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후베이성 대법제자
[명혜망] 나는 시골 중학교의 수학 교사다. 수련 전에 학생들이 좋은 성적을 내도록 최선을 다했지만, 매번 큰 시험이 끝나면 독감에 걸려 5~6일간 수액을 맞아야 했다.
1994년 봄, 교장은 파룬궁수련생 두 명을 찾아 파룬궁을 소개해 달라고 했다. 그들은 파룬궁을 연마할 때 ‘진선인(真·善·忍)’에 따라 도덕성을 높이고, 5가지 공법을 연마해 건강을 유지해야 한다고 했다. 나도 듣고 파룬궁이 좋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수련생들의 인품이 매우 좋다는 것을 알았다. 담배를 피우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으며, 카드놀이나 도박, 심지어 욕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누구나 성실하게 대해서 그들과 함께 일할 때는 쉽게 협조할 수 있고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집은 어릴 때 부농으로 분류되어 공산당의 투쟁 대상이었기에 나도 곤욕을 치렀다. 지금 주변에 파룬궁을 연마하는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니 나는 정말 파룬궁이 인간세상의 정토(淨土)라고 느껴졌다.
1994년 가을, 나도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수련자로서 나는 어디에서나 좋은 사람이 되고, 오직 성실하게 본업을 잘하며 명예와 이익에 집착하지 않아야 함을 깨달았다. 비록 업무량이 더 많고 교육 과제가 힘들었지만 나는 대법으로 지도해 교육 과정에 업무의 초점을 맞추고, 결과에 집착하지 않으며 학생들의 시험 등수에 대해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았다. 마음이 평온해지자 다시는 시험 후에 병이 나지 않았다. 수련하고 어떤 약도 먹지 않자 젊은 동료들은 모두 날 부러워했다.
하지만 1999년 7월 20일부터 사악한 장쩌민 일당은 파룬궁을 광적으로 박해했고 사방에 거짓말을 퍼뜨렸다. 피비린내 나는 박해 기간, 사부님의 보호 아래 나와 우리 가족은 엄청난 압력을 참고 진리를 견지하며 고난의 여정을 통과했다. 더욱이 “한 사람이 법을 얻으면 온 가족이 이익을 얻는다.”[1] 나, 가족, 동료, 제자들은 모두 대법의 혜택을 받았다.
‘1.5명’의 교사
수련 후 나는 지혜를 얻었으며 가르치는 능력이 도약했다. 어떤 문제에 부딪히더라도 항상 해결책이 있었다. 수업에서 요점을 강조하고 심층적이고 쉬운 방법으로 학생들이 규칙을 찾게 해 수업의 효율성을 크게 높였다. 내가 가르친 일반반 학생들의 성적이 병행반보다 월등히 높았고, 나중에 나는 학업 수준이 높은 경쟁반만 수업하게 됐다.
한번은 교육반장(관할 내 모든 초·중등학교를 총괄)이 우리 학교에 와서 무작위로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지만(가르치는 담당 교감 포함) 만족하지 못했다. 내 수업을 듣고 나서 그는 내 수업을 듣는 것은 일종의 즐거움이라고 말했다. 그는 교육 및 연구 회의에서 “우리 학교에는 실제 교사가 1.5명뿐”이라고 했는데, 그가 언급한 한 명의 교사는 나였고, 다른 0.5명 교사는 다른 남자 교사였다.
전국 수학 경시대회에서 두 명이 만점 맞아
1990년 말, 우리 시 교육국은 전국 중학교 수학 경시대회를 중시하며 수상 순위를 학업 평가의 중요 기준으로 삼았다. 시립 학교는 3학년부터 수학 경시대회 준비를 시작했고 내가 속한 지역 교육 당국도 주목했다. 1998년 가을, 우리 중학교 6반에 경시대회 반이 개설됐고, 나는 이 반의 수학 지도와 경시대회 과외 업무를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내가 직면한 세 가지 주요 문제는 학생들이 준비를 너무 늦게 시작했고, 교사가 경험이 부족하며, 학교에 과외 자료가 없다는 것이었다. 파룬따파(法輪大法) 수련자로서 나는 오직 안배에 따를 뿐이었다.
나는 수학 교습을 위주로 했는데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업을 나 혼자 도맡았다. 특별 훈련 콘텐츠 제작 강의, 시험지 작성부터 수업, 답안지 읽기, 지도 및 학생 관리까지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했다. 나는 ‘진선인’의 기준으로 요구하고 학생들이 착하게 행동하도록 은연중에 이끌었다. 쉴 때 우리는 대법이 전 세계에 널리 전해진 사진을 보았다.
아이들의 순수하고 순진한 본성을 깨우쳐 ‘불광이 널리 비치니, 예의가 원만하고도 밝도다(佛光普照, 禮義圓明)’[2]가 됐다. 품행과 학문이 모두 뛰어나고, 서로 도우며, 차별하지 않고, 비교하지 않았다. 수업 시간에 집중하며 질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쉬는 시간에도 장난치지 않고, 청소하고, 칠판을 닦고, 시험지 및 강의 원고를 정리했다. 내가 시험을 볼 때도 감독할 필요가 없었다. 야간자율학습 후 중학생들은 침실 밖에서 장난을 치지만 우리 6반 학생들은 조용히 침대에 앉아 불이 꺼질 때까지 그날 공부를 복습했다.
성적이 떨어지면 학생들은 자신의 결점, 심지어 품행의 결점을 찾았다. 한번은 한 학생이 이웃 채소밭에 덩굴을 세우는 데 사용된 작은 대나무 막대기를 잘못해 부러뜨렸다고 솔직하게 고백하기도 했다.
1999년 4월, 전국 수학 경시대회에 우리 반의 30명 학생이 참가했다. 우리 반에서 두 명이 만점을 맞아 특별상을 받았고, 10명이 1등상을 받았으며, 10명이 2등상을 받았고, 5명이 3등상을 받았다. 특별상을 받은 두 학생은 베이징으로 가서 전국 수학 경시대회 여름캠프에 참가해 역시 좋은 성적을 받았다.
이렇게 자랑스러운 성적은 우리 마을에서는 처음이었고 시립 학교도 능가했으며 성(省) 전체에서도 드물었다. 결국 많은 도시 학생이 우리 학교에 입학해 학생 모집이 꽉 찼다.
나는 파룬궁을 수련했기에 매일 8교시 수업을 잘할 수 있는 체력을 갖게 됐고, 지혜와 능력도 갖추게 됐다. 나는 방학 때 무료 수업을 해주었고, 또한 여름캠프에 참가한 두 아이에게 20일간 무료 점심을 제공해주기도 했다. ‘진선인’의 씨앗은 이미 아이들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웠기에 그들은 지혜를 발휘해 우수한 성적을 거둔 것이었다.
명예와 이익을 담담하게 여기고 청렴하게 수업하다
1999년을 전후로 교사들의 임금이 낮아졌고 매달 받지도 못했다. 그 10여 년간 우리의 임금은 고정 임금과 탄력 임금으로 나뉘었다. 고정 임금은 60%(당시 약 500위안) 정도로 재정국에서 월 단위로 지급했고, 탄력 임금은 학교에서 자체 조달해 연말에 지급했는데, 학교에 자금이 부족할 경우 교사에게 지급보증서만 줬다.
나는 남편과 같은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당시 내가 다니던 농촌학교는 탄력 임금의 일부만 현금으로 바꿀 수 있었다. 2000년, 학교에서 우리에게 나눠준 기숙사 한 칸을 또 허물고 강당을 짓는다고 하자 남편은 친지들에게 돈을 빌려 개인 주택을 지었다. 그 후 남편은 매달 우리 둘의 월급을 300위안만 생활비로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빚을 갚는 데 썼다.
나는 가난하게 살았지만 사부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학생들에게 한 푼도 받지 않았다. 학기마다 선생님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는 학부모들이 있었지만 나는 밥을 먹으러 가지 않았다. 선물을 보내는 학부모들도 있었는데 일반 쇼핑권이면 돌려주고, 실물이면 아이들에게 문구류나 비슷한 가치의 책을 사줬다.
나는 수학 경시대회 이후 현지에서 유명해져서 학부모들이 계속 보충 수업을 요청했지만 거절하고 되도록 본 수업에 충실했다. 경쟁반 학생들은 수업 보조자료를 사야 했다. 나는 서점 주인에게 학생들에게 60%를 할인해서 팔라고 했고 대신 나는 한 푼의 리베이트도 받지 않았다.
꽃은 어디에서나 향기롭다
박해가 시작된 후 파출소와 사무실 사람들이 나에게 “언제부터 수련을 했지? 누가 가르쳤지?”라고 물었다. 사무실 서기는 계속해서 욕설을 퍼부으며 사부님과 대법을 비방했고, 욕을 한 후 우리에게 연공하지 않겠다는 보증서를 쓰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점심 식사 후에 학교에서 사람을 보내 회의에 참석하라고 재촉했다. 파출소장 및 경찰 두 명, 학교 전체 지도자, 그리고 수련생 두 명이 그곳에 있었다. 파출소장은 파룬궁수련자(보도원)를 잡았으니 총살하라, 어쩌라면서 욕을 퍼부었다.
그런 다음, 현장에 있던 우리 세 명의 수련생에게 명령을 내렸다. “첫째, 1인당 3천 위안의 보증금을 지불하고, 둘째, 1인당 3천 단어의 ‘폭로 진술서’를 작성해 전교 교사 회의에서 교사들에게 읽어주되, 교사들이 점수를 매겨 평균 80점 미만은 다시 써야 하며, 셋째, 1일 1회 경찰서에 신고하시오. 이 3가지 항목은 3일 이내에 완료해야 합니다.” 나는 즉시 3일 휴가를 내겠다고 하고 고개도 돌리지 않고 교문을 나갔다.
집에 돌아와서 어디로 갈까 고민하던 중에 교장, 교육부, 경찰서 모두 날 찾아왔는데 내가 베이징에 청원하러 갈까 봐 두려워서였다. 그들은 나에게 휴가를 낸 이유를 물었고 나는 “파룬궁을 수련하고 참된 기준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는 건 잘못이 없습니다! 사람을 모욕하는 세 가지 일 중 저는 한 가지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나중에 그 세 가지 일은 하지 않아도 되니 수업하러 가라고 했다.
이후에도 괴롭힘은 계속됐다. 갑자기 먹구름이 날 덮쳤고 어린 시절 공산당의 핍박과 오래된 트라우마가 함께 떠올랐다. 침착하게 생각한 후에도 여전히 파룬궁을 수련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며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다음 학기에 나는 도청에 있는 사립학교에 취직했다. 1년 후, 남편도 이 학교에 왔다.
사립학교에서 나는 형편없는 반을 받았고, 나에게 할 줄 모르는 컴퓨터로 수업을 하라고 했다. 나는 내 생각에 따라 전통적인 방법으로 가르쳤는데, 첫 번째 종합시험에서 학생들의 성적이 일반반보다 훨씬 높았다. 어떤 선생님은 심지어 시험지가 유출됐다고 의심했다. 그 후 매번 시험을 볼 때마다 우리 반 성적이 월등히 좋았고 지적장애아인 학생도 81점을 맞았다. 그래서 나는 중학교 수업팀장으로 초빙됐다.
그 학교는 학기마다 공개수업을 하기 위해 교사들을 조직했고, 내 강의는 일반적으로 공개수업 전 시연 수업으로 간주됐다. 한번은 학교에서 젊은 교사들을 대상으로 강의 대회를 열었다. 수업 준비반 젊은 교사들이 시범 강의를 잘 못하자 급하게 나에게 젊은 교사들에게 새로운 교육 과정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저녁 자율학습 후 젊은 교사들과 논의해 교안을 재설계하고 내 의도에 따라 수업 코스를 다시 만들었다. 당시 남편이 8학년 수학 팀을 대표해 대회에 참가했는데, 몇 가지 제안을 했지만 주요 아이디어는 나 혼자 완성했다. 공식 대회에서 우리 그룹 젊은 교사가 1등을 했고 남편이 2등을 했다. 학년 감독은 매우 만족해했다. 1등을 한 교사는 동료들 앞에서 나에게 말했다. “선생님의 철학에 감탄하고 인품에 더욱 감탄합니다! 제가 선생님 남편분과 동시에 대회에 나갔는데도 절 도와주셨다니 정말 대단하세요!”
사부님께서 나의 공무원 등급을 높여주시다
내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자 학교에서는 늘 나에게 중임을 맡겼다. 그러나 대법에 대한 박해가 실시된 후 학교에서 나에게 준 영예는 교내 모범교사에 그쳤고, 월급도 교사 공무원 등급도 올려주지 않았다. 특히 교육국은 교사와 학생들의 파룬궁 수련을 금지하고, 파룬궁을 수련하는 교사는 공무원 등급을 올리지 못하게 했다.
은퇴를 몇 년 앞두고 우리 학교 교사들은 인력 재배치로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다. 나는 공산당에게 시달리지 않기 위해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중학교를 택했는데, 뜻밖에 거기에서 고급 공무원이 됐다. 이를 본 남편은 웃으면서 말했다. “공산당이 당신의 등급을 올려준 게 아니라, 리 대사님께서 올려주신 거야!”
중학교 고급 공무원이 되려면 먼저 컴퓨터 시험을 통과해야 했는데, 우리 학교에서는 한 명만 응시할 수 있었다. 교장 선생님은 자신과 친분 있는 젊은 교사에게 응시 자격을 주고 싶어 했지만, 그 교사는 증서가 2개밖에 없었다. 반면 나는 각종 논문과 수업계획서를 포함해 20여 개 증서가 있어서 스펙이 월등히 좋았다. 그래서 교장 선생님은 투표로 뽑겠다고 했다. 그 젊은 교사는 동료 교사들을 초대해 먹고 마시고 놀게 하면서 표를 모아 응시 자격을 얻었다. 그런데 교육청 책임자가 이 상황을 알고 우리 학교에 응시 인원을 한 명 더 늘려주면서 나도 그 젊은 교사와 함께 컴퓨터 시험을 볼 수 있게 됐다.
나는 나이가 많아 컴퓨터에 익숙하지 않았는데 겨우 한 달 공부하고 시험을 치렀다. 첫 번째 시험은 내 컴퓨터 모니터가 꺼지는 바람에 불합격했고, 나머지 두 시험은 높은 점수로 통과했다. 하지만 그 젊은 교사는 하나도 통과하지 못했다. 나는 1년 후 불합격한 시험을 다시 볼 수 있었는데, 남편은 내가 보충 시험을 통과해도 공무원 등급을 높일 수 없을 거라고 말했다. 학교에서 오랫동안 근무해 온 부교장 선생님이 상장과 증서도 많고, 지난해 이미 컴퓨터 보충 시험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 초등학교 고급 공무원 등급인데, 단번에 중학교 고급 공무원 평가를 통과하기는 어려워 올해 먼저 중학교 1급 공무원 평가를 통과한 후 내년에 중학교 고급 공무원 평가를 받으려 했다. 그러면 나에게 기회가 주어지기 어려웠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보충 시험을 보라는 교육청의 연락을 받았다. 올해 시험 준비 기간이 너무 짧고 시험 문제가 어려워서 세 가지 시험을 모두 통과한 교사가 너무 적었기에 이례적으로 올해 안에 재시험을 보게 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한 달 후 불합격했던 시험을 통과했다.
여름 방학에 공무원 등급 심사가 실시됐는데, 우리 학교에서 교사 한 명만 등급을 올릴 수 있었다. 신청 자료를 작성할 때 교장 선생님은 나에게 말했다. “선생님도 증서가 많고, 부교장 선생님도 증서가 많습니다. 하지만 부교장 선생님이 올해 바로 중학교 고급 공무원 평가를 받으려 한다면 그가 우선이니 각오해야 하실 겁니다.” 그때 내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수련하는 사람은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고, 내 것이면 내 것이 되고, 내 것이 아니면 억지로 구해 올 수 없다는 이치를 알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는 순조롭게 중학교 고급 공무원이 됐다.
한 동료는 이렇게 말했다. “컴퓨터 시험을 통과했어도 고급 공무원이 되지 못해 몇 해 연속 대기하고 있는 선생님들이 줄을 섰어요. 어떤 선생님은 퇴직할 때까지 기다려도 안 됐어요. 선생님처럼 컴퓨터 시험에 합격하고, 그 해 바로 고급 공무원이 된 사례는 우리 시 전체에서 찾아봐도 없을걸요!” 남편도 감탄했다. “교육청 책임자가 응시 자격을 추가로 주지 않았다면, 올해 이례적으로 컴퓨터 재시험을 치르게 하지 않았다면, 부교장 선생님이 올해 기어이 고급 공무원 평가를 받으려 했다면 당신은 중학교 1급 공무원 등급으로 퇴직했을 거야. 세 가지 조건 중 하나만 없었어도 안 됐을 테니 말이야. 이건 분명히 신께서 도와주신 거야!” 그래서 나는 “대법 사부님께서 도와주신 거죠”라고 대답했다.
아들이 복을 받아 고입, 대입 시험을 잘 치르다
아들이 2003년 고입 시험을 치르기 전까지 나와 남편은 모두 사립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아들은 내가 전에 있었던 중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했다. 담임 선생님은 아들의 실력으로 우리 시 중점 고등학교에 지원하는 것은 약간 위험하다고 했다. 당시 교사들은 월급이 매우 낮았고 현금으로 바꿀 수도 없었다. 그런데 합격 점수선 아래 학생들이 그 고등학교에 입학하려면 기본 5천 위안을 더 내고, 거기다 부족한 점수 1점당 200위안씩 추가로 내야 했다. 아들은 고입 시험에서 총점 513점을 받아 담임 선생님이 예상한 점수보다 낮은 점수를 받았다. 나는 아들을 위로해줬다. “5월 13일은 세계 파룬따파의 날인데 마침 513점을 맞았구나. 그 고등학교는 돈이 많으니 대법제자 가정에서 돈을 많이 받지는 않을 거야.”
아들은 어릴 때부터 대법이 좋다고 믿었기에 그동안 내가 진상자료를 배포할 때 도와줬으며, 정치 시험에서 대법을 비방하는 문제를 보면 답안을 적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들이 대법의 보호를 받을 것이라고 믿었는데 결국 현실이 됐다. 중점 고등학교 합격 점수선이 발표된 후 보니 아들은 9점이나 높았다.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아들의 성적은 한 반 70여 명 학생 중에서 중간 정도였다. 나중에는 노는데 정신이 팔려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아 성적이 떨어졌다. 그런데 고3 마지막 학기에 정신을 차리고 노력해 시험 볼 때마다 성적이 크게 올랐다. 그래서 담임 선생님도 매우 기뻐하셨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아들은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 공산당 조직인 공청단과 소선대에서 탈퇴하고 서류까지 가져다 폐기했다. 또 시험 볼 때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 호신부(護身符)를 갖고 갔는데 반 11위 성적으로 원하는 대학에 입학했다. 아들의 물리 선생님은 나에게 말했다. “이 반 학생 중 선생님 아들이 제일 운이 좋았습니다! 실력에 비해 훨씬 좋은 성적을 받았어요!”
아들은 대학 졸업 후 연봉이 높고 전망 좋은 외국계 대기업에 취직해 자주 해외로 출장이나 연수를 다녔다. 나중엔 아시아에서 최고의 기술을 가진 동료와 함께 사직하고 함께 개인 회사를 차렸는데 사업이 아주 잘 되고 있다. 그래서 친척과 친구들은 모두 부러워하며 말했다. “아드님은 학교 다닐 때나 직장 다닐 때나 운이 정말 좋아요!”
남편이 난을 이겨내고 평안을 얻다
박해가 시작된 후 남편도 큰 압박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내가 대법을 연마한 후 건강해지고 성격이 좋아졌을 뿐만 아니라 그의 단점을 너그럽게 대하고 시댁 식구들을 잘 대해주며, 학교 수업에서도 지혜가 열린 것을 보고 점차 대법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나를 도와 공산당의 박해를 경감시켰는데 그 덕분에 복을 받았다.
술을 좋아하는 남편은 어느 날 술에 취해 오토바이를 타다가 길가 배수구에 처박혔다.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 사진을 찍어 보니 갈비뼈가 몇 대 부러지고 폐에 내출혈이 심해서 응급조치를 해야 했다. 간호사는 즉시 남편의 옷을 가위로 자른 후 양 옆구리에 관을 꽂고 큰 주전자 2개 분량의 핏물을 빼냈다. 동료들이 사고가 난 곳을 살펴보니 배수구에는 큰 돌이 많아 목숨을 잃지 않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신께서 보호해주신 게 틀림없다고 말했다. 남편은 나중에 잘 회복됐는데 그 사고를 겪은 후 점차 무신론 관념을 바꾸게 됐다.
학교에서 인력을 재배치하면서 남편은 새 학교로 자리를 옮겼는데 일이 편하고 월급도 많은데다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됐다. 그는 앞으로도 행운이 이어지길 바라며 사무실에 대법 호신부를 걸어놨다.
저와 제 가족을 보호해주신 사부님께 무한히 감사드립니다! 착한 사람들이 모두 진실을 알고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에 공감해 우리처럼 행복하고 아름다운 인생과 미래가 있기를 바랍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법해-지난(濟南)설법 문답 풀이’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
원문발표: 2023년 5월 1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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