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미국 대법제자
[명혜망] 제가 중국에서 박해당하던 시절, 전 세계 구조 플랫폼의 수련생들 덕분에 구조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경험을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2016년 9월 어느 날 저녁 8시 무렵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아직 중국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별생각 없이 “누구세요?”라고 물었더니 윗집에서 물이 새서 왔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이웃이구나 싶어 문을 열어주었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문밖에는 경찰관 세 명이 서 있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는데 뭔가 누락이 있어서 경찰이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중 한 경찰이 “모모 씨(제 남편 이름) 댁 맞나요?”라고 물으셨고, 저는 “네, 맞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경찰은 자기가 지구대 경찰이며 확인할 일이 좀 있다고 했습니다.
제가 “그런데 왜 거짓말을 하셨나요?”라고 묻자 그는 “문을 안 열까 봐 그랬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집 안으로 들이고 거실에 앉혔습니다. 그러자 경찰은 우리 가족이 실명으로 장쩌민을 고소했다면서, 저희 중 한 명이 파출소에 같이 가서 상황을 확인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당시 저는 집에 프린터와 진상 자료들이 있다는 걸 떠올리고 혹시 발각될까 봐 경찰과 함께 가기로 동의했습니다. 가기 전에 화장실에 가서 우리 가족 단체 채팅방에 상황을 알리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파출소에 도착하자 경찰들은 저를 한 방으로 안내했는데, 안에는 다섯 명 정도의 경찰이 더 있었습니다. 그중 한 명이 서류 봉투를 꺼내 들었는데, 바로 우리 가족이 장쩌민을 고소한 자료였습니다. 경찰은 자료를 보면서 “당신들 전에도 잡혀왔었네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맞아요. 몇 년 전에 시 국내안전보위대와 파출소에 끌려가서 컴퓨터, 프린터, 개인 물품을 빼앗겼어요. 심지어 남편, 70세 시어머니, 7살 아이까지 다 잡혀갔죠. 파룬따파(파룬궁)를 수련한다는 이유로 박해당한 겁니다. 그런데 지금 대법원에서는 사건 접수와 수리를 의무화했어요. 우리는 파룬궁 박해의 원흉인 장쩌민을 최고검찰원과 최고법원에 고소했고, 최고법원으로부터 접수증도 받았습니다. 장쩌민은 이제 국가수반도 아니고 면책특권도 없어요. 그를 고소하는 건 제 권리예요. 이건 당신들하고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제 말을 들은 경찰들은 표정이 한결 편해졌습니다. 자기들이 한 일이 아니라는 투였죠. 저는 계속해서 그들에게 진상을 알렸고 그들은 메모하더니 서명을 요구했습니다. 사실 하고 싶지 않았지만 경찰이 “당신이 한 말 맞죠? 그럼 서명해야 해요”라고 해서 별생각 없이 서명했습니다. (나중에 이게 대법의 요구에 어긋난다는 걸 깨닫고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 후 경찰은 저를 이틀 동안 구류하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치에 맞게 그들과 맞섰고 그들은 강제로 저를 촬영했습니다. 그때는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고 밖에는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한 젊은 경찰이 운전을 하고 지구대 경찰이 동승해 저를 웨이쯔거우 구치소로 데려갔습니다. 차에 탄 저는 계속해서 그들에게 진상을 알렸죠. 파룬따파가 전 세계 100여 개국에서 널리 전해지고 있다는 점, 중국에선 진상을 접하기 어렵다는 점을 말하며 대법제자 박해에 가담하지 말 것을 권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은 물론 가족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거라고요. 그러자 젊은 경찰이 난감한 표정으로 “저도 하기 싫습니다”라고 말했고, 지구대 경찰은 “당신 집이 파출소랑 이렇게 가까운데 우리가 몇 년째 한 번도 안 갔잖아요”라며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차 안에서 저는 내내 정념을 발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집착 때문에 사악이 틈을 타게 되었나 안으로 찾아보았습니다. 그날 밤엔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습니다. 구치소로 가는 길은 원래 그들에게 익숙한 길인데, 그날따라 길을 잃고 한참을 헤매다가야 겨우 찾을 수 있었습니다. 차를 세운 곳은 구치소 정문과 꽤 거리가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구치소 입구에 도착했을 때 제 몸과 신발, 머리카락은 전혀 젖지 않았습니다.
구치소 당직 경찰은 20대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절 데려온 경찰들에게 퉁명스럽게 건강 검진부터 시키라고 했습니다. 당직 의사가 나와서는 두 경찰을 매우 싫어하는 태도로 대하더니 저에겐 살며시 “몸에 어디 아픈 데 없어요?”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딱히 아픈 곳은 없고 예전에 부종이 좀 있었다고 했더니 의사는 절 훑어보고는 경찰들에게 몸에 이상이 있으니 구치소에선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절 데려온 경찰들이 전화로 윗선에 연락하려 하자 구치소 측과 언쟁이 붙었습니다. 그 젊은 당직 경찰은 저에겐 정중하게 “아주머니, 여기 앉아서 쉬세요”라고 하고선 호송 경찰들에겐 “우린 함부로 사람을 받는 게 아닙니다. 전화해봤자 소용없으니 병원에 가서 검진이나 하세요”라며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창문과 불을 다 끄고 우릴 내버려두었습니다. 경찰들은 어이없다는 듯 “병원으로 갑시다”라고 했습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새벽 3시가 넘은 시각이었습니다. 경찰들은 접수하러 갔고 저는 정념으로 모든 박해의 요소를 제거하면서 이 모든 걸 사부님께 맡기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신체검사를 받았죠.
저를 맡은 건 젊은 여의사였는데, 저는 그녀에게 제가 파룬궁수련생이고 끌려왔을 뿐 죄수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 의사는 저를 너무 안쓰럽게 바라보더니 진단서에 알 수 없는 내용을 줄줄 써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후 그녀는 경찰들에게 제 병세가 아주 위중하니 어서 큰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경찰들은 완전히 맥이 빠졌습니다.
병원을 나서자마자 구치소로 돌아가 서류를 받으러 갔습니다. 아까 그 젊은 당직 경찰은 데려온 경찰들을 보자마자 또 한바탕 심하게 나무랐습니다. 그들은 부끄러운 듯 얼른 차에 올랐습니다.
파출소 앞에 도착했을 때, 운전했던 경찰이 이상하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출발할 때만 해도 기름이 얼마 없었는데 이렇게 먼 거리를 다녀와도 여전히 그대로네.” 저는 다시 한번 박해에 가담하지 말고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기억하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랬더니 지구대 경찰이 저에게 이런 부탁을 했습니다. “아주머니, 외국에 있는 당신 친구들(해외 수련생들)에게 제발 제 휴대폰으로 전화하지 말라고 좀 전해주세요. 제 폰이 폭발할 것 같거든요.” 이런 일이 있고 난 뒤 저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마음속엔 사부님에 대한 한없는 감사가 가득 차올랐습니다.
이 일을 겪으면서 저는 법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음을 깨달았습니다. 경찰의 질문에 협조함으로써 “어떤 환경이든지 사악의 요구, 명령과 지시에 협조하지 말라. 여러분이 모두 이렇게 한다면 환경은 이렇지 않을 것이다”[정진요지2-대법제자의 정념(正念)은 위력이 있다]를 해내지 못했습니다. 저는 또 남편에 대한 미련과 사악의 박해에 대한 두려움, 경찰에 맞서려는 쟁투심 등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을 거치며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 속에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올 수 있었음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절대로 사악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수련생들에게 들은 얘기로는 해외 수련생들이 끊임없이 중국으로 전화를 걸어 공안, 법조계 등 많은 이들에게 진상을 알렸다고 합니다. 이번에 구치소에 끌려갔을 때 당직 경찰과 의사가 절 납치한 경찰들을 매우 싫어하고 저에겐 상냥했던 것을 보면, 중생들이 각성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현재 저는 해외로 나와 ‘글로벌 구조 플랫폼’의 전화 구조 항목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전화 구조의 중요성을 더욱 절감하고 있습니다.
이 경험을 수련생 여러분과 공유하며, 한편으로는 저 자신에게도 느슨해지거나 해이해지지 말고 더 많은 중생을 구함으로써 서약을 이행할 것을 다짐해 봅니다.
부족한 점이 있다면 수련생 여러분의 자비로운 지적을 부탁드립니다.
원문발표: 2024년 6월 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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