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서북지방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1960년대 말에 태어났다. 성격이 고지식해서 친구들이 ‘차(車)’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장기말 중에 차는 직진만 할 뿐 꺾지 못한다. 나는 성질이 급해서 한번 화내면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손찌검을 했다. 남에게 지고는 못 배기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며,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는 성격 때문에 늘 주변인들과 싸웠는데, 상대가 남자든 여자든, 키가 크든 작든 가리지 않았다. 몸집이 마르고 작아 상대를 이긴 적이 거의 없지만 그래도 싸움을 멈추지 않아 싸움으로 유명해졌다. 사실 나는 싸움을 좋아하지 않지만 누구 말도 듣지 않고 양보할 줄 모르며, 털끝만 한 억울함도 견디지 못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은 “이렇게 싸움을 좋아하는 여학생은 처음 봤다”고 나를 평가하셨다. 이처럼 나는 늘 남과 싸웠지만 사실 속으로는 힘들었다.
세상 기풍이 날로 나빠져 원래 고지식했던 나도 교활해져, 직장에서 업무상 편의를 이용해 자기 이득을 챙기기 시작했는데, 몰래 하다 보니 사는 것이 힘들고 고달팠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무신론을 주입 받은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았고, 누가 신언(神言)과 신적(神跡)을 말하려 하면 비꼬고 조롱했다. 그래서 신에게 불경스럽고 재물을 탐내는 ‘남자 같은 여자’였고, 수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이렇게 좋은 책이 있다니!”
1998년 9월 어느 날, 내 인생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날 원래 다니던 직장에 갔는데, 경비실에서 동창생이 보낸 소포를 받게 됐다. 열어 보니 ‘전법륜(轉法輪)’이라는 책이었는데, 동창생은 이 책이 자신이 본 책 중에서 가장 좋은 책이니, 반드시 단숨에 다 읽으라는 쪽지까지 함께 보냈다.
그때 직장이 문을 닫는 바람에 나는 먹고살기 위해 서점을 차렸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하지 않은데다, 산후조리 때 눈을 보호하지 않아 책을 오래 보면 눈이 아팠기에 책을 거의 읽지 않았다. 서점을 운영하면서도 책을 별로 읽지 않았는데, 동창생이 첨부한 쪽지를 보니 싸움꾼 버릇이 다시 도져서 ‘난 서점을 차린 사람이야, 어떤 책이 좋은지는 내가 더 잘 알아!’라고 생각했다.
좀 거부감이 들었지만 그래도 무슨 책인지 알고 싶었다.
나는 그때 이미 전법륜이 매우 잘 팔리는 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 서점 앞에 있던 서점에 이 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1998년 봄, 우리 지역에서 파룬궁수련생들의 교류회가 열렸는데, 그 서점에서 책을 사려는 사람들이 거리 양쪽을 가득 메웠다. 그런 광경은 처음이었기에 매우 인상이 깊었다. 그날 그 서점에서는 한 컨테이너 분량의 책과 비디오테이프, 녹음테이프를 팔았다고 하는데, 나는 아이스크림 몇 개를 더 팔았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파룬궁에 관심 있는 척하면서 전법륜의 도매 경로를 알아보러 그 서점에 간 적이 있는데, 책을 팔아 돈을 벌기 위해서였고 공법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다. 어릴 때 나는 가족과 함께 어떤 기공을 연마했지만 아무런 변화도 느끼지 못해서 그 후부터 기공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앞 서점에 책을 사러 가는 사람이 하도 많기에 나는 책 도매시장에서 전법륜을 찾아봤는데, 읽을 수 없을 정도로 품질이 떨어지는 해적판밖에 없었다. 평소 전법륜을 사려는 사람들은 내 가게에 자주 찾아왔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와서 짜증이 날 정도였는데, 어른 몇 명이 들어오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앞 서점을 가리켰다. 그러면 그들도 알아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나는 전법륜의 도매 경로를 계속 열심히 알아봤는데, 나중에 20만 위안(약 3600만 원)을 선납해야 책을 들여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처음에는 왜 그렇게 큰돈을 먼저 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 그때 정부에서 이미 전법륜의 출판을 제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책이 워낙 인기가 많아서 출판 업자들이 자금을 모아 책을 찍어내는 상황이었다. 나는 당시 그렇게 많은 돈이 없어서 서점에 전법륜을 들여오지 못했다.
하지만 그 책에 대한 궁금증은 계속 있어서 언제쯤 한 번 읽어보려 했다. 앞 서점 주인도 열정적으로 자신이 읽던 전법륜을 나에게 빌려주겠다고 했다. 그때 나는 돈에 집착하는 마음이 너무 강해 책값 12위안도 아까워서 다른 사람의 책을 먼저 빌려보고 좋다고 생각되면 다시 사서 보려 했다.
지금 동창생이 보낸 것이 바로 그 전법륜이었다. 아직 어떤 책인지 몰랐기에 나는 자기 전에 읽어봤다. 처음에는 완전히 호기심으로 읽었는데, 책에서 말하는 그런 지식은 들어본 적이 없어 소설을 읽는 것 같았으며 일리가 있는 것 같지만, 또 약간은 허황해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매일 서점 문을 닫고 집에 오면 바로 책을 봤다. 전법륜은 읽다 보면 무슨 힘에 이끌리는 것처럼 매일 다음에는 무슨 이야기가 있을지 궁금해져 갈수록 더 빨리 읽게 됐다. 그래서 처음 세 강의는 일주일 만에 읽었지만, 다음 여섯 강의는 저녁에 시작해 다음 날 아침 다섯 시까지 단숨에 다 읽었다. 나는 그때 ‘어쩜 이렇게 좋은 책이 있을까!’라고 감탄했다.
나는 드디어 전법륜이 무슨 책인지 알게 됐다! 내 인생에서 알고 싶지만 이해할 수 없었던 많은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었다. 나는 마침내 내가 왜 살고 있는지 알게 되어 너무 기뻤다. 또한 내가 그동안 많은 일에서 잘못이 있었고, 나쁜 짓도 많이 저질렀다는 것도 알게 됐다.
파룬따파는 너무 소중하다
나는 속으로 말했다. ‘나는 왜 이리 늦게 법을 얻었을까? 사부님께서 날 구해주셨구나.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계속 타락해 무슨 지경까지 떨어졌을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나중에 대법 수련을 이유로 공산당에게 박해받거나 미혹 중에서 아무리 고생스럽고 힘들어도 사부님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없었고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뿐이었다!
나는 원래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대범하고 타인을 잘 대해주지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잘 대하지 않아 때린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언행을 ‘진선인(真·善·忍)’과 비교하니 내가 좋은 사람과는 거리가 너무나 멀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신기하게도 대법을 수련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오랫동안 날 괴롭혔던 눈의 통증이 사라졌다. 원래는 책을 읽거나 TV를 볼 수 없었고 좀 오래 보면 속이 메스껍고 토할 것 같았다. 그런데 ‘전법륜’은 밤새 봐도 눈이 아프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열이 느껴지며 편안했다. 그때 나는 아직 수련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지도 않았다. 이어 골반염, 위염, 선천성 심장병이 어느새 전부 좋아졌다. 고소공포증도 사라지고, 명치도 아프지 않았으며, 간헐적인 자궁 출혈 증상도 사라졌다.
또 신기한 것은, 이 책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좋지 않은 일에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면 날 도와주고, 마음을 움직이면 상관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법학습과 연공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어 다시는 누구에게도 손을 대지 않았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나는 화를 낼 때의 기분까지 잊어버렸다.
파룬따파는 너무나 소중하다!
고난 속에서 수련하다
수련하고 나서 나는 몇 년 전에 꾼 꿈에 대해 가졌던 의문에 답을 얻었다. 1992년 말에 변고로 한 친척이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너무 슬펐던지 신이 있다고 믿지 않던 내가 부처님 꿈을 꿨다. 하늘에서는 따뜻한 햇살이 비추고 여태껏 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채색 구름이 떠 있었는데, 푸르른 산 뒤로 큰 부처님께서 좌대에 앉아 계셨다. 그 부처님 몸에는 장난치는 아이들이 가득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정말 부처님이 계시는구나!’라며 신기하게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사부님께서 세상일에 집착하지 말라고 일깨워주신 것이었다.
나는 법을 얻고 너무 기뻐서 즉시 전법륜을 부모님께 보여드렸고, 부모님도 곧 법을 얻으셨다.
남동생도 방학 때 집에 와서 책을 읽고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래서 늘 화약 냄새가 풍겼던 집안이 화목해졌고, 어머니도 이제야 가정의 따뜻함이 느껴진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성격이 불같아서 그동안 우리를 때리거나 욕하기 일쑤였다. 어머니를 건드리면 주먹이 날아들었기에 온 가족이 조심하며 살았다. 그런데 수련 후에는 욕설은 물론 매도 절대 때리지 않으시고 자애로운 어머니가 됐다.
1999년 7월 20일, 풍운이 돌변해 아직 아침 연공도 제대로 견지하지 못하던 상태였던 나는 중국공산당(중공)의 갑작스러운 파룬궁 박해에 휘말렸다. 다른 가족들도 피해 가지 못해서 법을 깊이 배우지 못했던 아버지, 남동생은 수련을 포기했다. 나는 어머니와 베이징에 가서 청원하다가 구치소, 세뇌반에 수감됐다. 나는 또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불법적으로 형을 선고받아 가정이 파탄 났고 직장도 잃었다. 어머니도 수련 환경이 없어진 데다 내가 불법 납치되자 감당하지 못해 내가 구치소에 수감된 지 4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셨다.
몇 년 후 나는 검은 소굴에서 나왔지만 집도 일자리도 없었고, 아이는 아빠와 살았다. 원래 직장에는 갈 수 없었고 아무도 날 도울 수 없었다. 나는 사부님과 대법이 내게 주신 지혜로 자신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검은 소굴에서 나올 때 나는 마흔이 넘었는데, 원래 종사했던 직종은 요구가 높아서 젊은 사람을 원했다. 그래서 나는 내 전공인 재무 회계 일을 해보려고 했지만 그동안 한 번도 해본 경험이 없었다. 회계 일은 실무 경험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행히 사부님께서 내 주변에 경력이 많은 동창과 전 직장 동료들을 배치해주셨고, 나와 사이도 다 괜찮아서 그들에게 배울 수 있었다. 그들의 도움과 대법이 준 지혜로 나는 거의 10개 직장에서 경력을 쌓으며 마침내 자신의 길을 뚫어냈다.
처음 업계에 진출할 때 회계원 자격증을 따야 했다. 속인들은 ‘마흔이면 기예를 배우지 말라’고들 하지만 나는 마흔이 넘는 나이에 10여 년 전에 배웠던 전공을 다시 공부했다. 그래서 시험 볼 때 맞게 풀었다고 확신할 수 있는 문제가 별로 없었다. 나는 이 자격증에 생계를 의지해야 했으므로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도움을 간청했다.
나는 전혀 자신 없었지만 결국 사부님 덕분에 시험을 기적적으로 통과했다.
나는 첫 직장을 찾을 때 월급과 근무 시간을 전혀 따지지 않고 나를 받아주는 곳이기만 하면 가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자신감도 부족해 수표를 연속 여섯 장이나 잘못 끊어 10일 만에 해고됐다.
한 달, 두 달, 여섯 달…나는 해고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해고되면 또 다른 직장을 구했다. 고용된 동안에는 아무리 눈총을 주고 심하게 질책당해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일자리와 수입이 있어야 했고, 일하면서 진상을 알리고 사람을 구해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장이 내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내가 직장에서 다른 직원들과 한담도 하지 않고 부지런히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한 사장은 내가 잘 모른다는 것을 알아챘다. 어느 날 그는 계약서 한 장을 나에게 갖다주며 필요한 정보를 조사하라고 시켰다. 그러면서 “자네가 오늘 안에 조사해낼 수 있을까?”라고 얕보듯이 말했다.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맞는 말이었다. 나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식은땀이 절로 났다. 서둘러 마음을 안정시켰지만 월급을 거저 받는 것 같아 몹시 쑥스러웠다. 사실 나는 일이 익숙하지 않아 좀 서툴렀지만 급하게 해결해야 업무는 모두 비교적 순조롭게 해내고 있었다. 이는 사부님께서 내 곁에 계신 덕분이었다. 나는 단지 노련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눈총을 받는 일이 많을 뿐이었다. 나는 사장이 몇 마디 하는 것은 마음을 수련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들에게 대법 진상을 알렸기에 그들이 대법제자가 대충 일한다고 생각하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속으로 ‘사부님,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고 간절히 여쭤봤는데, 곧 방법이 떠올라 20분도 안 되어 시장 상황을 정확하게 조사해 사장에게 보고했다.
모든 기회를 이용해 진상을 알리고 사람을 구하다
나는 매번 직장을 찾을 때마다 대법제자의 기준에 따라 성실하게 일하면서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했다. 내가 대법제자라고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나는 기회를 찾아 진상을 알리고 삼퇴(중공의 3대 조직인 공산당, 공청단, 소선대 탈퇴)를 권해야 했다! 그러므로 반드시 평소에 잘해야 하고, 반드시 법을 실증해야 했다. 업무 능력이 부족해도 최선을 다하고, 모르면 모른다고 하고, 질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태도를 품었다.
나는 직장에서 기회가 되면 먼저 전통 신전(神傳)문화를 이야기했다. 나는 시비를 따지지 않고 남을 선하게 대하며 개인의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남을 잘 도와줬기에 인기가 많았다. 한 명씩 만날 기회가 있으면 제3자 신분으로 대법 진상을 알리고 삼퇴를 시켰다. 그래서 직장을 떠날 때쯤이면 대부분 직원이 삼퇴했고, 어떤 직원은 자료도 가져갔다.
나는 점심시간에 보통 점심을 거르고 거리와 공원에 나가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리고 삼퇴를 권했는데 매일 성과가 있었다. 지금은 사악의 요소가 적어져 2005년 이전보다 사람들이 진상을 더 쉽게 받아들이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2005년 이전에 나는 직장 동료들에게 대놓고 진상을 알렸는데, 연속 5개 회사에서 출근한 지 며칠이 되지 않아 해고당해 월급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5년간 직장을 몇 군데 옮겨 다니며 일하던 중, 한번은 진상을 알리다가 신고당해 구치소에 갇혔고, 나온 지 며칠 만에 다시 세뇌반에 끌려 들어갔다. 내가 회사에서 꼭 필요한 인재였기에 구치소에서 풀려난 직후 사장은 나를 계속 일하게 하려 했는데 다시 세뇌반에 들어가고 말았다.
그 난은 원래 피할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진상을 알릴 때 상대방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서 진상자료를 가져가 보라고 온 힘을 다해 설득했다. 나는 다른 사람을 강요하는 버릇이 나와서 진상자료를 봐야 하는 필요성을 반복해서 강조했다. 결국 그 사람의 나쁜 면을 건드려 몰래 신고당한 것이었다. 사실 그때 이미 오후 출근 시간이 다 됐는데, 내가 만약 제시간에 출근하는 걸 당연시했더라면 경찰이 오기까지 그러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여전히 바르게 행하는 것이 부족하고 극단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나는 야근이 일상인 신생 대행업체로 직장을 옮겼는데 너무 바빠서 적응이 안 됐다. 회사는 백지상태에서 시작해 반년 만에 300곳 이상의 거래처를 확보했다. 회사에는 나이 많은 회계원이 두 명 있었는데, 한 명은 20년 넘는 경력을 가진 분이었고, 다른 한 명은 경력이 몇 년 되지 않는 나였다. 그런데 대법을 수련해 사부님께서 지혜를 열어주신 덕분에 내가 그녀보다 일을 더 잘했고 시장 분석도 더 잘했다. 나머지는 모두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이들로, 많을 때는 20여 명이 있었는데 사람이 자주 바뀌었다. 그 나이 많은 회계사는 업무 강도를 감당하지 못해 사직했다. 나도 나가고 싶었지만 일이 계속 바빠서 기회를 보고 있었는데 그녀가 먼저 나가는 바람에 더 떠나기 어렵게 됐다.
나는 그 직장에서 회식하거나 같이 고객을 만나러 가는 등 기회를 모두 놓치지 않고 진상을 알렸다. 나는 동료들에게 먼저 전통문화를 이야기하면서 공산당의 사악한 본질을 알려줬다. 그렇게 많은 젊은이에게 진상을 말하려면 정념(正念)이 필요했다. 나는 평소 엄격하게 진선인에 따라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대가 없이 젊은 직원들을 도와줬는데 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개인적으로도 50여 곳 거래처의 장부를 대리 관리하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고객을 책임지기 위해 나는 월초에 늘 자발적으로 야근했지만 젊은 직원들이 고객을 만나러 같이 가자고 하면 항상 기꺼이 가줬다. 이렇게 하면 그들과 개별적으로 접촉해 진상을 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계약이 성사되면 모두 그들에게 고객을 넘겼는데, 젊은 직원들은 정말 힘들게 일하지만 월급은 적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도와준 덕분에 가끔은 그들이 나보다 월급을 더 많이 받기도 했는데, 여기에 대해 나는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만약 수련 전이었더라면 나는 내 것은 내 것이고, 다른 사람 것도 내 손에 들어오면 내 것이라고 했을 것이다. 수련 전에 한번은 물건을 사면서 점원에게 50위안을 줬는데 점원이 잘못 보고 80여 위안을 거슬러 줬다. 나는 그가 잘못 본 것을 알고 다시 물어봤지만 그 점원은 오히려 맞게 거슬러줬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마음 편히 그 돈을 챙기고 완전히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동안 공개적으로 진상을 알려 자주 해고당했기에 우회적인 방식을 택했는데 효과가 좋았다. 먼저 발정념을 해서 공간장을 깨끗하게 한 다음 젊은 직원들의 취향에 맞춰 밍후이왕의 신전문화 이야기를 들려주면 그들은 귀 기울이며 들었고, 틈만 나면 “언니, 더 이야기해주세요!”라고 했다. 나는 이야기를 마치고 나면 사악한 공산당 치하의 혼란상과 비교하면서 중공의 본질을 알려줬다.
그들은 대부분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스물다섯 살 전후의 젊은이들로, 원래 천상의 신이다. 예쁘게 생긴 한 아가씨는 신을 볼 수 있고 그들과 소통할 수 있었다. 특히 그녀는 순조롭지 않은 일이 있으면 용왕을 부르고, 그러면 용왕은 차를 마시며 그녀에게 방법을 알려준다고 했다.
하루는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언니, 어젯밤에 언니가 저 바다 밑에서 불법(佛法)을 전하는 꿈을 꿨어요. 많은 사람이 듣고 있었어요. 저도 꼭 듣고 싶어서 하늘에서 바다거북을 타고 내려갔는데, 바다 밑은 금빛으로 번쩍이고 정말 아름다웠어요.” 그녀는 계속 말했다. “그때 고대 복장을 한 천군만마가 우리를 향해 달려와 전쟁을 치르려 했는데, 언니가 한마디 하자 즉시 무기를 내려놓고 모두 언니 앞에 순순히 무릎을 꿇었어요.”
나는 그 꿈이 다른 공간의 진상이 펼쳐진 것임을 알지만 왜 바닷속인지는 이해되지 않았다. 나중에 우리 회사가 있는 건물 이름이 ‘중해(中海)××’ 빌딩임을 알게 되고 그 꿈이 이해됐다. 이 직장에서 나는 공개적인 장소에서는 대법 진상을 말하지 않고 신전문화를 이야기했으며, 사석에서만 대법 진상을 이야기했는데 다른 공간은 그렇게 훌륭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겠다. 이렇게 여러 해 동안 나는 줄곧 대법제자의 능력이 대단히 크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이 좀처럼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신이 볼 수 없게 했기 때문이다.”[1] 나는 이 법리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내가 중공의 악행을 폭로하자 사장은 처음엔 좀 긴장했지만 내가 회사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개인의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으며, 젊은 직원들도 나를 따르자 더는 상관하지 않았다. 사장은 파룬궁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진상 알리는 것을 막은 적은 없었다. 내가 힘들어도 자주 자발적으로 야근한 것도 사장이 내가 진상을 알리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직장에서 그렇게 거의 2년을 일하다가 나중에 능력 있는 회계원이 들어와서 사직했다.
내가 회사를 떠날 때 평소 자주 함께 고객을 만날 기회가 적었던 남자 직원 몇몇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젊은이가 삼퇴했다. 사장은 날 보내지 않으려 했지만 내가 끝까지 사직을 고집하자 고의로 내 마지막 월급을 깎았다. 나는 그와 따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내가 맡은 고객도 데려가지 않았다. 당시 내가 관리하던 50개 정도의 거래처 중 10여 곳이 날 매우 신뢰하고 있어서 다른 회계원들처럼 그들을 데리고 나갈 수 있었다. 게다가 거래처 4~5곳 사장들은 날 따라가겠다고 명확하게 말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젊은 직원들도 업무에 다 익숙해져서 나 없이도 혼자 할 수 있게 됐다. 만약 수련하기 전이라면 나는 사장이 날 그렇게 대한 것에 앙심을 품고 거래처 10여 곳을 다 데리고 나왔을 것이다!
나는 직장인이라 평소 진상을 알리러 밖에 나갈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가방에 늘 각종 진상자료를 넣고 다니면서 사람들과 접촉하는 모든 기회를 이용했다. 주변 수련생들이 내가 진상을 알릴 때 말을 잘한다고 하기에 그 과정을 적었다. 사실 나는 진상을 잘 알리는 편이 아니다. 어떤 수련생은 몇 마디면 삼퇴시킬 수 있지만, 나는 적어도 5분 이상이 필요하고 때로는 아주 긴 시간을 말해야 한다. 상대방이 듣고 있기만 하면 나는 여러 각도에서 말해줬다. 나 여기서 삼퇴하지 않더라도 다른 수련생을 만났을 때 삼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상대방이 좀 더 잘 들어주기를 바라서, 먼저 현재 사회의 혼란상부터 이야기했다. 사실 진상을 아는 사람들은 공산당이 너무 사악하다는 것을 다 안다. 하지만 공산당은 거짓말에 능해 모두들 속아 넘어갔다. 어떤 진상은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해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내용을 말하면 논쟁이 일어나는데, 그러면 대화를 이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진상을 알릴 때 접점을 찾으려면 아주 많다. 밍후이왕의 진상자료 내용은 진상을 알리기에 아주 적합해서 나는 다 읽어본 후 여러 가지로 활용한다. 상대방이 삼퇴한 후 읽을 자료가 필요한지 물어보며, 필요 없다고 하면 강요하지 않는다. 나는 자료를 줄 때 그들 온 가족이 다 본 후 이웃집 문손잡이에 걸어두면 이웃도 혜택을 볼 수 있고 하늘이 공적을 기록할 것이며, 그의 모든 일이 순조롭고 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해준다.
수련한 지 20년이 넘었다. 박해가 시작된 후 진상을 알리고 삼퇴를 권유하는 동안,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났고 수련에서 넘어진 적도 있었지만 자비로운 사부님께서는 이 제자를 버리지 않으셨다. 내가 한 일은 한계가 있어서 정말 사부님께 부끄럽지만 그래도 이전보다 성숙해졌다. 원래 나는 일하는 것을 수련으로 여겼는데, 지금은 세 가지 일을 동시에 잘하는 것을 중시한다.
진상을 알린 지난 10년간 나는 입을 열어 말하기만 하면 거의 매일 삼퇴를 시킬 수 있었다. 어떤 때는 온종일 진상을 알려도 한 명도 탈퇴시키지 못했지만 이런 경우는 1년에 10일이 넘지 않았고, 거의 매일 5~6명, 적게는 1~2명을 탈퇴시켰고, 하루에 10여 명을 탈퇴시킨 적도 있다. 내가 정한 목표는 그리 높지 않아 하루에 적어도 한 명을 탈퇴시키는 것인데 어느 날 탈퇴시키지 못했으면 나중에 보충했다. 목표를 초과하면 당연히 좋은 일이다.
내가 한 것은 매우 제한적이며 잘한 수련생과는 비할 수 없다. 그래서 더 열심히 노력하려고 한다. 나는 자신이 수련에서 초심을 잃지 않고 합격한 정법시기 대법제자가 되어 사부님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서: ‘각지설법11-20년 설법’
원문발표: 2023년 7월 2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3/7/25/44499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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