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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심을 남길 것인가 제거할 것인가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명혜망 2024년 5월 22일에 실린 ‘해악신군과 영봉의 진념이 갇힌 ’그 공간’과 정진에 대해’라는 글에서 이런 구절이 있었다.

“저는 자주 어떤 수련생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당신은 집착심을 너무 극단적으로 버리려고 하는 게 아닌가요? 어떤 집착심은 그렇게 철저히 버릴 필요가 없어요. 어쨌든 우리는 속인 속에서 살고 있으니 여전히 속인 생활에 부합하기 위해 조금은 남겨둬야 해요.”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것은, 제가 크고 작은 집착심에 대해 그렇게 엄숙하게 대하는 것은 사부님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저를 일깨우시고 수련 중의 어떤 작은 일도 층차를 제고하는 관건이며, 어떤 방임하는 생각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저는 수련생들이 한 이 말이 자신이 집착심을 버리지 않으려는 것에 대한 변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속인 속에서 살기 위해 집착심을 능동적으로 남겨두어서는 안 되는데, 그럼 본말이 전도된 게 아닙니까?”

저자의 이 말에 저는 매우 공감이 갔고 저자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글에서 언급된 일부 수련생들의 “속인 생활에 부합하기 위해 조금은 남겨둬야 해요”라는 잘못된 관념을 완전히 명백히 설명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 말을 신수련생이 한 것이라면 법을 인식하는 과정일 뿐이므로 용서할 만합니다. 하지만 노수련생이 지금까지 이런 관념을 품고 있다면 매우 옳지 않을뿐더러 위험한 것입니다.

‘7.20’ 박해를 겪은 대법제자라면 모두 알 것입니다. 박해 초기에 깨달음이 바르지 못한 이들이 자신을 변호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전법륜》에 이런 말씀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이 한 법문, 속인 중에서 수련하는 이 부분은, 속인사회 중에서 수련하며 최대한 속인과 같게 유지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지, 물질이익에서 당신에게 그 무엇을 실제로 잃으라는 것이 아니다.” 사악에 굴복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깨달음이 바르지 못한 이들은 자신이 “최대한 속인과 같게” 했을 뿐이라고 궤변을 늘어놓았습니다. 왜 이런 오류가 생겼을까요? 의도적인 왜곡을 제외하고도, 이 문제에 대해 인식이 불분명한 사람들은 언제나 사람의 기점에서 법을 이해하고, 사람의 인식에 고착되어 내려놓지 않으며, 법에 동화되는 과정에서 진정한 수련인의 표준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글자 그대로만 봐도 법에서 말씀하신 “속인과 같게”란 “속인사회 중에서 수련하며”를 가리키는 것이지, 선과 악, 바른 것과 사악한 것을 분별하지 말라는 뜻도, 수련을 포기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수련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역사상 그 어떤 수련 방식도 “속인사회 중에서 수련하며” “최대한 속인과 같게 유지할 것”이라고 감히 말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대법의 끝없는 법력이 인간 세상에서 체현된 것 아니겠습니까? 법이 크기에 속인사회 중에서 수련할 수 있게 해주셨고, 출가할 필요도, 사찰에 들어갈 필요도, 심산유곡으로 들어갈 필요도 없이, 세속과 단절하지 않고서도 마찬가지로 집착심과 사람마음을 제거하고 신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법 수련은 사람마음을 직접 겨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약 사악에 굴복해 수련을 포기한다면 더는 대법제자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일 뿐, “속인 상태에 부합하는” 수련은 논할 수조차 없습니다.

집착심을 제거하는 데 있어 “속인 생활에 부합하려면 조금은 남겨둬야 한다”는 문제에 관해, 사부님께서는 여러 설법에서 수련생들에게 해답을 주신 바 있습니다. 이 설법들을 보면 수련 과정 중에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사람마음을 조금 남겨주셔서 속인 속에서 생활할 수 있게 하신 것은 법의 체현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제 이해로는, 법이 수련자에게 사람 속에서 생활을 유지하도록 사람마음을 조금 남겨주시기에, 대법제자가 아무리 엄격히 자신에게 요구해 집착을 제거한다 해도 세간에서는 사람마음이 전혀 없는 상태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법의 체현이지, 제멋대로 자신에게 어느 정도의 집착심을 남기는 것이 아닙니다.

사부님께서는 진수제자에게 설법하신 것이고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법리입니다. 진수제자는 착실히 수련하는 과정에서야 비로소 이 법리가 자신에게서 어떻게 체현되는지 체득하게 됩니다. 반면 스스로 일부 집착심을 남겨두고 제거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사람은 사람마음으로 법을 인식하고 곡해한 것이며, 수련의 표준을 함부로 바꾼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런 인식을 갖고서는 이 문제에서 진수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법의 체현은 논할 수 없습니다.

제 개인적 인식으로는, 개인수련에서 집착을 제거함에 있어 사부님의 요구는 누락이 없습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련이라, 무엇을 누락이 없다(無漏)고 하는가? 하찮은 일은 없다.”(각지설법13-2015년 미국서부법회 설법)

우리 개개인이 집착을 제거함에 있어 일시적으로나 일정 기간 수련의 요구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은 개인의 정진 정도 문제입니다. 하지만 이를 빌미로 수련의 요구를 곡해한다면 그것은 법을 이탈하는 것이며, 이는 매우 위험하므로 결코 가볍게 여겨선 안 됩니다.

이상은 제 현재의 약간의 인식일 뿐이므로 바르지 않은 점이 있다면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롭게 지적해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허스(合十)

 

원문발표: 2024년 6월 1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4/6/14/47866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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