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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칭화대학 박사과정 수련생, 장쩌민의 가장 무서운 유산 폭로

[밍후이왕] (밍후이 기자 잉쯔 취재 보도) “장쩌민의 죽음은 중국 인민이 자신의 양심에 따라 파룬궁 학살이라는 악독한 운동에 가담하는 것을 중단하게 할 것입니다.”

2022년 12월 14일, 미국 필라델피아의 중국계 엔지니어 황쿠이가 필라델피아에서 발행 부수가 가장 많은 영어신문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The Philadelphia Inquirer)에 기고한 ‘장쩌민의 유산’이란 글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말했다.

황쿠이가 2008년 미국 오하이오주립대에서 공부할 때의 사진 (황쿠이 제공)

칭화대학 박사과정 학생이었던 황쿠이에게 중공(중국공산당)은 그가 파룬궁을 수련하고 ‘진선인(真·善·忍)’ 신앙을 견지한다는 이유로 5년간이나 불법으로 감금했고, 그 기간에 갖가지 고문과 박해를 받았다. 그는 중공 전 서기 장쩌민이 남긴 가장 무서운 유산은 ‘1999년 7월 집단 학살이라는 박해로 파룬궁을 제거하라고 명령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

2000년 12월, 칭화대학 박사과정 학생이자, 중공 박해를 받은 수천수만 파룬궁 수련생 중 한 명이었던 황쿠이는 중공에 납치되었고 파룬궁 수련을 포기하지 않아 이후 5년 동안 불법으로 감금됐다. 그 사이 그는 매일 16시간의 노역을 했고 또한 고압 전기봉에 시달려 연속 30일간 잠을 자지 못했으며 핍박으로 꼬빡 3일간을 쪼그리고 앉았다.

박해가 일어나기 전

황쿠이는 허난(河南)성 신양(信陽)지역의 평범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부터 열심히 공부하여 성적이 우수했다. 1994년에 그는 뛰어난 성적으로 중국 최고 학부인 칭화대학에 입학했다. 그 후 그는 반 전체 1위 학업성적으로 반장과 정밀기기 학과의 과학협회 부반장으로 추천됐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황쿠이는 인체의 특이공능, 우주의 진리, 인생의 궁극적 목적과 초자연적 현상 등에 대해 호기심과 사색으로 가득 차 있었다. 1998년 초 어느 날, 그는 학우로부터 ‘전법륜 [제2권](轉法輪卷二)’ 한 권을 받았으며, 그는 이때부터 수련할 법을 얻었다. 25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 법을 얻은 일을 회상하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는 말했다. “파룬궁 책에서 말하는 법리는 아주 높고 깊으며 인간 세상, 기나긴 역사의 수수께끼를 모두 똑똑히 설명한다.”

당시 20대 초반의 황쿠이는 파룬따파(法輪大法)가 바로 자신이 줄곧 찾고 있던 진법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법을 얻은 후, 그는 매일 여가에 리훙쯔(李洪志) 선생의 저작을 반복해서 읽었다. 그리고 칭화대 10구내식당 변두리 작은 숲에 가서 아침 단체 연공에 참가했다.

당시 파룬궁이 전국적으로 신속하게 전파된 것과 때를 맞춰 칭화대학 교정 내에도 10여 개 파룬궁 연공장이 있었다. 각 연공장에서 많을 때 백여 명이 단체로 연공하여 매우 장관이었다. 사람이 많을 때는 한 연공장에서 아침, 오후, 초저녁, 늦저녁, 네 개의 연공 시간으로 늘렸다.

1998년 황쿠이와 다른 학생들은 베이징 모 대학교에서 홍법 연공을 했다. (황쿠이 제공)

수련 후, 많은 수련생은 더는 늦잠을 자거나, 게임을 하지 않았고, 신체가 건강하고, 도덕이 향상되었으며, 많은 수련생이 끊임없이 수련 대열에 합류했다. 수련생들은 자유롭게 수련하고 교류할 수 있었는데, 그 시간이 황쿠이가 가장 행복했던 때였다.

‘진선인(真·善·忍)’ 수련에 따라 황쿠이는 심신을 승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지혜를 넓혔다. 본과 졸업 전에 그는 추천받아 박사과정을 공부할 기회를 얻었고 1999년 9월에 칭화대학의 박사과정 학생이 되었다.

1999년, 황쿠이는 베이징 칭화대학 우수 졸업생 칭호를 받았다. (황쿠이 제공)

장쩌민의 가장 무서운 유산은 집단 학살이라는 파룬궁 박해 

황쿠이는 ‘장쩌민의 유산’이라는 글에서 “중국공산당 전 수괴 장쩌민이 남긴 가장 무서운 유산은 1999년 7월에 집단 학살이라는 박해로 파룬궁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라고 말했다.

1999년 7월 20일, 황쿠이는 밍후이왕에서 전국 각 성의 자원 보도원들이 모두 동시에 체포된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 이튿날, 그가 다른 칭화대학 학우들과 함께 시단(西單) 부근의 민원실에 청원하러 갔을 때, 무장경찰이 파룬궁 수련생들을 거리에서 잡아끌어 강제로 미리 대기시킨 버스에 끌어다 넣는 것을 보았다. 버스는 많은 수련생을 베이징 교외의 스징산(石景山) 체육관과 펑타이(豐台) 체육관으로 끌고 갔다. 황쿠이는 일부 파룬궁 수련생들이 반복적으로 구타당하고 물대포를 맞는 것을 직접 보았고, 어떤 칭화대 학생은 맞아서 티셔츠가 모두 갈기갈기 찢어졌다.

황쿠이는 당시 베이징의 기온이 갑자기 높아져 온도가 섭씨 50여 도에 달해 마치 인간 연옥(煉獄) 같았다고 기억했다. 그 후 황쿠이는 여러 차례 국무원 민원실에 청원하러 갔고, 톈안먼광장에 가서 플래카드를 걸었으며 또 전전하며 서방 언론과 인터뷰도 했는데, 이로 인해 잡혀서 구타당하고 휴학 처분을 받았다.

1999년 7월 22일 오후 3시, 칭화대학 사무직원은 모든 사람에게 텔레비전을 보라고 했다. 중앙텔레비전방송국(CCTV)은 처음으로 중공 중앙의 결정을 방송했는데, 이로써 중공의 파룬궁에 대한 공개적 탄압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하룻밤 사이에 중국의 모든 방송국, 텔레비전 방송국, 신문이 돌연 천지를 뒤덮을 듯이 총력을 다해 파룬궁을 비방했다. 장쩌민은 파룬궁에 대해 ‘명예 실추, 경제적 파탄, 육체적 소멸’이라는 학살 정책을 지령했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6.10’ 사무실까지 23년간 전문적으로 파룬궁 박해를 멈추지 않았다.

장쩌민 지령하에 군대는 무장 경찰병원과 결탁해 파룬궁 수련생들의 장기를 대량으로 적출하고 ‘조직 간에 하나로 연결된 대규모 협력’ 산업을 형성하여 ‘이 행성에서 전례 없는 죄악’을 저질렀다.

1999년 10월 25일, 베이징은 기온이 급강하고 찬바람이 매서웠는데 당시 중공 수괴 장쩌민은 공공연히 프랑스 ‘르피가로’에 파룬궁을 ‘사교’라고 중상모략하였다. 이틀 후 중공의 기관지 ‘인민일보’는 사설을 발표하여 파룬궁을 모독했고 이로 인해 박해는 더욱 격화됐다.

우수한 칭화대 학생이 ‘진선인(真·善·忍)’ 신앙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참형을 받았다

박해가 점차 고조되고 국제사회의 침묵에 직면한 황쿠이는 ‘진선인’ 수련 단체에 대하여 사악한 중공 독재 권력이 발동한 이 탄압은 아직도 남아있는 사람들의 마지막 선념을 떨어뜨렸으며, 이는 전체 민족의 대재난이 될 것이라고 절감했다.

2000년 12월 16일, 황쿠이는 주하이(珠海)의 임대주택에서 불법으로 체포됐다. 그 후 그는 불법으로 주하이시 제2 구치소에 감금돼 20명의 죄수와 함께 좁은 감옥에 빽빽이 갖혀서 햇빛을 전혀 보지 못하고 신선한 공기를 조금도 마시지 못했다. 그곳에서 먹고 마시고 잤으며, 또 그곳에서 노예 제품을 만들었다.

황쿠이는 “매주 7일, 매일 최소 16시간을 일하며, 종종 하루 18~20시간을 일 하는데 기본적으로 1분도 멈추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임무가 과중하여 다하지 못하면, 저녁에 잠을 자지 못하고 이어서 일을 하거나 얻어맞아야 하는 상태였다

황쿠이가 만든 노예 제품은 다양한 플라스틱 꽃, 크리스마스트리 조명 장식, 목걸이, 월병 상자, 스탠드, 스파이더맨 완구 등이 있다. 가장 터무니없는 것은 가공식품이다. 사람마다 큰 집게로 피스타치오의 딱딱한 껍질을 집어 입을 반쯤 열게 했다.

이와 동시에 황쿠이는 또 끊임없이 심문, 위협, 구타당했으며 어떤 저항도 잔혹한 보복이 뒤따랐다. 그가 단식을 두 번 하자 교도관은 금속제 집게로 그의 입을 비틀어 열고 정체불명의 액체를 강제로 그의 위에 부어 넣었다.

두 번째 단식 후 수백 명의 죄수 앞에서 수갑이 채워진 황쿠이는 강제로 무릎을 꿇어야 했다. 십여 명 교도관이 고압 전기봉으로 그를 때렸으며 전류가 그의 몸을 통과해서 심한 경련을 일으켰다.

황쿠이는 구치소와 교도소에서 거의 1년간 독방 감금을 포함해 모두 5년 동안 불법 감금됐다. 한번은 꼬박 한 달 동안 수면을 박탈당했다.

극악무도한 장쩌민의 죄는 철저히 청산해야 한다

2015년 7월, 국내외 34명 칭화대학 교직원과 수련생들이 집단으로 장쩌민을 고문죄, 반(反)인류죄 등으로 기소하고 배상을 요구하였다. 당시 미국에 있던 황쿠이도 피해자로 이 소송에 참여했다. 호주의 한 변호사는 이 소송을 위해 무보수로 사건 서류를 준비하여 베이징에 있는 최고법원, 최고검찰원과 공안부에 부쳤다.

같은 해 9월 21일, 미국 의회전문지 ‘더힐(The Hill)’에 황쿠이의 블로그 글을 게재하여 장쩌민을 고소한 이유를 소개했다.

황쿠이는 말했다. 파룬궁에 대한 장쩌민의 박해는 7천만~1억 명 수련 집단에 대한 대규모 박해이며, 파룬궁 수련생 본인들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과 친구, 공안, 검찰원, 법원, 사법국, 언론, 학교, 교육기관 등 각 방면이 모두 연루되어서 박해범위의 크기를 상상하기 어렵다.

그는 “장쩌민은 그 죄가 극악무도한 사람이다. 그가 죽기 전에 인간 세상에서 정의의 심판을 받지 못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유감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해독은 반드시 널리 공개해야 한다. 인류, 특히 중국인에 대해 그가 남긴 재앙은 절대 철저히 청산해야 한다. 이로써 인간의 정의는 결국 승리하게 될 것이다. 부정부패한 그의 가족도 정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삼퇴’는 재난 전에 자신을 구하는 좋은 방법이다

황쿠이는 말했다. 장쩌민이 파룬궁을 박해하여 중국에 큰 재난을 가져왔으며, 백성의 생명을 전혀 중시하지 않았다. 그것이 가장 중시하는 것은 오직 자신의 통치일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약 아직도 중공의 본질을 똑똑히 인식하지 못하고 그것을 멀리하지 않는다면 사실 상당히 위험하다.

황쿠이는 예를 들어 현재 중국의 전염병 대폭발은 중국인에 대한 중공의 극단적인 무책임을 충분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처음부터 인간성이 조금도 없는 극단적 봉쇄통제로부터 아무런 대책도 없는 갑작스러운 봉쇄 해제에 이르기까지, 전염병이 폭발한 후 중국에는 약품과 의료 설비가 극도로 부족하여 많은 사람이 치료받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중공은 또 사람들을 재빨리 업무에 복귀시켜 전염병 전파를 더욱 가속했으며 아무런 통제도 없었다. 중국에서 온 많은 동영상 등 소식에는 도시의 장례식장, 병원이 이미 꽉 찼고, 복도에는 모두 시체로 가득했으며, 화장도 늦다. 대량의 중공 고위 관리, 중공 당원, 중공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모두 사망했다.

그는 말했다. 중국에는 “불의를 많이 행하면 반드시 스스로 무너진다.”, “선에는 선보가 있고, 악에는 악보가 있다.”라는 옛말이 있다. 중공이 그렇게 많은 나쁜 일을 했으므로 틀림없이 천벌을 받을 것이다. 그것에 줄을 선 사람은 그것의 에너지를 증가시키는 것과 같다. 중공이 천벌을 받을 때, 이런 사람들은 틀림없이 매우 위험할 것이다.

전염병의 대폭발에 직면하여 일반 대중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실행 가능한 한 가지 방법은 바로 ‘삼퇴’(즉 중공의 당, 단, 대 조직에서 탈퇴)이다. 삼퇴한 사람은 사악한 조직과 경계선을 긋고 마음속 정기를 높이고 사기의 침입을 막을 수 있다. 그러면 중공이 천벌을 받을 때 재난이 당신에게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황쿠이는 강조했다. “선량함이라는 최저선을 유지하고 삼퇴하는 것은 한 사람에게, 특히 이런 격동의 시대에 매우 중요하다.”

 

원문발표: 2022년 12월 29일
문장분류: 해외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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