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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생의 글 ‘자아를 내려놓은 후의 홀가분함’을 읽고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처음 수련생의 글 ‘자아를 내려놓은 후의 홀가분함‘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며칠 동안 여러 번 읽었는데, 글에서 수련생이 찾은 집착심의 뿌리가 저와 비슷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쟁투심, 질투심, 과시심, 남을 무시하는 마음, 남을 바꾸려 하고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강요하는 마음 등이 그랬습니다. 이 ‘자아’가 제 수련의 길을 가로막는 걸림돌이었던 것입니다.

남편에게 표현된 ‘자아’

우리 부부 양가는 형제자매가 많은 대가족으로, 3대를 합치면 100여 명이 넘습니다. 남편은 남들 보기에 저는 영리하고 능력 있는 깔끔한 사람입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좋은 사람입니다. 남의 부탁을 잘 들어주고, 이익 다툼을 하지 않으며, 남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늘 그런 남편을 무시했습니다.

남편이 오랫동안 기숙사 생활을 하다 퇴직 후 집에 돌아왔는데, 그의 위생 관념이 눈에 거슬렸습니다. 세면대와 변기를 더럽히고, 침대 정리도 제대로 하지 않으며, 집안일에도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채소는 싼 것만 한 무더기씩 사 오고, 남을 배려하거나 좋은 말을 할 줄 모르며, 위챗을 즐기고 사교춤 영상을 보는 등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세속에 물든 남편은 일반인들 눈에는 과묵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저는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때로는 쳐다보기도 싫었습니다.

오랜 세월 남편에 대한 원망과 다툼, 무시하는 마음으로 살면서 안으로 찾을 줄 몰랐고, 강한 자아가 작용하고 있음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자아를 내려놓은 후의 홀가분함’을 읽은 후, 그 글을 따라 저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면에서 남편을 배려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를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하는 일을 믿지 못하고 그의 말을 듣기 싫어했습니다.

특히 아들이 이혼하고 손녀를 우리가 돌본 지 1~2년이 되었는데, 남편은 며느리에 대한 미움을 아이에게 옮겼습니다. 아이가 말을 듣지 않고 공부를 해도 상관하지 않아서 제가 뭐라고 하면 남편은 화를 내며 반박했습니다. 딸도 “엄마는 아빠한테 잔소리를 많이 하면서, 아빠가 한마디 하는 것도 못 참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도 잘못을 알지만 조급해지면 또 잔소리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 남편은 “말 한마디 못 하게 하네”라며 크게 화를 냅니다. 그런 남편이 더욱 싫어지고 뻔뻔해 보였습니다. 수십 년간 집안일에 무관심하다가 이제 와서 간섭하고 비난하고 욕하니 말입니다.

이 몇 년간 저는 남편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했습니다. 과거에는 제가 가정을 책임지고 경제를 맡았지만, 남편이 퇴직해 돌아온 후에는 급여 통장도 남편이 관리하게 했습니다. 자녀들은 어릴 때부터 무슨 일이 있으면 저를 찾았고 제가 모든 걸 처리한 뒤 남편에게 알리는 식이었는데,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앞으로 일이 있으면 아버지와 먼저 상의해라, 나는 상관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저에게 말하고, 제가 일을 처리한 후 남편에게 알리면 그는 때로 받아들이지 않고 기분 나빠했습니다. 돌이켜 보니 이 또한 깊이 숨은 자아의 표현이었는데 저는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제가 깨닫지 못하자 사부님께서 명혜주간 1161기를 읽게 하셔서 그 수련생의 글을 보고 깜짝 놀라게 하셨습니다.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사부님, 죄송합니다. 제자가 걱정을 끼쳐드렸습니다. 이제 그 뿌리를 찾았으니 반드시 뿌리째 뽑아내겠습니다. 사부님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조용히 생각해보니 남편도 여러 해 밖에서 일하느라 쉽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박해 전에는 제 수련 환경이 매우 좋아서 대법 일을 떳떳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복사기를 사고 재료를 사고, MP3 플레이어도 새로 나오면 샀는데 남편은 전혀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는 묵묵히 제 수련을 지지해주고 있습니다. 다만 박해의 그림자가 그를 두렵게 할 뿐입니다. 그도 사부님의 가족인데 제가 오히려 집착을 내려놓지 못하고 그를 상처 주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는 제 수련을 도와 제고하게 해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사과하고 싶었습니다!

며느리에게 표현된 ‘자아’

아들 부부가 이혼한 후 손녀는 우리가 맡았고, 아들과 며느리는 감정이 격해져 서로 연락도 하지 않습니다. 둘 다 무슨 일이 있으면 저를 찾았습니다. 자녀들은 제게 며느리 편을 들지 말고 상관하지 말라고 꾸짖습니다. 하지만 저는 수련자로서 그럴 수 없었습니다. 저 스스로에게 다짐했습니다. ‘그들 사이에 어떤 은혜와 원한이 있든, 나는 마음을 지키며 내가 할 일을 하겠다.’

며느리는 결혼 후 우리집에서 8년 가까이 살았는데 감정 기복이 심하고 말과 행동이 차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우리와 직접적인 충돌은 없었습니다. 저는 그들과 함께 살 때도 열심히 일하고 말을 아끼며 그들 일에 간섭하지 않고 번거롭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들 부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저는 늘 아들에게 아내를 이해하고 가정을 지키라고 타일렀습니다. 그래도 결국 그들은 헤어졌습니다. 이혼한 지 3년이 됐는데, 법원은 며느리에게 매달 양육비 1천 위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지만 지금까지 한 푼도 내지 않았습니다. 아이 양육비는 모두 제가 부담하고 있습니다. 며느리가 가끔 아이 옷과 장난감, 인형을 보내긴 하지만 우리가 사준 인형만 해도 두 자루나 됩니다.

한번은 며느리에게 연락해서 아이가 이제 컸고 공부할 시간도 없는데 장난감 놀 시간은 더더욱 없으니 앞으로 인형 같은 건 사주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며느리는 여전히 직접 가져오거나 택배로 보냅니다. 하지만 아이의 공부에 대해서는 전혀 묻지 않습니다. 설에 며느리가 아이를 며칠 데려갔다가 우리가 보낸 새 옷과 양말을 모두 버리고 새것을 사 입혔습니다. 아이가 돌아올 때 인형 한 무더기와 세뱃돈이라며 200위안 정도만 가져왔습니다. 당시 저는 기분이 몹시 상했습니다. 이는 며느리에 대한 이익심, 원한, 무시하는 마음의 표현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 또한 자아의 표현이었습니다. 남을 바꾸려 하고, 제 생각을 남에게 강요하며, 모든 일을 제가 결정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게 가능할까요?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요! 이제는 이런 좋지 않은 마음을 없애고 자비를 키워 모든 이를 선하게 대해야 함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함께 살다 실패해 헤어진 것만 해도 안타까운 일인데, 며느리를 비난하고 해친다면 그게 말이 될까요? 이렇게 생각하니 며느리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그녀에게 아름다운 미래가 있기를 바랍니다!

수련은 엄숙하고 대법은 신기합니다. 자비로우신 사부님께서는 시시각각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깨닫고 진심으로 뉘우칠 때 즉시 사부님의 말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집착을 내려놓으면 가벼워진 배 빠를 것이요 인심이 무거우면 바다 건너기 어렵도다”(정진요지2-심자명). 마음이 맑아지는 느낌이 듭니다. 바르지 않은 사람마음과 좋지 않은 생각을 모두 하늘 밖으로 던져버렸습니다. 머릿속에는 온통 사부님의 법이니, 사부님 말씀을 들어야 하고 매사에 법으로 대조해 진정한 수련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아’의 표현과 해로움

마지막으로 한 수련생이 법 속에서 깨달은 바를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자아’의 표현: 늘 자신이 옳다고 여기고, 자신의 인식이 항상 맞다고 생각하며, 남들은 자기보다 못하다고 여긴다. 교만하고 오만하며 남을 무시하고, 늘 남을 지도하고 바꾸려 하며,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강요한다. ‘자아’는 바로 강한 사심이며, 구우주 생명의 특징인 사심은 남만 바꾸려 하고 자신은 바꾸려 하지 않는다. 바로 이 사심 때문에 우주의 높은 층에서 떨어진 것이 아닌가!

마찬가지로 ‘자아’뒤에는 중국공산당(중공)의 무신론 독소가 숨어 있습니다. 항상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태도는 중공이 자랑하는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정확하다’는 주장과 얼마나 비슷한가요! 이 ‘자아’를 내려놓지 못하면 그 해악이 너무나 큽니다.

사부님을 공경하지 않고 법을 존중하지 않으며, 선과 자비가 없다면 ‘진선인(真·善·忍)’에 동화되는 것을 심각하게 방해할 것입니다. 더 심각한 경우에는 ‘자심생마(自心生魔)’하여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자아’를 내려놓지 않으면 누구와도 조화롭게 지낼 수 없고, 간격으로 인해 정체를 이루지 못하며, 사악에게 박해의 구실을 줘 서약을 실현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미래의 새로운 우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오직 ‘무사무아(無私無我)’의 경지에 이른 생명만이 진입할 자격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만년의 윤회를 기다려도 헛될 것이며, 후회해도 늦을 것입니다!

저와 같은 생각을 하는 수련생 여러분께서 참고하시고, 함께 정진하여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부적절한 부분이 있다면 수련생 여러분의 자비로운 지적을 부탁드립니다.

 

원문발표: 2024년 7월 2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4/7/21/47953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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