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헤이룽장성 대법제자 혜녀(慧女)
[명혜망] 저는 1996년에 운 좋게 대법(파룬궁) 수련을 시작했고 지금은 70세가 넘었습니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제도로 인해 저는 환골탈태하고 병 없이 건강해졌으며 매일 대법의 법광(法光) 속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20여 년 동안 위대하신 사부님께서는 저를 이끌어주시고 항상 살펴주시며 본성으로 돌아가는 길을 인도해주셨습니다. 제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사부님의 심혈과 무량한 자비가 스며들어 있습니다. 어떤 말로도 제 감사의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아래에서는 대법에서 깨달은 바를 토대로 어떻게 관념을 바꾸고 명예와 이익을 가볍게 보며, 가정생활에서 사람의 마음을 제거했는지 수련생 여러분과 교류하고자 합니다.
1. 이기심을 제거하니 남편이 바뀌다
남편과 저는 1974년에 결혼해 가정을 이뤘습니다. 결혼 초기 몇 년간 그는 월급을 집으로 가져왔고 제게 생활비 지출을 기록하라고 했습니다. 결혼 후 4~5년 동안은 계속 전세방에서 살았습니다. 그 당시 남편 월급은 30여 위안(한화 약 5천 원), 제 월급은 40여 위안이었습니다. 평소 생활비 외에도 매달 양가 부모님 용돈, 집세, 아이 양육비 등으로 늘 빠듯했습니다. 게다가 아이가 아프면 약값, 주사비, 입원비가 추가되니 정말 빈곤했습니다. 남편은 덩치가 커서 두 사람 몫을 먹었고, 저는 산후조리와 유산으로 배를 채우기 힘들 때도 있었습니다. 정말 “솜씨 좋은 아낙네도 쌀이 없으면 밥을 짓기 어렵다”는 말처럼 그 시절 생활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몇 번 이사도 했지만 온종일 마음이 편하지 못했고 가난에 시달리며 살았습니다.
몇 년이 지나자 저는 심신이 지쳐버렸습니다. 그러면서 심장병, 위장염, 오십견, 경추병, 불면증, 편두통, 신경쇠약, 유선소엽증식증, 류머티즘, 부인과 질환 등 여러 질병이 연이어 생겼고, 심신의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아이가 여섯 살 때 저희는 마침내 직장 기숙사로 이사했습니다.
법을 얻은 후 저는 법공부를 통해 제 월급이 남편보다 많고 직장 복지가 좋으며 집도 제가 받은 거라 남편을 업신여기는 마음, 원망하는 마음, 불평하는 마음, 체면을 차리는 마음, 이익을 다투는 마음 등 사람 마음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이익을 중시하는데 가정불화의 대부분은 돈 때문에 생깁니다. 저는 수련자이므로 사부님께서 가볍게 보라 하시면 가볍게 보고 이익 앞에서 한발 물러섭니다.
그래서 일상생활에서 더 이상 월급이나 생활비 문제로 남편을 다그치지 않고, 제 월급으로 일상을 꾸려나가며 집안일을 챙기고, 저축은 돈 관리를 좋아하는 남편에게 맡겼습니다.
저는 남편의 장점을 보았습니다. 그는 검소하고 고생도 마다하지 않으며 성실하고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있었습니다. 저도 남편을 거울삼아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을 찾아 수련하면서 강한 자존심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더 이상 그를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았고 트집 잡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남편은 만족하고 기뻐하며 진정한 가장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20여 년간 거의 매일 싸우고 폭력으로 갈등을 해결하던 상황이 끝났습니다. 새로운 인생과 건강한 몸, 화목한 가정을 주신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이후 20년 넘게 대법과 대법제자가 박해받는 동안 남편도 압력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압박감에 시달리던 남편은 직장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제가 집을 돌보지 않아 별거 중이라는 등의 말을 했습니다. 남편은 제가 불법 감금되어 노동수용소에서 강제노역을 하고, 경찰이 집을 급습하며, 직장에서 저를 괴롭히고, 주민위원회 직원과 경찰이 잦은 방문과 전화로 괴롭히는 것을 겪으면서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받았고 내내 제 안전을 걱정하며 두려워했습니다. 저는 남편을 이해하고 위로해주었으며 대법이 세계로 전파되고 있는 형세와 대법 수련은 합법이지만 중공의 박해는 불법이라는 점을 알려주었습니다. 일상생활에서는 남편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그의 식사와 옷, 일상을 세심하게 돌봐주었습니다.
예전에는 남편이 집안일을 돌보지 않아 제가 혼자 부엌 개조, 구들장 파기, 벽 페인트칠, 창고 수리, 바닥 청소 등 모든 것을 남편과 싸우면서 주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남편은 집안일과 빨래, 장보기, 요리, 방 정리, 걸레질, 1년에 두 번씩 하는 굴뚝 청소를 즐겨 하고, 제가 세 가지 일(진상 알리기, 법공부, 발정념)을 하는 것을 묵묵히 지지하며 안전에 유의하라고 당부합니다.
저는 남편의 이런 큰 변화를 보고 정말 감동했으며, 동시에 사부님께서 《전법륜》에서 하신 “불광이 널리 비치니 예의가 원만하고도 밝도다(佛光普照,禮義圓明)”라는 법리를 체득할 수 있었습니다.
2. 원망심을 없애고 시댁 식구들을 잘 대하다
시어머니에겐 큰형님(큰시누이)과 남편 두 자녀가 있고, 시아버지는 남편의 의붓아버지로 이복딸 하나가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가정은 가족애가 없고 이해관계로 얽혀 서로 경쟁하니 어른이든 아이든 상대하기 어려웠습니다. 저와 남편의 다툼은 대부분 시어머니의 이간질에서 비롯되었고, 시어머니는 늘 저를 험담했습니다. 시아버지도 시어머니의 비위를 맞추려고 저에 대해 안 좋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군가 우리 부부 사이를 이간질하지 않고서야 어찌 그리 시끄러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시부모님이 늘 서운하고 원망스러웠습니다.
1996년 9월, 뇌졸중으로 20년 가까이 앓던 시아버지만 제게 남기고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같은 해 10월 저는 운 좋게 대법을 만났습니다. 노후주택 철거로 시아버지는 양로원으로 이사하셨습니다. 시어머니가 세상을 뜬 후 시아버지는 월급을 둘째 형님(이복 시누이)에게 맡겼습니다. 한때 중국 요리와 서양 요리에 능했던 시아버지가 이제는 허리가 굽어 겨우 걷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프고 불쌍했지만 원망은 없었습니다. 제가 시아버지를 위해 무엇을 해드릴 수 있을지만 생각했습니다. 만두를 빚어 냉동실에 넣어두고 드시고 싶을 때 삶아 드시라고 했고, 좋아하시는 조기 튀김도 며칠에 한 번씩 해드렸으며, 훙사오러우나 대하 등 입맛에 맞는 음식도 자주 만들어드렸습니다. 아들과 함께 족발과 맥주를 사 들고 시아버지를 찾아가기도 했고, 생필품이 떨어지면 사다 드리며 대화도 나누었습니다.
이 모든 일에서 시아버지께 한 푼도 받지 않았고 그 어떤 보답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비록 제가 친자식은 아니지만 대법제자이기에 사부님께서 《전법륜》에서 “각종 환경 중에서 모두 다른 사람을 좋게 대해야 하고, 남을 선하게 대해야 하는데”라고 가르치신 대로 했을 뿐입니다. 늦가을이 되자 시아버지는 몇 번이고 제가 자신을 돌봐줄 줄은 몰랐다며 진심으로 고마워하셨습니다.
시아버지가 중병에 걸렸을 때 둘째 형님이 병원비와 약값으로 쓰라며 시아버지 통장을 남편에게 주었습니다. 저는 남편에게 시아버지의 돈을 남몰래 써서는 안 되고 통장을 투명하게 관리하며 두 누나에게 보고해야 한다고 상기시켰습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7년 만에 80세 가까이 되신 시아버지도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장례식에서 시아버지의 삼촌은 제가 시아버지를 잘 모셨다며 거듭 칭찬했고, 둘째 형님 부부는 감동하며 “아버지가 올케 덕분에 복을 받으셨어. 우리는 생각조차 못 했고 할 수도 없었던 일을 해냈어”라고 칭찬했고 둘째 형님 남편도 친척과 동료들에게 “그분은 파룬궁수련생인데 나는 파룬궁을 찬성해”라고 말했고, 그의 한 동료는 제게 “사장님(시누이 남편을 지칭)과 저희는 여사님의 훌륭한 인품과 시아버지께 효도한 것을 늘 칭송했습니다”라고 전했습니다. 그들은 시어머니가 한때 저를 험담했던 사실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두 분 장례를 치르고 이듬해 묘지를 정해 유골을 안장했습니다. 시부모님을 위해 이 모든 일을 평화롭게 할 수 있었던 건 사부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수련자의 높은 표준을 지켰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가정에 또 무슨 문제가 일어났을지 모릅니다.
시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큰형님, 둘째 형님을 비롯한 시댁 식구들은 제가 한 일을 보고 더욱 감탄했습니다. 예전엔 왕래가 없던 친척들도 서로 연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종종 어르신들을 찾아뵙고 파룬궁이 사람들에게 선량해지고 더 좋은 사람 되라고 가르친다고 알려드리며 진상 DVD와 소책자를 보여드렸습니다. 그분들은 모두 대법의 진상을 알게 되셨고 대부분 삼퇴(공산당의 3가지 조직 탈퇴)를 하셨습니다.
1999년 7월, 중공 장쩌민 일당이 대법을 광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했을 때 저는 대법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경찰과 주민위원회의 괴롭힘을 여러 차례 당했고, 불법 감금되어 노동수용소에서 강제노역을 했습니다. 이 기간 큰형님과 둘째 형님은 대법 책을 지켜주었고, 둘째 형님 남편과 조카딸들은 구치소와 노동수용소로 음식과 생필품을 가져와 면회했습니다. 둘째 형님 남편은 공안국과 노동수용소에 가서 제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직권 범위 내에서 저를 괴롭히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가택연금 기간에는 큰형님이 매일 녹두죽을 끓여 작열하는 태양에 불구하고 점심을 가져다주셨습니다.
저는 그들의 헌신과 도움, 이해에 감사하며 그들의 선행에 복이 있기를 기원했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모두 복을 받아 노년을 평안히 보내고, 가정이 화목하며, 자녀가 잘되고, 사업이 번창하고, 특진하기도 했습니다. 대법에 대한 선한 일념이 하늘의 복과 평안을 가져다준 것입니다.
맺음말
대법제자의 길은 모두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것이며, 수련 중에 겪는 고비와 어려움, 고통은 모두 역사상에서 맺은 인연 때문에 생긴 것이므로 그 누구도 원망할 수 없습니다. 만약 사부님께서 제자를 위해 역사의 업력을 감당해주시지 않으셨다면 오늘날의 제자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사부님의 자비로운 은혜입니다. 앞길이 아무리 멀더라도 제자는 사부님과 함께 신성한 고향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층차의 한계로 법에 부합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로이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허스(合十).
사부님 감사합니다!
수련생 여러분 감사합니다!
원문발표: 2024년 4월 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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