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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기 끔찍한 나날들 (상)

글/ 리원밍(李文明)

[명혜망]

편집자의 말: 지난 2002년 8월, 파룬궁수련자 리원밍(李文明)은 칭하이와 간쑤 등 지역의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에 관한 진상을 알리는 비디오 삽입방송에 참여했다. 이 때문에 그는 20년 형을 선고받고, 2003년 란저우 감옥에 수감됐다. 이후 그는 사존의 보호 아래, 대법(파룬궁) 수련으로 얻은 굳건한 의지로 갖은 고문을 견뎌내고 2021년 8월, 마침내 풀려나 험악한 박해에서 벗어났다.

* * *

나는 지금도 ‘진선인(真·善·忍)’이란 보편적 가치에 따라 착하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가혹한 탄압과 박해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 그들은 국가와 사회에 수많은 이로움만 있을 뿐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일은 중국에서 일어났고 아직도 진행 중이다.

1999년 7월 20일, 중국공산당 우두머리 장쩌민은 극도의 질투와 사리사욕, 망령된 심리 때문에 국가 권력을 이용해 만고에 없는 고덕(高德) 대법을 모욕하고 공격했으며, 1억이 넘는 선량한 수련생들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사부님에 대한 비방, 대법에 대한 부당한 공격에 직면해 대법제자들은 의연히 천안문광장에서, 정부 부처에서, 사회 각계에서 대법과 대법 수련자가 당한 억울함을 알리고 거짓말을 폭로하고 진실을 밝혔다. 그들은 평화롭게 자신들의 요구를 표현했지만 오히려 더 거센 탄압을 당했다. ‘명예를 실추시키고, 경제를 파탄시키며, 육체를 소멸하라’는 장쩌민의 명령에 따라 수많은 검은 손이 대법제자들을 향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만고(萬古)의 큰 죄, 이 악이 하늘에 사무친 큰 죄는, 뭇 대궁(大穹)의 일체 신들로 하여금 모두 진노(震怒)케 하였다!”[정진요지3-세간을 향해 바퀴(輪)를 돌리노라]

나는 그동안 네 차례나 납치돼 총 21년 6개월간 불법적으로 수감됐다. 그 기간 나는 잔인한 고문과 인격 모욕을 당하면서 한 번도 눈물을 흘린 적이 없지만, 지금은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중생을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신 사존의 자비를 알게 되고, 대법의 홍대함에 감탄하며, 수련생들의 끈질긴 인내심에 탄복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여러 번 망설인 끝에 펜을 들어 중공 사법 기관의 어둡고 끔찍한 내막을 폭로키로 했다. 이는 또한 사람들의 양심을 일깨우고 그들이 거짓말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대법을 이해하고 선량한 대법제자들을 알게 하기 위해서다.

1. 기쁘게 대법 얻어

나는 리원밍, 또는 리밍이(李明一)라고 하며 원래 간쑤성 란저우 오토바이 공장에서 근무했다. 대법 수련 전에 나는 명예와 이익을 매우 중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공장의 물건을 자주 집에 가져갔고, 공장 일을 하고 비용을 청구할 때도 실제보다 되도록 많이 청구했다.

또 몸은 건강하지 않아 호흡계, 소화계, 비뇨계 만성 질병을 두루 앓고 있었는데, 가을과 겨울에는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만성 위장염은 수시로 날 괴롭혔다. 여기다 허리 통증, 사지 무기력, 정신 혼미 등 증상이 자주 나타났고, 만성 인두염은 일 년 내내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많은 기공을 연마해봤지만 모두 소용이 없어 명산대천에 명사(名師)를 찾으러 가기도 했다.

그러던 1996년 나는 운 좋게 파룬따파를 만났다. 사부님의 심오한 법리는 단번에 날 끌어당겼고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했다. 나는 눈물을 머금고 사부님의 강의 비디오를 보았는데, 그 후부터 내 인생관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나는 그 분이 내가 애타게 찾던 사부님이라고 굳게 믿고 앞으로 사부님을 끝까지 따라가겠다고 결심했다.

그 후 내 몸의 여러 질병은 신기하게 사라졌고, 정신 상태도 완전히 달라졌다. 나는 이전에 공장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다시 가져갔고, 그동안 공장에 초과 청구했던 비용을 보상하기 위해 새로 청구해야 할 영수증을 모두 폐기했다. 또 사사건건 대법에 따라 자신의 언행을 점검하면서 그때부터 진정한 수련의 길에 들어섰다.

2. 대법을 실증하며 20년간 잔혹한 박해 견뎌내

1) 4·25 청원의 진상을 알리다

1999년 초 뤄쌍 링즈둬제(洛桑 靈智多傑) 당시 간쑤성 정치법률위원회 서기가 공개석상에서 대법을 ‘X교’라고 비방한 후, 간쑤성 각지에서 수련자들의 연공을 방해하고 가택을 불법적으로 수색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 그해 4월 27일, 란저우와 인근 지역 수련자들이 성 정부를 찾아가 뤄쌍 서기의 무책임한 발언을 시정하고 연공 환경을 보장할 것을 요구했다.

나는 당시 수련생 5인 대표 중 한 명으로 정부 관계자를 만났는데, 그는 뤄쌍의 발언은 개인적인 발언으로 정부를 대표하지 않으며, 정부는 대중의 파룬궁 연공 활동을 금지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각지에서 확성기나 살수차 등으로 수련자들의 연공을 방해하는 사건이 갈수록 빈발했고, 나중에는 납치하는 일까지 발생했다.(당시에는 바로 풀어줬음)

5월 어느 날, 란저우 수련자들은 다시 성(省) 당위원회를 방문했다. 나는 또 수련생 5인 대표로 사무총장과 면담했는데, 그의 태도는 매우 강경했다. 그는 수련자들의 연공을 방해한 일은 언급하지 않고, 4·25평화적 청원을 ‘중남해(中南海: 중공 고위층 거주지역) 포위 공격’이라고 비난하며 우리에게 정세를 정확히 인식하고 ‘법률’을 지킬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수련자들은 물러서지 않고 그 후에도 며칠간 매일 성 당위원회를 방문했다.

2) 7.20 때 납치돼 구치소에서 박해받아

공장 근무 중 납치되고 가택수색 당해

1999년 7월 21일 새벽 3시, 나는 공장에서 야간 당직을 서고 있었는데, 란저우시 치리허구 공안국 경찰 10여 명이 당직실에 찾아와 날 납치하고 당직실과 우리집을 수색해 대량의 파룬궁 수련서와 영상 자료를 압수해갔다. 그들은 나를 샤시위안(下西園) 센커라이(仙客來) 호텔 1층의 구석진 방에 가뒀다.

당시 란저우시에서는 위안장(袁江), 거쥔잉(葛俊英), 펑젠(彭健), 펑보(彭波), 위진팡(於進芳), 왕장수(汪章秀), 시리린(郗麗琳), 원스쉐(文仕學), 차오쥔(曹軍), 스샤오취안(史曉泉), 화진촨(華金川) 등 20여 명의 수련자들이 납치돼 밍주(明珠) 호텔과 룽바오산좡(隴保山莊) 등 여러 곳에 불법적으로 수감됐다. 공안국은 두 개 대대의 특수경찰과 시 공안국 1처, 각 구역 공안분국 1과 경찰들을 파견해 밤낮 감시하게 했다.

20일 후 그들은 다른 수련자들은 다 풀어주고 나와 위안장(2001년 11월 박해로 사망, 당시 29세), 거쥔잉, 펑젠, 펑보, 위진팡, 왕장수 등 나머지 일곱 명을 인민호텔로 집결시켰다. 그들은 호텔 한 층을 비우게 하고, 특수경찰 한 개 대대와 시 공안국 1처 경찰을 동원해 6개월 동안 밤낮으로 우리에게 ‘반성’을 강요하고, 강제로 전향시켜 신념을 포기하게 하려고 했다. 그 후 직장에서 우리를 데려가게 했으며, 직장 안에서 주거하며 감시받게 했다.

베이징에 청원 갔다가 체포돼

우리는 매주 수요일 오후마다 시 공안국에 가서 ‘학습’을 해야 했다. 당시 설을 앞두고 공장의 감시가 느슨해지자 나는 틈을 타 란저우에서 122호 베이징행 열차를 탔다. 베이징 수련생은 날 창핑구(昌平區) 회룡관(回龍觀)의 한 셋집에 데려갔다. 그곳에서는 매일 전국 각지에서 온 수련자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그들은 거기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쩐싼런하오(真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파룬따파는 정법이다’ 등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나 플래카드를 만들어 천안문광장에 가서 대법을 실증했다.

그곳에서 불법적으로 감금된 기간 나는 저지른 잘못을 뉘우치고 명혜망에 엄정성명을 발표했으며, 2, 3일간 현수막 문구를 쓰는 일에 참여했다. 나중에 회룡관 파출소 경찰들은 그곳을 발견하고, 집 안에 있던 수련생과 나중에 찾아온 수련생들을 잇따라 납치했는데 대략 40~50명 정도 됐다. 경찰은 우리를 파출소로 연행한 후 날 포함한 남자 수련생 몇 명을 쓰러뜨리고, 구둣발로 머리와 온몸을 마구 걷어찼다.

당시 베이징은 겨울이라 공기가 탁했고 태양도 먼지에 가려져 있었다. 땅바닥에도 검댕이 쌓여있어 우리 몇 명은 얼굴과 온몸이 온통 시커멓게 됐다. 경찰은 또 우리에게 웃통을 벗고 얼음을 껴안게 했다. 그들의 악랄한 만행에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았고, 신기하게도 한겨울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추위는커녕 배가 매우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나는 우리가 겪는 흉포함은 표면적인 것일 뿐이고 실질적인 것은 사존께서 감당하셨음을 깨닫고 눈물을 흘렸다. 당시 방에 갇혀 있던 여성 수련생들은 밖으로 뛰쳐나와 경찰들을 질책하며 우리를 도와주려 했다. 그 덕분에 경찰은 폭행을 멈췄다. 이후 수련생들은 함께 단식하고 ‘논어’를 외우며 불법 체포에 항의했다.

하루가 지난 후 그들은 다시 우리를 심문하기 시작했는데, 이름과 주소를 대지 않은 수련생들은 구치소로 끌려갔다. 나는 베이징에 있는 란저우 정부 대표처로 끌려갔는데, 대표처 주임은 내가 도망갈까 봐 수갑으로 소파에 채워놓고, 이튿날 날 인도하러 온 란저우 공안국 1처 대장과 우리 공장 보위처장에게 신병을 넘겼다.

란저우 시궈위안 구치소에서

베이징시 당국은 새해를 앞둔 12월에는 모든 외부인의 체류를 금지했다. 그래서 그들은 저녁 늦은 시간에 항공편으로 날 란저우에 데려갔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에는 즉시 시궈위안(西果園) 구치소에 수감시켰다. 당시 자정이 넘은 시간이어서 짙은 어둠 속에서 구치소의 불빛 몇 개만 반짝이고 있었다.

시궈위안 구치소는 산자락에 있었는데, 좀 낮은 지대에 있어서 대문까지 가는 길은 내리막길이었다. 그 대문 위에는 망루가 있고 망루에는 총을 쏠 수 있는 구멍이 나 있었다. 감옥은 겉에서부터 으스스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는데, 철제 대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안에 들어서니 돌을 쌓아 황토굴처럼 지은 감방이 보였다. 한 감방에 수감자 20~30명, 심지어 40여 명까지 갇혀 있어 몹시 비좁았는데, 식사와 배변을 모두 그 속에서 해결하다 보니 공기가 나빠 숨 막힐 지경이었다. 어떤 감방은 한 층의 통 침대만 있어서 어떤 사람은 침대 밑바닥에서 자야 했고, 옆 사람과 반대 방향으로 누운 후 옆으로 몸을 세워야 다 누울 수 있다. 밤에 화장실을 다녀오면 다시 누울 공간을 찾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 안에서는 쥐가 자주 드나들었고 이도 득실거렸다. 어떤 사람은 온몸에 욕창이 생겼지만 치료를 받지 못해 옷을 벗고 햇볕을 쬘 수밖에 없었는데, 어떤 사람은 살이 썩어 뼈까지 보였다.

그곳에서는 매일 강제노동에 참여해야 했다. 여름에는 멜론 씨앗을 주워야 했는데, 많을 때는 하루에 한 마대씩 모아야 했다. 임무를 완성하지 못하면 밤늦게까지 주웠다. 그러면 졸려서 눈을 비비다 보니 위생 환경이 좋지 않아 눈이 실명되는 경우도 있었다. 겨울에는 해바라기씨를 큰 대접 하나씩 깠는데, 장기간 하다 보면 이가 깨지거나 손톱이 떨어지는 일이 흔했다. 임무를 완성하지 못하면 매를 맞았고, 그러다 죽어도 모두 ‘정상 사망’으로 처리했다. 감옥경찰이 수감자들을 폭행하는 수법은 108가지나 됐는데, 그들은 ‘요리 메뉴’라고 불렀다.

나는 그곳에 갇힌 지 3개월 됐을 때, 날 심문하러 찾아온 란저우시 공안국의 허보(何波), 웨이둥(魏東) 등 경찰에게 더 이상 날 가두는 것은 불법이라고 지적했다. 그 후 97일째 됐을 때, 그들은 날 풀어주고 주거지 감시 조치로 바꾸었다.

구치소에서 나와 보니 아내 샤오옌훙(肖彦紅)은 강제노동 1년 형을 선고받고 핑안타이(平安台) 노동수용소에 수감돼 있었다. 나는 공장에서 증명서를 발급받고 수용소에 가서 아내를 만났는데, 아내는 얼굴이 까맣고 몸이 부어있었다. 그녀를 만나는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하지만 그녀와의 면회는 그렇게 짧게 끝났다.

3) 강제 노동수용소의 혹독한 고문

박해받아 사망한 수련자 추모하다 납치돼

2000년 5월 어느 날, 나는 수련생 야오바오룽(姚寶榮)이 안닝(安寧)구 공안국에서 박해받아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치리허(七里河) 수련생 장쥐슈(張菊秀)의 집에 찾아갔다. 도착하니 이미 몇몇 수련생들이 그곳에 있었다. 야오바오룽의 부모가 생전 지인들의 조문을 허락해, 나는 추모 현수막을 걸고 영안실 앞에서 추모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한 변절자의 배신으로 나는 치리허 공안분국의 사악한 경찰 시밍제(席明傑) 등에게 납치돼 치리허 공안국에 48시간 억류된 후 시궈위안 구치소에 21일간 구금됐다. 그 기간 나는 단식하며 란저우시 정치법률위원회 당서기를 만날 것을 요구했다. 당시 나는 거의 탈진해 하루 종일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었다. 구치소 담당자인 먀오(苗) 씨는 시 공안국 1처에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 조속한 처리를 요구했다. 결국 1년 반 동안 수용소에 수감됐다.

나는 우리 공장의 한 동료가 동반한 가운데, 경찰 허보와 다른 한 젊은 경찰에게 연행돼 핑안타이 강제 노동수용소에 갔다. 장기간의 단식으로 몸이 극도로 쇠약한 상태에서 차를 타자 나는 실신할 정도로 힘들었다. 그런데 길에서 그 젊은 경찰이 작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제가 보기에 파룬궁 탄압은 3년을 넘지 못할 겁니다.” 나는 그 말이 기쁘고 위안이 됐다. 그는 그때까지 내가 만난 경찰 중 유일하게 깨어 있는 경찰이었다. 강제 노동수용소에서 나는 3대대 2중대로 배속됐다.

그곳에 수감된 5개월 동안 나는 여러 차례 단식으로 박해에 맞섰고, 경찰이 연공하지 못하게 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죄수 앞잡이가 밀치면서 연공하지 못하게 하자 나는 한밤중에 경찰 당직실 창가에 가서 연공했다. 그러면 그들은 나에게 손을 대지 못하고 보고했고, 당직 경찰은 날 강제로 감방으로 옮겨 가게 했다. 단식 기간 중대장 장취안싱(張全興)은 마약범 7명을 보내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게 했다.

가을이 되자 나는 설사가 멈추지 않았다. 많을 때는 하룻밤에 열 번 넘게 했고, 낮에도 7~8차례 화장실에 갔다. 그래서 눈에 띄게 수척해졌지만 정신 상태는 매우 좋아 매일 수레를 끌고 산에 있는 군부대에 가서 땅을 고르게 펴는 일을 할 수 있었다. 나중에 감옥경찰 돤지핑(段繼平)은 이 일을 알고, 마약범들을 시켜 날 넘어뜨리고 숟가락으로 내 입을 벌리고 강제로 약을 먹이려 했다. 그들은 내 치아까지 부러뜨렸지만 약을 먹이지는 못했다. 그렇게 40여 일이 지났다.

또 한번은 그들이 내가 잘 때 내 몸에 있던 사부님의 ‘홍음’ 책자를 훔쳐 갔다. 그것은 내가 매일 보고 외우던 것이었다. 나는 다시 단식했다. 10여 일이 지났을 때 감옥장 쩡링펑(曾令峰)이 찾아와서 보고 갔다. 그 후 나는 1중대로 옮겨졌다가 다시 5대대로 이송됐다.

1중대에 있을 때 한 마약범이 내 여행 가방을 검사하다가 경찰이 보는 앞에서 내 양털 스웨터를 빼앗아 갔다. 그 스웨터는 신장에 사는 장인, 장모가 우리 부부를 보러 왔을 때 선물한 것이었다. 나는 이 일을 다이싱룽(戴興隆) 관리과장에게 보고했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5대대에 오니 가장 더럽고 힘든 일은 거의 수련생들에게 시켰다. 한번은 화장실에 있는 인분을 밭으로 날라 흙과 섞은 후 벽돌처럼 만들어 퇴비를 만들었는데 우리 몇몇 대법제자들에게 시켰다. 일을 하다가 점심 식사 시간이 됐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손 씻을 물을 주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는데 수련생 쑹옌자오(宋延昭)가 나에게 말했다. “이건 그다지 더럽지 않아요. 요즘 어떤 사람들의 마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의 이 한마디는 날 일깨워줬다. 나는 즉시 더러운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찐빵을 집어 먹었다.

또 한번은 물통으로 개울에서 물을 퍼다 밭에 줬는데, 우리를 감시하던 마약범 마유싼(馬有三)은 몽둥이를 들고 우리에게 뛰게 했다. 동작이 조금만 느리면 몽둥이로 매질을 해댔다. 하지만 나는 그의 지시에 협조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천천히 날랐다. 그가 한 대 때린 후 내가 맞서자 그는 더 이상 때리지 못했다. 한번은 관리과에서 세뇌 공부 자료를 시험 봤는데 수련생들은 모두 외우지 않았다. 수련생 루바오량(陸保良)은 외울 차례가 되자 관리과장 다이싱룽에게 “대법제자는 이런 걸 외우지 않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강제 노동수용소에서 처음 ‘천안문 분신’ 조작 사건을 알게 돼

2001년 1월 23일 저녁 7시, 감옥 경찰은 ‘중요한 소식’이 있다면서 수감자들을 모아 놓고 TV 뉴스를 보게 했다. 죄수 앞잡이 두 명이 날 제일 앞줄로 끌고 가 바닥에 앉혔다. 나는 또 대법을 날조하고 비방하는 내용인 줄 알고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경찰이 앞잡이들을 시켜 내 눈꺼풀을 뒤집게 하자 그들과 나는 몸싸움이 일어났는데, 그때 TV에서 ‘천안문 분신’ 사건이 방송됐다.

수련생 선스융(申世勇)이 즉시 일어서서 대법은 수련자들에게 살생과 자살을 허용하지 않으며, 자살하면 대법 수련자가 아니라고 폭로했다. 경찰은 즉시 선스융을 사무실로 끌고 가 아주 가는 끈으로 1시간 넘게 묶어 놓고 고문했다. 하지만 수련생 차이창(柴强)도 일어나 진상을 말했다.

‘천안문 분신’ 조작 사건이 방송된 후, 핑안타이 노동수용소는 대법제자들에게 더욱 잔인한 탄압을 시작했다. 사악한 경찰 대대장 마우(馬武)의 지시에 따라 그들은 수련생 진지린(金吉林)의 한 손을 다리 사이를 지나게 한 후 다른 한 손과 함께 수갑을 채워 허리를 펴고 걸을 수 없게 했다. 또 수련생 왕마오린(王茂林)의 두 손을 뒤로 수갑 채워 빨랫줄에 매단 후, 마약범들을 시켜 배를 구타하게 해서 대소변 실금이 오게 했다.

첸스광의 죽음

수련생 첸스광(錢世光)은 당시 예순 살이었다. 그는 얼굴이 변형될 정도로 구타당해 몇 차례나 입원했다. 신념이 굳건했던 첸스광은 사람이 많은 곳에 가거나 다른 대대 수감자들이 지나갈 때마다 외쳤다. “파룬따파는 좋습니다!” “파룬궁은 좋습니다!” 우렁찬 그의 목소리는 하늘까지 울려 퍼져 사악을 두려움에 떨게 하고 중생을 일깨워줬다. 그는 외칠 때마다 폭행당했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다. 첸스광은 말했다. “저는 어디서든 파룬따파가 좋다는 사실을 알릴 겁니다!”

수용소 밖에 있을 때 첸스광은 항상 대법 진상자료와 ‘파룬따파는 좋습니다’가 새겨진 도장을 가지고 다니면서, 어디를 가든 도장을 찍어놨다. 한번은 진상자료를 배포하다가 악인을 만났는데, 4시간 동안 발정념을 하면서 대치한 끝에 다른 공간의 사악을 제거하고 무사히 탈출했다.

나중에 그는 궁자완(龔家灣) 세뇌반으로 납치됐다. 그는 생명이 위독해서 말을 못 하고 침대에 누워있을 때도 발정념 시간이 되면 나뭇가지로 침대를 두드리며 다른 수련생들에게 발정념을 잊지 않게 했다. 늘 성실했던 그는 사존의 경문을 외울 때도 문장부호 하나 빠뜨리지 않았다. 그는 늘 사부님 경문 중의 문장부호도 법이며, 법을 존경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첸스광은 결국 궁자완 세뇌반에서 박해로 세상을 떠났다.

쑹옌자오의 죽음

수련생 쑹옌자오는 폭행당해 얼굴이 변형되고 갈비뼈 5개가 부러졌지만, 사악한 경찰은 그에게 매일 아픈 수감자 4~5명을 수레에 태워 밭에 끌고 가게 했다. 5대대는 하우스 채소를 재배했다. 거기서 경찰 바오핑(包平)은 두 앞잡이에게 쑹옌자오의 두 손을 하우스 철사에 매달고 폭행하게 했다. 우리가 그가 갈비뼈가 부러져 병원에 가야 한다고 하자 캉스청(康士成), 왕원창(王文昌), 바오핑 등 경찰들은 더 가혹하게 박해했다. 캉스청은 쑹옌자오에게 말했다. “갈비뼈가 부러졌다며? 자, 우리가 치료해 줄게.” 그러고는 쑹옌자오를 땅바닥에 쓰러뜨리고 뼈가 부러진 부위를 꾹꾹 눌렀다. 그 때문에 쑹옌자오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수련생 장루찬(張露禪)이 “뼈가 부러진 사람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라고 따지자 경찰 황 씨가 빈정대며 말했다. “장루찬, 넌 대학을 어떻게 다녔어? 안마가 환자에게 좋은 것도 몰라?” 경찰 캉스청, 왕원창 등도 으스댔다. “나는 이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믿지 않아!” 쑹옌자오는 박해로 사망할 때까지 대법에 대한 믿음을 지켰고, 마지막까지 가부좌를 하고 있었다.

쑹옌자오가 박해로 사망한 후 경찰 마우는 대대장 자리에서 내려가 2대대 부대장으로 옮겨갔고, 5대대 정치지도원도 다른 대대로 갔다. 그 후 캉스청은 기가 죽었고, 왕원창은 허드렛일을 담당하게 됐으며, 바오핑은 하우스 지붕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는 등 모두 응보를 받았다.

발정념으로 박해에 맞서기 시작해

바이인(白銀)시 10대 우수 청년이자 파룬궁수련생 마쥔옌(馬君彦)도 우리와 함께 수감됐다.(아내는 여자 감방에 있었음) 바이인시 전력회사에서 지명한 미래 지도자였던 그는 열정적이면서 겸손하고 성실해 평판이 매우 좋았다. 전력회사 사장이 여러 차례 수용소를 찾아와 설득했지만 대법에 대한 그의 신념은 매우 확고했다.

한번은 내가 ‘귀머거리’라는 별명을 가진 마약범에게 화장실로 끌려가 폭행을 당했다. 뒤이어 마약범 몇 명이 내 양팔을 동시에 뒤로 당겨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들은 먼저 내 손목에 헝겊을 감은 후 뒤로 수갑을 채워 빨랫줄에 걸어놨다. 그렇게 하면 수갑이 미끄러지지 않았다. 당시 내 두 팔은 마비되어 감각을 잃었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 마약범들이 제아무리 기세등등해도 버틸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 마약범이 빨랫줄에 걸린 수갑을 끌고 뛰기 시작했다. 나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까치발로 그와 같이 뛰었다. 빨랫줄은 가운데가 낮고 시멘트 기둥과 가까운 양쪽은 높아서 시멘트 기둥 앞까지 가면 내 발끝은 바닥에 거의 닿지 않았고 두 팔의 통증은 뼛속을 파고들어 얼굴에서 땀이 흘렀다. 그렇게 몇 번 반복한 후 나는 녹초가 되어 서 있을 수 없었는데, 그 후에도 40분 넘게 매달려 있었다. 나중에 그들이 날 풀어주고 일으켜 세운 후 두 팔을 힘껏 문질러 줘서야 나는 정신이 돌아왔다. 그 후 내 손목과 양팔은 며칠간 마비 상태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쑹옌자오가 사망한 후 5대대 수련생들은 기분이 침울했다. 한번은 물을 뜨러 갔다가 나는 몇몇 수련생에게 단식 항의를 벌이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당시 수련생들이 두려운 마음이 커서 성사되지 않았다.

나중에 밖의 한 수련생이 면회를 와서 ‘대법제자들은 발정념으로 다른 공간의 사악한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는 명혜편집부 공지를 전해줬다. 나는 수련생 장펑(張峰)에게 반드시 앉은 자세로 발정념을 잘하자고 하며, 다른 수련생들에게도 전해주자고 했다. 그 후 아침 6시면 수련생들이 모두 동시에 일어나 발정념을 했는데, 경찰들은 놀라면서도 아무런 조치도 감히 취하지 못했다.

단체 연공을 회복해

나는 수련생들에게 다시 정념이 생긴 것을 보고 단체 연공을 해서 환경을 개척하자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아침 5시에 연공을 시작했다. 첫날 연공 때 경찰들은 심하게 막지 않았다. 저녁에 신임 대대장 정지광(鄭繼光)이 날 불러내 말했다. “더 이상 연공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지금 바로 가서 잠을 자도 돼. 어떤 조치도 하지 않겠어.” 하지만 나는 바로 거절했다. “안 됩니다! 저는 연공을 해서 여기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좋은 공법을 왜 연마하지 못하게 합니까?! 계속할 겁니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리원밍, 당신은 무대 아래에서 무대 위로, 무대 뒤에서 무대 앞으로 나오더니 이젠 팔을 걷고 덤비는구만! 이만 가봐!” 그들은 날 자갈을 쌓아 놓는 창고에 가두고 마약범 네 명과 경찰 두 명을 보내 지키게 했다. 그들은 내 손을 뒤로 해 침대에 수갑으로 채워놓았는데, 나는 단식으로 박해에 맞섰다.

재차 단식으로 박해에 맞서

이튿날 아침 또 수련생 몇 명이 끌려와 나처럼 수갑이 채워졌다. 사흘째에는 수련생 뉴완장(牛萬江)도 끌려왔다. 그때 감옥장 정링펑과 경찰 몇 명이 5대대로 순찰을 왔다가 나를 ‘간신’이라며 조롱했다. 5대대 수련생들이 따로 수감되면서 경찰력이 부족해지자 교육과, 관리과에서 일부 경찰력을 차출해 박해를 도왔는데, 3대대장을 지내다가 수용소 당기율위원회 서기가 된 경찰도 있었다. 우리를 박해하면서 5대대의 생산 활동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어느 날, 교육과장이 나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다. 나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좋지만 평등한 입장에서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는 마약범에게 시켜 나에게 작은 안락의자를 가져오게 하고 차까지 한 잔 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당연히 그들이 원하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었기에, 그에 따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나중에 이런 사고방식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음) 나는 환경을 개척하려고 연공을 고집했고, 그들은 다른 것은 의논할 여지가 있지만 연공만은 안 된다고 못 박았다.

당시 수련생 장펑(張峰) 등이 나와 함께 단식 중이었는데, 그들은 사흘째가 되자 우리를 병원에 데려가 음식물을 강제 주입했다. 2주 후 그들은 다른 수련생들을 모두 풀어주고 마지막에 나 한 사람만 남자, 나를 5대대 1중대에 가뒀다.(이 중대는 일을 하러 가서 방이 비어 있었음) 그들은 날 반쯤 웅크린 자세로 의자에 묶어 놓았다가 일주일 후 풀어줬다.

2중대로 돌아오니 왕 씨 중대장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은 형기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때까지만 가만히 있어. 나중에 내가 집에 데려다줄게.” 나는 그에게 말했다. “저는 원래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들이 저를 가만두지 않은 거지요.”

그 후에도 우리는 노동에 참여하지 않고 점호를 거부하는 등 그들의 관리에 협조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대대장 정지광이 나에게 바른 법집행 관련 좌담회를 열겠다며, 5대대의 모든 파룬궁수련자와 일부 경찰들을 참석시켰다.

좌담회에서 장룽(張榮) 등 수련생은 그들이 어떻게 대법제자를 박해했는지, 쑹옌자오가 어떻게 박해로 사망했는지 폭로했다. 회의에서 정지광은 자신의 부임 중 파룬궁수련자를 때리고 욕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부터 5대대의 환경은 좋아져서 수련생들이 서로 사부님의 경문을 전하고 법을 배우고 암기하며 심득을 교류했는데, 거의 교란을 받지 않았다. 일부 마약범들은 우리를 도와 경문을 숨겨주기도 했다.

그래도 한 마약범은 내가 몸에 숨긴 경문을 훔쳐서 경찰에게 바치고 상을 타려 했다. 내가 경문을 돌려달라며 그와 몸싸움을 벌이는 바람에 당직 대대장까지 달려왔다. 대대장은 즉시 날 훈계했고, 나도 내가 좀 과격했다고 생각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대대장이 말했다. “이건 다 외우지 않았나? 계속 둬서 뭘 하나?” 수련생 선스융(申世勇)이 경찰 레이진핑(雷金平)에게 경문을 내게 돌려주라고 했지만 돌려받지 못했다. 나는 당시 내가 마음가짐을 바로잡았더라면 사태를 그렇게 키우지 않고도 경문을 돌려받을 수 있었음을 깨달았다.

나중에 내 경문을 훔친 마약범은 야간 당직을 선 중대장에게 다른 핑계로 호되게 얻어맞았다. 중대장은 그에게 쓸데없는 일을 만든다며 야간 당직을 서지 못하게 하고 낮에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일하게 했다. 그는 원래 다리에 장애가 있어서 야간 당직을 맡았는데, 이번 일로 당직을 서지 못하고 매까지 맞았다.

노동수용소 박해가 끝나고 정신병원에 수감돼

2001년 12월 나는 핑안타이 강제 노동수용소를 나와, 우리 공장에서 보낸 차를 타고 공장 보위부에 갔고 그때부터 공장에서 생활했다. 하지만 엄격한 감시를 받아 자유가 없었다.

그때 린자좡(林家莊)에 있는 우리집이 철거된다는 소식을 듣고 보러 가겠다고 했지만 허락받지 못했다. 아내는 내가 공장에서 불법적인 감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공장에 전화로 항의했다. 그러자 그들은 날 란저우시 치리허구 화린핑(華林坪) 세뇌반으로 옮겨가게 했다. 그곳은 간쑤성 중의학재활센터였는데 4층은 정신병원이어서 창문과 복도가 철창으로 막혀 있었고, 1층에는 큰 철제 대문이 있어서 감옥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이곳을 통째로 얻어서 대법제자들을 강제로 ‘전향(수련 포기)’시키는 세뇌반으로 만들었다.

나는 거기서 다시 철거할 집을 보러 가겠다고 요구했지만 여전히 허락받지 못하자 단식을 시작했다. 그 후 탈출 가능성을 발견하고 단식을 중단하고, 매일 창가에서 주변을 관찰하고 체력이 회복되기를 기다렸다. 2002년 설을 앞두고 집으로 돌아간 환자가 많아지자, 의료진도 설 준비에 정신이 없었다. 나는 사존의 보호 하에 기회를 틈타 창문에 용접된 철창을 부러뜨리고 4층에서 뛰어내려 탈출에 성공했다. 그 후 란저우시 공안국은 주요 도로 출입구에 5만 위안(약 1천만 원) 현상금을 내건 수배령 포스터를 붙였고, 우리집 앞과 친지들 집 앞을 지키고 있으면서 날 체포하려 했다.

(계속)

 

원문발표: 2024년 3월 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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