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대법이 아이 마음속 원망과 분노를 녹이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저는 대법을 수련한 후, ‘진선인(真·善·忍)’의 기준에 따라 자신에게 요구하였습니다. 걸핏하면 화를 내고 성깔을 부리며 자아 중심적이었던 버릇을 고치고 너그럽고 낙천적으로 바뀌었기에 가정이 화목해지고 시부모님에게 진심으로 잘 대할 수 있었습니다.

​1. 가정의 재난

1999년 7월 20일, 중국 공산당이 파룬궁을 박해한 후, 저는 남부럽지 않은 직업을 잃어 경제적 수입도 없을뿐더러 여러 번 납치당했고, 경찰이 자주 집에 찾아와 소란을 피워 편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몇 년 후 남편이 외도로 인해 남편은 저와 이혼하려고 했습니다. 저는 “뭘 잘못했는지 알려주면 고칠게요.”라고 말했습니다. 남편은 “당신은 다 잘해, 동창들 아내 중에 당신보다 잘하는 사람이 없어. 하지만 우리는 뜻이 다르고, 가는 길이 맞지 않아, 공통 언어가 없으니, 헤어지자.”라고 했습니다.

저는 남편이 말한 것이 모두 핑계임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가정을 살뜰히 돌보고 아이를 잘 관리하는데, 정말 세심하게 보살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제가 불법적으로 수감된 것 외에는 줄곧 저를 떠나지 않았고, 가는 곳마다 데리고 다녔습니다. 저는 농촌의 더럽고 추운 환경을 좋아하지 않지만, 매년 설을 쇨 때면 시골에 가서 시부모님과 함께 일주일 동안 머물다가 돌아왔습니다. 실제로는 제 머리 위의 후광이 사라지고, 영예도 수입도 없는, 사회에서 타격받고 남들이 얕잡아 보는 사람에 속했습니다. 부부가 결혼할 때 ‘동고동락’의 서약은 돈이 제일이고, 도덕도 없고 인품도 없는 이 시대에는 이미 우매하고 가소롭게 바뀌었습니다. 이혼이란 전통적인 도덕 기준에 어긋나는 것임을 알고 있는 저는 이런 잘못된 길을 가고 싶지 않아, 그에게 “과거에는 열 개의 절을 헐지언정, 혼인은 깨트리지 않는다고 하니 이혼할 수 없어요.”라고 했습니다. 남편은 귀를 기울이지 않고 한 번 또 한 번 이혼 절차를 밟으라고 재촉했습니다.

​그때 친정어머니는 제 혼인 문제로 속상한 나머지 심한 스트레스로 몸이 매우 편찮으셨습니다. 외지에 가서 어머니를 돌보는 저는 이미 심신이 피로한데 남편은 또 전화를 거듭하며 이혼을 재촉하면서도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전혀 상관하지 않고 돌보지 않았습니다. 과거에 어머니가 남편을 매우 잘 대해 주었건만 이것은 정말 엎친 데 덮친 격이었습니다.

​그 후, 남편은 저를 고소했고, 3000위안의 돈을 들여 변호사를 고용했는데, 고소장에는 부부간의 불화, 무감정 등 비방하고 사실을 왜곡하는 많은 말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저는 매우 슬프고 괴로웠습니다. 지식인 집안 출신으로 전통 관념이 비교적 강하기에 매우 중요하게 여기던 가정과 혼인을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 같았습니다. 애초에 그와 결혼을 선택한 것도 그의 인품을 중시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집은 농촌에 경제 여건도 좋지 않았습니다. 저는 도시에서 태어나 고급 지식인 가정에서 자랐고, 모든 면에서 좋은 조건으로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대상이었는데 그때는 지금의 남편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주변에서 마음씨가 좋다고 해서 결혼에 동의했을 뿐입니다. 남편은 결혼할 때 예복을 벗으면 입고 나갈 만한 변변한 옷 한 벌도 없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오늘 여기 앉아서 저를 소송하고 이혼을 강요하다니?! 그리고 신념으로 인해 여러 번 박해를 받아 모든 것을 잃은 상황에서 소송하다니? 제 마음의 아픔은 극에 달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아들은 그가 키우고 집은 팔아 반반씩 나눠 갖기로 했습니다. 십여 년간 월급과 저축은 줄곧 그가 맡아왔는데, 저에게 1만 위안을 주었지만 추궁하지 않았습니다. 가슴을 졸이고, 답답하고, 괴로웠습니다…… 얼굴이 노랗고, 몸이 여윈 저는 밖에 나가기 싫었고,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대법을 수련하기에, 마음속으로는 원망할 수 없었고, 그저 자신이 잘하지 못해 이 가정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할 뿐이었습니다.

​1년 후, 저를 가장 아끼시던 어머니가 고통 속에서 돌아가시고 영원히 제 곁을 떠나셨는데 또 한 번 인생의 엄청난 고통이 저를 덮쳤습니다.

​2. 마음에 받은 심각한 타격

이혼한 후, 사실 아들은 줄곧 제가 데리고 있었고, 아들도 저와 함께 있고 싶어 했습니다. 2013년, 저는 대법을 수련한다는 이유로 다시 납치당했습니다. 당시 아들만 저와 함께 집에 있었는데 한 무리의 경찰이 집 문을 부수고 쳐들어왔습니다. 어느새 부엌으로 달려가 부엌칼을 가지고 와서 경찰과 필사적으로 싸우려고 했던 아들은 초등학생으로서 다른 사람과 싸워본 적도 없고, 화가 나고 원망스럽지만, 또 무력했습니다. 저는 보자마자 다급히 아이에게 바보 같은 짓을 하지 말라고 충고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이미 어린 아들에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한 무리 기세등등한 경찰들이 아들의 보금자리인 집에 쳐들어왔고 눈앞에서 엄마가 끌려가는 것과 경찰이 집안을 마구 뒤집고 냉동댕이 치고 가져가는 것을 보자 분노에 불타올랐습니다! 제가 납치된 후, 아들은 또 두 명의 경찰에게 차로 시 공안국으로 끌려갔습니다. 나중에 아들은 저에게 “당시 원망과 분노가 치밀어 올라 뒷좌석에 앉아 단칼에 한 명씩 두 사람을 죽이려 했는데 가방 안에는 칼이 들어 있었어요. 그리고 형사책임을 지지 않아도 될 나이였어요…”라고 했습니다.

감옥의 소굴에서 저는 한편으로는 인격 존엄이 없는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고, 한편으로는 강한 정신적 신념으로 생명을 지탱하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한창 인생의 전환점을 겪고 있는 아들이 중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가 성장에 가장 중요한 시기인 것을 생각하며 걱정했습니다. 인생의 많은 문제에 직면하게 될 때 의사소통이 제때 이루어지지 않아 마음의 매듭이 풀리지 않으면 성격의 왜곡과 문제를 보는 과격함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애석하게도 감옥에 갇혀 있는 저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3. 단단한 얼음으로 된 분노

​억울한 옥살이를 마치고 나온 후 어느 날 아들을 만나기로 약속했습니다. 거의 5년이 다 되어가는데 지금까지 그를 본 적이 없습니다. (수감 기간 아이 아빠가 저를 만나러 가지 못하게 했음) 저는 역에 서서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모든 사람을 주시하며 추측했습니다. 이 사람이 내 아들이 아닐까? 저 사람이 아닐까? 키 큰 사람? ? 키가 작은 사람? 퉁퉁한 사람? 마른 사람? 얼굴이 검은 사람? 얼굴이 흰 사람? 하나하나 지나가면 오, 아니야, 이 사람도 아니야, 다 아니야. 아들은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까?

​갑자기 180cm의 큰 키에 건장하고 표정이 차가운 한 사람이 다가왔습니다! 낯선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바로 그 사람이 분명했습니다! “엄마!” 저는 갑자기 흘러내리는 눈물이 앞을 가려 더더욱 그를 분별할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걱정한 바와 같이 아이의 억눌려 있는 마음은 사람에게 호의란 없었습니다. 아빠 집에서 아빠와 새엄마에 대해 반항하는 정서로 입으로는 아무 말도 안 하지만 행동은 선의가 없었습니다. 학교에서 반 친구들과도 싸우는 마음가짐으로 반드시 이겨야 했고 아빠와는 좀처럼 마음을 나누거나 교류하지도 않았습니다.

​섣달그믐날, 저는 납팔죽(臘八粥, 음력 12월 8일에 먹는 죽)을 끓여 아이에게 따뜻함을 느끼게 하고 싶어 학교로 보내 줬습니다. 주말 전까지 학생들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아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음식을 받아 들고 돌아선 아들은 아무런 내색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전에 즐겁고 활발했던 아들이 사라지고, 마음의 상처와 수년간의 억압으로 인해 풍요롭고 번잡한 사회에서 이런 모습만 보이며 웃음을 잃고 있었습니다. 저는 눈물을 흘리며 아이가 너무나 불쌍했습니다! 요 몇 년간 그는 어떻게 살아왔을까!

아이는 반달에 한 번 저에게 오는데 학교에 기숙하기에 오후 반나절만 있고는 학교에 갔습니다. 저는 아들과의 관계를 바로잡고 엄마로서 관심을 둬야 하고 또한 솔직하고 성실하며 평등한 친구로 대하였습니다. 아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냉담하든 온화하든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가장 기뻤던 것은 아들은 줄곧 대법이 좋은 것임을 굳게 믿었고, 이 여러 해 동안 꾸준히 책을 읽고 법을 배웠는데 단지 매우 적게 배웠을 뿐, 게다가 교류할 환경이 없기에 법에 대한 이해에 매우 한계가 있었습니다. 아들은 게임을 하고 인터넷 소설을 읽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다 보니 싸우고 증오와 폭력을 조장하는 심리적 성향이 강했습니다.

아들이 올 때마다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집에서 최대한 새엄마의 집안일을 도와드리고 몇 년 동안 키우느라 힘들었던 아빠한테 잘해드려.”라고 했습니다. 아들은 “그건 아빠의 의무예요.”라고 했습니다. 아이의 마음속에서 엄마는 좋은 사람이며, 대법은 바른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엄마를 잡아간 그 경찰들은 나쁜 사람이고 엄마를 이렇게 대하는 아빠와 새엄마도 다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4. 대법이 악을 물리치고 선행을 권장하다

저는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며 의견이 다를 때, 그를 바꾸려고 서두르지도 조금의 강요도 없이 완화된 후에 다시 이야기했습니다. 아들이 오면 가벼운 분위기, 당당하고 진실된 마음의 소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이의 마음속에 대법이 있기에 대법에 관해 말할 때면 우리는 항상 공통의 언어가 있습니다. 저는 “우리 사부님께서 ‘우리는 속인사회 중에서 수련하기에 부모에게 효도하고 자식을 가르치는 것은 모두 마땅한 것이다. 각종 환경 중에서 모두 다른 사람을 좋게 대해야 하고, 남을 선하게 대해야 하는데, 하물며 당신의 친인(親人)임에랴. 누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서, 부모에 대해 자녀에 대해서도 모두 잘 대하고, 곳곳마다 다른 사람을 고려하는’[1]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경찰들도 이용당한 것이고 그들이 나쁜 일을 하면 비참한 결말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어. 우리의 상처는 일시적이지만 그들의 비참함은 영원한 거야. 그들은 신을 믿지 않기에 나쁜 일을 함에 결과는 생각하지 않고, 눈앞의 이익만 챙겨 곧 도태될 거야, 그렇게 되면 얼마나 불쌍하겠니.”라고 말했습니다.

대법을 존중하는 아들은 이것이 대법 중의 법리임을 알기에 더는 반박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들에게 겪었던 많은 일에서 어떻게 가늠하였음을 이야기했습니다. 아들도 점점 그가 겪은 일과 처리 방법을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격의 없이 하고 싶은 말을 망설임 없이 다 했습니다. 아이는 점차 보름에 한 번에서 일주일에 한 번, 반나절만 있던 데로부터 아침 일찍 와서 온종일 머물렀습니다.

​대법이 아이 마음속의 악한 생각을 몰아내자 선량한 본성은 점점 살아나며, 눈빛은 선해지고, 얼굴에는 웃음이 생기고, 모든 세포가 평화롭게 바뀌었습니다.

​어느 날 아이가 왔을 때, 길이가 20cm가 넘은 몽골의 날카로운 칼 한 자루를 갖고 왔습니다. 저는 보자마자 두피가 저리고 대단히 두려웠습니다. 이것은 흉기입니다! 아들은 “예전에 호신용으로 샀던 거예요. 지금은 필요 없어 팔려고 했어요. 학교 친구가 사기로 했는데 마음이 바뀌어 안 산대요. 아마 사부님께서 팔지 말라 하시는 것 같아요, 누가 그것으로 사람을 다치게 해도 좋지 않으니 보관해 주세요, 더는 필요 없어요.”라고 했습니다.

​5. 새로운 삶을 살다

​저는 매우 감동했습니다. 아들의 마음은 정말 강대해졌고 더는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사람의 무기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적이 없고 그를 해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모두 그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사람들로서 이것은 선(善)의 힘입니다! 선은 우주의 특성 중 하나이며, 우주의 특성에 부합하며 그 힘은 우주로부터 오기에 무한한 위력을 가지고 있는 진정으로 강대한 것입니다!

​인생의 특별한 경험은 아이의 강한 끈기를 만들어 냈습니다. 자율성이 매우 강한 그는 확정한 일이라면, 고수할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법을 더 많이 배우라고 요구했고, 매일 꾸준히 법을 배웠으며, 게임을 하고 소설을 읽는 나쁜 습관을 능동적으로 끊었습니다. 이것은 강한 의지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가 해냈습니다. 아들은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디에서나 다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2] ‘학생이라면 당신은 학습을 잘해야 하고’[3]라고 말씀하셨으니 저는 공부를 잘해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학교의 여러 시험에서 모두 상위권의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대학입시에서 전교 1등으로 일류 대학에 합격했습니다.

아들은 대학 시절 내내 매일 법공부하며 방심하지 말라고 자신에게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아빠, 새엄마와의 관계도 점점 더 좋아지면서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질 수 있고, 그들이 좋아하는 음식과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자주 사주었습니다. 새엄마의 부모님도 아들과 수다를 떨며 아이의 말투나 태도가 보통이 아님을 느꼈습니다.

​6. 감회가 새롭다

매체 보도에서 성장하는 어린 대법제자들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은 제 아이와 같은 굴곡진 인생을 경험했습니다. 가정이 깨지고, 가족을 잃고, 폭력에 직면하고, 세태의 불행을 경험하고, 오늘날까지 그들은 여전히 신념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흐르고 있습니다. 저는 그 미소가 어떤 경험과 단련을 겪었으며 비바람과 혹독한 시련 속에서 만들어졌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 미소에는 의연함과 정성이 배어 있으며 눈 온 뒤의 매화와 그 눈보라 속의 푸른 소나무처럼, 비할 데 없이 존귀합니다! 더할 나위 없이 고결합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轉法輪)’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캐나다법회 설법’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휴스턴법회 설법’

 

원문발표: 2022년 12월 1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2/12/18/451231.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2/12/18/45123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