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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축 5.13] 좋은 사람이 되는 것만이 정도(正道)

글/ 헤이룽장 대법제자 문청(文淸)

[명혜망] (편집자 주: 요즘 사람들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어리석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장기적으로 보면 기만과 사기, 도둑질과 음란 행위는 일시적으로 판을 칠 수 있을 뿐이며, 오직 선한 사람만이 오래갈 수 있다. 특히 천재지변이 닥칠 때는 도덕적으로 고상한 자만이 신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존경하는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1960년대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의 영향 아래 자라면서 강한 성격을 지니게 됐습니다. 학교에서는 공부를 잘해야 하고, 직장에서는 성과를 내야 하며, 배우자는 저를 잘 대해주는 사람으로 골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조건이 좋지 않았고 성격도 괴팍했습니다. 평소 말수가 적던 그는 자기 생각에 어긋나는 말을 듣기라도 하면 불같이 화를 냈고, 심지어 물건을 집어던지거나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결혼 전까지만 해도 욕을 하지 않던 제가 그를 만나고부터는 성질이 급해졌고 우리 부부는 자주 다투게 되었습니다. 그가 한마디 하면 저는 두 마디로 받아쳤고, 그가 한 대 때리면 저는 서너 대는 때려야 속이 풀렸습니다. 때로는 제가 너무 심하게 굴어 그가 더 세게 때리기도 했습니다. 너무 괴로워 집을 나간 적도 있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저를 찾으러 오지 않았습니다. 그에 대한 실망과 상처, 복수심과 원망이 깊어만 갔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좋은 사람이 되는 게 바보 같은 짓이라고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이기적이고 심술궂고 원한에 사로잡혔던 사람에서, 남을 배려하고 아량이 넓으며 득실을 따지지 않는 선한 사람으로 변했고, 건강해졌으며 가정불화가 줄어들고 화목한 분위기가 감돌게 된 것은 모두 사부님의 위덕과 대법의 위력 덕분입니다. 대법이 새로운 저를 만들어준 것입니다.

당시의 일화를 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한번은 남편이 심한 감기에 걸려 열이 높아 이불을 덮어도 덜덜 떨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를 불쌍히 여기는 대신, 오히려 그 기회를 이용해 복수하려 했습니다. 빗자루로 그를 때리며 그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죠. 그와 싸우면 저는 밥도 해주지 않고 그가 출근한 뒤에야 면을 삶아 혼자 먹곤 했습니다.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억울하기만 했습니다. 그의 집안에 시집와서는 남편은 물론 그 가족들도 저를 무시했습니다. 결혼한 지 반년 만에 도시 병원에서 큰 수술을 받고 돌아왔을 때 시아버지와 시동생은 저에게 말 한마디 걸지 않더군요. 그래도 제가 먼저 시아버지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이 일로 너무 화가 나 남편에게 그의 가족들이 얼마나 냉정한지 따졌습니다. 동서는 이기적이고 이득을 챙기기 좋아해 저를 괴롭혔고 저는 괴로움에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남편에게 하소연해봐야 위로 한마디 얻을 수 없었죠. 당시 제 눈에 그에겐 장점이라곤 하나도 없어 보였습니다. 동창들을 만나면 모두들 자기 남편이 어떻게 좋은지 자랑들 하는데 저는 그저 창피하기만 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부터 심각한 류머티즘에 시달렸습니다. 15, 6년 동안 갖은 치료를 해봤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결국 부항 치료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전엔 어머니가 부항 뜨는 일을 도와주셨는데 이제는 남편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류머티즘이 심해서 며칠만 부항을 뜨지 않아도 가슴과 등이 돌로 누른 것처럼 답답해 숨쉬기조차 힘들었고, 때로는 목이 뻣뻣하게 굳어 돌릴 수조차 없었습니다. 남편은 참을성이 부족해 제가 매번 애걸복걸해야 했고, 그럴 때마다 그는 욕설을 퍼부었고 심지어 저더러 빨리 죽지 않는다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육체적 고통도 견디기 힘든데 거기에 남편의 태도까지 더해지니 제 마음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 그렇게 절망의 끝자락에서 저의 인생에 전환점이 찾아왔습니다. 동료의 인도로 저는 운 좋게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의 주요 저서 『전법륜(轉法輪)』을 접하게 됐습니다. 파룬따파의 법리에 깊이 감화되어 이렇게 좋은 법을 너무 늦게 만났다는 아쉬움마저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삶의 진정한 의미, 인간 생명의 근원,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 질병과 고통의 근본 원인 등을 깨닫게 되었는데, 삼십 평생 들어본 적 없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얼마간 수련하자 자비로우신 사부님께서 제 몸을 정화해주셨고, 고질적인 류머티즘과 불면증이 사라졌습니다. 온몸에 병 하나 없이 가벼워진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남편을 대하는 제 태도 또한 서서히 달라졌고, 갈등에 부딪혔을 때도 대법으로 헤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연공인(煉功人)으로서,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해도 대꾸하지 않으며, 높은 표준으로 자신에게 요구해야 한다.”(전법륜)

저는 이 말씀을 되새기며 가장 먼저 욕설부터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습관처럼 굳어진 데다 남편이 저를 건드리기라도 하면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기에, ‘다시는 욕하지 않는다’는 것이 저에겐 큰 고비였습니다. 남편은 일부러 시비를 걸며 몇 번이나 쏘아댔지만 저는 꾹 참으며 스스로에게 경고했고, 점차 욕을 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강제로 억눌렀다면 나중에는 분노와 증오, 원망 없이 너그럽게 받아넘길 수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남편이 말했습니다. “당신이 그 공법을 연마하더니 이젠 우리도 싸울 일이 없어졌네. 욕도 안 하고 재미가 없군.” 그래서 저는 “욕하고 싶으면 혼자 하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점점 남편도 욕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2012년에 남편은 성 소재지 병원에서 이하선종양 수술을 받았습니다. 제가 병간호를 하러 갔는데 병원 식사가 형편없어 식당에서 음식을 사다 주었습니다. 병실에 남는 침대가 없어 함께 비좁은 침상에 누워야 했고, 남편을 건드릴세라 옆으로 누워 자야 했기에 뼈가 배겨 아팠지만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3년 뒤 겨울, 남편이 현(縣)에서 직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손바닥뼈 세 개가 부러졌습니다. 현지 병원에 입원해 접골 수술을 받고 철심을 박았다가 1년 뒤 그것을 제거하는 수술까지, 모두 제가 함께했습니다. 남편 입맛에 맞는 음식을 준비하느라 집에 가서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당시엔 보온 도시락이 없어 스테인리스 밥그릇에 담고 식지 않게 여러 겹 포장한 뒤 버스를 타고 병원까지 날랐습니다.

이전에 우리가 다툴 때면, ‘그는 집안일을 돕지 않아’, ‘너무 완벽을 요구해’, ‘항상 날 화나게 만들어’ 등의 불만을 늘어놓으며 늘 밖으로 원인을 찾았고 저 자신은 한 점 흠 없는 꽃 같은 존재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대법 수련을 통해 원망을 내려놓고 차츰 안으로 찾는 법을 배웠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찾고 자신을 반성하고 고쳐나갔습니다. 남편에 대한 불평과 원망이 줄어들고 관심과 위로가 늘어나자 가정 갈등도 줄어들며 화목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변하자 남편도 변해갔습니다.

1997년 겨울, 저는 남편에게 시아버지를 모시고 함께 살자고 제안했습니다. 시아버지는 치아가 좋지 않아 부드러운 음식을 좋아하셨기에 생선과 두부, 달걀찜 등 좋아하시는 음식을 만들어 대접했습니다. 우리집에서 편히 지내시는 시아버지를 보고 남편은 고마워하며 저를 거듭 칭찬했지만 저는 그저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시아버지가 집으로 돌아가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암 선고를 받으셨다는 소식에 저는 참았던 눈물을 쏟아졌습니다. ‘정말 불행하시구나, 내가 효도하고 싶어도 기회조차 없구나.’ 남편은 치료비를 대주려 했는데 당시 저희 집에 남은 돈은 2천여 위안(약 40만 원)뿐이었습니다. 그래도 주저 없이 통장을 내밀었고 이후 남편이 물건을 사러 돈을 가져가겠다고 해도 기꺼이 지지해주었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지켜보신 시아버지는 자신의 낡은 집을 우리에게 물려주겠다고 하셨지만 우리는 정중히 사양했습니다.

동서는 예전에 우리에게 너무 큰 상처를 줘서 한때는 평생 그녀를 미워할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대법 수련을 통해 인연의 이치를 깨닫고 원한을 내려놓은 뒤에는 먼저 다가가 말을 걸었습니다. 그때부터 오랜 세월 연락이 끊긴 시동생 식구들과의 왕래가 시작됐습니다. 시동생 부부에게 둘째가 태어났을 때는 축의금을 보냈고, 아이 전학 문제로 어려움을 겪을 때는 적극 나서서 도왔습니다. 그들 역시 저희 집에 무슨 일이 생기면 한걸음에 달려왔습니다.

어느 해, 남편 직장에서 월급 대신 석탄 10톤을 지급했는데, 우리는 의논 끝에 그것을 모두 경제적으로 어려운 둘째 시누이와 둘째 아주버니 가족에게 나눠주었습니다. 둘째 아주버니의 자녀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도 학비가 필요하다 싶으면 제 옷을 사는 것을 아끼면서까지 종종 주머니를 털어 보태주곤 했습니다. 셋째 시누이는 타지에서 공공 임대주택을 얻기 위해 우리에게 5천 위안을 빌려 집수리를 했는데, 몇 년이 지나서야 3천 위안을 갚았습니다. 그때서야 셋째 시누이 내외가 건강이 좋지 않아 기초생활보장금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나머지 2천 위안은 받지 말자고 했습니다. 설날에 셋째 시누이 가족이 큰집에 인사차 왔을 때 우리가 1천 위안 상당의 약까지 챙겨주며 또 1천 위안을 택시비로 쥐여주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쓴 이유는, 더 많은 선량한 이들이 대법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주저 없이 수련의 길에 들어서서, 진선인(真·善·忍)의 표준에 따라 자신을 닦아 품성을 높이고 최후에는 자신의 진정한 고향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명혜망 5.13 세계 파룬따파의 날 응모작)

 

원문발표: 2024년 5월 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4/5/7/47600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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