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저는 1997년 8월에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 수련을 시작했습니다. 수련서 ‘전법륜(轉法輪)’을 본 후 책이 정말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욕이 넘쳐나는 사회에서 아직도 누군가 이런 이치를 이야기하고 있고 사람 됨됨이를 가르치고 있으니 파룬궁은 정말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수련에 들어서자 제 인생에서 후회 없는 선택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전법륜’을 보니 사람이 세상에 온 진정한 목적은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난세에서 자신을 수련하고 좋은 사람이 되며 더욱 좋은 사람이 되어 반본귀진(返本歸真)하는 것으로, 신계(神界)의 요구에 도달해 자신의 천국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제 인생관, 세계관은 완전히 바뀌었고 성격, 처세방식이 모두 함께 상응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1. 더는 회삿돈을 불법적으로 쓰지 않다
저는 회계일을 합니다. 원래 저는 회사 사장, 과장, 사무실 주임이나 사무원이 회삿돈을 헤프게 쓰고 사익을 챙기는 것을 보고 저도 그럴 기회를 노렸습니다. 예를 들어 어떨 때는 외출해 사적인 일을 보고 택시를 타면 회사에 다른 사람이 청구할 때 제 것도 함께 청구했습니다. 또 직원 몇 사람이 함께 밥을 먹으러 갈 때 저는 식당에 영수증을 끊어달라고 해서 돌아와 주임에게 돈을 청구했습니다. 또 사무용품을 살 때 개인용품도 함께 섞어서 샀는데 그때는 매우 정상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법 수련 이후, 실과 득의 관계를 깨닫고 자신을 엄격히 요구했습니다. 저는 시시각각 대법의 요구에 따라 하고 더는 공익을 해치는 일을 하지 않았으며 회사의 종이 한 장, 연필심 하나도 갖지 않았습니다.
2. 높은 자태로 집을 양보하고 돌려주다
수련 후, 회사에서 몇 차례 집을 나눠줄 때 저는 모두 갖지 않았습니다. 마음속으로 자신은 수련인으로서 다른 사람과 다투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좋은 집은 다른 사람에게 양보했습니다. 이제 저보다 젊은 사람들의 집도 모두 우리집보다 좋습니다. 저는 아직 구식 주택에 살고 있으며 총면적은 70여 제곱미터입니다.
저는 예전에 집 세 채가 있었습니다. 한 채는 제 이전 직장의 것이고, 다른 한 채는 제 남편 직장의 것이며, 또 한 채는 이후 직장의 것이었습니다. 회사에서 기존 직장의 집을 돌려달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수련 후 자진해 돌려줬습니다.
남편 직장의 집은 아파트형이었습니다. 그 집을 개조하면서 제 회사의 증명서를 제출하면 집을 돌려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이 다 이렇게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진선인(真·善·忍)’을 수련하는 사람이며 반드시 수련인의 기준에 따라 자신을 요구해야 하고 거짓을 꾸며서는 안 됐습니다. 남편과 상의한 후 집을 돌려줬습니다. 이사할 때 많은 사람이 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사해 들어오는데 당신들만 나가네요”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 제가 여전히 70여 제곱미터의 작은 집에 사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저는 억울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제 마음속에는 법이 있고 법의 요구에 따라 일을 하면 마음이 든든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관계가 좋은 한 동료가 “멀쩡한 집을 돌려주다니 경지가 참 높으시네요!”라고 비꼬기도 했습니다. 저는 “저는 대법을 수련하는 사람이라서 살 집만 있으면 돼요”라고 말했습니다.
회사에서 기숙사 건물을 새로지었는데 직원들은 가장 작은 집도 방 3개 거실 1개로 100제곱미터이고, 거실이 매우 크며 통풍도 잘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기숙사를 짓는 기초공사 사무실 주임도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도 이 주택의 등급이 매우 높다고 했습니다. 그때 직원들은 모두 그 주임이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기숙사 건물은 정말 좋았습니다! 기초공사 사무실은 시공할 때 부정한 수단으로 이득을 취할 수 있는 곳으로 건축회사 시공팀은 일을 따내기 위해 앞다투어 그 주임에게 선물과 촌지를 보내려 했습니다. 당시 저는 그 주임과 자주 수련 체득을 교류했고 그는 매사 ‘진선인(真·善·忍)’의 기준에 따라 자신을 요구한다며, 오직 상대방에게 계약서에 따라 일을 잘하도록 요구할 뿐, 다른 요구를 하거나 선물 등을 받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기숙사는 잘 지어졌지만 우리 두 사람은 분양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3. 사부님께서 내게 온전한 가정을 주시다
우리 가정도 비교적 특별합니다. 저는 1978년 대학 입시가 회복된 후 농촌에서 대학에 합격한 사람입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농촌에서 약혼했고 제가 대학에 들어간 후에도 남자친구는 계속 농사를 지었습니다. 제가 졸업하자 직장에서 그에게 임시직 일자리를 줬고 우리는 결혼했습니다.
나중에 다른 집 남자들은 모두 번듯한 직업을 가진 것을 보고 질투심이 나왔습니다. 서서히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제가 여러 면에서 모두 남편보다 뛰어나 남편과 같이 사는 게 매우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흘이 멀다고 다퉜고 몇 번이나 이혼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아이가 어려서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에 참고 지냈습니다.
저는 파룬따파를 배운 후부터 부부는 인연으로 맺어진 관계로 마땅히 남편을 잘 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관념을 바꾸어 남편을 대하는 태도를 완전히 바꾸었는데 이는 파탄에 이른 가정을 화목하고 원만하게 만들었습니다. 지금 이 일을 말하면 간단하지만, 그때는 정말 뼈를 깎는 수련 과정을 거쳤습니다.
남편은 제 변화를 보고 대법이 정말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본인도 수련에 들어섰습니다. 나중에 우리는 또 연공장을 남편 직장 입구에 만들었습니다. 남편은 매일 아침 일찍 녹음기를 들고 연공장에 갑니다. 밤에는 수련생들을 창고로 데려가 함께 법공부를 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했습니다. 나중에 대법이 불법적으로 탄압받자 남편도 조사정법(助師正法)에 뛰어들어 묵묵히 대법을 실증하는 많은 일을 했으며, 수련생들을 위해 매우 많은 자금을 절약해줬습니다.
4. 재혼한 시아버지를 선하게 대하다
남편은 원래 부모와 누나가 있는 원만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누나는 도시에서 일하고 시어머니는 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시아버지는 좀 이기적인 분이어서 자녀들을 전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시아버지는 한때 장사를 하면서 돈을 좀 버셨습니다. 그때 저는 출근하면서 매달 몇십 위안(약 몇천 원)을 벌었고 남편은 일자리가 없었습니다. 저는 혼자 일도 해야 하고 아이도 돌봐야 했는데 아이가 9개월이 되자 유치원에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이가 네 살이 됐을 때 저는 대학 입시를 봐야 해서 아이를 월요일 아침부터 토요일 저녁까지 탁아소에 맡겼고 어떨 때는 밤에도 맡겼습니다. 남편의 호적을 농민 호적에서 도시민 호적으로 바꾸는 일, 구직과 일자리 배치를 모두 저 혼자서 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일을 했지만 시아버지는 듣지도 묻지도 않으셨고 더욱이 돈 한 푼 주신 적이 없었습니다.
시아버지는 몇 년이 지나도록 아들과 딸에게 안부 한번 묻지 않고 스무 살이나 어린 여성과 재혼했습니다. 게다가 제 아이보다도 어린 아이를 둘이나 낳았습니다. 저는 그때 아직 대법 수련을 하지 않았기에 우리와 상의도 하지 않고 재혼한 아버지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시아버지는 또 재혼하면서 우리가 결혼할 때 사용하던 가구, 이불을 전부 가져가 사용하셨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매우 화가 나서 그 후부터 더는 시아버지댁에 가지 않았습니다. 저는 늘 화를 내다가 갑상선기능항진증에 걸렸습니다.
한번은 시아버지가 병이 나서 시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원장은 시아버지의 소꿉친구였습니다. 원장은 시아버지의 이런 일을 알고 남편을 위해 불평하면서 시아버지에게 우리에게 집 한 채 준 셈 치고 2만 위안(약 370만 원)을 주라고 했습니다. 시아버지는 그 자리에서는 승낙하셨지만 세상을 떠날 때까지 우리에게 한 푼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파룬따파를 수련한 후부터 사부님 말씀에 따라 자신을 가늠해보니 자신이 행한 것이 틀렸고 대법 요구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면서 점차 시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내려놨습니다. 어느 해 시아버지는 도시에 물건을 사러 왔다가 우리 큰고모 댁에 묵었습니다. 저는 알고 난 후 제 딸을 데리고 맛있는 음식을 많이 사 들고 시아버지를 뵈러 갔습니다. 가는 길에서 딸은 “엄마, 저는 정말 엄마가 할아버지를 보러 가실 줄 몰랐어요. 게다가 할아버지에게 이렇게 많은 맛있는 것을 사드리다니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엄마가 파룬따파를 수련하게 됐잖니, 더는 예전처럼 그렇게 해서는 안 돼”라고 말했습니다.
큰고모 댁에 도착하자 시아버지는 몹시 놀랐습니다. 제가 올 줄은 몰랐던 것입니다. 저는 파룬따파를 수련하게 됐고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시아버지는 매우 미안해하셨습니다. 큰고모는 얼른 저를 가리키며 말씀하셨습니다. “쟤가 파룬궁을 수련하고 바뀌었네, 앞으로 누구도 내게 (공산당이 말한 것처럼) 파룬궁이 나쁘다고 말해선 안 돼!”
우리는 시간이 나면 시아버지를 뵈러 갔고 돌아가실 때까지 매년 용돈을 드렸습니다. 장례식 날 많은 사람이 왔는데 분명 우리 집안이 부동산 때문에 다툴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또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은 큰고모에게 시아버지가 우리에게 언급한 2만 위안을 줬냐고 물었습니다. 큰고모는 “주기는 뭘 줘요, 안 줬어요!”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부동산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고향 사람들이 장례식에 얼마를 냈는지도 알아보지 않았고 매우 평온하게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래서 시아버지의 부동산은 매우 자연스럽게 새 아내의 자녀 것이 됐습니다. 이후 매년 청명절마다 우리는 성묘하며 또 그들에게 선물을 사다 줬습니다.
5. 아픈 큰오빠를 사심 없이 돌보다
우리 집안도 대가족이며 형제자매가 7명이고 저는 여섯째입니다. 큰언니와 큰오빠는 어머니가 재가할 때 데려왔지만 우리 형제자매와 관계가 매우 좋습니다. 저는 커서야 큰언니와 큰오빠의 아버지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집안이 가난하고 또 집도 없어서 큰오빠는 결혼하지 못했습니다. 처음에 큰오빠는 작은오빠와 함께 살다가 나중에는 갈등을 빚었으며, 큰오빠는 또 둘째 오빠와 함께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둘째 오빠는 큰오빠에게 ‘5대 생활보장 대상자’를 신청해줬습니다.
4년 전, 큰오빠는 몸이 안 좋아져 우리 이곳 병원에 와서 검사받은 결과 후두암에 걸렸음을 알았습니다. 큰오빠는 퇴원한 후 우리 이곳에 머무르며 미안해했지만 고향 집에 돌아가면 또 둘째 오빠와 잘 못지낼까 봐 걱정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큰오빠에게 “오빠, 우리집에 살아요. 또 오빠를 싫어할 사람이 없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매일 오빠에게 사부님 설법을 듣게 했고 파룬따파의 음악을 듣게 했으며 연공을 가르쳤습니다. 큰오빠의 건강은 뚜렷하게 좋아져 살도 좀 올랐습니다. 하지만 곧 80대가 되다 보니 도시 생활이 적응되지 않아 고향으로 한사코 돌아가려 했습니다. 저는 오빠를 여동생 집에 데려다줬습니다. 나중에 몸이 갈수록 안 좋아져 다시 우리집으로 데려와 매일 정성껏 돌보면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먹고 싶은 것을 만들어줬습니다.
큰오빠는 우리집에 올 때 2천 위안(약 37만 원)을 가져왔는데 세상을 떠난 후 저는 그 돈을 그대로 둘째 오빠 집에 갖다줬고 큰오빠의 몇만 위안(몇백만 원)의 저축과 부동산에 대해서도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5대 생활보장 대상자가 되면 병이 나면 마을에서 사람을 찾아 돌봐줘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찾자니 마음이 놓이지 않아 마을에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큰오빠를 돌본 일은 주변에도 소문이 났습니다. 한번은 고향에서 초등학교 동창을 만났는데 그 친구도 외지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던 길이었습니다. 친구는 여러 사람에게서 제가 큰오빠를 돌본 일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그건 당연한 일이야. 큰오빠는 우리집을 위해 가장 많이 애썼고 그러느라 결혼도 못 했는데 내가 마땅히 잘 돌봐야지. 하지만 만약 파룬궁을 수련하지 않았다면 나도 그렇게 못했을 거야. 큰오빠는 남동생과 조카들도 있는데 아무래도 시집간 여동생이 돌볼 차례는 아니니까.”
마을 사람들은 모두 제가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사실을 알고 수련 때문에 일자리를 잃은 사실도 압니다. 이번에 저는 사람들에게 수련인의 이타적인 면모와 개인적인 득실을 따지지 않는 우수한 품성을 증명했습니다.
저는 대법을 수련한 지 20여 년이 됐고 비바람을 겪으며 지나왔습니다. 특히 1999년 ‘7.20’ 이후로 파룬따파가 장쩌민과 중공(중국공산당)의 박해를 받고 대법제자가 잔혹한 박해를 받으면서 저도 공직에서 불법적으로 해고됐고, 불법적인 강제노동과 징역형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파룬따파는 제 마음속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중공이 저를 불공정하게 대우했지만 대법에 대한 확고한 마음은 동요한 적이 없었습니다. 파룬따파는 제게 좋은 사람, 더욱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입니다. 파룬따파 수련은 제 한평생에 있어서 후회 없는 선택입니다. 저는 악이 선을 이기지 못하고, 어둠은 결국 지나가며 이제 서광이 밝아오고 있다는 것을 확고히 믿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진정으로 파룬따파를 알아보고 진실을 알게 되어 대법으로부터 모두 혜택을 받기 바랍니다.
원문발표: 2023년 3월 2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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