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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님께 간청드림’에 대해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대법제자가 위험에 처했을 때 사부님을 부르는 것은 사부님과 법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전에 나는 문제가 생길 때 사부님께 간청드릴 줄 몰랐는데, 그 원인을 살펴보니 무신론의 세뇌를 받아서 어떤 일이 생기면 스스로 해결하려고 했고, 사부님께 간청드린다는 개념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당문화(공산당 문화)’의 사고방식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리 어렵고 큰일이라도 홀로 맞서 싸우고 버텨야만 한다고 여겼다.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은 마치 허락되지 않는 일 같았고, 자신이 무능력하고 실력이 없어 보이는 것 같았다. 악당이 만들어낸 소위 영웅이나 위인들처럼 불길 속에서도 꼼짝 않고 엎드려 있고, 자신의 살과 피로 총구멍을 막으며, 땅에 떨어진 돌멩이를 주워 하늘의 전투기를 맞추는 것처럼, 사람의 능력 밖의 일이라도 감히 사람의 힘으로 맞서야 하고 사람의 힘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여겨야 했다.

그리고 공산 악령의 ‘증오심’ 때문이기도 했다. 신, 부처, 우주에 대한 원한을 어릴 적부터 주입 받아 수련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됐다. 그래서 수련과 관련된 일을 하면 증오심 때문에 온몸이 거북해졌다.

법공부와 수련을 통해 사악이 만들어낸 여러 사상적 장애를 깨부수면서 나는 사부님께 간청드리는 것이 어색하고 거북해서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던 데에서, 문제가 닥치면 사부님께 간청드리는 법을 배우게 됐다. 또한 대법제자가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사부님께 부탁드려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법제자의 사부님과 법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자신을 고립무원의 속인으로 여기는지, 아니면 자신을 사부님이 책임지시는 속인을 초월한 사람으로 여기는지를 나타낸다는 것을 점점 더 깨닫게 됐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수련생들과 또 다른 ‘사부님께 간청드림’에 대해 교류하고 싶다. 교류 글에서 수련생들이 속인 일을 만났을 때 사부님께 간청드리는 내용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속인 친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사부님께 간청드리고, 자녀가 시험을 치르거나 직장을 구하거나 배우자를 찾을 때도 사부님께 간청드린다. 결국 속인이 겪는 일을 사부님께서 해결해주시길 바라는 것인데, 이렇게 하면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여 사부님께 간청드리는 것이 정말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이에 대해 내 작은 인식을 나누고자 한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육친(親人)에게 재난을 없애고 병을 없애달라고 비는 것도 모두 육친정(親情)에 대한 집착이다. 다른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려 하는데, 사람은 제각기 운명이 있다!”(전법륜)

“대법을 당신 개인적인 일에 사용하려고 한다면, 내가 생각하건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맞지 않다. 대법제자로서 당신이 정말로 잘 할 수 있을 때면, 내 생각에 그 시끄러움도 당신이 보는 것처럼 그렇게 절대적이 아니다.”(2003년 정월대보름 설법)

대법제자가 수련 중에 겪는 일들은 표면적으로는 모두 속인 속의 일이지만 사실은 우리의 수련을 위한 것이다. 가정에 갈등이 생기거나, 친구나 친지에게 무슨 일이 생기거나, 자녀 인생의 큰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등의 일은 모두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는 것이다. 거기에서 우리가 닦아 없애야 할 사람마음의 집착이 드러나게 하고, 사람의 것을 내려놓아 심성과 경지를 제고하도록 하는 것이다.

더욱이 수련하는 사람은 ‘사람은 제각기 운명이 있다’(전법륜)라는 것을 알며, 주변 속인들에게 어떤 일이 닥쳤을 때 무슨 일인지를 더 잘 알고 높은 경지에서 바라볼 줄 안다. 이런 일에 부딪혔을 때 드러나는 사람마음은 바로 수련하는 사람이 닦아야 할 곳이고 넘어야 할 고비인데, 이때 자신을 수련하지 않고 도리어 사부님께 해결해달라고 부탁드리는 것은 자신을 속인으로 끌어내리고 사람마음으로 수련의 문제를 대하는 것이 아닌가?

신수련생으로서 법에 대한 인식의 과정이 있겠지만 노수련생이 아직도 이런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이는 대법 수련에 대한 인식이 아직 부족한 건 아닐까?

대법제자가 사부님께 간청드릴 때 사부님께서는 우리의 사부님과 법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확고한 정념을 보고 싶어 하신다고 생각한다. 만약 속인의 집착심을 버리지 못하고 바람을 품은 채 간청드린다면 사부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겠는가? 속인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부처님께 절을 하는데 이는 본래 ‘부처님께 비는’ 의미를 왜곡한 것이다. 수련인으로서는 더더욱 이런 그릇된 인식을 ‘사부님께 간청함’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

내가 생각하기에 법에서 말씀하신 ‘사부님께 간청함’은 속인이 명예, 이익, 정을 위해 사부님께 바람을 품고 간청하는 것이 아니다. 전자는 수련인의 사부님과 법에 대한 바른 믿음과 정념이고, 후자는 속인의 마음과 욕망이 만족되길 바라는 것이다.

대법제자로서 사부님께 간청드릴 때는 자신이 법에 서 있는지, 사람에 서 있는지, 수련인의 정념에서 우러나온 것인지, 아니면 속인 마음에서 나온 것인지를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련인이 속인 마음을 내려놓지 않고 사부님께 바람을 갖고 구한다면, 그 이면에는 대법을 이용하려는 마음도 감춰져 있는 것은 아닐까. 게다가 사부님께서는 수련하는 사람만 책임지시고 속인은 상관하지 않으시며, 속인의 일생은 이미 다 배치되어 있다. 속인을 위해 사부님께 무언가 배치해 달라고 하는 것은 사부님께서 어떻게 하시길 바라는 것이 아닐까. 이런 마음은 모두 사부님과 법을 공경하지 않는 매우 좋지 않은 마음으로 수련인이라면 경계해야 한다.

그렇다면 왜 어떤 수련생은 속인 일로 간청드려도 사부님께서 ‘들어주시는’ 것일까?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허다한 사람들이 관음보살을 보았고 어떤 수련생은 불상을 가지고 개광한다.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겠다. 사람이 부처에게 절하는 그 순간에 내보내는 마음은 가장 慈悲(츠뻬이)하고 가장 선량하며 가장 좋은 마음이다. 당신의 이 마음을 보호하기 위해 당신으로 하여금 관음보살의 형상을 보게 한 것이다. 사실은 모두 내 법신의 현현(顯現)이다.”(파룬따파의해-베이징 파룬따파 보도원회의에서 말씀하신 정법에 관한 의견)

내 이해로는 표면상으로는 대법제자가 속인 일로 사부님께 간청드려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표면 현상일 뿐이고 그 이면에서는 사부님께서 속인 일을 해결해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현재 이해할 수 있는 몇 가지 이유에 대해 말해보겠다.

한 가지는 어떤 수련생이 사부님께 간청드릴 때, 예를 들어 중병에 걸린 속인을 위해 사부님께 빌 때 사람의 정 때문이 아니고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서도 아니라 자비심에서 우러나와 그를 위해 사심 없는 마음으로, 혹은 진정으로 중생을 구하는 정법의 각도에서 모든 것을 사부님께 맡기고 사부님께서 주관하시길 청한 것이다. 수련생에게 사람을 구하려는 마음과 사부님과 법에 대한 정념이 있었기에 대법의 위력이 나타난 것이다. 혹은 사부님께 간청드릴 때 비록 그 마음이 그렇게 순수하지는 않았을지라도 확실히 법에 부합되는 정념이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사부님께서 선한 마음을 수호하기 위해, 제자의 정념을 공고히 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중생을 구하기 위해 이런 일들을 해주신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우주 정법 중에는 우리가 볼 수 없는 수없이 복잡한 원인들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 속인이 바로 그때에 그런 형식으로 대법의 제도를 받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이 이면에는 사부님의 우주 정법 중의 배치와 사부님의 중생에 대한 자비로운 제도가 있는 것이다.

​또 다른 가능성은 이 속인의 일생에 이때쯤 되면 이런 일이 나타날 시기가 된 것일 수도 있다. 사부님께 간청을 드리든 안 드리든 나타날 일이고 원래부터 이렇게 배치되어 있었을 것이다. 대법제자가 사부님께 간청해 사부님께서 나타나게 하신 것이 아니다. 수련하는 사람이 속인의 마음을 갖고 사부님께 청하고 바라는 결과를 얻으려 한다면 사부님께서는 상관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수련인의 이런 마음은 누락이 되어 아주 쉽게 구세력에 틈을 주어 교란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이 바라는 결과를 나타나게 배치하여 당신이 원래 닦아버려야 할 집착심을 키우고, 일이 있을 때 자신을 수련하지 않고 사부님께 해결을 구하는 그 마음을 강화시킨다든지, 혹은 다른 수련생들에게 이를 보고 바라는 마음을 깊게 만든다든지 하는 식이다. 혹은 겉으로는 당신이 바라던 결과를 얻게 해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이후의 발전 과정에서 다른 교란이 나타나게 해서 박해하도록 하고, 이로써 사부님의 정법 중의 배치를 교란한다. 즉 겉으로 보기에는 사부님께 간청드린 것이 뜻대로 이루어지고 사부님께 청하니 들어주시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구세력의 빈틈을 타고 구세력이 배치한 길을 걷게 된 것이어서 자신에게 불필요한 곤란을 초래하고 사부님께 더 많은 근심을 끼치게 된 것이다.

나의 깨달음으로는, 대법제자가 사부님께 간청하는 것은 자신을 제도해주신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경외심의 발로이지, 속인의 마음을 갖고 속인이 추구하는 바를 위해 청하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수련인으로서 다른 수련생이 속인 일로 사부님께 간청했는데 해결된 사례에 대해 사람의 눈으로 본 표면 효과나 사람의 이치로 무슨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되며, 반드시 법으로 가늠하고 법에서 인식해야 한다.

개인의 층차가 제한되어 있어 법에 어긋나는 부분이 있다면 자비롭게 지적해주시길 바란다.

 

원문발표: 2024년 5월 29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4/5/29/47812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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