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혜망](헤이룽장성 통신원 2023년 7월 31일, 하얼빈시 쐉청구 신싱향 파룬궁수련자 자오더화(趙德華)가 납치돼 불법적으로 가택수색을 당한 후 쐉청구 구치소로 끌려갔다. 현재 자오더화는 근 8개월 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
대법 수련으로 온 가족이 혜택을 받다
자오더화는 남성으로 1965년 6월 7일 출생해 현재 59세이며, 만족(滿族)으로 헤이룽장성 쐉청시 신싱만족향 신파촌(이후에 둥광촌으로 개명)에 거주한다. 할아버지 대부터 자오 가문은 이곳에 살았다. 부모님은 모두 성실한 농민이었고 집안은 매우 가난했다. 4명의 자녀 중 자오더화가 맏이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농사일을 시작했다. 먹고 입는 것이 부족한 나날 속에서 그는 완고하고 고집 센 청년으로 성장했고, 막노동으로 먹고 살았다.
1987년, 자오더화는 이웃 마을의 류펑제(劉鳳傑)와 결혼했다. 류펑제는 자오더화보다 한 살 많았고 역시 화를 잘 내는 성격이어서 가정 갈등이 끊임 없었다. 며느리 류펑제와 시어머니 왕잉도 늘 갈등을 빚었다. 한번은 고부지간에 말다툼을 할 때, 자오더화가 몽둥이를 들고 류펑제를 마구 때려 멍이 들게 했다.
자오더화의 인생은 1999년 1월 17일 큰 변화를 맞이했다. 당시 중국 도시와 농촌에는 파룬궁이라 불리는 심신 수련법이 유행하고 있었다. 며느리 류펑제는 다른 사람들이 파룬궁을 배워 성격이 좋아지고 담배와 술도 끊는 것을 보고 남편에게도 배우라고 권했다. “당신은 담배를 끊겠다고 해도 끊지 못하니 파룬궁을 배워보는 게 어때?” 아내가 여러 번 권하자 자오더화는 가보기로 했다. 그는 파룬궁을 통해 자신이 믿음을 찾고, 인생도 바뀌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중국에서 탄생한 파룬궁은 일반적인 체육 운동과 다르게 동작 외에도 심성을 닦아야 하며, 수련자들에게 진선인(真·善·忍) 원칙을 따를 것을 요구한다. 파룬궁 창시자 리훙쯔(李洪志) 대사의 강의를 보고 자오더화의 내심은 깊은 충격을 받았다. “너무 잘 말씀하셨다! 이건 평범한 기공이 아니야. 나는 꼭 이 법을 배우겠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자오더화가 가장 먼저 바뀐 것은 오랫동안 피웠던 담배를 끊은 것이었다. 자오더화는 3일 만에 완전히 담배를 끊었다. 중독성이 강한 담배를 성공적으로 끊은 것뿐 아니라, 책 읽기와 공부를 좋아하게 됐고, 성격도 온화하고 예의 바르게 변했다. 그는 “진선인을 가르치는 파룬궁을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게 됐습니다”라고 말했다.
자오더화는 다시 태어난 것과 다름없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 왕잉과 아내 류펑제도 파룬궁 수련에 동참했고, 온 가족이 선량하고 겸손해졌으며 더 이상 다투지 않게 됐다.
온 가족 5명이 박해당하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중공)은 사리사욕을 위해 1999년 7월부터 대법을 모욕하고 비방하며 수련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대법의 명예를 되찾고 사부님의 결백함을 밝히기 위해, 자오더화 일가 5명은 베이징에 가서 청원하며 공정한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중공의 잔혹한 박해를 당했고, 자오더화 자신이 고문당했을 뿐만 아니라, 아내와 어머니도 박해 중 불행히 세상을 떠났으며, 두 어린 딸들도 어려서부터 고난을 겪어야 했다.
2000년 12월 31일, 자오더화 부부와 어머니 왕잉, 그리고 두 어린 딸은 파룬궁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하려고 베이징에 가서 청원했다. 그들은 톈안먼 광장에 갔고, 자오더화는 품에서 붉은 천을 꺼내 아내와 함께 펼쳤다. 이것은 그가 집에 있는 붉은 커튼을 찢어 금분을 섞은 페인트로 “파룬따파는 정법이다(法輪大法是正法)”라는 글자를 쓴 것이었다. 이는 그가 오랫동안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진실한 외침이었다. 그들은 국가 지도자들에게 파룬따파가 좋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고 파룬궁 박해를 중단하기를 바랐다. 이것은 민중의 마음속 소리였다. 그러나 그들의 소박하고 선량한 외침에 경찰들은 주먹과 발길질로 대답했다.
그날 자오더화는 파출소로 끌려가 경찰들에게 담뱃불로 지져졌고, 추운 날씨 속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자오더화는 경찰들에게 진실을 이야기했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고, 오히려 자오더화의 솜바지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자오더화의 머리는 구타로 인해 붓고 변형됐다.
다음 날, 쐉청구 주재 사무소 직원들이 자오더화 일가를 납치해 쐉청 제2구치소에 가둬 놓았다. 자오더화 일가는 2001년 설날을 쐉청시 제2구치소 감방에서 보냈다. 자오더화는 2개월간 박해를 당한 뒤, 신싱향 ‘610사무실'(파룬궁 탄압기구)과 현지 파출소 경찰들에 의해 향에서 운영하는 세뇌반으로 끌려가 다시 15일간 박해를 당했다.
신싱향 세뇌반 첫 집합 때, 자오더화는 베이징에서 납치된 이후 만나지 못했던 어머니와 아내를 처음 보았다. 세뇌반은 중공이 파룬궁 박해 이후 수련자들에게 수련을 포기하도록 강요하기 위해 특별히 설립한 세뇌 기관으로, 610사무실이 운영을 담당한다.
세뇌반 첫날, 현지 파출소장 쿵칭만, 경찰 장윈룽, 위전보, 바이춘우, 궈웨이둥, 바이위차오, 그리고 밖에서 고용한 폭력배 두 명(그 중 한 명은 왕녠콰이의 아들이었음) 등 악인들은 자오더화의 손발을 때려 푸르게 멍들고 만두처럼 부어오르게 했는데, 발은 부어서 신발을 신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 후 자오더화를 난방 파이프에 수갑으로 채워 화상을 입혔다.
이틀 후 오전 10시쯤, 장윈룽, 바이춘우, 쿵칭만, 궈웨이둥, 위전보, 탄산, 우레이, 그리고 몇 명의 낯선 자들이 다시 왔다. 그들은 자오더화의 옷을 벗긴 후 때렸고, 자오더화가 거의 숨을 쉴 수 없을 때까지 때린 후에야 그만뒀다.
바이위차오는 양초로 자오더화의 가슴을 지져 살갗이 지글거리는 소리를 냈고, 철사로 자오더화의 손가락을 찔러 피를 흘리게 했다. 그들은 자오더화에게 대법 사부님의 사진을 밟도록 강요했고, 플라스틱 막대기로 자오더화의 온몸을 멍들게 때렸다. 그들은 지쳐서 헐떡거렸고 자오더화는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마지막으로 자오더화를 침대에 수갑으로 채운 후 그들은 떠났다.
나흘째 되는 날, 바이춘우가 다시 왔다. 그는 자오더화에게 옷을 벗으라고 했고, 자오더화의 온몸에 성한 곳이 없는 것을 보자 “옷 입어, 더 이상 때릴 수가 없군”이라고 말하고 떠났다.
7일째부터 9일째 저녁까지, 장윈룽이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자오더화에게 ‘삼서(三書: 수련 포기 각서)’를 쓰라고 강요했다. 자오더화는 쓰지 않았다. 그러자 한겨울인데도 경찰들은 창문과 문을 열어 자오더화를 얼렸다. 이렇게 15일간 자오더화는 박해를 당했다. 동시에 신싱향 파출소장 쿵칭만은 자오더화의 300위안을 빼앗았다.
15일째 되는 날, 경찰은 자오더화를 다시 쐉청구 제2구치소로 끌고 가 계속 박해했다. 그곳은 습하고 어두컴컴해 햇빛이 들지 않았고, 자오더화는 온몸에 옴이 생겨 고통스러웠다. 한 달 반 후, 자오더화는 다시 현지 세뇌반으로 보내져 박해를 당했다.
자오더화와 류펑제에게는 두 딸이 있는데, 한 명은 두 살, 다른 한 명은 아홉 살이었다(2000년 기준). 2000년 말, 자오더화와 류펑제는 어린 두 딸과 어머니를 데리고 베이징에 가서 청원하다가 경찰에 납치됐다. 이틀 후 쐉청구 610 주관 경찰 장윈룽과 마을 주민 한싱후에 의해 끌려갔고, 두 딸은 돌볼 사람이 없어 경찰에 의해 친척 집으로 보내졌다.
자오더화 가족이 경작하는 토지는 모두 18.2무(畝)였다. 2001년, 마을에서는 자오더화 가족의 밭 7.2무만 남겨두고 나머지 토지를 회수했으며, 4천 위안의 토지 임대 수입을 610사무실에 넘겨 베이징 청원에 대한 벌금으로 충당했다. 토지가 줄어들어 자오더화 가족은 정상적인 생활조차 유지하기 어려웠다. 자오더화와 아내는 8천 위안의 벌금을 강요당했다.
다시 납치되고 아내와 어머니가 불행한 죽음 맞이해
자오더화는 대법 수련에는 잘못이 없으며, 전단지 배포와 진상 알리기도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는 박해를 폭로하고 제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자오더화는 다시 쐉청 제2구치소로 끌려갔다. 10평방미터 감방에 47명이 수감되어 매우 비좁았고, 밤에는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숨이 막혔다.
경찰은 또 죄수 자오더취안을 시켜 자오더화를 박해했다. 자오더화의 얼굴을 부어터지게 때렸고, 그가 법공부와 연공을 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자료를 조작해 1년 불법 강제노동 처분을 내리려 했다. 결국 자오더화는 완자 노동수용소로 끌려갔다. 신체검사에서 자오더화의 온몸이 박해로 인해 곪아 터졌기에 노동수용소에서는 받아주지 않았다. 자오더화는 다시 쐉청 제2구치소로 보내졌고, 1개월간 박해를 당한 후에야 귀가할 수 있었다.
아내 류펑제는 2000년 말 남편과 함께 두 어린 딸을 데리고 베이징에 가서 청원했다가 경찰에게 납치됐고, 이틀 후 쐉청시 610 주관 경찰 장윈룽과 마을 주민 한싱후에 의해 끌려갔다. 어린 두 딸은 경찰에 의해 친척 집으로 보내졌고, 류펑제는 쐉청시 제2구치소에 불법 감금됐다. 1개월 후, 다시 현지 파출소 세뇌반으로 끌려가 50일간 세뇌 박해를 당했다. 이 기간 쐉청시 610사무실의 직접 지휘하에 장윈룽은 6~7명을 데리고 류펑제를 마구 때리며, 사부님의 사진을 밟고 사부님을 욕하라고 강요했지만 그녀는 거부했다.
류펑제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고 집으로 돌아왔다. 벌금 강요로 인해 집안에는 돈이 없어 생활 수단을 잃었고, 채소를 팔아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2001년 8월 12일, 류펑제는 아이들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채소를 팔러 나갔다가 도중에 차에 치여 38세 나이로 숨졌다. 당시 두 아이는 각각 열 살과 세 살이었다. 자오더화는 “엄마”를 부르짖는 두 아이의 처절한 울음소리를 들으며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자오더화의 어머니 왕잉은 당시 60세로, 파룬궁 수련 전에는 기관지염, 폐기종, 심한 위하수 등을 앓았고 치료가 불가능했다. 그녀는 파룬궁을 연마한 후 건강을 회복했다. 2000년 말, 그녀는 아들, 며느리, 두 손녀와 함께 베이징에 가서 파룬궁의 진상을 알리는 청원을 했다가 경찰에게 납치돼 박해당했다. 이틀 후 쐉청시 경찰에 의해 끌려와 쐉청시 제2구치소로 보내져 계속 박해당했다. 세뇌반에서 그녀는 4천 위안의 벌금을 강요당했다. 이 기간 왕잉의 몸은 심각한 상처를 입었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회복되지 않다가 2005년 1월 9일 한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났다.
중공의 파룬궁 박해로 인해 자오더화는 완전한 가정을 잃었다. 사악한 중공 당국은 또 여러 차례 그를 괴롭혔고, 자오더화는 어린 두 딸을 데리고 서로 의지하며 살았으며, 박해를 피해 여러 번 유랑할 수밖에 없었다.
15일 불법 감금당해
하얼빈시 공안국은 각지를 암행 방문하던 중, 민자툰 마을 담벼락에 ‘파룬따파는 좋습니다(法輪大法好)’라는 표어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주민들에게 이곳에서 누가 파룬궁을 연마하는지 물었다. 그들은 자오더화의 집을 찾아 쐉청 공안국에 신고했다.
2014년 4월 25일, 쐉청구 국내안전보위대와 신싱 파출소 경찰 무리가 자오더화의 집에 난입했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들어와 강제로 자오더화를 끌고 가더니 가택수색을 하고 자오더화의 모든 파룬궁 수련서와 션윈 DVD, 현금 5백 위안을 강제로 가져갔다. 자오더화를 쐉청 구치소로 끌고 가 15일간 감금하고 가족에게 4백 위안의 식대를 내라고 요구한 뒤에야 풀어줬다. 당시 자오더화를 납치한 사람들은 쐉청시 공안국 왕위볜오, 신싱진 파출소 부소장 처자오둥, 민자툰 촌장 아이궈량 등이었다.
현재 60세에 가까운 자오더화는 2023년 7월 다시 납치돼 근 8개월간 불법 감금되어 있으며, 자세한 박해 내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선량한 분들의 관심을 호소한다.
원문발표: 2024년 3월 23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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