지만 그 순간에야 비로소 그 깊은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일요일은 흐린 날이었고 공기는 답답했으며 햇빛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생각을 하는 순간, 창가의 구름이 갑자기 흩어지고 한 줄기 햇빛이 하늘에서 내려와 창 앞 빈 공간에 떨어졌습니다. 당시 저는 등을 구부정하게 하고 책상에 앉아 멍하니 있었는데, 눈앞에 벌어진 이 장면에 놀라 즉시 허리를 꼿꼿이 폈습니다. 만약 수련 과정에 중대한 전환점이 있다면, 저에게는 이것이 결정적인 전환점 중 하나였습니다.

그 순간 수련의 의미를 깨달았지만 바로 수련의 길로 돌아오지는 못했습니다. 집에 있던 모든 대법 서적이 압수됐고 유일하게 있던 데스크톱 컴퓨터도 수색 당시 압수됐거든요. 게다가 고3 학업이 바빠서 저는 곧 다시 문제를 풀고 시험 보는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한때 깨달음을 상징하던 그 빛줄기도 바쁜 일상 속에서 점차 잊혀갔습니다.

고3 마지막 몇 달 동안 제 성적은 정상으로 회복됐고 결국 대학 입학 시험에서 평균 수준의 실력을 발휘해 우한대학교에 합격했습니다. 가족에겐 큰 위안이 됐고 저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좋은 대학에 입학하는 것, 그것이 당시 제게는 가장 큰 소원의 실현이었습니다. 그 소원이 이뤄진 후 큰 기쁨이 왔지만 곧이어 큰 공허함이 찾아왔습니다. 기쁨은 짧았지만 공허함은 오래 갔죠. 모든 것이 그저 그렇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잉어가 용문(龍門)을 뛰어넘어 순식간에 용으로 변하는 그런 극적인 변화는 없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먹고 마시고 배설하고 자는 저였습니다. 다만 시험을 끝냈으니 먹고 마시고 배설하고 자는 일이 더 많아졌을 뿐이죠. 저를 둘러싼 세계가 순식간에 밝고 다채롭게 변했을까요? 아닙니다. 여전히 그 질서정연하고 천신만고한 세계일 뿐이었습니다.

특히 대학에 입학한 후, 주변 학생들은 모두 또래 중 엘리트들이었고 하나같이 대단한 인재들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자존감이 높았던 저였지만 동급생들 사이에서 그저 지능과 감성이 모자란 시골뜨기에 불과했죠. 이런 큰 심리적 괴리감은 제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고 자연스럽게 인생의 궁극적 질문들을 고민하게 됐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왔는가?’

대학 초기를 저는 이렇게 고통스러운 혼란 속에서 보냈습니다. 신입생 교육 때 학교에서 설문 조사를 했는데, 평범한 설문 조사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두 달 후 지도 교수님이 저를 따로 불러 상담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상담실에 가서야 상담 대상이 학교 심리 상담사라는 걸 알았고, 그는 지난번 설문 조사 결과 제가 우울증 경향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결과를 듣고 꽤 놀랐습니다. 저는 자신이 매우 강인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우울증에 걸렸을까요? 이 결과를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마음을 열고 진솔하게 이야기하는 척하며 심리 상담사를 적당히 대충 넘겼습니다. 하지만 상담실을 나서자마자 표정이 무너졌고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일단 가족과 친구들에게는 숨기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우울증이 의심되는 상태로 대학 1학기를 보냈습니다. 드디어 겨울 방학이 되어 집에 돌아갔지만 다른 대학생들은 영광스럽게 귀향하고 의기양양한 모습인 반면, 저는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채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도 멍하니 방학을 보내다가 곧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 의심스러운 우울증을 확진된 우울증으로 만들 참이었습니다. 이때 전환점이 왔습니다. 예전에 약간 알고 지내던 수련생 언니가 특별히 저희 집에 방문해 주었고, 제가 책이나 자료가 전혀 없다는 걸 알고는 제 플레이어에 사부님의 설법 녹음과 대법 경문을 넣어주었습니다.

저는 그 플레이어를 들고 학교로 돌아갔고 그때부터 정식으로 다시 법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대법에서 말씀하신 이치들은 여전히 제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어서 매우 친숙하게 느껴졌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인생의 고통과 시련을 겪은 후에 많은 풀리지 않던 문제들이 법공부 과정에서 하나씩 해답을 얻게 되었고, 법리에 대한 이해도 어릴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졌다는 점입니다. 성장한 후 다시 법을 읽으니 《전법륜》의 간단한 한 문장이 제가 깨달은 순간 큰 종소리처럼 울려 퍼져 저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예를 들어 《전법륜》 제3강의 “사람은 스스로 미혹 중에 떨어져 왔기 때문에 마땅히 훼멸되어야 하지만, 당신에게 한 차례 이 미혹 중에서 되돌아갈 기회를 주었다. 되돌아갈 수 있으면 되돌아가고, 되돌아가지 못하면 그것은 바로 계속되는 윤회와 훼멸이다”라는 구절은 어릴 때 읽을 땐 그냥 지나쳤고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의 저는 어머니가 수련 원만을 이루면 저는 승천하지 못해도 인간 세상에서 복을 받아 부귀한 한량으로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성장한 후에야 이것이 얼마나 유치한 생각이었는지 깨달았습니다. 부귀한 한량이 되는 것으로는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서 초탈하지 못하면 계속 미혹 속에 살게 되고, 미혹 속에서는 계속 업을 짓게 되어 결국 필연적으로 훼멸로 향하게 됩니다.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고 단지 시간의 길고 짧음의 문제일 뿐입니다. 수련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였습니다.

우울하고 폐쇄적이었던 제 마음은 법공부를 하면서 활짝 열렸습니다. 이런 혼자 수련하는 상태는 2008년 어머니가 감옥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와 우리 모녀가 다시 만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방학 때 집에 돌아가면 어머니와 함께 법공부를 하고 연공을 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의 진로에 대해 아무런 계획이 없을 때, 어머니가 갑자기 유학을 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으셨습니다. 집안이 박해받은 후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아 유학은 우리에게 너무 높은 목표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외국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현실 앞에서 망설였습니다. 그 과정의 우여곡절은 생략하겠지만, 어쨌든 저는 유학 중개인의 도움도 없이 맹인이 코끼리 만지듯이 기적적으로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2012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오게 되었습니다.

성공적으로 나왔지만, 현실 상황은 여전히 매우 어려웠습니다. 돈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순 없지만 돈이 없으면 많은 추가적인 문제를 야기합니다. 공부하던 몇 년간 제 계좌에는 자주 천 달러나 2천 달러밖에 없었습니다. 매일 공부하고 아르바이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었는데, 어떻게 1달러를 2달러처럼 쓸 수 있을지 걱정해야 했습니다. 다행히도 매번 궁지에 몰릴 때마다 뜻밖의 작은 돈이 생겼습니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임시 장학금 프로그램이 생겨 받게 되거나, IRS에서 자발적으로 이메일을 보내 제 세금 신고 오류를 확인하고 환급해주거나, 유급 인턴십을 찾게 되는 등이었죠. 어쨌든 사부님의 보호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빈털터리가 되어 거의 굶어 죽을 뻔한 상태에서 무사히 졸업하고 또 순조롭게 일자리를 찾았습니다.

어느새 미국에 온 지 12년이 되었습니다. 중국에 있을 때 저는 스스로 매우 굳건하게 수련하는 제자라고 생각했고, 법에 대한 믿음이나 불신의 시련을 겪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미국에 와서 환경이 안전하고 여유로워지자 오히려 믿음과 불신의 시련을 거듭 겪었습니다. 제가 동요한 이유는 다양했습니다. 처음 극장에 가서 션윈 공연을 봤는데 평범하게 느껴졌다거나, 가난한 유학생의 삶이 너무 힘들고 지쳐서 일자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 차라리 중국으로 돌아가 평범하게 살자는 생각, 또는 ‘수련생들이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이렇게 오랫동안 수련했는데도 이 모양이라니, 이 법은 정말 괜찮은 걸까?’라는 생각, 혹은 중국의 코로나 사태로 4억 명이 죽었다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등등, 이해되지 않는 게 많았습니다. 또는 때로는 이렇게 오랫동안 수련했는데 돌이켜보면, 게임만 해도 게임 점수가 올라가는 걸 볼 수 있는데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 같아 너무 성취감이 없었고 계속하기 어렵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는 단지 몇 가지 예시일 뿐이고, 더 많은 동요들은 여기 나열하지 않겠습니다. 일부 의문은 법리 속에서 해답을 얻을 수 있었지만, 곧 새로운 의문이 생겼습니다… 12년간 저는 이렇게 비틀거리고 넘어지면서 걸어왔습니다. 한번은 단체 법공부 전에 현지 수련생이 무심코 모두에게 질문을 던졌는데, 대략 “당신이 수련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이 질문에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지만 그 순간 떠오른 생각은 바로 “‘진선인(真·善·忍)’이 우주 만물 운행의 이치이기 때문이지”였습니다. 이것이 제가 수련을 계속하는 이유입니다. 오늘날까지도 이것이 제가 여러 가지 동요 속에서 걸어올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개인적인 원만, 고해에서의 탈출이 물론 매우 중요하지만, 저는 이에 대해 그렇게 강렬한 추구심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수련하는 이유는 제 마음 깊은 곳에서 ‘진선인’이 우주의 지고한 이치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마땅히 이 우주 특성인 ‘진선인’에 동화되어야 합니다. 우주의 질서, 정의, 균형, 조화, 원융불멸… 이 모든 것이 ‘진선인’에서 비롯됩니다. ‘진선인’의 법리가 없다면 우주는 아마도 어둡고 혼란스러운 혼돈의 상태일 것이고, 아니면 인간 세상의 확장판에 불과할 것입니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개인의 원만도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설령 피라미드 꼭대기에 올라 무상의 영광을 누리고 무한한 복과 장수를 누린다 해도, 세상의 온갖 불의를 보고 세상의 중생들이 모두 고통받는 것을 보면 마음이 괴롭지 않을까요.

저는 제가 계속해서 수련해 나갈 수 있기를, 그리고 언젠가는 이 우주와 암묵적인 이해와 공감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제가 현 단계에서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상태입니다.

이상은 제 심성 교류의 일부입니다. 부적절한 점이 있다면 수련생 여러분의 자비로운 지적을 부탁드립니다.

(2024년 플로리다 법회 원고)

 

원문발표: 2024년 8월 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4/8/5/48047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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