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어우양페이(歐陽非)
[밍후이왕] 20여 년 전 미국에 유학을 갔을 때, 중국인 교수가 초대한 식사 자리에서 진화론 이야기가 나왔다. 교수의 부인은 “진화론은 가설”이라는 말을 듣고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가 회사의 임원이었으니 진화론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가 아주 보편적임을 알 수 있다. 어려서부터 주입됐으니 진화론을 진리처럼 대하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자. 만약 정말 당연하다면 오늘날 생물학계에서 진화론을 연구하는 수많은 교수는 무엇 때문에 바쁘게 일할까?
또 한번은 회사에서 박사 동료와 한담을 나누었다. 그는 진화론을 믿고 있었고, 인간과 오랑우탄의 DNA 차이가 1%에 불과하다는 예를 들었다. 나도 그 1%를 기억하고 있었는데, 최근에 ‘사이언스’가 2007년에 보도한 기사 ‘인류와 침팬지의 차이는 1%에 불과한가? (상대적 차이: 1%의 신화)’를 읽고 나서야 그 1%가 뒤집혔음을 알았다. 1% 주장은 1975년에 제기되었고, 작은 일부의 유전자만을 비교한 것이었다. 2003년과 2005년에 인류와 침팬지의 유전자 서열을 완성하면서 유사점을 다시 살펴본 결과 그 차이가 1%에 그치지 않음이 발견되었다. 수많은 유전자가 한쪽에만 있었고, 실질적인 유사성을 계산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1% 주장은 여전히 진화론의 증거로 널리 유행하고 있다.
다윈과의 작별?
다윈 학설의 정수는 ‘자연선택(적자생존)’인데, 이는 지구상에 원시 생명이 있다는 조건(그래도 예의 바르게 창조주에게 약간의 여지를 남겨주었음)에서 지구상의 만물이 진화해 나올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 과정은 무작위적, 우발적, 점진적이며,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어떠한 외부 지혜의 개입도 없이 오직 생존 본능에 따르는 것이 핵심이다(본능은 어디에서 왔을까? 여기에도 조금 신경이 쓰인다). 지난 백 년 동안 생물학, 특히 유전자 연구에 큰 발전이 있었는바, 출발점은 진화론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뜻밖에도 그것은 양날의 검이었고, 수많은 증거가 다윈의 가설에 도전했다.
중국과학원 고생물학연구소는 2009년, 다윈을 기념하며 ‘다윈과의 작별?’이라는 문장을 발표했다. 목적은 작별 인사를 서두르지 않도록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용 중에는 진화론이 직면한 도전이 요약되어 있었고, 매우 충격적이었다. 몇 가지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상기한 종의 큰 변이는 다윈의 점진적 변화 모델로 설명하기가 몹시 어렵다. 이것이 바로 다윈 학설의 허점 중 하나다.”
“새로운 생물 집단이 오래된 생물 집단을 대체했는데, 이런 식의 참신한 변화는 점진적이고 느린 생물 진화로는 실현되기 어렵다.”
“생명이 대폭발식으로 진화하는 것은 예외적인 일이며, 진화와 생물다양성(종분화)이 자연선택과 생존경쟁을 거치지 않을 수 있다.”
“분자 수준에서 생물의 돌연변이 대부분이 중성 또는 거의 중성에서 나타나며, 우열의 구별이 없고, 적응 부적응의 구별이 없다. 따라서 자연선택이 작용을 일으키지 않는다. … 자연선택이 진화론에 미치는 결정적 작용의 근본을 흔드는 것이다.”
다윈 학설의 기초인 ‘자연선택’이 이미 빈틈투성이였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모든 과학 법칙에 한계 조건이 있음을 알고 있다. 뉴턴 역학의 적용 범위를 넘어서면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으로 가야 한다. 진화론은 그런 적이 없지 않은가? 한 종에서 일부 진화적 모습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털이 긴 개와 짧은 개를 육종할 수 있지만, 어떻게 해도 돼지가 되지는 않는다. 이것도 ‘다윈과의 작별?’에서 언급한 우려 중 하나다. 문장에서는 ‘생명의 대폭발’도 언급했다. 이는 1984년에 윈난(雲南)성 청장(澄江)현 마오톈산(帽天山) 인근에서 발견된, 잘 보존된 초기 캄브리아기 고생물 화석군을 가리키는 것으로, ‘캄브리아기 생명의 대폭발’로 일컬어진다. 거의 모든 현생 동물의 문(門)과 이미 멸종된 생물이 캄브리아기 지층에서 갑자기 나타났으나, 더 오래된 지층에서는 그 조상의 화석이 발견되지 않았다. 단지 이 발견만으로도 다윈의 학설을 위태롭게 하기에 충분하며, 우리 중국인들이 다윈의 점진적 진화론에 그야말로 크게 한 방 먹인 것 같다.
진화에 설계도는 있는가?
진화론의 뜨거운 쟁점 중 또 다른 하나가 ‘다윈과의 작별?’에서 언급되지 않았는데, 바로 생물의 ‘하나도 빠뜨릴 수 없는 복잡성’이다. 생활 속의 쥐덫을 예로 들어 보자. 바닥판, 해머, 스프링, 먹이 꽂이, 홀딩 핀 등 다섯 가지 부품은 하나라도 없으면 안 된다. 어떤 사람들은 세포가 얼마나 작은데 쥐덫과 비교할 수 있겠느냐고 생각한다. 작다고 간단하지 않다. 손톱만 한 칩 하나에 수백억 개의 트랜지스터를 담을 수 있고, 엄지손가락만 한 USB 메모리에 책 2백만 권을 저장할 수 있다. 생명 세포의 구조는 칩이나 USB 메모리보다 훨씬 더 복잡할지도 모른다! 현대 분자 생물학은 세포 구조 측면에서 간소화할 수 없는 복잡한 시스템 수천 개가 있음을 발견했다. 세포 한 개는 원자 수조 개를 품고 있는 명실상부한 초미세 공장이다.
최근 서구, 특히 미국에서 진화론을 비판하는 ‘지적설계론(Intelligent Design Theory)’ 운동이 태동했다. 이 운동의 핵심 인물인 생화학자 마이클 베히(Michael Behe)는 한 종의 세균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이 세균은 이동을 돕는 ‘편모’라 불리는 채찍과 같은 세포 기관을 가지고 있다. 단순해 보이는 ‘편모’는 사실 대단히 정교한 시스템으로, 에너지, 동력전달, 구동, 방향 제어 등과 관련한 완전한 기능이 있으며, 이러한 기능은 또 각종 단백질로 구성된 ‘부품’이 모여 완성된다. 베히는 세균의 이런 ‘편모’가 바로 전형적인 ‘간소화할 수 없는 복잡한 시스템’이며, 이 시스템의 모든 부품은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만약 먼저 디자인 설계도가 없다면, 다윈의 진화론에 따라 진화 과정이 연속적이고 무작위적이며 우연적이고 미소하므로, 각각의 부품이 진화 과정에 나타나더라도 번거로워질 가능성이 매우 커서 이치대로라면 제거해야 하는데, 어떻게 최후까지 버티면서 완벽한 기구를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2022년 초 미국 ‘네이처’지에 한 연구 결과가 발표됐는데, 유전적 돌연변이의 탄생은 완전한 무작위적인 것이 아니며, 반대로 돌연변이가 나타나는 곳에 분명한 규칙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모종의 지혜가 있고 그 속에 설계도가 있다는 암시가 아닐까? 물론 이것은 아직 매우 초보적인 결론이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미시적으로 볼수록 생명이 더욱 오묘함을 발견하게 되며, 진화론에 대한 도전도 갈수록 커질 것이다. 어떤 사람이 시간은 진화론의 반대편에 있다고 말한 것도 이상하지 않다.
‘진화론’의 배후에 무엇이 있을까?
진화와 관련한 이론은 다윈 이전에 존재했지만, 다윈이 주장한 ‘자연선택’이 진화론에 ‘과학’이라는 외투를 입혔고, 그래서 진화론은 ‘몹시 우아한’ 자리에 올라앉았다. 이상한 것은 ‘자연선택’이 현대 생물학의 수많은 도전 속에 파산에 직면했는데도 수많은 사람이 여전히 필사적으로 다윈을 보호하며 진화론을 맹신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깊이 따져보면 다윈의 학설은 단지 배후의 검은 마수에 의해 이용될 뿐인데, 직설적으로 말하면 바로 ‘무신론’이다. 19세기 유럽에서는 신앙의 위기가 있었고, 무신론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1848년 마르크스가 발표한 ‘공산당 선언’은 다윈의 ‘종의 기원’보다 10년 앞선 무신론 선언이라 할 수 있다. 다윈이 세상을 바꾼 것은 아니지만, 무신론의 흐름에 다윈이 필요했고, 다윈의 진화론으로 무신론의 확산을 조장한 것이었다. 오늘날 진화론은 거의 무신론의 대명사가 되었다. 따라서 다윈의 진화론 가설에 대한 부정적 증거가 끊임없이 등장할 때, ‘무신론’ 사상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여전히 끊임없이 각종 새로운 가설을 만들어 뜯어고치고 억지를 부리면서 ‘진화론의 진화’라고 주장하며, 심지어 ‘신다윈주의’라는 모자를 씌운다. 이는 과학 역사상 매우 이례적인 방식이다. 아인슈타인은 뉴턴의 역학이 순수한 과학이기에 뉴턴의 역학을 돌파했지만, 사람들은 진화론을 과학으로 보며 연구하지 않고 진화론과 무신론을 자신의 신앙으로 여기기에 진화론을 돌파할 용기도 없고 돌파하려 하지도 않는다. 거짓으로 판명된 과학을 포기하기는 쉽지만, 신앙을 포기하기는 어렵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의 만남은 과거에 과학을 가로막았던 ‘교회’의 옛이야기다. 오늘날 무신론은 일찍이 가장 큰 종교가 되었고, ‘교회’의 패권적 지위로 사람들의 자유로운 탐구를 방해하고 있다. ‘무신론’의 경계를 건드리는 모든 생각은 무자비하게 억압받고, 조롱거리가 되며, 포위 섬멸당한다. 역사는 반복되며, 단지 역할과 장소만 바뀔 뿐이다.
이런 포위 섬멸은 각 방면에서 나타나며, 심지어 포위 섬멸의 이유마저 황당무계하다. 몇 년 전 ‘지적설계론’과 진화론 사이에 큰 논쟁이 있었다. 당시 미국 ‘사이언스’지의 발행인이 ‘베이징과기보(北京科技報)’와 인터뷰하다가 진화론에 의문을 제기하는 성명서에 서명한 과학자 5백여 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겨우 5백 명이라는) 소수의 과학자가 믿는 것은 과학이 아니다.” 그는 아마 코페르니쿠스도 소수자였음을 몰랐을 것이며, 중국 속담에 “진리는 늘 소수의 손에 달려 있다”는 말이 있다는 것은 더욱 몰랐을 것이다. 사실 대다수 과학자도 교과서를 통해 ‘진화론이 진리’라고 배우며 자랐으니 진화론을 지지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들의 말을 역으로 이용해 진화론이 진리임을 증명한다면 이런 순환 논증은 전혀 과학적인 방식이 아니다.
하늘에 대한 경외심을 유보하다
사람들이 진화론을 일종의 가설로 삼아 계속 연구할 수는 있겠지만, 우리는 흉금을 열고 있어야 하며, 창조주에 대한 부정을 전제 조건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아인슈타인의 태도는 참고할 가치가 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무신론자가 아니고 종교인도 아니라고 했다. 그는 하느님에 대한 문제가 ‘세상에서 가장 어렵다’고 했다. 이 문제는 간단하게 ‘예 또는 아니오’로 대답할 수 없다며 “연관되는 문제가 우리의 유한한 두뇌에게는 너무나 크다”고 시인했다.
연관되는 문제가 확실히 아주 크다. 진화론의 배후에 무신론이 있다면, 무신론의 배후에는 무엇이 있을까? 바로 사탄, 마귀, 악령이다. 그것들은 사람이 신을 믿지 않게 하고, 선악에 응보가 있음을 믿지 않게 하고, 좋은 사람이 되고 성실해져야 할 도덕적 근거를 찾지 못하게 한다.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인류의 도덕을 심연으로 밀어 넣고, 사람이 더는 인간의 규범을 갖지 못하게 해 인간을 망쳐놓는 것이다. 당신은 단지 자신의 삶을 살 뿐, 신과 귀신을 믿는 것이 자신과 관계가 없다고 말하지만, 신에 대한 신앙이 없고, 선악에 응보가 있음을 믿지 않는 사회가 어떤 결과를 얻는지를 목격할 수 있다. 거리에서 눈 가리고 빼앗기, 탐오 부패는 제쳐두고도 의사의 가짜 논문, 과학자의 가짜 칩, 기업가의 거짓 융자 등, 이런 ‘고차원적인’ 사기가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흔한 일이 되었다. 이런 사회에서 사는데 자신과 무관할 수 있을까?
중국에는 머리 석 자 위에 신령이 있다는 말이 전해오고 했지만, 단지 공산당만이 중국인에게 무신론을 강요했다. 1980년대 기공 열풍은 사람들의 사상을 열어 중국 전통과 연결했다. 장쩌민 집단이 1999년 7월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한 이후, 중공은 다시 한번 무신론의 기치를 들고 ‘진선인(真·善·忍)’의 바른 믿음과 대판 싸움을 벌였다. 중국 사회가 최소한의 도덕과 신용을 상실해서 맞은 위기가 바로 이런 역류로 빚어낸 나쁜 결과가 아닐까?
아인슈타인이 “연관되는 문제가 우리의 유한한 두뇌에게는 너무나 크다”고 했는바, 만약 신에 대한 믿음 여부가 인류의 도덕과 연결되어 있다면 이 문제는 정말 너무나 크고, 너무나도 크다. 무신론을 팔려고 진화론을 이용했다는 말을 들었으니 확실하게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원문발표: 2022년 4월 12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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