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홍콩 파룬궁수련자
[명혜망] 1999년 4월 25일, 1만여 명의 파룬궁수련자들이 베이징 중난하이 부근 청원사무실에 가서 평화롭게 청원하며, 감금된 파룬궁수련자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4·25 평화청원 25주년을 앞두고 일부 홍콩 파룬궁수련자들이 현수막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홍콩 수련자들, 4·25 평화청원 25주년 기념 영상
기념행사에 참여한 수련자들은 4·25 청원은 파룬궁수련자들의 평화로운 것 반(反)박해 정신을 체현했으며, 현 사회에 큰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과거 홍콩 수련자들은 매년 4월 25일 전후로 집회 시위를 개최했는데, 비록 현재는 홍콩에서 대규모 행사 개최가 어렵지만 그들은 여전히 다양한 형식으로 중공에서 박해 중지를 호소할 것이라고 말했다.
베이징 경찰 “여러분의 사부님은 정말 존경스러워”
74세 파룬궁수련자 린(林) 씨는 1996년부터 파룬궁 수련을 시작했다. 그녀는 2000년 4월 25일, 즉 4·25 청원 1주년을 맞아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던 경험을 전했다.
린 씨는 당시 다른 두 명의 홍콩 수련자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베이징에 갔다고 회상했다. 청원사무실 부근에 도착했을 때 100여 명의 공안, 국안(國安)이 청원사무실을 빽빽이 둘러싸고 청원 온 사람들을 모조리 데려가는 것을 보았다. 세 사람은 우회로를 통해 청원사무실에 도착했지만, 문을 들어서자마자 청원사무실 접수 직원은 보이지 않고 공안에 의해 각각 작은 방에 갇혀 심문받았다. 린 씨는 공안에게 “우리는 파룬궁을 위해 공정한 말 한마디를 하러 홍콩에서 베이징까지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날 밤 그들은 한 회의실로 끌려가 감시를 받았다. 그들은 회의실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린 씨는 한 경찰이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 것이 기억난다고 했다. “여러분의 사부님은 정말 존경스러워요. 그분은 정말 대단하세요. 여러분이 하나같이 가부좌 자세가 이렇게 멋지잖아요.”
린 씨는 그 경찰에게 이렇게 말했다. “파룬궁 사부님은 우리에게 진선인(真·善·忍)으로 사람 되라고 가르치셨어요. 진(眞)은 진실한 말을 하고 진실한 일을 해야 한다는 뜻이고, 선(善)은 자비로워야 하고 선한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대해야 한다는 뜻이에요. 인(忍)은 맞고도 때리지 말고 욕먹어도 대꾸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죠. 우리는 진선인을 기준으로 삼아 나쁜 짓을 하지 않고 그저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 뿐이에요. 좋은 사람이 많을수록 더 좋지 않나요? 정부가 왜 우리 이런 좋은 사람들을 탄압하는 걸까요? 그게 공평한가요?” 그녀는 또 경찰에게 박해에 가담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당신들 경찰은 치안 유지를 위해 나쁜 사람들을 단속해야 하는데, 지금은 좋은 사람들을 탄압하고 있으니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네요.” 경찰은 “저희도 어쩔 수 없어요”라며 곤란해했다.
공안은 그들이 홍콩에서 왔다는 사실 때문에 감옥에 보내지는 않았고, 이튿날 차를 태워 공항으로 보냈지만 3천 위안의 ‘차비’를 받아 갔다.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귀향증은 공안에 의해 압수됐다. 린 씨는 말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어요. 부모님이 시골에 계시는데 연세가 많으셨거든요. 이제 다시는 고향에 가서 부모님을 뵐 수 없게 됐으니까요.” 린 씨가 베이징에서 돌아온 지 한 달 만에 어머니가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고 남편에게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게 할 수밖에 없었다.
린 씨는 계속해서 홍콩에서 파룬궁 박해 반대 활동에 참여했다. 박해로 숨진 중국 수련자들의 사진을 들고 시위행진을 하기도 하고, 홍콩주재 중국연락판사처 앞에서 묵념 시위를 하기도 하며, 홍콩 전역에서 전단을 배포하기도 했다. 25년간의 반(反)박해 과정을 돌이켜보며 린 씨 이제 점점 더 많은 시민이 파룬궁이 모함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4·25는 정당한 청원이었으며 ‘천안문 분신자살’은 거짓이었음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관광 가이드 “그들이 하는 말은 모두 사실이에요”
관(關) 씨는 1998년 홍콩에서 파룬궁 수련을 시작했다. 1999년 이후로 그녀는 자주 퍼레이드에 참여하고 전단을 배포하며 중공의 파룬궁 박해를 폭로했다.
그녀는 2000년의 일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녀는 반산(半山)의 한 전망대에서 관광객들에게 파룬궁 진상을 알렸다. 당시 많은 중국인 관광팀이 지나갔는데, 한 관광팀을 이끌던 가이드가 4·25 청원 사진을 가리키며 관광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때 제가 저 현장에 있었는데 사실 그들이 하는 말은 모두 사실이에요. 그들은 중난하이를 포위 공격하지 않았고 모두 조용했어요.” 당시 많은 관광팀이 중공의 압력을 받아 관광객들에게 파룬궁 전시판을 보지 못하게 했는데, 이 가이드의 의롭고 솔직한 말에 관 씨는 매우 감동했다.
25년간의 반(反)박해를 거치며 관 씨는 더 많은 시민들이 중공의 파룬궁 박해를 꿰뚫어 보게 됐고, 심지어 “우리는 파룬궁이 존경스러워요. 여러분은 정말 대단해요”라고 말하기도 한다고 밝혔다. 진상을 알리는 과정에서 알게 된 일부 시민들은 그녀와 친구가 됐고, 특히 많은 젊은이들이 파룬궁을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그녀는 전했다.
“현 사회에는 4·25 정신 필요해”
파룬궁수련자 왕(王) 씨는 1999년만 해도 파룬궁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밝혔다. 2007년 그녀는 남편과 함께 유럽 코소보에서 일할 때 현지에는 중국어 매체가 거의 없어서 신탕런(新唐人) 방송의 ‘공산당에 대한 9가지 평론(九評共産黨)’ 등 프로그램을 자주 보았고, 파룬궁수련자들의 글도 읽으면서 파룬궁 수련의 길로 들어섰다.
파룬궁수련자들의 20여 년간 반박해 경험을 돌이켜보며 그녀는 4·25의 평화로운 정신이 현 사회에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요즘 사회는 증오심이 매우 강한데, 일부 사람들은 불공정한 대우를 받으면 사회에 복수하려 든다. 25년간 파룬궁수련자들은 잔혹한 박해를 받았지만 시종일관 평화롭고 이성적인 방식으로 정의와 양심을 호소했을 뿐 결코 폭력에 호소하지 않았다. “시간이 사람의 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 4·25 청원 25주년을 맞아 그녀가 가장 깊이 느낀 바다.
그녀가 다른 수련자들과 함께 4·25를 기념하는 단체사진을 찍을 때, 한 젊은 여성이 맞은편 길에 서서 미소를 지으며 구경하다가 철책을 돌아 길 건너편으로 와서 자진해서 수련자들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왕 씨는 “매우 감동적이었어요. 요즘 많은 시민이 파룬궁수련자들을 보면 기뻐하는 것 같아요. 많은 사람이 우리를 지지하고 있다는 걸 느낍니다”라고 말했다.
4·25 청원의 전말
1999년 4월 11일, 중공 중앙정법위원회 서기 뤄간(羅幹)의 처남 허쭤슈(何祚庥)가 톈진(天津) 교육대학의 한 청소년 잡지에 파룬궁을 공격하는 글을 발표했고, 톈진 파룬궁수련자들은 해당 잡지사에 사실과 다른 내용을 바로잡을 것을 요구했다. 4월 23일, 대규모 진압 경찰이 교육대학에서 조용히 앉아 있던 수련자들을 내쫓고 폭행했으며 45명의 수련자들을 납치했다. 한 시정부 관리는 공안부가 개입했으니 파룬궁수련자들에게 베이징으로 가서 문제를 해결하라고 제안했다.
1999년 4월 25일, 소식을 들은 1만여 명의 파룬궁수련자들이 헌법이 부여한 청원권을 행사하기 위해 중난하이 인근의 국무원 청원사무실로 가서 청원했다. 다섯 명의 수련자가 대표로 국무원에 들어가 정부 관리들과 회담을 갖고, 톈진에서 불법 체포된 파룬궁수련자들의 석방과 파룬궁 서적의 합법적 출판 및 연공 환경 보장을 요구했다.
당시 국무원 총리 주룽지(朱鎔基)는 국가가 군중들의 연공을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는 정책을 재차 강조하고, 톈진 공안국에 석방 명령을 내렸다. 그날 저녁, 톈진 공안은 모든 불법 구금된 파룬궁수련자들을 석방했고, 베이징에 청원 온 파룬궁수련자들은 즉시 평화롭게 철수했다.
이번 청원 사건은 중국과 해외를 진동시켰고, 국제사회로부터 “중국 청원 사상 규모가 가장 크고, 가장 이성적이고 평화로웠으며, 가장 원만했던 청원”으로 평가받았다.
원문발표: 2024년 4월 25일
문장분류: 해외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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