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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이들의 소원은 박해를 멈추는 것 (중)

글/ 대만 대법제자

[명혜망] 진선인(真·善·忍)을 수련하는 좋은 사람이 박해받는 것, 이는 어린아이들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며 떨쳐내기 힘든 그림자가 됐다. 아이들의 얼굴은 맑은 거울과도 같아 순수한 영혼이 그대로 드러나고, 그들의 선한 말투는 내면에 간직한 사랑과 햇살과 같은 따뜻함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전편에 이어)

명혜망 통계에 따르면, 중국공산당(중공) 장쩌민 집단이 파룬궁을 탄압하기 시작한 1999년 7월 20일부터 2023년 11월 20일까지의 24년간, 중공의 박해로 사망한 파룬궁수련자 수는 신원이 확인된 사람만으로 이미 5,010명에 달한다. 게다가 수만 명의 수련자가 불법적인 징역 판결을 선고받았고, 수십만 명의 수련자가 불법적으로 노동수용소에 보내졌다. 이러한 데이터는 중공의 인터넷 및 정보 봉쇄를 뚫고 어렵게 얻은 것으로, 실제 박해 상황은 훨씬 더 심각하다.

중공의 잔인한 박해로 사랑하는 가족을 영영 또는 잠시 잃게 된 어린아이들은 오랜 세월 동안 혈육에 대한 기나긴 기다림과 애잔한 그리움 속에서, 그리고 수모가 동반하는 삶 속에서 슬픔과 분노, 두려움과 무기력에 떨어야만 했다.

다섯 살 왕징 “왜 나랑 안 놀아줘?”
10살 장자루이 “절 차별하지 마세요!”

사진 속 다섯 살 왕징(王淨)의 앳된 얼굴에는 마치 “친구야, 왜 나랑 같이 안 놀아줘?”라는 의문이 그려져 있는 듯하다. 왕징은 충칭 파룬궁수련자 돤스츙(段世瓊)과 왕즈하이(王治海)의 아들이다. 아이의 아버지는 2001년 7월, 쓰촨성 몐양시 신화 노동수용소에 구금돼 박해를 받았다. 아이의 어머니는 2003년 9월 17일, 쓰촨성 청두 구치소에서 박해로 사망했다. 어린 왕징은 조부모가 돌봐줬다. 파룬궁을 음해하는 중국공산당의 거짓말 선전에 속은 그의 친구들은 그를 조롱하며 그에게 욕설을 퍼붓기 일쑤였다. 왕징은 우울과 슬픔 속에서 나날을 보내야 했다. 같은 시기, 또 왕징과 아주 비슷한 경험을 한 창춘시의 7살 소녀 정셴추(鄭先楚)는 학교의 학습 환경과 분위기에 적응하기 위해 남들 앞에서 부모의 실명조차 입에 올리지 못했다.

만약 다시 2004년으로 되돌아가 그 당시 헤이룽장성 다칭시의 10세 어린이 장자루이(張家瑞)를 만난다면, 그 아이의 쓸쓸한 표정이 한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2004년 12월, 장자루이의 아버지 장빈(張斌)은 또 한 번 납치돼 쑤이화(綏化) 노동수용소에 불법 감금돼 잔혹한 고문을 당했다. 그때 장자루이는 초등학교 3학년생이었다. 어머니 청칭란(成慶蘭)은 이렇게 말했다. “아이가 오랫동안 아버지의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했고, 거기에 학교 친구들, 선생님들과 기타 환경으로부터 오는 차별을 항상 받아왔기에 자존감이 너무 낮아졌고, 우울한 마음으로 생활하다 보니 학업 성적도 좋지 않았습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아이의 심신 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 같습니다.”

파룬궁 탄압을 위한 중공의 거짓 선전과 고압적인 박해 정책 속에 형성된 전 사회적 증오 분위기와 파룬궁수련자에 대한 차별은, 때때로 수련자들의 미성년 자녀들을 괴롭히기에 충분했다. 충칭 장진시 출신의 소녀 리칭칭(李淸淸)은 13살 때 어머니가 중공의 박해로 사망한 후, 또래와 반 친구들로부터 냉대와 조롱을 당했는데, 아이는 홧김에 농약을 100ml 삼킨 적도 있다.

완루이 “저 나쁜 사람들이 두려워요!”
류샹 “고아원이 무서워요!”

중공은 파룬궁에 대해 ‘명예를 실추시키고, 경제를 파탄시키며, 육체를 소멸하라’라는 학살 정책을 실시했다. 이 정책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이들의 얼굴에는 그 공포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장시성 난창시 출신의 완루이(萬如意)는 4살 때 공원을 산책하면서도 “나쁜 사람들이 우리를 따라오고 있어요!”라고 겁에 질린 표정을 짓곤 했다. 아이의 아버지 완리지(萬裏驥)는 난창시 둥후(東湖)대대 전직 경찰이었다. 그는 파룬궁 수련을 이유로 5년간 심한 육체적, 정신적 고문을 당하다가 2004년 2월 9일 고작 34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완 씨가 사망했을 당시, 화장될 때까지 시신에서 피가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아버지가 억울하게 사망한 후 어린 루이의 가족은 어머니가 하는 작은 장사로 겨우 생계를 유지했다. 4살 루이는 종종 “아빠한테 전화해야지”라며 혼잣말을 하곤 했다. 아이는 가끔 공원을 산책할 때도 중공 경찰의 감시를 받는 느낌을 받았다.

선전시의 류샹(劉響)은 11살 때 고아원을 가장 무서워했다. 그의 부모는 모두 선전시 난터우 중학교 전직 교사였으나, 어머니 왕샤오둥(王曉東)은 2003년 7월 선전시 난산 구치소에서 박해로 사망했다. 아버지 류시펑(劉喜峰)은 2003년 12월 불법적인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쓰후이(四會) 감옥에서 박해당했다. 11살의 류샹(劉响)은 늘 공포감과 두려움을 안고 선전시 고아원에서 생활해야 했다. 만약 고아원을 탈출하면 경찰의 추적을 받아야 했기에 그저 참아야 했다.

후난성 융저우시의 류샤오톈(劉曉天)도 미성년자 시절 중공 경찰에 쫓기는 공포를 경험했다. 2001년 11월 23일, 류샤오톈은 자기 부모를 박해하던 경찰이 학교로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고서 놀라 학교를 벗어나 이웃집 잡동사니 방에 숨어 하룻밤을 지냈다. 하지만 2~3일 후, 경찰 7~8명이 와서 이웃을 위협했고, 아이는 삼촌에게 목숨을 의탁할 수밖에 없었다. 몇 달 후 경찰에게 발각되자 삼촌은 또 친구에게 도움을 청해 조카를 선전시의 마대를 쌓아 놓는 큰 창고로 피신시켰다. 그곳에서 샤오톈은 꼬박 1년 넘게 머물렀다. 그 후 삼촌은 거액을 빌려 사람에게 부탁해 조카를 덴마크에 보냈다. 샤오톈은 덴마크에서 난민 신분을 획득한 후에야 자신의 어머니도 중공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쑨밍위안 “엄마, 아빠를 돌려주세요!”

부모를 구해달하는 호소가 적힌 종이 간판을 가슴에 단 이 소년은 지린성 더후이시의 쑨밍위안(孫明遠)이다. 그의 부모는 파룬궁을 수련하며 진선인(真·善·忍)을 실천하는 좋은 분들이었다. 아버지 쑨첸(孫遷)은 수련을 이유로 불법적인 판결을 받아 12년을 선고받았고, 어머니 마춘리(馬春麗)는 2004년 12월 더후이시 구치소에 수감돼 박해로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까지 이르렀다. 외롭게 혼자 남은 어린 쑨밍위안은 이모할머니에 의지해 살 수밖에 없었다. 2005년 설날 오전, 소년은 “제 엄마, 아빠를 돌려주세요, 도와주세요!”라는 호소 글이 적힌 팻말을 목에 걸고 더후이시 상무 빌딩 앞에 서서 사람들에게 부모의 불행을 알리며 관심을 호소했다.

양성웨이와 여동생 “우리를 때려죽인다 해도 두렵지 않아요! 엄마를 돌려주세요!”

여동생을 업고 공안국에 찾아가 어머니를 돌려달라고 요구한 이 소년의 이름은 양성웨이(楊盛偉)다. 소년은 바로 전날 지린성 바이산시 푸쑹현 공안국 경찰에게 얼굴을 구두로 걷어차였다. 그러나 분노의 마음에 두려움을 뒤로한 채 13세 소년은 어머니를 되찾기 위해 세 살배기 여동생을 등에 업고 부당하게 어머니를 잡아간 푸쑹현 공안국을 찾아 떠났다. 어머니 양중훙(楊忠紅)은 2006년 9월 19일 파룬궁 진상을 알리다가 불법적인 납치를 당해 감금됐다. 불법 수감 중 그녀는 ‘철의자(鐵椅子, 중공이 파룬궁수련자를 박해하는 고문 수단 중 하나)’에 묶인 채 협박과 고문을 당했다.

허베이성 슝(雄)현에 사는 12살 소녀 류첸(劉倩)의 특별한 이야기는 모든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선생님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다. 이는 허베이성 슝현 거거좡(葛格庄)촌에서 벌어진 일이다. 거거좡촌 초등학교 3학년에 다니던 류첸은 2003년 11월 15일 급성 백혈병에 걸렸고, 이후 생명이 위태로워졌는데 가족은 아이가 죽은 후 입관 시 입을 옷까지 다 준비했다. 그러면서도 벼랑 끝에 몰려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심정으로 부모는 최후의 방법이라 생각하고 아이를 데리고 파룬궁을 배우기 시작했다. 류첸은 수련 7일 만에 병이 완전히 회복돼 침대에서 일어나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됐고, 병원 검사 결과에서도 모든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두 달이 지나서 개학 후, 학교 교장은 중공의 압력으로 불법적으로 류첸을 강제 퇴학시켰고, 류첸이 파룬궁 수련을 포기하지 않는 한 학교에 돌아올 수 없다고 엄포를 놨다. 강제 퇴학당한 이튿날 교장을 만났을 때, 류첸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물을 흘리며 교장을 가리키면서 분개하듯 말했다. “저기, 저기, 저 사람이에요…” 핍박과 괴롭힘에 시달리던 류첸의 정신상태는 날로 나빠졌고 5일 후 우울한 마음으로 결국 사망했다.

어린 류첸은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아이는 아마 많은 의문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왜 교장 선생님은 학생을 아끼지 않나요?’, ‘왜 정부는 파룬궁 수련을 허용하지 않나요?’

류모한 “왜? 무엇 때문에요?”
쉬솨이 “무슨 근거로 아빠를 살해했나요?”

아이들에게는 너무나 많은 ‘무엇 때문에?’라는 의문이 남아있다. 지린성 눙안현의 류모한(劉默涵)은 5학년 때 말했다. “왜 우리 아빠 류청쥔(劉成軍)을 고문해 죽였나요? 아빠가 파룬궁 진상을 알린 게 뭐가 잘못인가요? 무엇 때문인가요?”

여섯 살 때 파룬궁을 수련한 지린시 어린이 쉬솨이(徐帥)는 이렇게 물었다. “왜 연공을 못 하게 하나요? 무슨 근거로 우리 아빠를 살해했나요? 무슨 근거로 우리 할아버지를 살해했나요? 무슨 근거로요?”

이 아이들은 당시 가장 어린아이가 겨우 두 살이고, 가장 큰 아이도 채 열 살이 되지 않은 나이였다. 그들의 무고하고도 연약한 목숨은 중공의 극악무도한 파룬궁 박해 속에서,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은 지옥 같은 상황을 견뎌내야만 했다.

중공의 박해가 조성한 그림자가 본래 근심 걱정 없고 천진난만해야 할 아이들의 유년 시절을 삼켜버렸다. 공포와 두려움, 걱정에 휩싸인 앳된 얼굴들은 단순히 그래프상의 차가운 숫자만이 아닌, 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생생한 생명이다.

(계속)

 

원문발표: 2024년 6월 14일
문장분류: 해외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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