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저는 1999년 ‘7.20’ 이전에 법을 얻은 노년 대법제자로, 풍랑 속에서 20여 년을 걸어왔습니다.
오랫동안 저는 항목에 몰두하는 일에 익숙해져서, 개인수련 측면에서는 스스로에 대한 요구를 느슨히 했습니다. 일이 있을 때마다 능동적으로 안으로 찾아 자신을 수련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바깥만 보며 법으로 남을 가늠했기에 마성(魔性)이 점점 커졌습니다. 예를 들어 일할 때 감정에 따라 행동하고, 바쁘다는 이유로 밥하기와 집안일 하기조차 내키지 않았으며,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만나면 짜증 내고 화를 냈습니다. 심지어 사소한 일로 가족 수련생들과 자주 다투고 고집을 부리며 언쟁을 벌이곤 했습니다. 오랜 기간 사소한 일로 갈등이 끊이지 않았지만, 자신은 대법 항목을 위해 공헌하고 있다고 여겨 수련을 잘하고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일하는 것을 수련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사실 “사부님을 도와 정법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한 것입니다.
아마도 사부님께서는 제 이런 상태가 너무 오래 지속되고, 깨달음이 더디며, 일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한 것을 보시고 제게 환경을 바꿔 수련하게 하신 것 같습니다. 2년 전 며느리가 직장 때문에 아이를 돌봐달라고 해서 우리의 수련 환경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솔직히 말해 저는 정말 내키지 않았고 원래 환경을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거기에는 제가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몇 번이나 사부님께 도와달라고 청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아이들과 함께할 기회가 주어졌다면 그 속에는 반드시 제가 수련해야 할 것이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환경을 바꿔서도 수련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럼 저는 어떻게 수련했을까요?
지적받기 싫어하는 마음 제거하기
오랫동안 아이들과 함께 살지 않았고, 게다가 아이들은 직장 일이 너무 바빠 늘 야근을 하곤 했습니다. 이런 환경에 맞닥뜨리자 모든 것을 새로 배워야 했습니다. 매일 해야 할 일이 많았는데, 집안일을 잘 해내는 것은 물론이고 손자의 학습 준비까지 잘해야 했습니다. 더욱 중요한 건 수련인으로서 대법제자가 해야 할 세 가지 일도 잘해내야 했습니다. 원래 생활이 단순했던 우리에게는 정말 큰 압박감이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매사 최선을 다해 노력했고, 합리적으로 시간을 배치하며, 모든 일을 정성껏 해내려 애썼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가 어디에 있든 좋은 사람이 되고, 다른 사람을 선하게 대하며, 늘 남을 배려하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아들 집에 갔습니다.
하루는 며느리가 부엌에서 갑자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채반에 곰팡이가 슬었네요. 지금은 장마철이라 자주 씻어야 해요.” 저는 듣고도 대꾸하지 않았고 속으로는 ‘네가 보았으면 씻으면 되잖아?’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씻지 않고 그대로 두었고 결국엔 제가 참고 참다가 그 채반을 깨끗이 씻었습니다. 그런데도 억울하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 남편에게 하소연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나이 들어 멀리서 와서 도와주고 있는데, 고마워하기는커녕 트집 잡고 투덜거리면서 뭐가 마음에 안 든다는 거야. 정말 버릇없어.” 남편은 듣고도 아무 말 않고 휙 가버렸습니다. 저는 위로 한마디 해줄 줄 알았던 남편의 그 모습을 보고 더욱 서운해졌습니다. 저는 한동안 감정에 빠져 마음이 무척 괴로웠고 밤에 잠도 오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마음이 가라앉고 나서야 저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수련인인데 어떤 일을 만나든 우연한 게 없습니다. 왜 그들이 저를 그렇게 대했을까요? 제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요? 며느리는 평소에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착한 아이라 저와 정면으로 충돌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왜 그랬을까요? 제가 왜 이렇게 괴롭고 억울한 걸까요? 아! 알았습니다. ‘인내’의 한계에 도전받은 거였습니다. 법 속에서 진정으로 자신을 수련하지 않고, 기꺼이 ‘소화상(작은 스님)’이 되려 하지 않았기에, 제 노력이 인정받지 못하고 보답받지 못하자 마음의 불만이 생긴 겁니다. 마음의 포용력을 넓혀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다시 말해, 표면적으로는 남에게 잘해주는 것 같지만, 사실 그 선함에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남의 인정과 칭찬을 바라고, 허영심에 자신이 남보다 낫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 했습니다. 남에게 욕먹기 싫어 아첨하고, 능력 있다는 칭찬을 듣고 싶어 한 겁니다.
이런 마음들을 발견하고 나자 크게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수련했는데도 저는 진정으로 자신을 수련하지 않았습니다. 공산당 문화 속에서 양성된 우월감, 허영심, 체면, 질투심, 안일함, 쟁투심 등, 이런 구우주 생명들의 관념과 마성이 지금까지도 제 사상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는 추구하는 마음이고 이기심입니다. 이런 마음을 품고서 어찌 진정한 수련인의 표준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저희 세대는 악당 문화 속에서 세뇌당하고 오염되며 자란 세대입니다. 우리 같은 사람이 정말로 신을 믿을까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 관계를 믿을까요? 오늘날 사회 현실에서 겸손할 수 있을까요? 사부님의 법은 이미 “사람이 산다는 것이 바로 업력윤보(業力輪報)”(전법륜)라고 명확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층층이 세상에 내려와 윤회 환생하는 과정에서 모르고 많은 업을 빚었는데, 저는 날마다 잘난 체하며 높은 곳에 앉아 있었으니 정말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다행히도 사부님의 제자가 될 수 있게 됐고,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께서는 우리를 지옥에서 건져 올리시고 씻어주시며, 우리를 위해 너무나 많은 업력과 고난을 감당해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루빨리 대법에 동화되고 정진하고 착실히 수련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시려는 것이었는데, 저는 지금껏 구우주의 이치와 관념을 고수하며 진흙탕에서 발버둥 치고 있었습니다. 한정된 시간과 생명을 낭비하면서 자신을 수련인이라 말하고 있었으니, 이는 가짜 수련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것들을 인식한 지금, 저는 마음은 내려놓고 더 이상 집안일에 휘둘리지 않게 됐습니다. 모든 것은 자연스러워졌고 생활 속에서 서로 소통할 수 있게 됐습니다. 며느리도 아주 지혜롭게 저에게 잔일을 나누어 맡겼는데, 아마 제 시간을 뺏기 싫어서, 우리에게 더 많은 번거로움을 끼치기 싫은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들을 위해 배려하고 최대한 잘 보살폈습니다. 집안을 깨끗하고 정돈되게 치우고, 옷과 물건들을 잘 정리하며, 음식을 만들 때는 그들의 입맛을 고려하고, 일상에서 절약하고 낭비하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손자의 좋은 생활습관 형성에도 신경 썼고, 온 가족이 어른을 공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며 서로 존중하도록 했습니다.
옷에 대한 탐욕 제거하기
전 수련하기 전에 옷 입는 것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특히 중공의 무신론에 중독되어 내면은 중시하지 않고 유행과 트렌드를 추구했습니다. 그래서 사회에서 유행하는 옷이 있으면 저도 꼭 사야만 했고, 제 눈에 들어오는 옷은 망설임 없이 구매했습니다. 이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옷장 속 옷들을 쉽게 갈아치웠고, 속인의 이 커다란 염색통에 심하게 오염됐으며,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업을 빚었는지 모릅니다.
수련을 시작한 후 사부님의 설법을 공부하면서 중국 전통문화에 대해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됐습니다. 여성으로서 마땅히 부도(婦道)를 지켜야 하는데, 이런 허영을 좋아하고 추구하는 집착과 행위는 신이 사람에게 남겨준 도덕 행위 규범에 어긋납니다. 수련인으로서는 더더욱 과거처럼 해서는 안 되고, 대법제자의 표준에 따라 자신에게 요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저 자신도 이 부분에서 절제하고, 관련 집착을 극복하려 노력하며, 대법 수련과 사부님을 도와 정법 하는 항목에 전념했습니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대법을 확고히 수련했기에 직장을 잃게 됐고, 거기에 사부님을 도와 정법 하는 항목으로 바빠 이런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앞으로 옷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없어지자 저도 모르게 옷에 대한 집착심이 거의 닳아 없어졌다고 여겼습니다. 예전에 남편 수련생에게 “제가 이제 옷에 집착하는 게 예전 같지 않죠?”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는 “그건 아직 당신 마음에 드는 게 없어서 그런 거지”라고 했습니다. ‘응? 왜 저런 말을 할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았습니다. 그는 저를 너무 잘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겁니다.
아이들과 함께 살면서 옷에 대한 집착심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며느리는 직업상 옷차림을 꽤 신경 쓰는데, 그녀의 옷이 고급스럽고 트렌디하며 품질도 좋은 것을 보니 마음이 움직였고 내심 부러웠습니다. 하지만 이제 나이가 많아 그런 좋은 옷은 저에겐 너무 먼 이야기였습니다. 그럼에도 그 집착심은 내려놓을 수 없었습니다. 마음속으로 늘 그 옷이 떠올랐고, 어디서 샀는지, 얼마인지 궁금했으며, 심지어 빨래할 때도 옷 상표를 확인하고 인터넷에서 그 브랜드 매장에 제가 입을 만한 옷이 있나 검색해 보기도 했습니다. 역시 그 마음이 또 나온 거였습니다. 지나고 보면 스스로가 우스웠고, 이런 일로 시간을 낭비한 것이 후회되고 부끄러웠지만, 집착심이 올라오면 도저히 억누를 수 없었습니다. 마치 마약과 같아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죽을 것 같았습니다.
자신의 욕망이 채워지지 않자 돌아서서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며느리의 저 옷이 얼마짜린지 봐요. 저렇게 살림하면 되겠어요?” 공산당 문화 사상이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질투하고 불평하는 마음을 그런 식으로 달래려 한 겁니다. 하지만 남편 수련생은 제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렸습니다.
몇 차례 겪으면서 스스로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속인의 물건을 그렇게 추구하면서 한 손으로는 사람을, 한 손으로는 신을 붙잡고, 한 발은 문 안에, 한 발은 문 밖에 두는 게 수련인의 모습일까요? 이는 수련인의 에너지를 소모하는 게 아닐까요? 법공부를 통해 저는 제가 진정으로 사부님 말씀대로 행하지 못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제 언행은 수련인이라 할 수 없었고, 사람들과 비교하고 다투며 극단적으로 이기적이었을뿐더러, 입을 수련하지 못하고 뒤에서 남에 대해 뒷담화를 했으니, 평범한 사람만도 못했습니다.
제 소행을 돌아보니 매우 부끄러웠습니다. 그때부터 개인수련을 중시하기 시작했고, 자신의 일사일념(一思一念)을 관찰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으며, 구우주 생명의 이기적인 낡은 관념을 내려놓고, 생각 속에서 남에 대한 부정적 사유가 나타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또 입을 닦아 뒤에서 남의 시비를 의논하지 않게 됐습니다.
2년여의 고된 시련 속에서, 심성 제고 면에서 많은 수확을 얻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전에 중시하지 않았던 많은 집착심이 폭로됐습니다. 사부님께서 저를 위해 마음 써주신 것과, 수련의 길에서 각종 환경을 제공해준 주변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20여 년을 수련한 노제자로서 진정으로 자신을 수련하지 못해서 사부님께 죄송스럽습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을 더욱 소중히 여기고 각종 수련 제고의 기회를 잘 붙잡으며, 엄격히 자신에게 요구하고 마음을 써서 착실히 수련하겠습니다. 자신의 일언일행(一言一行)과 일사일념에 주의를 기울여, 합격된 대법제자가 되어 사부님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만약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수련생 여러분의 자비로운 지적 부탁드립니다.
원문발표: 2024년 4월 1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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