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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법회] 우리는 수감된 수련생의 가족이다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위대하신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25년간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 수련을 해온 대법제자로, 현재 63세입니다. 제20회 명혜망 중국법회에서 박해받는 수련생 구출에 참여한 과정과 저의 수련 체험을 써서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께 보고드리고, 수련생 여러분과 공유하려 합니다.

1. 정체적으로 협력해 노동수용소에 들어가 수련생을 만나다

2009년, 우리 지역 수련생 B는 불법적으로 강제노동 1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어느 날 수련생 C가 저에게 말했습니다. “B의 형기가 끝나서 가족이 데리러 갔는데, 노동수용소 측이 B가 ‘전향(수련 포기)’ 등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구실로 석방하지 않아요. 그래서 B는 계속 갇히게 됐어요. 하지만 면회는 가능하답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전향하지 않았다니 정말 의지가 대단하네요. B의 가족을 찾아가서 얘기해봐요. 그들이 면회 갈 때 우리도 같이 가서 그녀의 정념을 강화하고 구세력의 박해를 부정할 수 있게 도웁시다.”

어느 날 저와 C는 B를 면회하는 일을 논의하기 위해 B의 여동생을 찾아갔습니다. 그녀의 여동생도 수련생이었는데, 저는 B의 남편이 언제 노동수용소에 면회 가는지 물으면서 같이 가서 직접 만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B의 여동생은 면회 시간을 알려줬습니다.

C가 수련생 Z와 L에게 연락해, 우리 네 사람은 어떻게 사부님과 대법을 믿고, 구세력의 박해를 부정하면서 B를 구할지 함께 의논했습니다. 수련생 Z와 L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협력했기에, 우리 네 사람은 B를 구하는 임시 팀을 구성하고 하루 일찍 버스를 타고 저녁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또 사부님의 도움 하에 노동수용소 인근 여관에 순조롭게 투숙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같은 방에 머무르며 법공부하고 교류하고 발정념을 했습니다.

당시 세 수련생은 모두 저보다 10살 이상 많은 60대 할머니들이었는데, 모두 정념이 강해서 피곤해하지 않았으며 일에 빈틈이 없었습니다. 버스에 오를 때만 해도 저는 그들이 음식을 잔뜩 싸 들고 온 것을 보고, 나이 많은 수련생들은 관념이 너무 많아 어딜 가든 무거운 짐을 만든다고 좀 못마땅해했습니다. 하지만 여관에 있어 보니 갖고 간 음식 덕분에 많은 일을 덜 수 있었습니다. 사부님의 배치로 우리는 서로 협력하며 같은 목표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작지만 매우 견고한 정체(整體)를 형성했으며, 구세력이 굴복할 수밖에 없는 천군만마의 태세를 보였습니다. 이는 대법의 위력입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아침 식사를 하고 노동수용소 대문 밖에서 B의 가족을 기다렸습니다. 8시쯤 B의 남편과 아들, 여동생이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B의 여동생이 우리에게 다가와 B의 아들이 우리가 어머니를 만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 넷 중 B의 아들을 모르는 사람은 저뿐이었습니다. 그때 한 수련생이 “그러면 만나지 말죠 뭐, 아들을 불편하게 만들지 말고 밖에서 발정념만 해요”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흔들리지 않고 수련생들에게 말했습니다. “속인의 말을 들으면 안 돼요. 지금 다른 공간에서는 정사대전(正邪大戰)을 하고 있습니다. 사악은 우리가 B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급히 교류해 상황을 지켜보며 되도록 B를 만나는 방향으로 노력하자고 결정했습니다.

B의 면회 시간이 돌아오자 Z와 L은 수용소 대문 밖에서 발정념을 했고, 저와 C는 B의 가족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제가 C에게 “면회실에 들어가지 못하면 로비에서라도 머물며 B의 가족을 기다려요. 거기서 B의 상황을 들어봅시다”라고 말하자 C는 그러자고 했습니다.

면회실로 갈 때 우리는 B의 가족과 약간 거리를 두고 뒤따라갔는데, 제가 앞에서 걸었고 C는 뒤에 있었습니다. 복도는 구불구불해서 면회실까지 정말 멀어 보였습니다. 저는 조금 긴장돼 정념으로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대법제자에게 후퇴란 없다.’ 그때 제 뒤에 있던 C가 “계속 앞으로!”라고 말하면서 손으로 제 팔을 살짝 밀었습니다. 저는 걸어가면서 한편으로는 발정념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용히 사부님의 법을 외웠습니다. “대각자는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나니 의지는 금강으로 만들었구나 생사의 집착이 없나니 정법의 길은 탄탄하여라”(홍음2-정념정행). 그렇게 정념을 강화하니 잠시 후 마음이 진정되고 머릿속이 텅 비어 모든 생각이 없어졌습니다.

면회실 앞에 도착하니 수감자를 만날 때까지 세 개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와 C는 계속 B의 가족을 뒤따라갔습니다. 4~5m쯤 걸어가니 첫 번째 문이 있었는데, 한 여경이 입구에 서 있었습니다. 그녀는 B의 가족이 들어갈 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속으로 ‘그래, 나에게도 말을 걸지 마’라고 생각했습니다. 뒤이어 저는 ‘그녀가 날 들여보내 줄까?’라고 걱정했습니다. 그때 C가 “빨리 따라가요”라고 독촉했습니다. 제가 문 앞에 도착하자 그 여경은 “면회하러 가세요?”라고 친절하게 물었고, 저는 “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여경은 “지금 면회 시간이니 빨리 들어가세요”라고 열성적으로 안내했습니다.

저와 C는 빠른 걸음으로 첫 번째 문을 통과한 후 7~8m를 걸어가 두 번째 문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저는 그제야 주위를 둘러봤는데 그곳은 복도가 아니라 큰 방이 있었고, 옆에서 경찰 몇 명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저와 C는 서둘러 문을 열었습니다.

두 번째 문은 두 개의 문이 서로 마주 보고 있었고 잠금장치로 잠겨 있었습니다. 우리 둘은 재빨리 잠금장치를 열고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1m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세 번째 문이 있었고, 역시 두 개의 문이 잠겨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재빨리 잠금장치를 열고 면회실로 들어갔습니다. 면회실은 수십 평 되는 넓은 공간이었는데, 가운데가 큰 방음 유리로 막혀 있어 양쪽 사람들이 서로 소리를 들을 수 없었습니다. 유리 벽에 몇 개 창구가 있었고, 안팎에 수화기가 설치돼 있어서 가족들은 그 수화기로 이야기를 나눴고, 경찰들은 같이 듣고 있었습니다.

저와 C가 면회실에 들어갔을 때 B는 수화기를 들고 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모자가 모두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사악에 이용당해 “엄마가 한마디만 하면 집에 보내준다고 했어요”라며 B를 설득하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또 자신의 고통도 하소연했습니다. B의 아들은 원래 대법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B가 여러 차례 박해를 받으면서 따라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어머니와 함께 있지 않아 중공(중국공산당)의 거짓말을 지속적으로 듣고 속았습니다. 아들은 어머니가 수련을 포기한다고 한마디 하고 집에 가서 계속 수련하면 되는데, 왜 쓸데없는 고생을 하냐고 했습니다.

저와 C, 그리고 B의 남편은 모두 옆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옆에서 면회 시간이 거의 끝났다고 해서 저는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전 아직 B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고 들어온 목적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B의 아들은 어투가 격해지더니 수화기를 집어 던지고 창가에 가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B가 아들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B의 남편이 수화기를 들고 몇 마디 한 후 바로 내려놓자, C가 얼른 수화기를 들었습니다. 그녀는 B에게 생활용품이 충분한지 물어보고 인사말 몇 마디 더 나눴는데 둘이 눈물까지 훔쳤습니다. 그때 경찰이 “시간이 거의 다 됐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아직 B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기에 더욱 조급해졌습니다.

그때 C가 제게 수화기를 넘겨줬는데 저는 수화기를 받자마자 인사말을 생략하고 바로 말했습니다. “언니, 이곳은 언니가 머물 곳이 아니에요. 아버지(사부님)께서 집에 가라고 하세요.” B는 알았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말을 마치자마자 여경이 들어와 가족들을 쫓아내면서 B에게 우리가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저는 가족이라고 대신 말했습니다. B의 가족이 이미 면회실 밖으로 나갔기에 저와 C도 서둘러 밖으로 나갔습니다.

노동수용소 대문을 나서고 나선 후 다시 생각해 보니 B를 만나러 가는 길은 정말 멀게 느껴졌는데, 나올 때는 순식간이었습니다. 저는 C에게 “사부님께서 우리를 보호해주셨어요. 우리는 정말 운이 좋았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네 명은 다시 만난 후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흥분하며 이야기했습니다. Z와 L은 “우리도 B를 만나고 싶어요. 같이 갈 걸 그랬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정체적으로 협력해 예정대로 B를 만나고 당일 오후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B는 한 달 더 감금된 후 정념으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2. 정체적으로 협력해 형기를 마친 수련생을 구출하다

우리 지역 수련생 F는 경찰이 자주 집으로 찾아가고 감시해 집을 떠나게 됐습니다. 당시 저도 떠돌이 생활을 하다 보니 그녀와 함께 며칠을 지낸 적이 있습니다. 그 후 F는 타지에서 납치돼 전기 충격과 여러 가지 고문을 받아 두 다리를 쓸 수 없게 됐고, 불법적으로 14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녀 가족들은 그녀가 형기를 마칠 때까지 모두 무관심했습니다. F는 감옥에서 온갖 고통을 당했지만 구사일생으로 목숨만은 잃지 않았습니다.

저는 F의 소식에 계속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수련생 A가 말하길, 그녀가 수감된 지 10년 됐을 때 사지가 마비되고 배에 종양이 많이 생겨 위독해지자 감옥에서 석방하려 했지만 가족이 인계하러 가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A와 여러 수련생이 가족을 설득했지만 그들은 감옥에서 죽는 게 낫다며 데려오려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한번은 설날이 되어 A와 수련생들이 쌀과 밀가루, 콩기름을 사서 F의 어머니를 찾아갔는데, F의 남동생이 그들을 내쫓으며 다시 오면 신고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그래서 수련생들은 다시는 그들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정을 듣고 저는 수련생들과 함께 우여곡절 끝에 F의 언니를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가족들이 F를 데리고 나오기만 하면 앞으로 저희가 책임질게요.” 이 말을 듣고 F의 언니는 감동하며 “작년에 데리러 가지 않았는데, 이제는 감옥에서 석방하지 않아요. 면회만 할 수 있대요”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가족들이 석방을 요구해야 한다고 하자 F의 언니는 “집에 할 일이 많아서 시간이 없어요”라면서 거부했습니다. F의 어머니가 면회 허가증을 갖고 있었기에 F의 언니는 어머니의 전화번호를 알려줬습니다. 그래서 당일 오후 우리는 F의 어머니 집 근처에 가서 전화했지만 F의 어머니는 집에 없다고 거짓말하면서 우리를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F를 구하는 일은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었습니다.

4년이 지난 후, 저는 F의 형기가 거의 다 되자 그녀를 데리러 갈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사이 F의 언니가 이사했습니다. 저는 A의 집에 가서 F의 남동생 집 주소를 물어봤습니다. 제가 “F가 곧 나오는데 가족이 데리러 가야 해요. 혹시 가족의 주소를 아세요?”라고 묻자, A는 “지난번에 우리를 쫓아내서 다시 가지 않았어요, 주소도 잊어버렸고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F가 14년간 5천 일이 넘게 감옥에서 고통에 시달리다가 살아서 출소하는 것은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힘들어도 가족을 찾아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저는 A를 만난 후 다른 단서를 찾지 못하자 며칠 후 다시 A를 찾아가 F의 남동생 집 주소를 잘 기억해 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다른 수련생들에게도 F가 형기를 마칠 때가 됐는데 가족을 찾을 수 없다며 딱한 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수련생 중 일부는 모른다고 했고, 일부는 그녀 가족의 태도가 너무 좋지 않다며 나서길 꺼렸습니다. 하지만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일이 바로 당신의 일이며”(각지설법2-2002년 워싱턴DC법회 설법)

저는 다른 사람을 기다리지도 의지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대법제자들은 정체이며 위대한 사부님이 계십니다. 우리 파룬궁수련생들은 모두 F의 가족입니다. 구세력이 수련생들을 박해하는 것은 우리 모두를 박해하는 것입니다. 감옥은 대법제자가 수련하는 곳이 아닙니다. 한 대법제자가 밖에서 얼마나 많은 중생을 구하고 있습니까? 저는 깨달았다면 바로 행동에 옮기고, 추구하는 마음이 없이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F의 가족을 찾을 수 없으니 어떻게 하지?’ 저는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A를 다시 찾아가 F의 남동생 집에 함께 갔던 수련생들이 있는지 물었고, A는 수련생 W와 H가 있다고 말해줬습니다. 이 말을 듣고 저는 기쁜 마음으로 먼저 W를 찾아가서 F의 남동생을 찾는 이유를 설명해줬습니다. 하지만 W는 주소를 잊어버렸다고 했습니다. 저의 기쁨은 실망으로 바뀌었습니다.

W의 집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점심 시간이었지만 저는 점심을 먹을 새 없이 또 H를 찾아가 F의 남동생을 찾는 이유를 설명해줬습니다. 그런데 그녀도 대략적인 지역만 알고 자세한 주소는 잊어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수련생 Y도 같이 간 적이 있으니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래도 희망이 있다는 생각에 Y의 집에 찾아가서 문을 두드렸지만 집에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냥 왔다 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밖에서 기다렸습니다. 오후 4시 30분까지 기다린 후 그녀가 돌아왔을 것 같아 다시 문을 두드렸더니 아니나 다를까 Y가 문을 열어줘서 정말 기뻤습니다.

집에 들어가서 찾아간 이유를 설명하자 Y는 F의 남동생 집 주소를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즉시 그녀에게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녀는 아이에게 저녁을 차려줘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 정말 많이 헤매고 다녔어요, 오늘도 여기서 반나절이나 기다렸고요”라고 말하면서 꼭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Y는 “그러면 같이 가요. 저녁은 아이가 알아서 먹게 하죠”라고 말했습니다.

Y와 저는 그길로 F의 남동생 집에 가서 문을 두드렸지만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F의 오빠 집에 갔는데 아내만 집에 있었습니다. 저희가 찾아간 이유를 설명하자 그녀는 F의 작은올케한테 얘기해야 한다면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러고는 전화를 저에게 건네줬는데, 전화기 반대편에서 F의 작은올케가 귀가 찢어지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누구세요? 뭐 하려고요? 할 말 있으면 해봐요!” 저는 차분하게 인사하고 만나서 할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조금 누그러든 목소리로 “그럼 오세요”라고 하면서 주소를 알려줬습니다.

저와 Y는 F의 큰올케에게 감사드리고, F의 작은올케가 일하는 곳으로 갔습니다. 우리 둘은 버스에서 발정념을 하여 F의 작은올케를 조종하는 사악한 요소를 제거했습니다. 우리를 보자 그녀는 “무슨 일인가요? 제게 말하면 돼요”라고 했습니다. 집안일은 자기한테 말하면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우리는 찾아간 이유를 설명하고 F의 정확한 출소 날짜를 물어봤습니다. 그녀는 태도가 좀 누그러졌지만 여전히 화를 내며 “몰라요, 우린 상관하지 않아요. 나와서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말고 거기 있으라고 해요”라고 했습니다. 그녀가 원망이 너무 깊어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며칠 후에 다시 오겠다고 했습니다. 밖으로 나오자 Y는 “전 집이 멀어서 다음엔 오지 못할 것 같아요”라고 말했고, 저는 “알았어요, 다음엔 저 혼자 올게요”라고 말했습니다.

이틀 후 저는 그녀를 다시 만나러 가서 F를 데리러 가자고 설득했습니다. 그녀는 저번처럼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데리러 가는 것은 여전히 거부했습니다. 그녀는 말했습니다. “전 돈을 많이 못 벌어요. 시누이(F)의 친정에서도 신경 쓰지 않아요. 집도 없고 돈도 없고 뱃속에 종양이 가득 자란 사람이 나오면 어떻게 살겠어요? 누가 시간 내서 돌봐주겠어요? 병원에 입원하려고 해도 돈이 없어요. 결국 사람도 죽고 돈도 잃게 될 거예요.” 저는 침착하게 말했습니다. “파룬궁은 사람들에게 선해야 한다고 가르쳐요. 시누이는 착한 사람이 되려고 하다가 감옥에서 박해받았어요. 가족들이 신경 쓰지 않으면 누가 신경 쓰겠어요? 나와서 법공부하고 연공하면 병이 나을지도 몰라요.” 그 후 저는 3~5일에 한 번씩 F의 작은올케를 찾아갔습니다.

세 번째 찾아갔을 때 그녀는 610사무실(파룬궁 탄압기구)에서 F의 출소 날짜를 알려줬다고 하면서 “610에서 데려가게 놔두세요. 우리는 상관하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안 돼요, 시누이가 좋은 사람인 걸 알잖아요. 시누이는 14년간 온갖 굴욕과 박해를 견뎌냈어요. 41세에 들어가 50대가 돼서 풀려나는데 살아서 나오니 구사일생이에요. 우리 수련생 중에는 감옥에서 고문받아 사망한 사람도 많고, 출소 후 바로 세뇌반이나 노동수용소로 이송돼 계속 박해받는 사례가 많아요. 그녀를 늑대 굴에서 나와 호랑이 굴에 들어가게 할 수는 없어요! 수련인은 법공부를 못 하는 것이 가장 큰 고통이에요. 가족이 그녀를 데리러 가지 않으면 방법이 없어요. 우리가 갈 수도 없고.” 그러자 F의 작은올케는 말했습니다. “저도 파룬궁이 좋다는 걸 알고 있어요. 다른 수련생들이 말해줬어요.”

사부님의 도움으로 저는 정념을 갖고 말했습니다. “돈을 걱정하셨죠? 가족들이 시누이를 데려오면 저희가 돌볼게요.” 저는 속으로 F가 밖으로 나온 후 사부님과 대법을 굳게 믿으면 반드시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F의 작은올케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저를 바라봤습니다. 저의 진심과 헌신에 감동하고 거의 죽게 된 시누이를 책임지겠다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놀란 겁니다.

저는 “시누이는 원래 병이 많았는데 대법을 수련해서 좋아지지 않았나요?”라고 말하면서, 저도 대법 수련을 통해 건강이 좋아졌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전 30대 때부터 병이 많았어요. 심장이 좋지 않았고 신경쇠약에 유선 증식, 산부인과 질환, 허리 디스크도 있었죠. 신경쇠약 때문에 밤에는 잠도 잘 못 자고, 허리 통증 때문에 잠깐 앉아 있기도 힘들었어요. 허리 디스크가 심할 때면 절름거리며 걸었고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고 힘들었어요. 짐 같은 건 아예 들 수도 없었고요. 그때 한약과 양약을 아무리 많이 먹어도 소용없었는데 파룬궁을 수련하고 다 나았어요. 전 그 후 완전히 건강해져서 더 이상 약을 먹지 않아요.” 그녀도 F가 원래 병이 많았는데 파룬궁을 수련하고 다 나았다고 했습니다.

F의 작은올케와 헤어진 후 저는 한 노수련생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는 다른 수련생을 구출한 경험이 많고 어떤 면에서는 저보다 더 잘했기에 610이 F를 납치하지 못하도록 다른 각도에서 F의 작은올케와 이야기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다음날 우리는 다시 가서 F의 작은올케와 아주 좋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이틀 후, 저는 F의 작은올케를 다시 만나 F를 데리고 올 방법을 논의했습니다. 그녀는 현지 610에서 자기에게 직접 데려가라고 공지했고, 당일 610, 주민센터, 공안국에서도 감시 인력을 보낼 거라고 했습니다. 그녀가 “전 자가용이 없어요. 시누이에게 610사무실 차에 타라고 할까요?”라고 묻자 저는 단호하게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기차는 어때요?”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기차는 불편해요. 시누이는 몸이 쇠약해서 타기 힘들 거예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녀가 제 의견을 잘 따르자 저는 제가 차를 구해보겠다고 했고 그녀는 좋다고 했습니다.

F의 작은올케를 만나고 온 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F는 고문받아 잘 걸을 수 없었기에 차를 반드시 감옥 안까지 갖고 들어가야 하는데, 그러면 운전하는 수련생이 위험하게 되는 게 아닌가? 그냥 내가 비용을 내고 택시를 구하는 게 낫지 않을까….’

F의 작은올케와 이 문제를 논의하러 찾아가니 그녀가 먼저 말했습니다. “수련생에게 운전을 맡기면 안전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제가 “그렇지 않아도 이 문제를 말하려 했어요”라고 하자 그녀는 “그럼 제가 차를 구할게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그럼 그렇게 해주세요, 내일 다시 올 테니 어떻게 됐는지 알려주세요. 우리 수련생들의 안전을 생각해주시니 정말 고마워요.”

이튿날 찾아가니 그녀는 F의 둘째 오빠가 차를 빌려줄 수 있는데, 하루 일을 쉬어야 하니 일당에다 기름값과 통행료까지 줘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총 얼마인가요?”라고 묻자, 그녀는 “800위안(약 15만 원) 정도 될 거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1천 위안을 준비해 내일 드릴게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지난번처럼 놀란 눈빛으로 저를 바라봤습니다. 이번에도 그녀는 저의 진심 어린 선한 마음과 이익을 따지지 않는 마음에 감동했습니다. 다음날 저는 그녀에게 돈을 갖다줬는데 다른 생각은 하지 않고 F가 악의 소굴을 떠나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기만을 바랐습니다.

F의 작은올케는 시누이를 위해 새 옷도 사고, 시누이가 편안하게 누워서 올 수 있게 차 뒷좌석에 펴놓을 이불도 준비했다고 했습니다. 제가 “시누이를 어디서 살게 할 건가요?”라고 물었더니 그녀는 “우리집에 데려갈 거예요. 제가 시간 나면 돌봐줄 수 있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F가 출소하는 날 아침 감옥 정문 밖에서 기다리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녀가 선념을 갖고 있어서 정말 기뻤습니다. 시누이의 처지를 전혀 상관하지 않고 못 본 체했던 그녀가 그간 정말 많이 변했습니다. 대법제자를 선하게 대하는 것은 아름다운 미래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저는 또 수련생 A를 만나러 갔는데, A는 “지금 기다리고 있었어요. 저희가 이미 수련생 7~8명이 앉을 수 있는 차를 준비해 놨어요. 차에서 발정념을 할게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사부님께서 미리 배치하신 거네요. 저도 같은 생각을 했어요. 너무 좋아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정체 협력, 정체 제고하라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F가 출소하는 날, 아침부터 날씨가 맑았고 우리는 차를 타고 순조롭게 감옥에 도착했습니다. 오전 10시쯤, F의 가족들이 탄 차가 감옥 안으로 들어가 뼈가 앙상하고 겨우 숨만 붙어있는 F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모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감격했습니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 아래 또 한 명의 대법제자가 자유의 몸이 됐기 때문입니다.

돌아오는 길에 F가 탄 차 뒤를 610사무실 차가 따라갔고, 그 뒤를 수련생들이 탄 차 두 대가 따라갔습니다. 우리는 사부님의 도움으로 F를 순조롭게 남동생 집까지 데려다줬습니다.

F는 법에서 심신을 조절해야 했으므로 저는 그녀에게 ‘전법륜’과 ‘각지 설법’ 몇 권을 가져다줬습니다. 또 150위안어치 장을 봐서 F의 올케에게 줬습니다. 그녀는 시누이가 수련생들의 돈을 쓰면 좋지 않다고 했다면서 저에게 1천 위안을 돌려줬습니다.

F는 신사신법(信師信法)하며 부지런히 법공부와 연공을 해서 몸이 금방 회복됐고, 배 안에 있던 크고 작은 종양도 모두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나중에 다리 부종도 나았고 정신 상태도 좋아지면서 체중이 늘고 일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스스로 돈을 벌어 생활할 수 있게 된 겁니다. 그 후 F는 세 가지 일을 하고 사람을 구해 파룬따파의 위대함과 기적을 다시 한번 실증했습니다.

출소할 당시만 해도 F의 가족들은 그녀가 결코 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변화를 보고는 모두 파룬따파가 좋다는 것을 믿게 됐습니다! 그들도 대법제자를 선하게 대해 복을 받았습니다. F의 남동생은 수련생들을 신고하는 악행을 바로 잡았는데, 610사무실 사람들이 F에게 ‘보증서’를 쓰라고 강요하자 “왜 이런 걸 쓰게 합니까?”라고 하며 막아 나섰습니다. F의 작은올케는 원래 힘들게 일하면서 한 달에 3천 위안밖에 벌지 못했는데, 나중에 부부가 병원에서 간병 일을 하다가 부유한 집안 노인을 만났습니다. 그 할머니는 퇴원한 후 많은 돈을 주고 그들 부부를 고용해 도시에 있는 자택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수십 명의 수련생을 구출하는 데 참여했는데, 여기서는 더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에 감사드립니다!

 

원문발표: 2023년 11월 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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