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산둥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1997년에 법을 얻었다. 다년간의 수련 과정을 돌이켜보니 정말 부끄럽기 그지없다. 지금까지 비틀거리면서 걸어왔고 자신이 낭비한 시간과 착실히 수련하지 않은 시간을 빼면 수련한 시간이 가련할 정도로 적다. 원인은 대법에 대해 정확한 인식이 없었고 대법을 인생에서의 정신적 지주로 간주한 것이다. 사람 마음이 중하고 자아가 강했으며 명리정(名利情)에 얽매였다. 수련 중에서 제일 중요한 체득을 한마디로 형용한다면 바로 ‘자신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이다.
나의 형은 80년대 대학생이며 같은 해 누나가 또 현지 중등 전문대학에 합격해 집에 겹경사가 찾아왔다. 소식이 빠르게 주변에 퍼져서 많은 사람이 우리 집에 와서 축하했다. 주위의 이웃이 어머니를 향해 “아주머닌 복이 많으시네요, 한 해에 두 명이나 시험에 붙었어요”라고 말하며 부러워했다. 그해에 나는 아버지의 허리가 곧게 펴진 것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우리 형제에 비해 한참 차이가 난다. 선생님을 화나게 하고 어중이떠중이들과 휩쓸리며 어릴 때부터 싸우고 말썽을 피워서 가족들을 골치 아프게 했다. 성격이 성패를 좌우한다는 게 형님의 평가였다. 내 성격이 장래에 실패하는 사람으로 정해졌다는 뜻이다. 나는 형이 뭐라 하든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나는 원래 자유분방하고 구속받지 않으며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다. 내가 결정한 일은 여덟 마리의 소도 끌어당길 수 없다. 남쪽벽에 몇 번 부딪치지 않으면 이번 생에 오지 않은 것과 같다. 나는 집에서 막내인데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는 외에는 아무런 일도 상관하지 않았다. 나는 자유로운 생활을 즐기며 통제받는 것을 싫어하고 돈을 벌면 먹고 마시고, 저축은 아예 생각지도 않았으며 전통적인 가족 관념도 없다. 나는 오랫동안 떠돌아다니며 놀다가 지쳐서야 가정을 꾸려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하던 해에 나는 서른세 살이었고 결혼 비용은 모두 형님이 냈다.
누나와 조카가 동북에서 갓 돌아왔을 때 집을 구하기 전에 먼저 나와 함께 살았다. 누나는 항상 나에게 “너는 이 집을 여관이라고 생각하는구나”라고 했다. 나는 한 달에 집에서 10번도 밥을 먹지 않았다. 그때 나는 회사에서 사무실과 직원 식당을 관리했으며 온종일 접대가 끊이지 않았다. 큰일은 상사를 동반했고 상사가 없는 날이면 직장 동료나 고객이 초청하면 항상 약속을 잡고 모든 행사에 참석했다. 한밤중에 곤드레만드레 취해서 집에 돌아오곤 했는데 집에 들어가면 바로 쓰러져 잤다. 가끔 술에 취해 토하면 누나가 청소를 다 해주는데 나는 취해서 몰랐다. 이튿날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전날의 생활을 반복했다. 정말 보는 사람이 화가 날 정도였다.
1. 법을 얻고 하사처럼 수련
1997년, 법을 얻은 후 내가 넘은 첫 번째 관문, 가장 어려운 관문이 금연이라는 것을 많은 사람은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나는 수련하자마자 금연했다. 또 어떤 사람은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금연했다고 하는데 7살부터 담배를 피우고 농작물과 나뭇잎에 말아서 30년 이상 담배를 피운 나에게는 그야말로 힘든 일이었다.
출근한 후 하루에 한, 두 갑 피우는 것은 정상이고 세 갑까지 피우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그때 주변 친구들은 내가 담배 중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 친구가 “네가 금연하면 매일 밥을 사줄게”라고 말하고 다른 한 친구는 내가 금연하면 밥을 먹지 않겠다고 말했다. 비록 농담이지만 그들은 내가 담배 중독이 심한 것을 알고 있으며 내가 금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완전히 금연하자 그들은 자신이 한 말을 지키지 않았지만, 그들은 나의 결심을 보았고 대법의 힘이 사람을 고칠 수 있는 것을 보았다.
당시 금연하려 할 때 아이가 어려서 아내와 아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방이 작아 우리 세 식구는 큰 침대에 비좁게 있었다. 특히 한밤중이 되면 목에서 ‘쉬쉬’하는 소리가 나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고 아내와 아이가 잠자는 것에 영향을 미쳤다. 방법이 없어 아내에게 창문을 조금 열어달라고 했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더는 소리가 나지 않아야 잠을 잘 수 있었다. 여름은 괜찮은데 겨울에 창문을 열면 집안에 한기가 들어와 아내와 아이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도 담배를 더는 피우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단시간에 끊을 수 없었다. 가끔 담배 중독이 올라오면 한 개비 피우면 그 맛이 아니라 끄고 다시 한 개비 피우면 또 그 맛이 아니라 또 끄면서 속으로 ‘이 담배가 가짜가 아닌가? 왜 원래 맛이 안 나지’라고 생각했다. 그때 사부님께서 나를 상관하시고 피우지 말라고 하신 것을 알지 못했다. 아예 남은 담배를 꽈배기처럼 비틀어 버렸다. 그러나 담배 중독이 올라오면 다시 아래로 내려가 한 갑을 샀다. 이렇게 담배를 끊고 피우는데 여러 번 반복하다가 몇 년이 걸려서야 담배를 끊었다.
법을 얻은 초기, 뜻밖의 태풍 사건으로 나의 사무실 주임이 면직당해 마음속으로 화가 치밀었다. 나는 일에만 전념하고 겨울 축제에 현수막을 걸다가 얼어서 손가락 상처에 뼈가 보일 지경인데 당신들은 나를 이렇게 대하는가. 그리하여 온종일 술을 마시며 기분 전환하고 회사 일은 일절 묻지 않았다. 마침 그때 한 동창이 나에게 외지로 가자고 해서 동의했다. 나는 홧김에 사직서를 쓰고 직장을 떠났다. 떠날 때 배낭 속에 유일한 책인 ‘전법륜(轉法輪)’을 가지고 갔다. 그때 이 일은 첫 번째로 명예와 이익에 대한 추구를 포기하라는 것이며 두 번째는 온종일 접대하지 말고 더 많은 시간에 법공부를 하라는 것이었다.
2. 기술을 탐구하며 남을 위하는 마음을 수련
2004년경, 외지에서 살던 집을 개조하려고 먼저 집을 임대해야 했다. 수련생 L(동창)은 광고 설계를 배우기 위해 내가 있는 도시에 왔으며 우리 집에 있게 되었다. 그는 내가 온종일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 걱정과 초조함에 여러 번 나에게 수련을 하라고 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당시 기술을 아는 수련생이 적었으며 박해를 폭로하는 진상 자료 수요량이 많았다. 집에서 매달 생활비를 조금 주는데 그 돈은 기본적인 생활도 보장할 수 없어 수중에 돈이 없었다. 그때 나는 월급이 매우 많아서 의논을 거쳐 거의 5천 위안을 써서 데스크톱 컴퓨터 한 대를 샀고 또 초고속 인터넷을 설치하였다. 이렇게 하면 그가 이 컴퓨터로 기술을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겸사겸사 일도 좀 할 수 있었고 이렇게 작은 꽃이 피어났다. 당시 고향에서 ‘풍우천지행’ CD가 필요했다. 컴퓨터에 달린 CD 라이터 한 대는 전혀 작동하지 않았고 CD를 구운 후 또 검사해야 해서 수요량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리하여 또 CD 라이터 두 대를 사 컴퓨터에 연계했다. 세 대를 온 밤 돌렸고 밤에 CD를 수십 장 구울 수 있어 능률이 크게 향상되었다. 당시에는 CD 라벨 용지가 없어 우리는 마커펜을 가지고 손으로 썼다. CD를 다 구우면 그는 집에 가 주변의 수련생에게 갖다주었다. 그는 이 컴퓨터로 적지 않은 컴퓨터 지식을 배웠으며 컴퓨터 전체가 늘 블루스크린이나 검은색 화면으로 표시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시스템을 재설치하는 방법을 몰랐다. 그는 GHOST(원클릭 복원), CD 굽기, 방화벽 및 바이러스 백신 소프트웨어 등을 연구했고, 서서히 우리 지역의 컴퓨터 전문가가 되어 지역 수련생의 많은 문제를 해결했다.
그때 우리는 인터넷 봉쇄를 돌파해 밍후이왕에 접속할 수 있어 빠르게 사부님께서 발표한 신경문을 볼 수 있었고 사악이 대법제자를 박해한 실지 진상을 알 수 있었고, 또 CD를 굽고 인쇄에 필요한 자료와 관련 기술을 다운로드하여 학습할 수 있었다. 사부님께서 산속에 조용히 앉아 계신 사진을 보고 나는 마음이 복잡해 사존을 한 번 더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어 또 자책감이 들었다. ‘제자는 수련인 같지 않습니다. 사존을 볼 면목이 없습니다.’ 나는 내가 철인지 강철인지 알 수는 없지만, 누구도 벽을 지탱하지 못하는 진흙 덩어리가 되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때 마음이 매우 고통스러웠다. 나는 자신이 많은 굽은 길을 걸었고 많은 시간 허송세월한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사부님께서는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2011년 뇌혈전에 걸렸지만, 사부님께서는 생명을 구해주셨다. 대법으로 되돌아온 후 내가 생각한 것은 어떻게 해야 더 잘할 수 있으며 과실을 보완하고 정진하여 사부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는지였다.
그리하여 나는 수련생에게서 수리 기술을 배워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어도 수련생을 위해 일했다. 현지에 기종이 많고 또 낡아서 수리하는 난이도가 큰 상황이 있었다. 우리는 과감히 캐논 4880과 4980 두 개의 내구형 기기를 남기고 그 외의 기기는 전부 사용을 중지해 수리의 어려움을 줄였다. 동시에 수련생의 자료 수요량과 형세의 변화에 근거해 적절한 시기에 천지행 논단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기종에 유익한 것을 개발해 보충했다. 때로는 수련생과 함께 기술을 연구했다. 우리는 협조해 휴대가 간편하고 실용적인 잉크 추출 도구를 개발했다. 여러 번의 실험 끝에 천지행 논단에 보급했으며 효과가 매우 좋아 천지행 논단을 이용하는 많은 수련자에게 도움이 되게 했다. 또 일상에서 요약한 작은 경험도 논단에서 수련생들과 공유해 공동으로 기술을 만들었다.
전염병 발생 기간 나는 두 지역을 왕복해야 했다. A 지역에 있는 수련생은 흩어져 있고 어떤 수련생의 집은 편도로 전동차를 타고 한 시간 가야 했지만, 나는 그런 것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기계의 정상적인 작동을 보장하는 것이 내 책임이다. 전동차 타고 가는 내내 법을 외웠고 아무것도 지체하지 않았다. “고생을 낙으로 삼노라”[1] 수련생을 위해 좋은 조력자가 되는 일에서 나는 자아를 내려놓는 즐거움을 느꼈고 한 수련인이 진정으로 타인을 위하는 의미를 체험했다.
한 번은 집으로 가다가 코로나 때문에 길목이 갑자기 봉쇄되었다. 집에 못 가면 어떡하지? 마침 길가에서 채소를 사는 한 누님을 만나 길을 물었더니, 그녀는 길을 돌아서 채소 사러 나왔는데 나를 데리고 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사부님의 도움으로 또 다른 길이 생겼다. 후에 나는 또 산길을 하나 더 찾아 통행할 수 있었다. 어쨌든 신사신법(信師信法)하면 지혜가 많아지고 길이 많아졌으며 길 봉쇄도 나를 어렵게 하지는 못했다.
내가 두 도시를 왕복하면 한 번에 300리 남짓하다. 내가 현지로 돌아갈 때까지 이 전동차는 나와 함께 만 리의 길을 달렸다. 한 번은 집에 가는 길에 친구의 가게를 지나다가 마침 그에게 볼일이 있었다. 그는 내가 전동차를 타고 온 것을 보고 좀 궁금해서 먼저 와서 앞을 보고 뒤를 보더니 이 전동차가 뭐가 특별한지 생각하다가 어떻게 이렇게 잘 달릴 수 있지? 하고 말하더니 또 “이 전동차에 뭘 달았나요?”라고 했다. 나는 “내 전통차는 신기(神器)에요. 가지(加持)할 수 있어요.”라고 했다.
일을 해도 수련을 잊으면 안 된다. 기술 일을 하는 동시에 주변의 수련생이 나에게 법공부를 많이 하고 연공을 잘하며 발정념을 많이 하라고 일깨워 주었다. 수련생의 말에 나는 이 몇 년간 전법륜(轉法輪)을 거의 세 번 외웠고 또 ‘홍음5’, ‘홍음6’을 외웠으며 법을 한 번 베꼈다. 신경문이 나오면 나는 외운다. 사부님의 신경문 ‘왜 인류가 존재하게 되었는가’가 발표된 후 4일 만에 외웠다.
3. 자신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예전에 나는 우리 집안일에 무관심했다. 부모님께 효도하는 일은 나와 무관한 것 같았다. 위로 두 누나와 형이 있어 그것은 그들의 일이었고 난 내 세상만 책임지고 살았다. 수련 후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가족에게 진상을 말하고 자료를 주었는데 그들은 보지도 않고 받지도 않았으며 대부분 냉담하거나 무시했다. 내가 진상을 알리는 방식을 요약해 보니 말속에, 관념에 모두 당문화의 흔적이 있었다. 예를 들면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주입하고, 독선적으로 강요했으며, 듣지 않으면 무시하거나 조급해하고 또 말참견도 못 하게 했다. 그 효과는 생각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나는 사부님께서 먼저 좋은 사람이 되라고 하셨는데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하고 생각했다. 가족들이 자주 하는 말도 내 귀에 맴돌았다. “네 일이 제일 중요하니”, “말만 하면 급해”, “가족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아”…… 그래, 내가 박해당한 적이 있었는데 가족도 큰 영향을 받아 그들의 초기 대법에 대한 아름다운 인상까지 바꾸어 놓았다. 자아로 형성된 사고 관념이 우리 사이의 교류를 방해하고 그들이 진상을 듣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 문제는 자아에 있다. 그리고 사부님의 신 우주가 원하는 건 타인을 위하는 생명이다. 자아와 위타(爲他)는 반대이며 자아를 내려놓지 않고 어떻게 타인을 위할 수 있겠는가?
생각하다가 나는 수련 중에서 한 가지 중요한 결정을 했다. 자신을 바꾸자. 먼저 타인을 위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그때 형과 누나는 모두 외지에 있었다. 나는 어머니 집에 들어가 함께 살았다. 어머니와 함께 물건을 구입하고 힘든 일을 하고 집을 청소했다. 어머니는 폐품을 팔았는데 가장 큰 아쉬움은 월급이 없다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어머니는 ‘57’년 노동자이고 퇴직 대우 정책이 있어도 모르며 아무도 처리해주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광산에서 주는 약간의 위로금에만 의지했다. 어머니는 폐품을 주워 팔았고 어머니의 말로는 자신의 노동으로 바꾸어 온 것이다. 나는 집에 있으면 폐품을 팔 때마다 같이 갔다. 큰누나가 갓 돌아왔을 때 매우 어려웠는데 그때 나는 결혼도 하지 않았고 외지에 일하러 갔었다. 나는 조카가 대학시험을 볼 때 대학 지원 절차를 도와주었고 대학원 시험을 볼 때 누나와 함께 대학원이 있는 도시로 갔다. 형님이 바쁠 때 나는 형을 도와 문서를 정리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 몇 년의 노력 끝에 마침내 가족과의 거리를 좁혔고 그들은 나의 변화를 보고 기뻐했으며 다시 그들과 진상을 이야기하면 쉽게 받아들였다.
원문발표: 2023년 5월 1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3/5/11/458237.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3/5/11/45823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