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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축 5.13] 질투심을 닦아 ‘마음의 꽃이 활짝 피다’를 체험하다

글/ 일본 대법제자 정은(淨恩)

[밍후이왕] 저는 외동딸로 집안 살림이 넉넉한 편은 아니지만 어려서부터 먹고 사는 것은 걱정이 없었습니다. 부모님의 교육 방식은 격려와 칭찬 위주로 하며 거의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남들 앞에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기에 보통 다른 부모님들의 말처럼 “다른 집 아이를 좀 봐”에 관한 고민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저는 자신에 대한 요구도 높았고, 집 안팎에서 더 많은 인정을 받기 위해 잘하려 했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남의 질책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남들이 저보다 뛰어나면 질투심으로 마음이 평형되지 못했습니다. 파룬따파를 수련한 후 ‘진선인(真·善·忍)’ 법리와 질투심의 해악을 깨닫게 됐습니다. 평소에도 어떤 상황에서 질투심이 생기는지 주의하며 억제했습니다. 게다가 튀지 않고 조용한 성격이라 주변 사람들과 잘 지냈습니다.

법을 얻은 초기에 저는 대법에 대한 이해가 매우 표면적이었습니다. 비록 늘 속인의 억지로 참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했지만, 마음의 평형을 유지하기에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균형 감각은 결혼 후 점차 깨졌습니다.

남편은 매우 진지하고 섬세한 사람입니다. 그에겐 고집이 세고 완벽을 추구하는 두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서로의 생각과 감정이 완전히 일치하던 신혼생활에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평범한 일상생활로 넘어가고 또 부부가 함께 사업을 시작하면서 제 심성은 끊임없는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법에 대한 표면적인 이해로 더 이상 갈등 속에서 침착함을 유지할 수 없었고, 예전의 억지로 참아왔던 방식은 썩은 나무가 부러지듯 손쉽게 무너졌습니다. 저는 종종 극도로 평형을 이루지 못하는 상태에 빠져있었습니다. ‘무슨 권력으로 나한테 그런 태도로 말할 수 있어?’ ‘나보다 몇 살 위라고 그렇게 대단한 척하지?’ ‘왜 당신 말을 들어야 해? 당신이 옳다는 걸 어떻게 알아?’ 남편과 이견이 생길 때마다 이런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고, 저는 수련인의 최저 기준을 겨우 유지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집에서는 한 사람(남편)은 서서 고함지르고, 한 사람(저)은 의자에 앉아 묵묵부답했으며, 한 사람(남편)은 의견을 내고, 한 사람(저)은 조용히 “난 안 해!”라며 거부하는 이런 광경이 자주 벌어졌습니다. 30대 중반인 사람이 “난 안 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유치했지만, 그 당시 저의 가장 진실한 심리 상태였습니다.

그때부터 남편이 저에게 ‘난 안 해’라는 별명을 지어주고 수시로 놀렸습니다. 그 시절 저는 이 평형을 이루지 못하는 상태가 질투에서 비롯됐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결국 ‘나는 수련인이고 남들과 같은 식견을 가져서는 안 된다’라고 자각하자 다시 약간의 심리적 평형을 되찾았습니다.

어느덧 2020년이 되자 전 세계를 휩쓴 중공 바이러스(우한폐렴) 대역병이 모든 사람의 삶을 바꿔 놨습니다. 자비로운 사부님의 보호 속에 남편이 마침내 파룬따파 수련에 들어섰습니다. 가족이 마침내 법을 얻은 기쁨을 누리는 단계를 지나자 저는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하게 됐습니다.

법공부를 한 후 대법 수련에 관해 알게 된 남편은 법에 따라 자신을 바로잡는 것 외에 그가 보는 기준으로 저에게 요구했습니다. 제가 어떤 일에 부딪혀도 그는 “왜 안으로 찾지 않아요?”라고 아주 그럴듯하게 말했습니다. 당연히 안으로 찾아야 하는 건 알지만 신수련생이 제게 이렇게 요구하자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게다가 사부님께서는 근기가 좋은 남편에게 늘 법리를 보여주셔서 그는 며칠만에 한 층차씩 급속히 위로 제고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와의 교류에서 저는 그가 육체적 감각에서나 법에 대한 이해에서나 제가 막 법을 얻었을 때와 크게 다른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그가 말한 그런 상태를 느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작은 불균형이 또다시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이후 갈등이 생기자 저는 원래의 인내와 무시에서 또다시 분노로 바뀌었습니다. “당신은 수련하니 의사소통 방식을 조정해야 하고, 안으로 찾아야 해요.” 두 사람 모두 서로가 변하기를 원했고, 그래서 자주 불쾌한 기분으로 헤어졌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음에 꼭 고비를 잘 넘기자며 함께 반성했습니다. 이렇게 한동안 반복했습니다. 어머니 수련생과 함께 교류하자 어머니는 자신에 대한 엄격한 요구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이전에 수련한 것이 어떻든 간에 신수련생을 잘 이끄는 것은 노수련생의 책임입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안에서 수련하고 자신을 향상해야만 할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법공부를 하면서 저는 수련자로서 고비를 넘기는 것을 그저 생활 속의 어려움으로 여기며, 마음의 평형을 이루지 못하는 근원이 질투심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악자(惡者)는 질투심의 소치로 자신을 위하고, 화를 내며, 불공평하다고 한다.”[1] 그리고 사부님께서 ‘무엇이 참음인가’에서 말씀하신 “참음(忍)은 心性(씬씽)을 제고하는 관건이다. 화가 나 원망하고, 억울해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참는 것은 속인이 해를 입을까 염려하는 참음이다. 화를 내거나 원망함이 전혀 생기지 않으며 억울함을 느끼지 않는 것이야말로 수련자의 참음이다.”[2]에 대한 함의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갈등 해결을 목적으로 한다면 그것은 ‘유위’로서 진정한 참음이 아님을 깨닫게 됐습니다. 마음속에서 어떤 잔물결도 일지 않고, 어떤 외적 조건에도 움직이지 않는 것만이 수련자의 ‘참음’입니다. 다소 깨닫게 되자 시련도 뒤따랐습니다. 남편이 다시 한번 큰 소리로 질책할 때 겸허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도리어 비난하려는 순간, 문득 제가 “불공평하다고 한다”[1]는 악자(惡者)가 됐음을 깨닫게 됐습니다. 수련자로서 평형을 이루지 못하는 마음은 자신이 아니고, 제가 원하는 것은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수련자의 참음입니다. 저는 이 생각을 확고히 하며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 ‘평형을 이루지 못함’이 아직 존재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으나 그 마음이 잠시 정지돼 있었기에 순조롭게 이 고비를 넘었습니다.

제가 질투심을 버리려는 정념이 있는 것을 보신 사부님께서는 자비를 베풀어 더 많은 법리를 보여주셨습니다. 갈등이 발생한 다음 날 아침, 정공(靜功)할 때 결가부좌를 할 수 있었던 남편이 갑자기 반가부좌로, 그것도 다리가 매우 높이 솟아 있었습니다. 이를 악물고 괴로워하는 그의 표정을 보고 이해할 수 없었는데. 바로 그때 문득 머릿속에서 누군가 “당신을 위해 감당하고 있는 거야!”라고 말하는 소리에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바로 당신을 도와 소업(消業)해 주고 있지만 그 자신은 모른다. 그는 표면상으로만 당신과 맞서 싸우며 마음속으로는 당신을 아주 좋게 대하는 이런 것이 아니라, 정말로 내심으로 화를 낸다. 왜냐하면 업력이 누구에게로 떨어지면 바로 누가 괴롭기 때문인데, 틀림없이 이러하다.”[3]

그렇습니다. 갈등 중에 남편의 도움으로 제가 고비를 넘겼으니 업력을 그가 감당해야 했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면서 저는 처음으로 수련의 길에서 제가 고비를 넘기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신 수련생, 심지어 속인이 짊어진 것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깨닫게 됐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 제자들을 위해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놓아주셨고, 그 사다리 위의 모든 계단이 바로 우리가 고비를 넘기도록 도와주신 분들입니다. 제가 한 걸음 한 걸음 향상한 것은 모두 사부님의 도움 하에 다른 사람의 어깨를 밟고 올라간 것입니다. 그 순간 저는 감사하기 그지없었고, 수련인은 문제를 거꾸로 보아야 한다는 법리를 깊이 이해했습니다. 평형을 이루지 못하던 제 마음이 녹아버렸습니다!

저는 이상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그 후의 수련에서 누구와 함께 있든, 어떤 문제가 있든, 자신을 단속하고, 가능한 한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안으로 찾았습니다. 항상 잘하는 건 아니지만 정신을 차리고 정념으로 대할 때가 점점 많아졌습니다.

한번은 초창기에 법을 얻고, 매우 착실히 수련하며 정진하는 수련생과 교류했습니다. 남편이 상쾌한 기분으로 최근에 깨달은 법리에 대해 말했고 저는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었습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그 수련생이 갑자기 저에게 “어쩐지 남편분이 나중에 법을 얻었지만 (당신보다) 수련에서는 앞선 느낌이 드네요”라고 한마디 했습니다. 저는 마음이 움찔하며 본능적으로 몇 마디 논박하려 했지만, 또 제 마음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에 결국 웃으며 말하지 않았습니다.

수련생이 떠난 후 저는 안으로 찾았습니다. 어떤 마음을 건드렸을까? 남보다 못하다고 하면 기분이 언짢아하는 것은 질투심입니다. 원래부터 남편에게 나타난 많은 상태가 저에게는 없었기에 조금 낙담하고 있었는데, 남들도 면전에서 남편이 더 잘 수련한다고 말하니 명성을 추구하는 마음이 건드려진 것입니다. 또 남에게 지적받을 때 즉석에서 반박하고 싶은 것은 쟁투심이었습니다. 한동안 찾아본 후 갑자기 깨닫게 됐습니다. ‘남편의 여러 장점은 내가 갖추지 못한 것들이다. 그렇다면 왜 태연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없을까?’ ‘겸손’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자신을 너무 높게 보았기에 겸손함이 부족해 다른 사람이 훌륭하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나를 구해야 한다, 모두가 당신은 나를 구해야 한다, 당신은 나를 구해야 한다고 하는데, 표현형식은 세간의 논리로 인식하는 그것과 같지 않다. 사람에게 부탁을 할 때는 예의를 갖추어야 하며 아주 겸손해야 한다. 당신이 나를 구해주니, 내가 먼저 당신에게 감사드리고 내가 당신에게 편의를 제공한다는 이런 것이 아니다. 그것들이 보건대, 당신이 나를 구할 수 있으려면 당신은 나의 층차에 도달해야 하고, 이 위덕이 있어야만 당신은 나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4]

높은 곳에 앉아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깔보는 마음가짐으로 대하는 것은 바로 이런 구세력과 꼭 같은 것이 아닌가요? 사람 마음 뒤에 숨어 있는 이 ‘큰 마귀’를 잡아낸 저는 구세력의 모든 안배를 부정한다는 정념을 내보냈습니다. 동시에 평소에 다른 사람의 장점을 많이 보았습니다. 자신이 부족한 부분은 되도록 숨기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다른 수련생의 의견을 듣게 됐습니다. 때론 부끄럽기도 하지만 마음가짐은 예전과 달리 크게 바뀌었습니다.

얼마 전 남편이 사부님의 신경문 ‘왜 인류가 존재하게 되었는가’를 가족에게 읽어주었는데 가족 사이에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그가 고비를 넘기고 있는 줄 알았지만 그 순간 저는 심성을 지키지 못한 채 남편에게 “그들이 어떻게 이럴 수 있나요?”라고 흥분했습니다. 남편은 “당신은 이끌려서 움직이고 있으니 이제 그만 말해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끌린 것이 아니라 단지 안타까울 뿐이라는 등으로 변명했습니다. 남편은 엄하게 말했습니다. “속인에게 이끌리고 있으면서도 인정하지 않는다니, 그들에게 경문을 읽어주는 기점이 뭐죠? 우리는 사부님을 도와 중생을 구하고 있어요. 당신은 100% 사부님과 법을 믿고 있어요? 나도 조금 전에 이끌리긴 했지만 곧 고비를 넘고 있음을 깨닫게 됐어요!”

그제야 저는 냉정해졌습니다. 비록 ‘당신은 신수련생이니 그래도 내가 알려줘야 해!’라고 반박하려는 물질이 다시 솟구치려 하지만, 이번에는 남편 말을 똑똑히 직시하고, 모든 교란을 배제하고, 예전에 속으로만 ‘당신 말이 일리가 있어요!’라고 생각했던 말을 직접 전했습니다. 이때 저는 질투심의 그림자도 느끼지 못한 채 마음속으로 진심으로 ‘당신은 정말 잘 깨닫고 아주 잘했어요! 정말 당신 때문에 기뻐요!’라고 감탄했습니다.

이 생각을 할 때, 저는 심장 속에서 매우 느린 속도로 커다란 꽃이 피어나는 것을 분명히 느끼는 동시에 얼굴에 웃음이 퍼지면서 방금까지도 엄숙하던 표정이 저도 모르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로 바뀌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마음의 꽃이 활짝 피다[心花怒放]’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완벽하게 표현했습니다.

보아하니 옛사람이 만들어 낸 단어는 다 유례가 있었습니다. 이 ‘마음의 꽃이 활짝 피다’는 자신이 얼마나 기뻐했는지가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해 남을 위해 기뻐했을 때 비로소 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질투가 없는 아름다운 상태를 체험할 기회를 주신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요즘 남편 수련생은 더 이상 ‘난 안 해’라는 말로 절 조롱하지 않습니다. 매번 그가 무엇을 요구하든, 태도가 좋든 나쁘든, 저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하하 웃으며, 깡충깡충 뛰어다니며 대응합니다. 한번은 막 두어 마디 하던 남편이 갑자기 혼자 웃으면서 “아이고, 당신 요즘 정말 잘 수련하고 있네요!”라고 말했습니다.

제자를 보호해주시고 깨닫게 해주신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마침내 곤혹스러운 질투심에서 벗어나 심성이 한 걸음 한 걸음 향상됐습니다. 수련 과정에서 반복과 기복이 있었지만, 수련을 어떻게 하는지 알게 된 제자는 끊임없이 정진하는 모습으로 사부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경문: ‘정진요지-경지’
[2] 리훙쯔 사부님 경문: ‘정진요지-무엇이 참음인가’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
[4] 리훙쯔 사부님 저작: ‘각지설법11-대법제자는 반드시 법 공부를 해야 한다’

(밍후이왕 제24회 세계 파룬따파의 날 응모작)

 

원문발표: 2023년 5월 2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3/5/20/46095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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