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구술, 수련생 정리
[밍후이왕] 내 이름은 메이롄이고, 1952년생으로 올해 71세이다. 나는 원래 불교의 거사였고 절을 20년 동안 다녔다. 1994년 5월, 나는 운 좋게 파룬따파를 수련하기 시작했다. 세계 파룬따파의 날을 맞아 밍후이왕 5.13 공모에 응해 연분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나의 진솔한 이야기를 적어내려 한다.
중공(중국공산당)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전에 우리 집은 연공 거점이었고 박해가 시작된 후에는 자료점이 되었다. 20여 년 동안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나의 믿음을 어떤 일도 동요시키지 못했다.
나는 학교에 다닌 적이 없지만, 사부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전법륜’과 각지설법을 통독할 수 있고 진상 자료를 프린트할 수 있으며 진상 CD를 제작할 수 있다.
1.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수련이다.”
나는 도시에서 태어났지만, 가정형편은 아주 어려웠다. 나는 다섯 자매 중 넷째인데 어려서부터 배불리 먹지 못하고 따뜻하게 입지 못했으며 학교에 다닌 적이 없다. 어려서부터 사람은 아주 고생스럽다고 생각했고 부처를 공경하고 싶었고 수련하고 싶었으며 나의 사부님은 아주 젊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1970년대에 나는 사부님을 찾아다녔다. 절에 가니 주지 비구니가 나보다 젊었다. 나는 그녀가 비교적 높다고 생각하고 그녀를 사부로 모셨다. 그녀는 사양하며 나에게 다른 절에 가서 나이가 비교적 많은 비구니를 모시라고 건의했다. 나는 “나의 사부님은 젊은 사람입니다.”라고 고집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받아주지 않았고 그녀의 사부님(이미 세상을 떠났음)을 사부로 모시라고 했다. 나는 수련은 성심성의라고 생각하고 그녀와 함께 불가의 일을 했다.
나는 문맹이지만 경서를 정말 베껴 쓰고 싶어 불교의 경문을 한 획 한 획씩 베껴 썼다. (사실 글자를 몰랐다) 비구니는 나를 잘 대해주었다. 그녀는 “나는 당신을 어머니보다 더 잘 대해줍니다.”라고 했다. 나는 그녀와 함께 먹고 자고 했다. 나는 집에 있는 기름이랑 쌀을 모두 절로 가져왔다. 출근하고 아이를 데리러 가고 생활용품을 사러 가는 외에 나는 어디도 가지 않고 경을 염하는 데만 전념했다.
나는 절을 20년을 다녔어도 여전히 불편했다. 1990년에 나는 남편과 이혼하고 9살이던 딸과 함께 살았다. 1994년에 직장이 부도나 수입이 없었다. 1994년 5월에 나는 구토와 설사를 해서 7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있게 되었다. 딸은 병원에 가라고 했지만 나는 거짓말을 했다. “병원에서 약을 사 왔어.” 사실 당시 나는 쌀을 살 돈도 없었다.
며칠이 지나 한 동료가 와서 나에게 “파룬궁은 불가공인데 가봐요.”라고 말했다. 절에 다닐 때 나는 아무 데도 가지 않았는데 그날은 그녀를 따라 파룬궁 연공장에 갔다. 연공 음악을 듣자 아주 편안해졌다. ‘아! 이것은 일반 공법이 아니구나,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수련이구나!’라고 생각했다.
나는 결가부좌를 하고 썬퉁쟈츠파(神通加持法)를 따라 했다. 썬퉁쟈츠파를 할 때 땀이 나서 옷이 다 젖었고 두 손바닥에서 땀방울이 떨어졌다. 나를 데리고 간 동료는 겁이 나서 나에게 다리를 내리라고 했다. 나는 편안해서 내리고 싶지 않았다. 그때 사부님께서 내 몸을 청리해 주셨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때 나는 연공하고 사부님의 설법 녹음을 열심히 들었다. 사부님의 설법은 한 구절 한 구절 내 머리에 들어왔고 나는 사부님의 요구대로 했다.
‘전법륜’을 출판할 때 나는 제일 먼저 사겠다고 신청했다. 나는 글을 알지 못했기에 책을 들고 사부님의 설법 녹음을 들었고 한 글자씩 물었다. 서서히 ‘전법륜’은 읽을 수 있었지만, 같은 글자가 다른 곳에 있으면 또 몰랐다.
한번은 소파에 앉아 ‘전법륜’을 보고 있었다. 나는 가부좌를 하고 천을 발에 덮었다. 보고 보다가 발이 없어진 것 같아 힘껏 꼬집어도 발은 감각이 없었다. 나는 두려워서 얼른 천을 젖히고 보니 발이 보였다. 아마도 이것은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앉아있다 보면 다리도 없어진 것을 발견하는데, 다리가 어디로 갔는지 분명하게 생각나지 않으며”[1]라는 입정 상태일 것이다.
나는 비구니에게 파룬궁을 수련하겠다고 알리자 비구니는 말리면서 내가 주화입마(走火入魔) 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절대 주화입마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비구니가 또 손님을 청해 한 상 차렸는데 그중에는 비구니와 거사도 있었다. 함께 밥을 먹으면서 내 생각을 돌려놓으려 했지만 나는 확고하게 파룬따파 이 한 문을 수련하리라 다짐했다.
하루는 내가 사부님의 설법 녹음을 들었는데 사부님께서는 “석가모니는, 말법시기에 이르면 사원(寺院) 중의 승려마저도 자신을 제도하기가 아주 어렵다고 했는데, 하물며 거사(居士)는 더욱 관계할 사람이 없다. 당신이 스승을 모셨다고만 보지 말라. 이른바 그 스승 역시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그도 착실하게 수련하지 않으면 헛되며, 이 마음을 닦지 않으면 누구도 올라가지 못한다. 귀의(皈依)는 속인 중의 형식으로서 당신이 귀의했다고 해서 곧 불가(佛家)의 사람인가? 부처가 곧 당신을 책임지는가? 그런 일은 없다. 당신이 날마다 이마가 터지도록 절을 하고 향을 한 줌 한 줌 피운다 해도 역시 소용없다. 당신은 진정으로 당신의 그 마음을 착실하게 수련해야 한다.”[1]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불이법문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전에 모셨던 세 관음상을 큰 절로 모셨고 전에 염불할 때의 염주와 불교의 경문, 표지 등을 전부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비구니에게 보냈다. 비구니는 상심해서 병들었다. 그녀는 아주 오랫동안 앓다가 후에 병원에 입원했다.
비구니는 사람을 시켜 나에게 그녀를 보러오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거절했다. 나는 비구니와의 인연을 다 했다고 생각했고 나에게는 오로지 리훙쯔(李洪志) 사부님뿐이라고 생각했다.
1999년 나는 베이징에 가서 청원했고 대법을 위해 바른말을 한 후, 우리 지역의 구치소에 불법적으로 수감 되었다. 비구니는 한 거사에게 부탁하여 그녀에게 사람이 필요하니 나를 데려오라고 했다. 거사는 비구니에게 “누나(나)가 확고하니 못 말려요.”라고 했다.
나는 7년의 억울한 옥살이를 마치고 볼품없이 망가진 집으로 돌아왔다. 울안에는 잡초가 무성했고 집에는 먼지가 가득했으며 딸은 이미 시집갔다. 비구니는 사람을 시켜 내게 오라고 했는데 나는 여전히 단호하게 거절하고 파룬따파 이 한 문을 수련했다.
2. “우리 집에 와서 수련해요.”
1994년에 실업한 후, 우리 모녀는 내가 바느질하는 것으로 살아갔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매우 넓고 도심에 있어 세를 놓으면 나는 경제적으로 좀 더 여유로울 수 있었지만, 수련생이 갈수록 많아져 원래 연공장이 200여 명이 되었을 때 2층에 있는 큰 방 두 칸을 합치고는 수련생들에게 우리 집에 와서 수련하라고 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우리 집 2층에는 50~60명이 연공하고 법 공부했다.
보도원은 내가 생활이 어려운 것을 보고 나에게 물세와 전기세를 주려 했으나 딸과 나는 받지 않았다. 설이 되니 보도원은 달걀과 고기를 보내왔다. 딸이 달걀을 세어보니 100개였는데 돈으로 환산하니 30위안이었고 고기는 무게를 달아보니 70위안이었다. 딸은 “엄마, 합치면 모두 100위안이에요. 설이 지나고 돈을 다시 큰아버지(보도원)에게 갚아요.”라고 했다.
이틀 후에 나는 꿈을 꾸었고 꿈속에서 누가 나에게 ‘9-8’이라 말했다. 내가 무슨 뜻인지 묻자 그는 “내일 거리에 나가면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음 날, 단체 연공 할 때 쓰는 카세트가 고장이 났다. 나와 딸은 얼른 카세트를 사러 갔다. 거리에 가서야 카세트가 98위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마침 그 100위안으로 카세트를 샀다.
그때 둘째 언니도 우리 집에 와서 파룬궁을 배웠다. 언니는 늘 우리 집 위층과 아래층에 각양각색의 파룬이 도는 것을 보았고 마당에 연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보았다. 둘째 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우리 자매 중 가장 교육 수준이 높다. 아쉬운 것은, 내가 중공에 의해 불법적으로 형을 선고받은 후, 그녀는 수련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내가 돌아왔을 때 둘째 언니의 심장병은 매우 심각했다. 나는 언니에게 “빨리 ‘전법륜’을 공부해요, 시간을 다그쳐 공부해요, 공부할 수 있는 만큼 얻어요.”라고 했다. 둘째 언니는 여전히 감히 연마하지 못했고 결국 세상을 떠났다.
연공하는 방에 사부님의 법상을 모셔놓고 나는 매일 경건하게 향을 피우고 절을 올린다. 대법 책은 잘 보관하고 읽을 때 나는 가부좌를 하고 노란 비단 천으로 대법 책을 받치고, 엄숙하고 공손하게 법 공부하는데, 대법 책은 진정한 경서다!
3. “사부님은 나의 부모이기에 나는 파룬궁을 위해 바른말을 하려 합니다.”
1999년 7월 20일, 장마두(魔頭)와 중공은 파룬따파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딸을 데리고 수련생들과 함께 성 정부에 청원하러 갔다. 8월 15일에 우리는 베이징에 가는 기차를 탔다. 베이징 교외에 도착했는데 당시에 돈이 없어 옥수수밭에서 밤을 지내 몸이 다 얼었다. 나는 당시 돈이 없어서 빌린 돈으로 법을 수호하러 베이징에 갔다.
우리는 구치소에 갇혔고 단식투쟁을 하면서 박해를 막기 위해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불법 촬영을 당했을 때, 대법제자는 이미지에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나는 두 손으로 결인(結印)하고 웃으면서 사진을 찍었다. 처음에 수련생들이 아주 많았으나 후에는 현지 수련생과 진저우(錦州) 수련생, 나 셋만 남았다. 우리는 표준말을 했는데 경찰이 아무리 애를 써도 우리 이름을 알아내지 못했다.
경찰은 “당신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 건가요?”라고 했고 나는 “우리는 다만 정부에 파룬따파가 좋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요. 우리는 환경이 있고, 대법 책이 있고, 수련할 수 있으면 돼요.”라고 했다. 경찰은 또 우리 가정상황을 물었고 나는 법을 얻게 된 경과를 말했다. 경찰은 모녀만 있고 실업 당했는데 돈을 빌려서 청원하러 베이징에 왔다는 말을 듣고 한숨을 쉬면서 “왜 이렇게 멍청해요! 당신 혼자서 하늘을 떠받칠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이 얼마나 좋은 공법이에요! 우리 사부님이면 바로 나의 부모인데 사부님께서 억울함을 당했는데 사부님과 대법을 위해 바른말을 해야 해요.”라고 말했다.
나는 경찰에게 업을 짓게 하고 싶지 않아 속으로 생각했다. ‘그에게 나쁜 것을 묻지 않고 나쁜 말을 하지 않게 해주세요.’ 그러자 경찰이 물을 때면 전화가 울렸다. 그는 나에게 창가에 쪼그리고 앉아있으라고 했다. 그는 나쁜 말을 하지 않았다. 마지막에 우리를 베이징 주재 사무소로 끌고 갔다. 내가 보니, 우리 지역의 많은 수련생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손을 흔들고 웃으며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세요!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외쳤고 경찰은 나를 보고 당황해했다. 그 후 경찰들은 우리를 구치소로 데리고 가서 불법적으로 감금하였다.
구치소에서 우리는 매일 법을 외우고 연공 했다. 우리는 경찰에게 ‘전법륜’을 요구했으나 주지 않았다. 우리가 단체로 단식을 하자 그들은 바로 줬다. 어느 날, 저녁에 내가 7시간 동안 가부좌를 했는데 마음이 아주 고요하고 편안했다.
전에 알고 지내던 한 거사의 아내가 높은 직위에 있는데 구치소에 와서 인사하고 나를 해치지 말 것을 요구했다. 경찰은 나에게 할 말이 있는지 물었고 나는 “불법적으로 감금되어 있는 우리 지역의 대법제자들을 즉시 조건 없이 석방하고 우리가 공개적으로 법 공부하고 연공 하는 것을 허락해줘요.”라고 했다. 그렇게 말하자 그들은 내가 ‘우두머리’라고 생각했다. 사실 당시 나와 수련생들의 생각은 모두 같았다. 경찰은 나를 다른 구치소로 이동시키고 ‘엄격하게 통제’했다.
구치소 안에서 한 수련생에게 족쇄를 채웠는데 바지를 갈아입을 때 아주 불편했다. 나는 그녀에게 빼라고 말했다. 그녀는 “나도 빼고 싶어요.”라며 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옆에 있던 수련생이 “경찰은 그녀가 한쪽이라도 빼내면 영원히 족쇄를 채우지 않겠다고 말했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여전히 “뺄 수 있어요.”라고 했다. 그녀가 아래로 툭툭 쳤는데 정말로 한쪽을 빼냈다. 수련생들이 경찰을 불렀는데, 경찰이 자세히 보고는 불가사의하게 생각했다. 족쇄는 뜯은 흔적이 없어서 경찰은 열쇠로 다른 족쇄를 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석방된 후에 또 컴퓨터로 진상 자료를 만드는 것을 배웠다. 나는 혼자서 컴퓨터 한 대, 프린터기 2대, CD 라이터 한 대를 사용해 ‘밍후이 주간’, 진상 자료, 진상 CD 제작을 책임졌다. 나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침식도 잊었다. 프린트 용지가 도착하면 한 아름 안아 삼륜차에 가득 채워 가져갔다.
후에 자료점은 경찰들이 파괴했고 나도 세뇌반에 납치되어 박해받았다. 건강검진 할 때 나는 사부님께 빌었다. “사부님, 여기는 제가 있을 곳이 아닙니다. 저는 집으로 가겠습니다.” 결국, 혈압이 200을 넘었고 심장도 매우 좋지 않아 세뇌반에서 나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지역 ‘610’(파룬궁을 전문적으로 박해하는 조직), 정치법률위원회는 검진하는 의사가 나의 지인이라며 성 병원에 가서 검사한 후 나를 거기에 가두고 박해하려 했다.
나는 여전히 사부님께 나를 구해달라고 빌었다. 의사는 나를 기계에 묶어놓고 초음파를 찍었으나 기계가 떨리는 바람에 결국 찍지 못했다. 의사는 “이런 일이 없었어! 기계를 모두 망가뜨렸어!”라며 소리 질렀다. 계속해서 심전도 검사를 했는데 그래프가 마구 흔들렸다. 의사는 “안돼! 그녀는 아주 위험해!”라고 했고 성 세뇌반은 나를 받아주지 않았다. 우리 지역 ‘610’은 나를 구치소로 데려가 1년 넘게 감금하고 7년 형을 선고했다.
4. “나는 서명하지 않겠어요, 일을 위해 양심을 저버릴 수 없어요.”
베이징에 가서 청원하고 돌아온 후, 딸은 중등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기다리고 있었다. 딸의 아빠는 이미 딸을 받을, 시 세무국과 시 재정국을 두 곳을 찾아 놓았는데 두 곳의 관리자가 이미 받겠다고 서명했다. 하지만 정치법률위원회를 관리하는 시장은 서명하지 않았는데 그는 내가 ‘연공을 하지 않고 베이징에 가지 않으며 결탁하지 않는다.’라는 보증서에 데 반드시 서명해야 하고, 서명하지 않으면 그도 서명하지 않겠다고 했다. 나는 그가 그것으로 나를 ‘전향’시킨 후에 가서 다른 수련생들을 ‘전향’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딱 잘라 서명하는데 거절했고 그들에게 내 딸을 연루시키지 말고 선한 일을 하라고 권고했다.
그는 계략이 성사되지 않자 또 다른 계략을 꾸며 내 딸에게 내가 수련을 하지 않는 것을 보장한다고 서명하게 했다. 내 딸은 비록 열 몇 살이지만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었기에 서명하지 않았다. 딸은 “우리 엄마가 평생을 고생하신 건 신념 때문이 아니겠어요? 그냥 좋은 사람이 되려고 그러는 거 아니겠어요? 나는 내 일을 위해, 내 밥그릇을 위해 나의 양심을 저버릴 수 없어요. 만약 내가 서명한다면 사무실에 앉아서 높은 월급을 받겠지만 나는 즐겁지 않아요!”라고 했다. 딸은 그렇게 ‘철 밥그릇’을 잃었다.
내가 누명을 썼을 때 악인들은 내 딸에게도 벌을 주려고 했다. 딸은 입을 굳게 다물고 수련생을 한 명도 배반하지 않았다. 사부님의 보호로 딸은 잡혀가지 않았다. 내가 억울한 옥살이를 한 7년 동안 딸은 외롭게 지냈고 소자본 장사를 하려고 사처에서 돈을 빌렸다. 친 고모부가 내 딸에게 돈을 보여 주고도 빌려주지 않았는데 그녀는 온갖 굴욕을 당했다.
하지만 나는 원망하고 미워하지 않았다. 그것은 각자가 자신의 위치를 잡는 것이다. 내가 돌아온 후, 옛날의 나쁜 감정을 털어버리고 인내심으로 진상을 알리고 고모부를 도와 삼퇴(중공의 당, 단, 대 조직에서 탈퇴) 시켜 목숨을 지켜줬다.
5. 20년 된 견직물 연꽃에 새 꽃술이 피다
2014년 상반기에 사부님께 향을 피워올릴 때 나는 놀랍게도 사부님께 공양하던 견직물 연꽃에 새 꽃술이 핀 것을 발견했다!
그 연꽃은 1995년에 산 것이다. 나는 거리에 나가 연꽃 두 송이를 사서 사부님께 올렸다. 그 꽃은 나일론 천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각 연꽃에는 3송이의 열린 분홍색 연꽃과 1개의 연봉, 몇 개의 녹색 잎이 있고, 연꽃에는 가늘고 노란 꽃술이 있어 정말 보기 좋았다. 나는 연꽃 두 송이를 작은 꽃병 두 개에 꽂아 위층 대청 사부님의 법상 앞에 모셨다.
1999년 7월 20일 전에 우리 집은 연공장이었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50~60명의 수련생이 대청에서 법 공부하고 연공 했다. 중공이 파룬따파를 박해한 후 나와 수련생들은 성 정부, 베이징에 파룬궁을 위해 바른말을 하러 갔다. 나는 여러 번 불법적으로 감금당해 박해를 받았고 후에 또 진상 자료를 제작했다고 불법적으로 7년 형을 선고받았다.
내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울안에는 잡초가 무성했고 집에는 먼지가 가득해서 발을 디딜 데가 없었다. 사부님 법상과 모든 대법 서적, 오디오와 비디오테이프는 모두 ‘610’ 범죄자들에게 빼앗겼고 연꽃 두 송이만 남아 있었다.
나는 또 사부님 법상을 모셔와서 여전히 대청에 모셨다. 나는 연꽃 두 송이를 깨끗이 씻어 꽃병에 꽂아 사부님의 법상 앞에 올렸다.
매년 설이며 나는 연꽃을 깨끗이 씻는다. 2014년 상반년에 나는 사부님께 향을 올릴 때 사부님 법상 왼쪽의 연꽃 두 송이가 유난히 빛나는 것을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 연꽃의 작은 봉오리 주위에 뜻밖에도 옅은 황금색의 꽃술이 몇 개 자라났다! 꽃술은 타원형이고 가루가 통통하고 알갱이가 통통했다. 연말이 되자 꽃술이 눈에 띄게 자랐다.
2015년 4월에 한 수련생이 연꽃을 사진 찍어 밍후이왕 ‘세계 파룬따파의 날’ 공모에 응모했을 때 연꽃의 꽃술이 하룻밤 사이에 또 자랐다. 만물에는 영이 있다고, 작은 연꽃을 20년 동안 사부님께 공양했더니 새 꽃술이 나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드문 일이라고 수련생들은 말한다.
연꽃은 내가 법을 얻고 지키며, 재난을 겪고 다시 태어나는 것을 직접 목격했고, 세상 사람들이 점점 깨어나 중공의 당, 단, 대에서 탈퇴해 자신을 구한 사람들의 수가 거의 2억 명(2015년 때)에 달한 것을 직접 목격했다. 세계 파룬따파의 날이 다가오자 연꽃이 꽃술을 피웠는데 이것은 정말 하늘이 내린 상서로운 일이다!
현재 나는 매일 연공을 마치고 어린 외손녀를 학교에 데려다주며 거리에 나가 진상을 알리고 삼퇴를 권한다. 진상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말한다. “파룬궁에 감사드립니다!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당신에게 감사드립니다!”
사부님께서는 줄곧 나를 보호해주고 계신다. 20여 년 된 낡은 연꽃에서 꽃술이 자라 나왔는데 이것은 사부님의 자비로운 격려라고 생각한다.
주:
[1]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
(밍후이왕 제24회 세계 파룬따파의 날 응모작)
원문발표: 2023년 5월 1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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