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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의 아름다운 체험과 축복 받은 친지

글/ 후베이 대법제자 루윈(茹雲)

[밍후이왕] 나는 금년 77세로 파룬궁(法輪功)을 수련한 지 20여 년이 됐다. 지금 귀와 눈이 밝고, 치아도 건강하여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한다.

우여곡절 수련길

나는 우한에서 700여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고, 딸은 우한(武漢)에 산다. 1995년 하반기에 딸 부부가 나에게 “파룬궁이 좋으니 수련하라”고 했다. 당시 장사를 하고 있던 나는 바쁘기도 하고, 새벽 5시에 공원에 가서 연공하는 것을 보고 너무 고생스럽다는 생각이 들어 수련하지 않았다.

딸은 수련하지 않는 나를 보고 몹시 안타까워하면서 우한에서 큰 대법행사가 있을 때마다 행사에 참가하라고 연락했다. 어느 해 수련생들이 연공복을 입고 인각을 하는 큰 대법행사에서 연공복을 입지 않은 사람들이 앉도록 지정해준 곳이 있었다. 나도 그 곳에 앉아 눈을 감고 가부좌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큰 박수 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자, 바로 태양 안에 사부님 법신께서 가부좌하고 계시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여 참으로 놀라웠다. 하늘에는 아름다운 색깔의 구름들이 드리워져 있어서 ‘신불(神佛)은 정말 존재하는구나!’라며 감동했다. 그 때부터 수련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나뿐만 아니라, 신성(神聖)한 장면을 목격하게 된 많은 사람들이 파룬궁 수련을 시작했다.

어느 해 봄날 수련생들이 한양(漢陽)의 한 공원에서 연공시연 홍법행사를 진행할 때 비가 계속 내렸다. 빗물이 고인 시멘트 바닥에서 나도 함께 가부좌를 해 옷이 전부 젖었지만 춥지 않았으며, 오히려 몸이 따뜻했다.

특별히 대법의 아름다움을 체험하고 나서 나도 지역 홍법에 참가하기 시작했고, 점점 많은 사람들이 연이어 연공에 참가했다. 한번은 2장 공법 빠오룬(抱輪)을 하다가 한 신 수련생이 동작을 잘못하는 걸 보고 고쳐주다가 내 연공을 놓칠까봐 얼른 자리로 돌아와 빠오룬을 하는데, 바로 앞에 금색 연공복(비디오 연공복과 같음)을 입은 빠오룬을 하고 계신 사부님 모습이 보였다. 금빛 찬란한 사부님 모습에 더욱 확신이 들어 참으로 기쁘고 감격스러웠다.

수련을 시작한 지 6개월이 되었어도 가부좌는 여전히 반가부좌였다. 어느 날 딸집에 갔을 때 사위가 내게 말했다. “장모님, 외삼촌(나의 오빠, 그 지역 보도원)의 형편이 넉넉하지 않으니 장모님께서 녹음기와 비디오를 사주세요.”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당장 사준다는 말을 하지 않고 핑계를 댔다. “너의 외숙모 친척이 가전용품 장사를 하니, 내가 돌아가서 그 친척을 찾아가면 싸게 살 수 있을 거야”라고 말했다. 사실 나는 돌아와서도 사지 않았다.

나는 내 연공을 열심히 했으며, 사람들은 나를 보고 편하게 느꼈고, 나도 편안하게 느꼈으며, 얼굴에 빛이 나고 마음도 유쾌했다.

1996년 봄, 딸과 수련생들이 우리 지역으로 홍법하러 오게 되었다. 먼저 딸에게 녹음기와 비디오기를 가져오라고 말한 후, 조카(오빠의 딸)에게 2500 위안(약 47만 원)을 주며 “내 딸이 녹음기와 비디오기를 가져오면 이 돈을 주라”고 했다. 그 후 오빠 집에서 가부좌할 때 완전한 가부좌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아주 조금만 베풀었는데 사부님께서는 더 많은 걸 주셨다. 나는 직접 사부님의 무한한 자비를 체험한 것이다.

선심이 원망을 풀어주고 이웃이 구조되다

중공(중국공산당)이 파룬궁을 박해하는 초기에 파출소 경찰관이 우리 마을에 올 때마다 이웃에 살고 있는 전임 책임자인 L의 집에 들렀다. 그래서 나는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는 진상 자료를 배포해도 L에게는 전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바로 그가 나를 파출소에 신고했다. 나는 파출소 경찰에게 불법적으로 납치되어 다음날 현(縣) 구치소로 옮겨져 3개월 동안 감금되었다.

그 후 L의 집안에 많은 업보가 나타났다. 그의 남동생이 오토바이를 타고 벽에 부딪혀 거의 식물인간이 되었고, 시내에서 학교를 다니던 그의 조카는 누구에게 머리를 맞아 크게 다쳤으며, L도 전립선염에 걸려 고생하면서 자주 침대에 오줌을 쌌다. 또 그의 아내는 자궁근종으로 큰 수술을 받았다. 나는 그들이 업보를 받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고 가련해보였다. 그들이 모두 깨닫지 못하고 중공 악당에게 속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구해주고 싶었다.

어느 날 L의 어머니가 다친 그의 조카를 보러 시내에 갔다. 내가 먼저 어머니를 마중하던 L에게 말을 걸어 “어머니는 어디 가세요?”라고 묻자, 조카를 보러 갔다고 했다. 내가 동정어린 말로 “어머니께서 정말 고생하시네요. 연세도 있으신데, 집안에 걱정거리가 많아 이곳저곳으로 다니시니 고생이 많으시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L은 괴롭다는 듯 “왜, 이렇게 재수 없는 일이 많이 생기는지 모르겠어요.”라고 했다. 나는 최대한 위로하는 말을 해주었다.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나는 먼저 L의 아내에게 대법의 진상을 알려줬다. “내 며느리가 파룬궁이 좋다는 것을 아니까 모든 일들이 다 순조로워졌다”고 말하고, 며느리가 직접 겪은 일도 많이 말해주었다. 며느리와 손자가 중공조직에서 탈퇴했고, 손자는 진상 호신부를 지니고 다니는데, 무슨 일을 하든지 매우 잘 된다고 말해주었다.

평소 며느리는 다른 지역에서 일하고, 나는 혼자 집안 농사일을 하는데, 시간이 되는대로 찾아가 L의 아내를 설득했고, 결국 L도 탈당시켰다. 탈당한 L은 환경이 바뀌어 다시 책임자가 되었고 나를 자주 도와주었다.

파출소에서 자주 L에게, 베이징에 가지 못하도록 나를 잘 감시라라고 전화를 했다. 그러면 “그녀가 혼자 밭농사를 하느라 바빠서 갈 틈이 없다”고 경찰에게 말해주었다. 어떤 때 현 ‘610(전문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하는 불법조직)’이 나의 소재를 물으면, L은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 후 L은 다시 마을 서기(書記)가 되었고, 여전히 나를 보호해주었다. 한번은 내가 자료를 배포하고 돌아오는 길에서 L이 차를 세워 태운 후 집까지 데려다줬다. 어느 날 내 사위가 말하길 “L이 서기가 되어 모든 마을 일은 그가 다 결정한다. 도로 정비 등 마을 모든 건설공사도 촌과 정부에서 돈을 끌어다 한다. 작년에는 마을을 관광지로 만들기 위해서 1천만 위안(약 19억 원)의 예산을 따왔는데, 마을 위쪽에 낚시터도 만들었다”며 L이 승승장구 하고 있다고 했다.

친아들이 진상을 알게 되고 복을 받다

내가 전남편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을 때, 시어머니가, 점쟁이 말이 우리 부부가 궁합이 맞지 않는다고 했다며, 우리의 앞일을 생각해서 이혼하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눈앞이 캄캄했다. 나는 꽃 같은 나이에 충격에 빠져 갓난아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갔고, 아들이 젖을 뗀 다음 전남편 집으로 보낸 후 마을에 있는 사별한 남자와 재혼했다. 재혼한 남편에게 어린 세 아들이 있었고, 내가 두 딸을 낳았다.

나는 헤어진 아들과 왕래를 하며 지내는데, 수련을 시작한 후에도 자주 그의 집을 방문했다. 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했을 때 내 아들은 마을 부서기(副書記)라 파룬궁을 박해하는 일도 했었다. 현재 같이 사는 전처 자식인 큰아들은 사립학교 교사다. 학교 교사들의 월급이 적다보니 교사들이 자주 상급기관에 진정하게 되는데, 큰 아들이 주동적인 역할을 했고, 무슨 일만 있으면 교사들이 큰 아들에게 찾아왔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발생하기만 하면 중공사당이 큰 아들을 찾아오는 바람에 받게 되는 압력이 컸다. 아들은 이런저런 일로 스트레스를 받게 되자, 공연히 파룬궁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파룬궁에 불경한 말까지 했고, 내가 그러지 말라고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았다.

그 후 무슨 이유인지, 마을 서기가 숙청된 뒤 내 아들도 숙청당할 위기에 처했다. 아들은 악당이 사람을 어떻게 다루는지 알고 있으므로 공포감이 일어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내가 아들 집에 갔을 때 아들이 나를 오토바이에 태워 집에 데려다주며, 자기가 숙청당할 일을 말했다. 나도 속이 상했지만, 아들을 위로하며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真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 9자 진언을 염하라고 말해 주었고, 사부님께 “아들이 난을 피할 수 있도록 보호해 주십시오!” 하고 청을 드렸다. 아들도 이번 일을 계기로 대법을 확고하게 믿었다. 날마다 성심성의껏 9자 진언을 염했고, 아들의 운명은 이때부터 바뀌었다.

아들은 자발적으로 마을 부서기직을 사퇴하고 이복동생의 부동산 회사의 지배인이 되었다. 마을 서기보다 훨씬 형편이 좋았다. 일도 편하고 돈도 많이 벌게 되었고, 괴롭히는 사람도 없다. 몇 년 안 돼 새집을 마련하여 100만 여 위안(약 1억 9천만 원)을 들여 새로 인테리어까지 했다. 그는 또 자기 아들에게 가구와 가전제품을 마련해주었으며, 30만 여 위안(약 5600만 원)으로 승용차까지 사줬다. 그러자 아버지의 도움을 받게 된 손자는 직접 집을 마련하려고 했다. 이것은 아들이 받은 선보 중 하나다.

기쁜 일은 또 있었다. 아들은 늘 자기 아들에게 순하고 착한 며느리와 짝을 맺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실제로 순박하고 정결한 처녀를 며느리로 맞은 것이다. 현재 중국에서는 정말 찾기 힘든 여자였다. 며느리는 예물을 원하지 않았고, 1천 위안(약 19만 원) 이상의 옷은 사 입지 않았으며, 결혼식도 검소하게 치렀다. 아들은 매우 만족해하며, 대법 사부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원문발표: 2021년 12월 1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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