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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 기간에 연 식당이 문전성시를 이루다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제 친정집은 남쪽에 있고 저는 젊었을 때 북쪽으로 시집을 갔습니다. 결혼 전에는 남편의 집이 매우 가난하다는 것과 남편이 세 살 때 부모님이 이혼했다는 것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저 그가 불쌍하다고만 느꼈고 남편도 저를 열심히 쫓아다녔기에 그와 결혼했습니다. 저는 우리가 결혼한 후 둘이 힘을 합쳐 돈을 벌면 가난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1. 이 가정을 구한 대법

결혼 후에야 시아버지의 성격이 급하고, 남편은 가정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먹고 마시고 도박하고 매춘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설날이 다가왔는데 집에 돈이 없어서 이웃에게 돈을 빌려 작은 장사라도 해서 설날을 보내려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도박을 하러 가서 돈을 잃었습니다. 남편은 또 자주 다른 여자들과 어울려 다녔습니다. 그 후에 남편도 병에 걸리고 시아버지도 병에 걸렸는데, 시아버지는 어깨 주위염에 걸렸습니다. 남편은 어떤 병에 걸렸는지 검사할 돈도 없었고, 검사해서 무슨 병인지 알아도 치료할 돈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끌다 보니 남편은 건강이 하루하루 더 나빠졌습니다. 집의 땅도 경작할 사람이 없었고 정말 밥 먹는 것도 문제가 됐습니다. 아이는 아직 한 살도 안 됐는데 자주 아팠지만 병원에 갈 돈이 없었습니다. 아이가 아파서 울면 그저 낮이고 밤이고 아이를 안고 여기저기 걸어 다니며 아이가 울다 지쳐 잠들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날들이 언제 끝날지 몰랐습니다. 자주 한밤중에 아이가 울면 하늘을 바라보며 혼자 조용히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저 자신의 운명이 고달프다고만 원망했습니다. 제가 남편과 결혼할 때 친정에서는 반대했기 때문에, 저는 먼저 결혼하고 나중에 아이를 낳고 나서야 부모님께 알려드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모님께 제 상황을 말씀드리지 못하고 잘 지내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때 저는 자주 남편과 싸웠고 집을 떠나려고 했지만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저를 다시 데려갔습니다. 나중에는 ‘어차피 남편이 곧 죽을 텐데 지금 도망가서 그를 더 화나게 할 필요가 있을까, 그가 죽으면 그때 가면 되지’하고 생각했습니다.

남편의 생명이 거의 끝나갈 때쯤에는 걸을 때도 제가 부축해야 했습니다. 제가 기공을 좀 해보라고 제안하자 그의 친척이 파룬궁을 연마해보라고 제안했습니다. 파룬궁은 돈이 들지 않고 병 치료와 건강 증진에 효과가 아주 좋다고 해서 남편은 파룬궁 수련을 시작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은 병이 나았다고 했습니다. 정말로 예전에는 한 끼에 조금밖에 먹지 못했는데 이제는 한두 그릇을 먹을 수 있게 됐고, 걸음도 힘차졌으며, 밭에 나가 일도 하게 됐습니다. 저는 남편의 나쁜 습관도 고쳐졌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남편의 변화를 보고 둘씩 셋씩 모여 우리 집 이야기를 전하며 모두 대법이 이 가정을 구했다고 말했습니다. 모두 파룬따파를 칭송했고 많은 사람이 차례로 파룬궁을 배우러 왔습니다. 우리집은 큰 연공장이 됐습니다. 그 후 우리 마을에는 3~4개의 연공장이 생겼는데 그 광경은 매우 장관이었습니다.

물론 저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파룬궁을 연마했습니다. 아이도 더 이상 아프지 않았고, 시아버지의 병도 나았으며 온 가족이 화목하게 지냈습니다.

2. 발가락이 차에 깔려 잘렸는데 운전자가 주는 돈을 받지 않다

2008년 어느 날 오후, 남편이 세발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길가의 수리점에서 급하게 달려 온 큰 차가 남편의 차를 들이받았고, 세발자전거가 뒤집혀 남편이 그 밑에 깔렸습니다. 저는 급히 사람들을 불러 세발자전거를 들어올렸는데, 보니 남편의 발가락이 깔려 잘렸습니다. 한 개는 아직 조금 피부가 붙어있었고 나머지 네 개의 발가락은 다른 쪽에 있었습니다. 운전자는 급히 택시를 불러 우리를 시립병원으로 데려갔습니다. 병원에 도착하자 의사는 발가락을 접합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운전자에게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했습니다. 남편은 집에서 스스로 치료하기로 결정했고, 저와 남편의 고집으로 운전자는 우리를 집으로 데려다주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은 집에서 법공부와 연공을 했습니다.

운전자는 먼저 5만 위안(약 1천만 원)을 가져와 보상금으로 주려 했지만, 남편은 진선인(真·善·忍) 원칙에 따라 자신을 엄격히 요구하며 항상 타인을 위해 생각하여 운전자의 돈을 한 푼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운전자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도 돈 벌기 쉽지 않잖아요. 우리 사부님께서 항상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하라고 가르치셨어요. 여러분이 사람을 친 것도 고의가 아니었고, 제 이 정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집에 가서 연공하면 나을 거예요. 저는 파룬따파를 수련하니 사부님께서 돌봐주시니 병원에 가는 것보다 더 빨리 나을 겁니다. 안심하세요.”

하지만 운전자는 남편이 병원에도 가지 않고 돈도 받지 않자, 나중에 문제가 생겨 그를 협박할까 봐 걱정되어 그들 마을 간부를 데려와 우리에게 앞으로 그를 찾지 않겠다는 협약서를 쓰게 했습니다. 우리가 다 쓰자 운전자는 안심하고 떠났습니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대법이 가르친 사람은 너무 위대하다고 감탄했습니다.

남편은 집에서 법공부와 연공을 하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발가락 상처가 아물었고, 조금 피부가 붙어있던 그 발가락도 자랐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남편의 발가락이 잘린 후 지혈 주사도 맞지 않고 진통제도 먹지 않았지만 상처에서 피가 많이 나지 않았고 상처에 감싼 거즈만 적셨을 뿐이었습니다. 부상 후 전체 발도 부어오르지 않았고, 남편은 다친 발이 그다지 아프지 않다고 했으며, 여전히 정상인처럼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의 발가락을 보지 않으면 그가 다쳤다는 것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 운전자는 교사였는데 그는 이 일을 자신의 학생들에게 들려주었고, 학생들은 또 이 일을 부모님께 전했습니다. 이렇게 대법의 신기한 이야기가 우리 지역에 퍼졌습니다. 80대의 한 할머니가 이 일을 듣고 수십 리 밖에서 우리집을 찾아왔습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임을 보고 그녀는 감동의 눈물을 멈추지 못했고 제 손을 잡고 놓지 않으려 했습니다.

3. 마을 간부가 우리를 때리려다 자기를 때리다

한번은 우리 마을 간부가 당원 회의에서 사람들에게 대법제자(파룬궁수련자)를 신고하라고 하면서 남편의 이름을 직접 언급했습니다. 진상을 아는 사람이 이 일을 우리에게 알려주며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듣고 직접 마을 간부를 찾아가 진상을 알리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마을 간부 집에 도착하자 마을 간부는 우리를 보고 도둑처럼 마음이 불안해지며 긴장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무슨 일로 왔냐고 물었고 말투가 매우 불친절했습니다. 우리는 그가 사람들에게 대법제자를 신고하라고 한 일을 말하고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에게도 좋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한 나쁜 일을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화가 나서 우리를 때리려 했습니다. 저는 더 이상 그에게 진상을 알릴 수 없다고 보고 떠나려 했습니다. 우리가 막 그의 집 대문을 나서자 그가 주먹을 휘두르며 남편을 때리러 왔습니다. 이 상황을 보고 저는 그가 자기 자신을 때리기를 바랐습니다. 그러자 그의 오른손이 세게 자신의 왼쪽 뺨을 때리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어서 그는 또 발로 남편을 세게 차려고 했지만, 발이 빗나가 땅에 크게 넘어졌습니다. 이때 그는 정말 화가 나서 미쳐 날뛰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고는 그는 또 땅에서 돌을 주워 남편을 향해 세게 던졌습니다. 하지만 돌은 남편을 맞추지 못하고 나무에 맞았다가 다시 튀어 그의 몸에 맞았습니다. 이때 그는 입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내가 당신들 신고하라고 했다면 천둥벼락을 맞을 거야.”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본래 맑았던 하늘에서 갑자기 큰 천둥소리가 그의 옆에서 울렸고, 이때 그는 겁에 질려 집으로 도망쳐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 간부의 아내와 아들, 며느리가 쫓아왔고, 그의 아들이 또 주먹을 들어 남편을 때리려 했지만 주먹이 그의 어머니 몸에 맞았습니다. 나중에 제가 정념을 발하자 그들은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않았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이후로 마을 간부 집은 일이 항상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마을 간부는 늘 아팠고, 아들은 또 암에 걸려 베이징에 가서 많은 돈을 썼습니다. 며느리는 또 다른 사람에게 칼에 맞았고 나중에는 집을 떠났습니다. 그의 아내는 스스로 자신의 발을 찍었습니다. 몇 집이 양을 함께 방목했는데, 하필 그의 집 양들만 농약을 먹고 죽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의 집이 왜 그렇게 불운한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모두들 그들이 대법제자를 박해해서 보응을 받은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더 이상 감히 대법제자를 박해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아직 진상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에게 충고드립니다. 중공의 거짓말에 속지 마세요, 좋은 사람을 박해하지 마세요. 선과 악에는 보응이 있습니다. 보응이 왔을 때 후회해도 늦습니다.

4. 전염병 기간에 연 식당이 문전성시를 이루다

2010년, 저는 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갔고 집은 경찰들에게 털렸습니다. 생활용품까지 모두 압수되어 약 10만 위안(약 1900만 원)의 손실을 입었습니다. 남편은 어쩔 수 없이 떠돌아다녀야 했고 집에는 80대 노인과 14~15세의 아이만 남았습니다.

1년 반 후, 저는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남편이 세 들어 살던 집에 갔을 때 우리는 집세조차 낼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저는 일을 시작해 돈을 벌어 이 가정을 유지했지만, 몇 년이 지나도 많은 돈을 모으지 못했습니다.

2021년, 우리는 작은 식당을 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때 가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선의로 우리를 말렸습니다. “요즘 전염병이 심각하고 자주 도시 봉쇄가 있어서 과거에 장사가 잘되던 가게들도 지금은 장사가 안 되고 심지어 문을 닫고 있는데, 당신이 이때 가게를 여는 것은 상황을 몰라서 그래요. 돈을 버리는 거예요.” 남편도 정념을 잃고 더 이상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사부님 말씀을 굳게 믿었습니다. 대법을 수련하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 혼자 이 가게를 경영했고, 할 줄 모르는 것은 사부님께 청하면 곧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저는 엄격하게 수련인의 기준에 맞춰 행동하며 항상 타인을 위해 생각했습니다. 가게 장사는 점점 더 잘 됐고 나중에는 작은 가게로는 부족해서 더 큰 가게로 옮겼습니다. 남편도 돌아와 함께 일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다른 가게는 사람이 없는데, 당신들 가게는 매일 만석이고 심지어 기다리는 사람도 있네요.” 이때 저는 그들에게 우리가 대법을 수련하는 사람이라고 말해주며 진상을 알려주었고, 사람들은 모두 대법의 아름다움에 감탄했습니다. 나중에 우리는 방 3개 짜리 아파트도 샀는데 전액 현금으로 샀습니다. 우리는 마침내 우리 자신의 집을 갖게 됐습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대법을 칭찬했습니다. 자주 사람들이 “그의 집(우리 식당을 가리킴)에서 밥을 먹고 나면 마음까지 밝아져”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대법제자가 만든 음식은 질이 좋고, 환경도 좋고, 사람도 좋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이 전적으로 사부님 덕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부님의 시시각각의 보호가 없었다면, 사부님의 자비로운 깨우침이 없었다면, 저희는 오늘의 이런 환경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원문발표: 2024년 6월 2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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